[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야 해.” (『위민 토킹』 52쪽)
“활동하면서 힘든 점은 없나요? (비서울)지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해나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사회자가 물었다. “시간이요.” 나는 즉각 답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여성인데, 이분들이 가족이나 주변 관계를 돌보느라 너무 바빠요. 그리고 본인의 시간을 마음대로 쓸 권한이 별로 없어요. 저는 활동하면서 ‘시간이 인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건 정부나 지자체에서 예산을 지원해준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사자를 비롯해 가정, 지역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바꿔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모임이나 교육을 운영하다 보면, “남편에게 외출 허락을 받지 못해서”, “남편이 아이를 봐주지 않아서” 참여할 수 없다는 기혼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특히 ‘여자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기시하는 가정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외출하거나 출장을 가야 할 때 남편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둔다던가 하는 일종의 ‘집안 탈출 노하우’에 대해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참여자들의 가족(정확히는 남성 배우자)이 불편하지 않은 일정과 시간을 미리 고려할 때가 있는데,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조차 가부장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현타’가 오기도 한다.
성인이 언제 외출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성은 왜 일상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과 가족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죄책감을 느끼는가? 우리의 일상이 성차별과 젠더 권력에 잠겨 있는 한 여성은 선택권을 가질 수 없다.
가정폭력, 하면 흔히 물리적 가해를 떠올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가장 일상적으로 피해자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방식은 ‘통제’다. 사랑이나 보호라는 명목으로 시간, 관계, 경제력 등을 앗아가 피해자의 자립심을 갉아먹고 결국 가해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가부장 사회의 질서에 익숙해지면 나의 배우자뿐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한 통제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여성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요즘 같은 시대에도 그런 집이 있냐거나, 이런 이야기가 딴 세상 일처럼 들린다면 당신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다. 볼리비아의 메노파 신자 공동체는 수만 명이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17세기에 머물러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2005년에서 2009년 사이 100명 이상의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캐나다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는 그 사건을 모티브로 장편소설 『위민 토킹』(Women Talking)을 썼다. 이 작품은 헐리웃에서 영화화되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는데, 부디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면 한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 책의 맨 앞 장에는 실제 사건 내용이 짧게 소개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메노파 공동체의 여성들은 아침이면 머리가 멍해진 채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는데, 몸 곳곳에 상처가 있고 피가 흘렀다. 사람들은 이것이 여자가 죄를 지어 악마에게 벌을 받았다거나, 관심을 끌고 싶어서 혹은 간통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것, 또는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고, 피해자를 ‘관종’이라 조롱하고, ‘무고’라 모함하고, “미쳤다”고 낙인찍는 것은 지금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메노파 공동체만의 문제나 이야기가 아니다. 사건의 범인들은 마을 남성 여덟 명이었는데, 이들은 동물용 마취제를 이용해 잠든 피해자들을 무력화시키고 성폭력과 폭행을 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몇 년 전 공론화된 ‘버닝썬’ 사건을 비롯해 술․약물을 사용한 성범죄가 한국에서도 심각한 문제임을 떠올려 보면, 메노파 사건은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서늘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곳에 돌아온 해에 여자들은 자신이 꾸는 꿈들을 묘사했고, 마침내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 하나의 같은 꿈을 꾸고 있었으며, 그건 절대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5쪽)
이에 여성들은 투표를 했는데,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1. 아무것도 하지 않기 2. 남아서 싸우기 3. 떠나기
여성들은 글을 모르기에 투표용지의 선택지는 그림으로 나타냈다. 1번을 선택한 여성들은 제외하고, 남아서 싸우길 원하는 프리센가 여성들과 떠나고자 하는 뢰벤가 여성들만 회의에 참석했다.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각성’한 뢰벤가와 프리센가 모녀 8명은 남자들이 마을을 비운 이틀간 몰래 모여 미래의 선택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그들은 문자를 배우지 못했기에 조력자인 남성 아우구스트 에프에게 부탁해 ‘말하는 여성들의 회의록’을 남긴다. 이들은 캐릭터도 의견도 모두 다르지만,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울면서도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함께 행동하기 위해 나아간다.
몰로치나 공동체에서 여성은 평균 열 명 이상, 많게는 스무 명 넘게 출산을 하면서 농사와 살림, 육아의 모든 노동을 책임지고, 공동체 남성들의 결정을 신의 뜻처럼 받들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고, 공동체의 규율을 거슬러 행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원하고, 믿음을 간직하길 바라고, 생각하고 싶다”는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 모여, 이들은 남자들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꿈꾼다. 그것은 ‘추방’이나 ‘도망’이 아니라 ‘여행’으로 명명되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날 거야. 지난 이틀 동안 우리가 해석하고 이해한 변화를 주도할 거야. (…) 우린 반드시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란 걸 믿어야 해.” (245쪽)
“공동체를 위해 여자들과 남자들이 모든 결정을 함께하기. 여자들에게도 생각할 권리를 허용하기. 소녀들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기. 학교에 반드시 세계지도를 걸어서 우리가 세상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기. 기존 종교를 토대로 사랑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종교를 몰로치나 여자들이 만들기.” (90쪽)
여자들끼리 하는 바느질 모임, 반찬 봉사 모임, 공동육아 모임에는 어떤 남자도 “왜 남자들을 배제하냐”는 질문이나 비난을 던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여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언어를 갖는 것에 ‘가부장’들이 갖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몰로치나 공동체의 여성들 또한 지도 보는 법도 모르는 채 마을 바깥으로 한발 나선 순간,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있는 이유는 곁에 함께 걷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거기에 깃든 의미가 두려웠던 거라고. 이제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거라고. 우리가 미지의 땅으로 출발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라고.” (133쪽)
내 삶의 주인으로서, 우리는 지도에 새로운 길을 그릴 권리가 있다. 그 길들이 모여 언젠가 세계의 모양을 바꿀 것이다.
[필자 소개] 달리.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며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에서 프로그램과 모임을 기획한다. 지역에서 여성들과 글을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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