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본 척하는 것은 가해자의 협력자가 되겠다는 선택”⌜지속가능한 연극을 위한 헌장」 공표한 ‘극작가 여자모임.’ 인터뷰올해 일본 연극계에서 「지속가능한 연극을 위한 헌장」을 공표한 ‘극작가 여자모임.’(劇作家女子会.)을 만났다. 멤버인 오노마리코, 사카모토 린, 모스크와카누, 구로카와 요코 씨로부터 ‘헌장’을 만들기까지 어떤 생각과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 들어보았다.
사카모토 린(극단 다루메시앙 대표): 2014년에 모스크와카누 씨가 극장에서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며 상의해왔어요. 우리가 지원을 시작하자, 연극계에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와카누(극단 게키사쿠카 소속):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제가 피해를 당하고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다 보니, 그제야 괴롭힘과 (성)폭력에 대한 안테나가 세워지게 된 셈이에요.
오노마리코(극단 슈코 대표): 그러다가 2017년에 폭로된, 연출가 이치하라 미키야(市原幹也) 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치하라 씨는 캐스팅을 걸고 배우에게 성적 가해를 했음이 밝혀졌죠. 생각해보면 그전에도 극단 대표가 단원을 강간해, 단원이 그만둔 사건 등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어요. 가까이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개인들이 연극에 전념하는 환경에 마비되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모스크와카누 씨가 괴롭힘 방지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그래, 우리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럼 해보자” 했죠.
모스크와카누: 괴롭힘 문제에 관한 스터디 모임에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은 가해자의 협력자가 되겠다는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덜컥했어요.
사카모토: 모여서 공부를 해봤지만, 과연 ‘괴롭힘’의 정의가 무엇인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일단은 고민의 과정을 공유할 생각으로, 2019년에 일본극작가협회 안에서 괴롭힘과 관련한 활동을 하던 이시하라 넨(石原燃) 작가를 만났습니다. (관련 기사: 페미니스트는 백래시를 두려워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https://ildaro.com/9294) 또, 이전부터 괴롭힘에 대한 규칙 만들기를 하고 있던 극단 세이넨단(青年団, 한국에는 극단 청년단으로도 알려져 있음) 소속 아야토 유키(綾門優季)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로카와 요코(극단 게키사쿠카 소속): 이시하라 넨 씨는 “자기가 내면화해버린 가치관에 의문을 가지는” 일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어요. 당시에는 “아, 그렇구나”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제가 육아를 시작하고 보니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내 한계를 뛰어넘는 부담을 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내면화된 가치관’의 공포를 통감하고 가치관을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오노마리코: 우선 공부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해, 2017년에 제정된 영국 로열코트씨어터(Royal Court Theatre)의 괴롭힘 가이드라인을 읽었습니다. 단, 그땐 일종의 ‘책임감’으로 시작해서 당시엔 괴롭힘 가이드라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헐리우드 가이드라인은 세부에 걸쳐 너무 방대하고….
사카모토: 내용이 길면, 현장 연극인들이 제대로 읽지 않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단의 가이드라인이라면 위반한 사람이 극단을 나가게 할 수 있지만, 극작가인 우리가 만든 가이드라인으로는 누군가를 연극계에서 떠나게 할 힘은 없죠. 그러니 그보다는 다 함께 피해자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모스크와카누: 공연이 끝난 직후의 들뜬 기분에서 하는 허그(hug)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연극에서 키스 장면이나 폭력적인 장면을 안전하게 만들려면 (실연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해야 할까 등의 이야기를 나눴어요.
오노마리코: 그런데, 논의가 끝도 없이 길어지더라고요.
사카모토: 그래서 간결한 버전, 그리고 괴롭힘 방지책과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버전, 이렇게 두 종류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노마리코: 연극 현장에서 당한 괴롭힘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거든요. 그래서 일종의 파문을 일으킬 방법을 고민하다가 떠오른 것이 ‘게릴라 전단’이었습니다. 연극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뒷배’가 없는 젊은 연극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SNS가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에서, 손에 직접 들고 보길 바랐습니다.
사카모토: 우리가 만든 게릴라 전단을 손에 들고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인을 보고, “됐다” 싶었어요. 두 번째 편지는 가해자를 대상으로, 구체적인 괴롭힘 행위에 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연출가 다니 켄이치(谷賢一)씨 사건(대표로 있는 극단의 단원에게 위계폭력과 성폭력을 가한 것이 2022년 12월에 피해자의 폭로를 통해 알려짐)도 있었죠.
오노마리코: 다니 씨는 자기 극단에서 ‘괴롭힘 대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괴롭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 있는 극단 세이넨단 소속이기도 하고요. 가이드라인이 괴롭힘이나 성폭력의 방지책이 될 수는 없으며, 장기적인 연수 등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스크와카누: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폭로하면) 공연이 취소되어 팀원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무서워서 말을 못 한다고…
오노마리코: 다니 씨에 대해서는 공연장 책임자가 공연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괴롭힘 방지를 위한 교육은 연출자나 극단 대표는 물론, 공연장 관계자, 프로듀서, 스태프, 배우,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헌장’을 만들게 되었군요.
오노마리코: 2022년 여름 무렵에 시작했다가, 한 번 좌절했어요. 괴롭힘 행위를 없애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정작 SNS에서 괴롭힘 발언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거든요.
모스크와카누: 그래서 ⌜지속가능한 연극을 위한 헌장」 공표에 동의하고 함께 이름을 올릴 사람을 고르는 데 신중해졌습니다. (헌장 전문 및 연명자는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charterfortheater.com) 가해자는 자신의 가해성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피해자 역시 “그건 괴롭힘 행위”라는 말을 듣고서야 피해자 의식을 갖게 되는 일도 자주 있죠.
오노마리코: 요즘엔 연습 첫날에 괴롭힘과 관련한 교육을 하는 단체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연팀 안에서 괴롭힘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쉬워지고, 확산되죠.
사카모토: 윗세대의 경우, 구체적인 가이드라인보다도 의지를 중시하는 헌장을 통해서 연대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각 극단에서 논의하고 자유롭게 바꿔서 쓰셨으면 합니다.
모스크와카누: 최근에 ‘공연예술 관계자 대상 성폭력-괴롭힘 상담창구 리스트’가 뜻있는 분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관련 연수도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헌장이 법적 효력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안전한 연극 현장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로카와: 연극계를 소통이 잘 되는 곳으로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 헌장으로, 연극계의 괴롭힘 문제와 본래 직무 영역을 넘어서는 일을 하게 만드는 노동착취 환경 등에 이의 제기하기가 쉽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모스크와카누: 가해자임이 밝혀지면 도중에 교체하거나 연습실에 들어오지 않도록 요구할 수 있는, 연극 현장을 지키는 방식으로 운용할 수도 있습니다.
오노마리코: 제도적으로, 공적 지원금이나 극장과의 계약서에 “괴롭힘 행위가 있으면 계약을 해지한다”와 같은 문장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괴롭힘 행위에 대한 견제도 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극장 측이 공연을 취소할 수 있는 근거도 되니까요.
사카모토: 기업들이 노동 문제를 상담하는 사회보험 노무사가 연극계 내 괴롭힘에 대한 조사를 하는 사례도 생기고 있습니다.
-네 분이 ‘극작가 여자모임.’을 꾸리게 된 경위는?
사카모토: 2013년에 모스크와카누 씨와 오노마리코 씨의 공연에 저와 구로카와 씨가 ‘관객과의 대화’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 토크 이벤트 타이틀이 ‘극작가 여자모임’이었습니다. 그다음엔 같이 공연을 만들고 싶어서 단편희곡을 함께 공연한 것이 이 모임의 시작입니다.
모스크와카누: 공연이라는 게, 혼자서 하면 부담감이 크거든요. 고민이 있을 때 상의를 하거나, 더 이상 (대본을) 못 쓰겠다 같은 약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즐거웠어요. 그래서 넷이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극작가가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모스크와카누: 저는 다카라즈카(1913년에 창단한 여성 뮤지컬 극단. 모든 배역을 여성이 맡는다)를 좋아해요.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고, 인간의 질펀한 그림자와 어두운 면을 아름다운 멜로디에 실어 노래하면 사람들이 들어주는구나 하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카모토: 고등학생 때 연극부에 들어갔는데, 지역 극단의 어른들이 그럴듯한 판타지를 무대 위에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멋있다, 나도 만들고 싶다’ 했어요.
오노마리코: 학생 때는 자주 연극을 보러 다녔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한 후에 뭔가 취미를 찾아야겠다 싶어 지인이 극단을 창단하는 데 참여했어요. 즐거웠어요. 검열도 없이, 내가 생각해낸 것을 누군가가 연기해준다는 게 자유롭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구로카와: 어릴 적부터 “내가 사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건 갑갑하다. 어떻게든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 등의 창작물을 엄청 좋아했고요. 그중에서도 연극이 객석과 무대를 동일한 공간으로 두면서 다른 세계를 만드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생각인가요.
오노마리코: 괴롭힘 문제에 대한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는 극단 대표자들이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사카모토: 앞으로 우리가 만든 헌장을 확산시키고, ‘극작가여자모임.’에서 괴롭힘 가이드라인을 만들려고 합니다. 함께 공연하고 싶은 작품도 많아요. 연극을 만드는 환경의 개선을 염두에 두면서, 공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일다>와 기사 제휴하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제공 기사입니다. 고주영 씨가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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