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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가 성립되는 요건을 기존의 폭행·협박 유무 여부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결국 윤석열 정부의 양성평등정책 시행계획 세부 과제에서 제외됐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옆 나라 일본도 올해 ‘강간죄’ 명칭을 ‘비동의 성교죄’로 바꾸는 개정안이 6월 참의원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지난 13일부터 시행되었다. 비동의 성교죄는 당연히 배우자나 파트너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는 성폭력이 10건 중 6건
‘강간죄’를 개정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법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의 나무 활동가는 작년 한해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성폭력 상담 분석 결과를 통해 이를 알렸다. 전국의 성폭력상담소 119개 기관에 접수된 4,765건의 강간 사건을 분석한 결과, 물리적인 유형력의 폭행이나 명시적인 협박이 있었던 건 전체의 20.7%,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었던 건 62.5%에 달했다.
전체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아는 관계’가 57.9%, ‘친밀한 관계’가 13.6%, ‘친족 및 친·인척’이 10.2%로 원래 알던 사이인 경우가 81.7%였다.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의 경우는 ‘아는 관계’가 더 비중이 높았는데(64.3%), 아는 관계를 재차 분류했을 땐 채팅상대자, 동급생·선후배, 단순대면인, 직장관계자, (전·현)애인 순이었다.
나무 활동가는 “채팅상대자가 많은 건, ‘여자들 홈런 치는 방법’, ‘술 마시고 강간하고 고소당하지 않는 법’ 등 현재 법이 규율하는 성폭력을 피할 수 있는 (가해)방법이 온라인 플랫폼(채팅, 어플)을 기반으로 일상적으로,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성폭력의 상황을 살펴봤을 땐 강요(19.9%), 회유(17.6%), 지위 이용(11%), 속임(9.7%), 그루밍(7.9%), 폭언(4.6%), 괴롭힘(2.9%), 가스라이팅(1.8%), 가해자의 과시(1.5%), 경제적 속박(1.4%) 순이었다.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인 경우엔 회유(21.5%), 강요(18.1%), 지위 이용(12%), 속임(11.3%), 그루밍(10%), 괴롭힘(2.6%), 가스라이팅(2.4%), 가해자의 과시(1.5%), 경제적 속박(1.3%) 순으로 나타났다.
접수된 전체 강간 사건 중에서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비율은 67.9%로 높았는데, 이는 “피해자가 성폭력 상담소를 직접 찾고, 안내를 받아 지원을 받게 되는 상황”임을 고려해야 한다. (2022년 12월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성범죄 신고율은 2013년 1.1%, 2016년 2.2%, 2019년 1.7%밖에 되지 않는다.)
나무 활동가는 “전체 성폭력 상담 중 폭행·협박이 없는 경우가 62.5%임에도 신고율이 67.9%나 된다는 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의 없이 이뤄진 행위에 대해 많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으로 인식하고 있고, 법의 정당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성폭력을 신고하는 것에 장벽을 느끼는 피해자들도 많다. 신고를 하지 않는 이유는 자책, 수치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등 피해자 스스로의 무력감과 관련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강간 상담 전체 중에서 기소가 된 비율은 24.7%이며, 피해자가 신고·고소한 강간 상담 중 기소된 비율은 36.4%, 경찰의 불송치 사건 중 피해자가 이의 제기한 건은 23.5%, 이의 제기 후 기소된 건은 14.2%에 불과했다. 불송치(경찰), 불기소(검사) 이유는 ‘폭행·협박이 입증되지 않음’,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의심’이 주요 판단의 근거였다.
이에 대해 나무 활동가는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불인정”으로 연동되는 것 아닌지 유추했다. 또한 “폭행·협박에 대한 피해자의 저항 유무”를 기준으로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는 것이 오랫동안 ‘저항하는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라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을 형성해 왔다고 지적했다.
상담 결과 분석에서 알 수 있는 건,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성폭력이 분명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이 발생하는 상황과 유형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나무 활동가는 “폭행·협박이라는 유형력 기준, 피해자의 저항 정도를 문제 삼는 판례와 학설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피해자다움이나 피해자의 극심한 저항 유무에 의존하여 성폭력을 판단하면, 실제 상황과 동떨어지게 되고, 피해자들은 신고/고소, 송치/불송치, 기소/불기소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누락”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국회 토론회에서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막는 주장들에 대한 법률적 반박이 상세하게 다뤄졌다.
먼저 폭행이나 협박이 없다면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지 않을 수 있고,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성폭력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 대해, 이경환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이 차이, 신체적 능력의 차이,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 포함되지 않는 당사자간의 관계, 사건 당시 주변 상황 등에 따라” 특별한 강제력의 행사 없이도 많은 여성이 성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
또한 이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성폭력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저항하지 못하는, ‘긴장성 부동화’ 또는 ‘긴장성 무운동’, ‘비자발적 마비’ 상태를 경험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알려져 있다”는 점도 짚었다. 일례로 “스웨덴에서 2017년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298명 강간 피해자 중 70%가 상당한 정도의 긴장성 부동화 상태를 경험했으며, 48%는 그 정도가 극심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 법원도 이를 인지하고 있으며, “안희정 사건과 전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 사건(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때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논의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여성의 의지나 능력을 폄하할 여지가 있다’(한국 정부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거나, ‘성인남녀를 성관계시 예, 아니오 의사표시도 제대로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평가절하한다’(국민의힘 권성동 의원 페이스북 게시글)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경환 변호사는 이런 주장은 자칫 ‘폭행, 협박, 위력이 없다면 여성은 성교를 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는데,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다면 이는 여성이 동의한 것이라는 위험한 논리로 발전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여성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과, 그러한 여성의 의지를 무시하고 의사에 반하여 권리를 침해한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동의 여부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냐고?
또 다른 반대 논리인 “동의 여부를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나?”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경환 변호사는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형사처벌이 좌우되는 경우는 이미 존재한다”고 답했다. “형법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다.”는 것.
“단적으로 집주인이 동의하면 집들이 등이 정상적인 방문이 되고, 집주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형사적으로 처벌되는 주거침입이 되는 경우”, “상호 동의 하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서로를 때리면 어떤 스포츠 경기가 되지만, 그런 동의가 없으면 그냥 폭행, 상해가 되는 것처럼 오로지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형사처벌이 좌우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동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도 “피해자의 내심만으로 범죄 성립이 좌우되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원래 형사재판이란, 피고인의 내심의 의사가 무엇이었는가를 ‘고의’라는 개념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이 재판하는 곳이다. 내심의 영역을 재판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지적은 재판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고 일축했다.
나아가 이경환 변호사는 “일상의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이분법적으로 항상 명확하게 정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개정하고자 하는 건, 수많은 상황에 대해 법이 일일이 개입하여 피해자의 의사를 동의/비동의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영역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필요한 범위에서만 ‘동의’라는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 뿐”이라고.
또한 “다른 법적 개념과 비교했을 때, 동의 개념이 입법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불명확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개념이 불명확하여 위헌이라고 주장이 제기된 개념들- ‘위험한 물건’, ‘궁박’, ‘현저하게 부당한 이익’, ‘직무’, ‘유기’, ‘위력’, ‘업무’, ‘방해’, ‘음란한 물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합헌 판단을 받았다. 어떤 개념에 일부 불명확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하여 입법화가 반드시 불가능하다고 쉽게 단정해선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강간 구성 요건인 최협의설-‘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라는 정의도 판단하기 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법원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발견된다. 이경환 변호사는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어 있지 않은 현행 법제 하에서도 법원은 동의 여부 판단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고 제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동의를 번복할 자유, 성적 접촉에 동의하였더라도 그 범위를 한정할 자유, 그와 같은 동의를 판단하는 기준 등을 제시한 바 있”다.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관계는 성폭력’ 당연한 기준돼야
“반성폭력 운동이 강간죄를 비롯한 성폭력의 판단 기준을 ‘동의’ 여부로 바꿀 것을 지속해서 촉구해 왔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회적 인식, 국제 인권 기준도 변화해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건 이제 당연한 기준”이라고 말했다.
한국 법원의 판례 또한 변하고 있고, 동의의 구체적인 판단 기준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상 강간죄가 ‘폭행·협박’을 구성요건으로 하는 이상, 재판부가 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여전히 최협의의 폭행·협박 여부만 판단하여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판결이 많고, 때로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피해자를 간음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무죄가 선고되기도 한다.”
김혜정 소장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입법을 통해 강간죄의 쟁점이 되는 구성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물론 법만 개정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김 소장은 “강간죄 구성 요건이 ‘동의’ 여부로 개정된다 하더라도, 수사·재판 기관의 성인지 감수성 및 성폭력 통념, 시장화된 가해자 전문 변호사들의 변론 전략 등이 극적으로 변화하진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이어서 “동의란 무엇인지, 우리 사회는 다양한 성적 주체에게 각각 어떻게 동의 역량을 보장하고 있는지 등 ‘동의’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쏟아져 나올 질문에 대응하기 위한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더 활발하고 풍성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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