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을 상담, 지원하는 현장 단체들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법 개정과 사회 인식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성폭력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경험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현행법 상 드러나는 쟁점과 문제, 개정의 필요성을 담아 총 7회에 걸쳐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황에서 친족성폭력 피해를 당한 많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나의 친오빠인 가해자는 굳이 수고롭게 폭행이나 협박을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내가 두려움에 완전히 얼어붙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엄마가 알게 되면 자식들을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려웠고, 또 수능을 앞둔 오빠의 앞길을 막았다고 비난받을까 봐 두려웠다. 도망갈 곳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잠든 척하면서 끔찍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나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저항하지 못해서 피해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길어졌다고 자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가장 먼저 나를 탓했을까? 왜 성폭력 피해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나에게서 찾았을까?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오빠의 성폭력 수위는 점점 심해져 결국 가족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아
친족성폭력은 반인륜 범죄이므로 폭행·협박이 없었더라도 피해자가 주변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친족성폭력 사건에서도 성폭력에 대한 성차별적 통념들이 그대로 작동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감정이입하는 말들은 차고 넘친다. 내가 오빠에게 당한 성폭력을 처음 말했을 때,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해자인 오빠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두 번 다시 이 얘기는 어디서도 꺼내지 마라. 네 오빠는 가정이 있잖니.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언니는 오빠의 범행을 사소한 일로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성기 삽입은 없었잖아.”
그렇게 친족성폭력 가해자의 범행은 철없을 때 저지른 실수, 혹은 장난, 또는 남자는 성욕이 너무 강해서 그럴 수도 있는 일, 사과하면 더이상 문제 삼지 말고 피해자가 화해를 해줘야 하는 정도의 일이 된다.
“미투 하지 마. 가족이 다 불행해져. 지금까지 참고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쭉 참고 살아. 너 그러면 엄마 제 명에 못 죽어.”
언니는 긴 고통의 책임을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힘들어?”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친족성폭력 피해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장화는 아빠의 성폭력을 말한 후 가족으로부터 ‘꽃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희망은 가해한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 최예원의 가족들은 아빠 가해자가 감옥에 간 후에도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푸른나비는 동생이 다음 차례가 될까 봐 아빠의 성폭력을 견뎠지만, 동생은 “그건 언니가 반항하지 않아서야”라고 말하며 피해자를 비난했다.(『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의 기록, 장화·불가살이·김민지·정인·희망·최예원·엘브로떼·명아·푸른나비·평화·조제, 글항아리, 2021)
공기처럼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성폭력에 대한 성차별적 통념들은 피해자가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피해의 책임을 손쉽게 피해자에게 지운다. 가해자에게 향해야 하는 분노가 피해자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든다. ‘작은 일’에 너무 큰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미쳤거나 나약하다고 믿게 만든다. 피해자가 혼란과 고통으로 사경을 헤매는 동안에도 가해자들은 쉽게 엉성한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 선량한 시민인 척 거짓 명예로 포장한 삶을 누린다.
문화, 법, 개인의 생각은 상호작용하기 마련이므로, 이렇게 가해자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성차별적 문화를 유지하는 큰 기둥 역할을 형법상의 ‘강간죄’가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법은 인권 존중 사회로 나아가는 데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현행 형법상 ‘강간죄’는 결국 피해자에게 죄의 책임을 묻는가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인 강간죄, 개정되어야
피해자의 반항을 제압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강간죄’와 “원하지 않은 성관계는 맞지만 강간은 아니다”라는 판례들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국가는 완벽한 피해자만 보호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인권(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 당한 것에 분노하기 전에, 혹시 내가 빌미를 준 건 아닌지 자기검열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피해자라는 가해자 중심적인 기준은 너무 높기 때문에, 또 가해자에게 관대한 문화가 피해자의 증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피해자의 책임을 끝도 없이 생산해내기 때문에, 다수의 피해자들은 완벽한 피해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내가 만 14세에 잠들었을 때 당한 친족성폭력 피해와 첫 직장 야유회에서 잠들었을 때 당한 성폭력 피해에 대해, 나의 친밀한 관계인 남성은 “니가 다리를 벌리고 자는 습관 때문에 그런 피해를 당한 거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상상력이 정말 창조적이지 않은가! 조금의 부주의라도 있었다면 피해자는 비난과 낙인이 두려워 말문이 막혀버린다.
다행히 최근에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를 살피는 판례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긴 하나, 피해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법관을 만나는 운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라서, 여전히 문제적이고 시급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폭행 협박’이 아니라 ‘동의 여부’로 개정된 세상을 상상해 본다. 피해자에게 성폭력의 책임을 지우는 문화적 압박이 없는 세상.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서 말 못 하는 피해자가 없는 세상. 나처럼 동의 없이 피해자의 성기가 침해당하면 “그건 강간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가족을 성폭행하면 가해자가 대가를 치르는 세상. 주변인들이 피해자를 지지하고 보호하며 가해자를 방관하지 않는 세상.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가족이라는 신뢰관계와 피해자의 취약성을 이용한 친족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은 전부 가해자의 몫이야”라는 말을 차고 넘치게 듣는 세상을 상상한다.
강간죄의 구성 요건이 ‘동의 여부’로 개정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뀌나?
동의 여부가 기준이 되면, 성폭력 피해 예방에 큰 효과가 있음은 물론일 것이고 피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시간은 짧아져서 치유는 성큼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여성의 ‘내숭’과 ‘두려움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의 여부로 성폭력을 판단하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사람이 생긴다는 논리는, 남성 문화 내에서 인권의식이 한참 뒤처져 있다는 자기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할 줄 모르는 편견과 무지는 어릴 때부터 인권교육을 강화하여 해결할 일이지, 처벌 시도 자체를 안 하겠다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강간죄 개정 요구는 여성을 물건(도구, 소유물)이 아닌 사람으로 존중하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대한 요구이다. 이미 여성들의 인권의식은 ‘더 이상 여자라는 이유로 착취당하지 않겠다’는 각성의 수준에 도달했고, 이를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성폭력을 부추긴다는 오명을 벗고 싶다면, 또 국회가 존재 이유를 증명하려면,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조속히 개정해서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글쓴이 소개] 심이경: 친족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 ‘공폐단단’ 활동가, 『나는 안전합니다』 저자.
※‘공폐단단’은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해 매주 마지막 주 토요일 12시 광화문역 4번 출구 칭경비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시위뿐 아니라 축제, 소수자 연대, 언론 인터뷰, 공부 모임 등 다양한 반성폭력 운동을 펼치며, 생존자와 지지자들과 연결되기 위해 SNS 채널을 운영한다. cafe.naver.com/antiincest 엑스(X) @metooincest 인스타 @voice_of_survivor 페이스북 @gongpyedan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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