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라는 말이 등장한 데에는 갖가지 이유가 있다. 이곳, 대한민국은 각 군의 노동자들이 갈려나가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며, 성폭력이 만연하고, 각종 차별과 혐오가 널려있으며 계층의 이동은 꿈꾸기 어려운 곳이다. 잔혹한 범죄가 매일 이어지고 정부는 대책을 내지 못하며 자꾸만 유가족이 늘어간다. 이러한 현실에 지쳐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참혹한 뉴스를 연달아 볼 때면 이 땅에 사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사회는 이런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기는커녕 탈을 씌운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모른 척하고 살면 편할 텐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투쟁에 대한 혐오로 쉽게 이어진다. 이렇게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을 그저 ‘앓는 소리’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이득을 보는 쪽은 따로 있다. 집회를 ‘빨갱이의 농간’이라며 묻어버리면 편안해지는 쪽은 기득권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사회적 약자, 일반 서민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지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셈이다. 처참한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이 못 본체 넘어가는 가짜 천국보다 더 천국답다.
씩씩한 게 아니라 둔한 거야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는 학교폭력의 가해자 무리와 피해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두운 밤, 가해자 무리는 생일인 피해자를 괴롭힌다. 가해자 무리가 우르르 떠나고 홀로 남은 단발머리의 피해자 황선우는 얼굴에 케이크가 잔뜩 묻은 채로 공터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그리고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송나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나미는 황선우보다 머리가 길다. 송나미가 오프닝 씬의 피해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단적이고 확실한 증거다. 송나미는 엄마가 하는 가게 방 안에서 자살 시도를 하다가 엄마에게 걸린다. 엄마는 송나미의 등짝을 때리며 구박한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싶다. 한 번 까인 걸로 뭘 그러냐고 씩씩하게 살라고 한다. 송나미가 반박한다. “그건 씩씩한 게 아니라, 둔한 거야!” 욕설을 섞어서 말을 하고는 뛰쳐나간다.
둔하게 살면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밀려올 것이다. 모른 척 넘어갔던 사회의 그림자가 언제 나를 덮을지 모른다. 송나미는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던 척, 씩씩한 척, 둔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까였다’라는 엄마의 표현에서 알 수 있는 송나미 또한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송나미는 그런 문제를 묻어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마주한다.
가게를 뛰쳐나온 송나미는 애꿎은 나무를 발로 걷어차면서 욕을 한다. 송나미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 괴로움을 다 받아낸다. 괴로운 상황을 괴로워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송나미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 마냥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그려졌던 피해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물론 무기력한 상황이지만, 상황이 무기력할지언정 성격까지 무력해지지는 않는다. 오우리 배우의 툭툭 내뱉는 톤이 송나미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송나미는 죽음을 앞둔 상황이지만 끝까지 펄떡인다.
송나미는 황선우와 자살을 계획한다. 아무도 없는 폐건물에서 둘은 만난다. 송나미는 자신의 유서를 황선우에게 건네며 아무 우체통에나 넣어달라고 말한다. 황선우는 무슨 생각인지 그 유서를 꺼내 읽는다. 그리고 유서 속 가해자 박채린은 잘 살고 있다고, 소식을 모르냐고 한다. 당황한 송나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송나미는 죽기 전에 박채린의 인생에 기스라도 내자고 제안한다. 송나미와 황선우는 그렇게 ‘기스’를 위해 수안보에서 서울로 간다.
뒷모습에 다가가기
두 학교폭력 피해자가 박채린을 마주한 첫날, 교회의 분위기에 압도된 황선우는 구토감을 느낀다. 예배를 구경하다가 뛰쳐나와 결국 토를 하고 박채린은 그것을 손으로 받는다. 다른 아이들은 박채린을 대단하다고 하고, 송나미도 정말 박채린이 변한 걸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황선우가 아파 눕게 되고 송나미도 별 수없이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숙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 황선우와 송나미에게 한 청소년 혜진이 다가온다. 투덜대듯이 단체 생활이니 빨리 나와서 밥을 먹으라고 말한다. 황선우와 송나미는 혜진을 따라나선다. 셋은 좁은 복도를 지나 급식실로 간다.
카메라는 복도를 걷는 셋의 앞모습을 비추며 점점 황선우에게 다가간다. 안 그래도 인물이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며 걷고 있는데 카메라까지 다가가니 엄청난 ‘이입’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처음에는 황선우가 이 사이비 교회에 빠지게 되는 걸까 봐 두려웠는데 황선우가 바라본 것은 혜진의 뒷모습이었다. 혜진의 등에는 황선우의 쌍둥이 동생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있었다. 황선우는 급식실에서 혜진을 유심히 보게 되고 다른 아이들이 혜진을 묘하게 따돌리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황선우가 이입한 것은 교리나 구원, 낙원이 아니라 다른 이의 지옥이었다.
피해자에게만 낙인이 남는 사회
송나미는 박채린에 얼굴에 기스를 낼 틈을 노린다. 토마토 농장으로 체험학습을 간 날, 송나미는 박채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모든 걸 다 뉘우친 듯 시종일관 선한 눈빛으로 생활하는 박채린에게 송나미는 커터칼을 꺼내든다. 칼을 쥔 송나미의 손이 떨린다. 현재의 상황만 본다면 박채린은 선해 보인다. 깊은 신앙심을 갖고 신실한 생활을 하며 진심으로 용서를 바라는 듯하다. 그런 박채린에게 칼을 내미는 송나미는 악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태양을 등지고 선 박채린의 얼굴은 어둡고, 박채린의 맞은편에 선 송나미는 태양을 받아 밝게 빛이 난다. 구원과 선을 상징하는 빛이 신실한 자가 아닌 칼을 든 자에게 비춘다. 이 빛의 연출을 통해 감독은 학교폭력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음을, 용서는 교회에서 받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송나미는 결국 박채린에게 기스를 내지 못하지만 박채린은 다른 교회의 어른들에 의해 얼굴에 기스가 나게 된다. 가해자라는 낙인은, 흉터는, 기스는 새기기 어렵지만 피해자라는 낙인은 쉽게 찍히는 사회다. 마귀가 됐다며 어른들은 박채린을 괴롭히고 비닐하우스에 감금한다. 그런 박채린을 구하는 것은 송나미와 황선우다. 셋은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 행사용 폭죽이 빵빵 터진다.
영화에는 폭죽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로 황선우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도망 다니는 황선우를 깜짝 놀라게 하는 소재로 쓰인다. 두 번째로 송나미가 나무를 걷어차며 세상을 욕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갑자기 어디선가 파바박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고, 폭죽쇼가 이어진다. 세상을 걷어차던 송나미는 깜짝 놀라 먼 곳의 하늘을 쳐다본다. 마지막에는 피해자인 송나미, 황선우, 그리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박채린이 모여서 폭죽놀이를 보게 된다. 송나미는 신나서 춤을 추고 황선우도 웃는다. 박채린은 흉터가 생긴 얼굴로 멍하니 바라본다.
본래 폭죽은 축하와 즐거움을 상징하지만, 영화에서는 학교폭력의 도구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을 들여다보게 하는 용도로 변모했다가 마침내 다시 본래의 목적성을 찾는다. 그 여정에는 송나미와 황선우의 연대가 있었다. 처음 수안보를 떠나 서울로 가는 밤, 둘은 따로 앉는다. 각자 다른 창에, 어둠에 얼굴이 비친다.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수안보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둘은 서로에게 기대 아침 빛을 맞으며 쿨쿨 잔다.
오키오키
그렇다고 둘은 낙관하지는 않는다. 둘은 희망 없는 연대를 한다. 그냥 지옥에서 같이 살 뿐이다. 교회에서 낙원에 갈 신도를 뽑는 자리에서 송나미가 황선우에게 너랑 있으니까 덜 죽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허황된 낙원보다 진실된 한 걸음이다. 지옥에서 둘은 죽지 않고 살기로 한다. 영화의 마지막, 지옥에 다시 온 걸 환영한다는 송나미의 말에 황선우가 대답한다. “오키오키”. ‘오키’는 ‘OK’를 편하게 재밌게 발음한 버전이다. 이 장난스러운 “오키오키”가 영화 중반 교회에서 울려 퍼지던 거창한 기도문보다 더 믿음직스럽다.
피해자 둘은 살기로 하면서 가해자 박채린에게 말한다.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근데 죽지 말고 살라고. 가해자들은 때때로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피해자가 화를 낼, 증오할, 용서할 그 어떤 기회도 선택지도 주지 않고 가버린다. 영화는 가해자들에게 죽음으로 도피하지 말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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