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우리 사회에서 친밀성과 가족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혼인평등이나 생활동반자등록법 운동 등 법적으로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는 현재 법적 논의들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가족정치-가족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이 가족을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살고 유대를 맺고 상호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재생산 정의’를 향한 사회권 실현과 만나야 함을 논의하고자 한다.
가족구성권은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것뿐 아니라 상호적 돌봄 관계를 함께 만드는 것
“우리 가족은 제가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혼자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을 계속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가족 안에서 ‘계속 돌봐줘야 하는 사람’이었을 때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게 불편했어요.”
한 장애여성 활동가가 2021년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진행한 「가족-잇슈, 할말-잇슈」 워크숍에서 양육의 경험을 이야기하던 중 한 말이다.
가족구성권은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것을 넘어, 돌봄 관계를 맺는 동료와 연대를 함께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돌봄의 공공성’은 돌봄바우처를 확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삶을 저당 잡히지 않도록, 책임의 무게가 쏠리지 않도록 상호적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이다.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취약한 존재로만 인식되는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돌봄 관계에서 ‘갈등’이 이뤄져야 한다. 장애여성의 삶을 통해 매일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기고 보이는 일이, 서로의 감정이 공유되는 공간에 함께 있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불편함을 삼키거나 곱씹는 일이 일상에서 어떤 갈등을 직면하는지 꺼내져야만 한다.
‘장애가 있는 네가 어떻게 혼자 사냐?’ 가족과 시설로부터 관리되지 않고 ‘잘 의존할 수 있는 삶의 권리’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 한국의 복지 제도는 누구와 함께, 어떤 공간에서 살아갈지 개인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국가는 돌봄과 부양의 책임을 가족에게 맡겨왔으며, 돌봄 역할을 수행할 가족이 없는 이들 혹은 돌봄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몸을 시설에 수용했다. 개인의 삶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시설에 위탁되고, 퇴소할 권리 또한 시설장의 승인을 전제하고 작동한다. 돌봄의 책임을 돌봄을 행하는 자의 권리로 등치시킬 때 ‘시설 수용’이 더욱 강화되는 모순은 장애인의 권리보다 효율과 예산절감의 논리가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족구성권 운동은 ‘정상성’을 기반으로 가족을 정의하고 시민권을 선별하거나 사회적 재생산을 막는 차별적인 제도와 낙인을 깨나가는 운동이다. 결국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은 기만적인 시설 수용 정책을 폭로하고 ‘탈시설’ 권리를 실현하는, 매우 정치적인 실천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신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장애여성운동은 장애여성의 관점과 경험으로 탈시설과 독립을 말할 때, 한 공간에 집단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구조가 아닌 ‘사생활을 보장받고 내가 존중 받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해왔다. 장애여성이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장애여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생활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으면서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 장애여성이 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수 있는 구조인가를 중요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재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 내 ‘독립형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을 신설하는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어 있다. 장애인운동은 이를 개정안이 아닌, 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개악안이라고 보고 있다.
이유는 법의 내용이 기존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설이 개별형 주거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며, 개인의 사적 공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거주시설에서 지역사회로의 이동, 혹은 사적 공간을 갖는 것의 의미가 아니다. 장애여성이 자신에 대한 권한을 대리/착취하는 가족과 시설로부터 관리되지 않고, ‘잘 의존할 수 있는 삶의 권리’를 의미한다.
독립의 자격을 묻는 사회가 문제다 독립을 ‘사적인 능력’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에서 벗어나 ‘돌봄의 정치’로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혼자 사는 것’,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일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로 상상한다. 그래서 ‘외롭고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 밥 먹을 때 화장실을 갈 때 돌봄이 필요한 나’는 독립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다른 사람의 돌봄을 필요로 하고, 서로 고립되지 않기 위한 연대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장애여성운동에서 말하는 독립적인 삶이란 의존과 돌봄을 주고 받는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매일 반복되는 매끄럽거나 평온하지 않은 돌봄의 관계 속에서 경험과 갈등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것, 돌봄 받는 몸이 주도권을 빼앗기는 명분이 되지 않는 것, 이 속에서 서로 돌봄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돌봄을 사적인 능력의 문제 혹은 개별이 해결해야 하는 영역으로 취급하는 것을 문제 제기하며, 독립이란 어느 특정 시기에 도달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해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장애여성운동은 그것을 ‘실패할 수 있는 권리’라 말한다.
독립을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책임지는 일로 강요하는 사회는 시민들에게 의존과 돌봄을 독립과 정반대에 있는 것으로 배치하며,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독립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사회는 장애여성들이 독립을 원한다고 말할 때 ‘장애가 있는 네가 어떻게 혼자 사냐’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듣게 만든다. 보호와 안전을 이유로, 장애여성의 독립을 통제하면서도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성공적인 독립을 강제한다.
그러나 오히려 묻고 싶다. 그 질문을 하는 당신들은 정말 누구의 돌봄과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홀로 삶을 살아 가고 있는가?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이 더 이상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권리로서 돌봄을 보장 받기 위한 투쟁을 해오면서 장애인활동지원제도를 쟁취했다. 활동지원제도를 통해 돌봄을 받는 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없애고 내가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권리를 만들어 왔다.
독립의 자격을 묻는 사회는 장애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하지만 돌봄에 대한 권리는 ‘자격이 없다’고 평가 받는 개인이 감수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자격을 구분하는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국가는 권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가족’ 밖의 울타리를 만드는 도전과 실패들
장애여성은 돌봄을 받기 위해 몸을 드러내야 하며, 그 순간을 함께 겪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가장 편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신변보조가 필요한 상황에 대해 한 장애여성 활동가는 “성기를 닦는 보조가 필요한 경우에 냄새도 걱정되었고, 활동지원사가 ‘더럽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진 않을까 두려움도 컸다. 나는 보조 받는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활동지원사와 몸이 닿는 감각이 최대한 느껴지지 않게 휴지를 3번 이상 돌돌 감아서 사용한다던가, 방향, 횟수, 힘의 세기, 모양(톡톡 두드리는 것과 일직선로 쓱- 닦는 것의 차이는 크다) 등의 구체적인 보조를 협의해갔다. 물론 이 과정은 긴장과 불편한 감정을 동반하는 일이다. 신변보조와 같은 밀접한 신체적 돌봄 관계는 깨끗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기에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감정과 수치스러움을 말하지 않고서는 활동지원을 요청할 수 없고, 신뢰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다. 몸의 경험들과 실패한 욕망들이 끊이지 않는 시도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진성선, “몹시 사적이지 않은, 장애여성의 활동보조 이야기”, 비마이너, 2020.09.25)
“깔끔하고 매끈한 욕망이 과연 존재하는가. 욕망과 사회적 억압과 뒤엉켜 있는 공간으로서의 몸,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실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이 나의 사생활, 내 공간, 내 몸을 끝없이 노출시키고 있지만, 아무런 갈등도 없는 매끈한 욕망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진은선, “아무것도 오염되지 않은 깔끔한 관계는 불가능하다”, WO/F)
돌봄을 주고 받는 이들과 얽히고 살아가는 일상, 부대낌이 느껴지는 갈등을 반복하는 것, 침을 닦고, 냄새를 공유하고, 더럽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하는 것이 돌봄 관계를 바꾸는 시작이다. 상호적인 돌봄이 운동의 언어로서 당연한 게 아니라, 갈등과 어려움을 나누고 또 기꺼이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같이 겪어나가야 나의 존엄을 지키는 돌봄이 가능해진다.
장애여성, 가족에게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고만 있을까?
장애여성에게 가족은 유일한 자원인 경우가 많아서 독립을 가로막는, 통제 당하는 삶의 관계를 끊기 어렵다. 때로는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 폭력을 견뎌내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특히 돌봄을 받는 장애여성-가족의 관계는 권리나 욕구보다 안전함과 보호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가족관계에서 장애여성들은 일방적인 돌봄만을 받지 않는다. 장애여성 명의의 임대아파트에서 가족이 함께 생활하거나, 자신의 수급권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경우가 많고, 집에서 여러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가족은 활동지원 바우처로 제공되는 돌봄 자원을 가족 구성원 전체를 위한 가사노동에 활용하기도 한다.
장애여성운동은 원가족 안에서 평등한 구성원으로 장애여성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질문하면서도, 어떻게 평온하고 오롯하게 ‘떠날 수 있는가’를 요구한다. 장애여성이 가진 돌봄의 역량과 사회적인 자원이 본인이 선택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휘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나갈 것이다.
장애여성인 나는 누구랑, 어떻게 살고 싶은가? 생활동반자 관계, 더 넓은 실천을 함께 할 동료들 만나는 과정
지난 7월, 장애여성공감에서는 회원들과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랑 살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하고 어려운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달장애여성들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중단하기 어려운 갈등상황을 이야기했다.
“내가 장애가 있어서 다른 사람 못 만날 것 같다는 생각 진짜 들어요. 그래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좋지 않아도 좀 참는 것도 있어요” “엄마가 소개도 해줬고 비밀도 다 아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는지) 반반.”
장애여성들은 어떤 가족 형태이든 ‘내가 장애가 있더라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원했다. 이 욕구는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이거나 성애적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해 자신감을 잃는 순간도 있지만, 분명한 문제는 정상적인 몸의 기준을 규정한 사회다. 생활동반자 관계는 기존 사회 가족 규범을 벗어나 더 넓게 운동적인 실천을 함께 할 동료들을 만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정상가족에 속하고 싶은 불안과 욕망을 솔직하게 마주하면서 ‘난잡한(문란한) 돌봄’을 실천할 수 있다.(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결국 가족을 해체하는 시도는 이 관계에 묶인 ‘정상성’을 깨는 일이다. 의무나 책임이 아닌, 기꺼이 욕망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관계, 서로의 삶을 변화하는 관계가 가능한 생활동반자 관계를 기대하며 상상해본다.
[필자 소개] 고나영. 장애여성 인권운동 단체인 장애여성공감에서 장애여성 인권의 향상, 사회변화를 위해 장애여성을 배제하는 제도와 기준이 가진 문제에 공감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06년 7월 13일, 당시 민주노동당의 제안으로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으로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장애여성공감, 언니네트워크, 여러 퀴어/페미니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함께했고, 이후 사회복지연구소 물결도 합류했다. 2019년 1월 24일 연구소로 전환하였으며,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familyequalityrigh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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