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을 상담, 지원하는 현장 단체들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법 개정과 사회 인식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성폭력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경험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현행법 상 드러나는 쟁점과 문제, 개정의 필요성을 담아 총 7회에 걸쳐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생존자로 산다는 것
“안녕하세요”하는 인사가 좋다. 내 일상이 안녕치 못해진 이후에도 웃는 얼굴로, 혹은 무심하게 주고받는 안녕이라는 인사는 차가운 세상을 약간 더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를 준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안녕하다 말할 수 없는 지금, 나는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싫고 한국어가 듣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서구 세계로 잠깐 동안의 도피를 결심한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다. 명백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강간 피해를 당했으나, 폭행이나 협박이 없다고 기소조차 되지 않은 강간 피해 생존자이다. 동시에 만취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되어, 누구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못한 준강간 피해 생존자다. 법적으로 나는 강간도, 준강간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아닐까? 성폭력 범죄의 피해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지만, 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더 괴롭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게 일어나지 않는 강간
낯선 장소에서 동의하지 않은 이와 맞이하는 아침의 불쾌함을 아는가? 나는 내가 마주한 상황을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술에 취한 채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앞뒤의 정황은 알 수 없다. 당신은 나체이며,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는 그때, 그 낯선 이는 일상적인 것처럼 말을 걸며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겠다 한다. 그리곤 다시 허락 없이 당신의 몸을 만진다. 더 이상 행위가 진행되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당신의 거절의 말과 몸짓은 상대방의 무력으로 제압된다. 그는 원하던 일이 끝나고 나자, 어쩌면 무해해 보일지도 모를 표정으로 태연하게 다시 말을 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은 그 간극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아는가?
나는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으로 한숨만 나왔다.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대개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성희롱, 그리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는 다르다. 명백하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사는 철저하게 묵살 당했다. 태어나서 겪어본 경험 중, 타인에 의해 내가 사라지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강간’은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폭력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얻어맞거나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극심한 무력감과 함께 공포 속에 있었다. 최선을 다한 저항과 거듭된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는 상대방의 행위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나를 제압했다. 마법이 풀리고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때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현행법상 강간은 ‘폭행과 협박으로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겪은 일은 무엇인가? 폭행과 협박이 없었으니 화간인가? 거절은 있었으나 동의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는, 조금 독특한 형태의 성관계였는가? 전혀.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할 것에 절대로 동의한 바 없다. 내가 당한 일은 명백한 강간이었지만, 법원은 그 행위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일어난 성폭력은 어떠한가? 나는 클럽 안에서 낯선 남성과 술을 한 잔 마신 이후부터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나의 사라진 시간은 혼자 서 있지도 걷지도 못하고 소지품 하나 없이 낯선 남성들에 의해 낯선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담긴 CCTV와, 몇 시간을 나를 찾아 헤매고 있던 친구들의 메시지, 방 안의 성적인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으로 성폭력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내가 술에 취해 항거불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피해를 당한 나의 호소보다 조사나 법정진술 때마다 말을 바꾸던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답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피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가해자의 ‘귀찮아서 거짓말했다’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말은 왜 따져묻지 않나
현행법상 준강간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항거불능이어도 성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기본값인가?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한 채 겪는 성폭력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나의 성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법원은 내게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없었던 것처럼 판단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무엇과 싸웠던 걸까? 내 싸움의 대상은 가해자 개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사회는 동의하지 않았던, 그리고 저항했지만 ‘성폭력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나의 호소를 외면했다. 귀찮아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는 가해자의 말을 더 감싸 안으며 방어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가해자가 떳떳하게 사는 사회, 희망이 있을까
가해자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떻게 다시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본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 기대를 한다면, 그것은 ‘동의 없는 성적 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법과 사회에 자리잡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허락 없이 수단화, 도구화할 수 없다. 폭행, 협박이 있건 없건, 적극적 동의가 없었다면 합의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동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그 동의는 효력이 없다.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제야 사회에 인식되기 시작했듯이 ‘동의 없는 강간’ 또한 법과 사회에서 당연히 통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결과에 순응할 수 없고, 순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로 인정받지 못한 그날의 일을 나는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까? 피해자라는 허울뿐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더 했어야 할까? 혹시 성폭력의 판단기준이 ‘동의 없는 성적행위’였다면 그 결과가 달라졌을까? 나는 아직도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름을 모른다.
[글쓴이 소개]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의 피해 당사자로, 준강간과 강간을 동시에 경험했으나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사법부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정체화하여, 그 경험을 알리고 다른 피해자에게 연대하며 성평등한 세상을 쟁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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