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 책을 기진맥진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여자들을 위해 썼다.” (에밀리 나고스키, 어밀리아 나고스키 피터슨 지음, 박아름 번역, 책 『재가 된 여자들』 10쪽)
식사 도중 반찬이 떨어진 빈 접시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눈치 빠른 누군가는 일행들이 어떤 음식을 잘 먹는다 싶으면 그것이 다 사라지기 전 종업원에게 더 달라고 미리 부탁하기 때문이다. 종업원에게 시키는 것마저 마음이 쓰이는 사람은 직접 반찬을 다시 채워 오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만히 앉아 받아먹기만 하는 건 마음이 불편해, 단체로 식사를 하러 가면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거들 일을 찾곤 한다.
언젠가 단골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반찬을 더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은 나를 바로 주저앉혔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는 “먹을 땐 먹기만 해. 밥 먹다 왔다갔다 하면 식사 제대로 못 해.”라고 말하면서 반찬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식사 중에 다른 사람은 신경 쓰거나 눈치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허락받은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같이 밥 먹는 사람들의 상태를 끊임없이 살펴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하찮게 들릴까?
“세상에는 ‘베푸는 인간’이 있고, ‘존재하는 인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밥이 나오고 수저가 놓이고 물잔이 앞에 있고 휴지와 수건이 걸려 있다.” (책 『재가 된 여자들』 권김현영 ‘추천의 글’ 첫 문장)
식탁에서 여자들이 보여주는 섬세한 배려는 사실 어느 것 하나 살면서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는 식사예절(?) 혹은 사회생활이다. 하지만 어디에 가나 그런 여자들은 흔히 보이고, 그 자리에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거기 동참하게 된다. 누가 옆구리를 찌르지 않아도, 순간 명절날 며느리 같은 모드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나 풍경을 그저 훈훈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가끔 난감했다.
한 번은 어느 지역의 여성단체 회원들과 식당에 갔다가 모두가 음식이 나오기 전 ‘한마음 한몸’으로 쉼 없이 움직이는 걸 보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좀 싫은 소리를 했다.
“우린 늘 남을 위해 일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요. 그냥 자기 것만 알아서 챙깁시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버리고.”
질서정연하게 식탁 세팅을 척척 같이하던 이들은 순간 멈추고 약간 겸연쩍어하며 웃었다. 그런데 한 분이 나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챙기고 돌보는 게 우리 여자들이 가진 사랑이고 큰 힘이에요, 가부장적인 사회가 알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쿵, 맞은 느낌이었다. 그 말은 혹시 내가 돌봄을 실천하는 여자들을 폄훼하는 시선을 갖고 살아온 게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배려’나 ‘친절’로 부르기엔 불충분하고, ‘희생’이나 ‘착취’라 규정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듯한 이 집단적, 무의식적, 자동적 행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책 『재가 된 여자들-이제는 쉬고 싶은 여자들을 위한 회복 가이드』(원제 Burnout) 저자들은 위 용어를 활용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돌봄과 감정적 소진이 젠더화된 현상을 ‘베푸는 인간 증후군’(Human Giver Syndrome)으로 설명한다.
“여성은 ‘베푸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과 건강, 삶을 포함해 인간으로서 가진 모든 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기대를 받으며 살아간다.” (246쪽)
『재가 된 여자들』은 여성의 ‘번아웃’과 스트레스에 대해 과학과 의학, 통계를 ‘증거’로 동원하면서 심리학적인 접근과 영적인 질문, 페미니즘적 비평과 실천을 두루 꿰어 해결책을 모색한다. 여성의 진정한 ‘웰빙’을 위한, 실용적이고도 다정한 ‘자기계발서’라 할 수 있다.
저자들이 말하는 웰빙이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요가, 유기농 음식, 스파 같은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들이 웰빙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 “인간의 삶에 수반되는 사이클을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통과하는 것”이다. 웰빙은 스트레스 상태 이후에도 거기 갇히지 않고 “다시 안전하고 고요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기에, 정적이기보다 동적인 상태라 말한다.
당연히,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없다. 저자들은 스트레스의 원인을 해결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 ‘스트레스 반응 사이클’을 완성하고, ‘모니터(좌절의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메커니즘)’를 통해 자신의 내적 자원을 ‘무기’로 삼으라 조언한다. 문제에서 한 발 떨어져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훈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자기관리’와 달라 보인다. 자기관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추어 나를 조각하는 일에 가깝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은 나에게 맞는 삶과 내가 원하는 것을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계속 머물러 있을지 떠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97쪽)
저자들은 기존의 자기계발서들이 개인의 노력과 성취를 강조하면서 “조작된 게임”판인 성차별적 사회구조 문제는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오로지 나의 능력에 성공과 그에 따른 보상이 달려 있다는 자기계발서의 선전은 ‘기울어진 운동장’ 속 여성들에게 기만적이며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베푸는 인간”인 여성들은 남성중심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조건에 도달하기 어렵거나 미끄러지기 쉽다.
가사노동자도 직장인도 내 주변의 여성들 대부분은 바쁘고, 아프다. 우리에게 하루 24시간은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양육 및 가사에 투자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40시간에 달한다. 반면 남성이 투자하는 시간은 1시간 30분에 불과하다.” 타인의 필요와 욕구를 우선으로 여기는 “베푸는 인간”들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잠마저 줄여가며 피로와 과로에 허덕인다. 『재가 된 여자들』에서도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수면과 휴식 시간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고, 더 많은 몫을 완벽히 해내야 한다고, 자주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의 건강과 인간관계 그리고 일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요소가 ‘감정적 소진’”이라는 연구 결과는 삶의 중심과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것이 여성의 건강과 웰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다.
“번아웃의 치료약은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326쪽)
며칠 전 지인과 식사 약속을 했는데 그가 내게 좋아하는 음식이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매운 것을 잘 못 먹는다고 답하고 나서, 문득 여자들과 무언가 먹게 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주고받았음을 떠올렸다. 다른 여자들에게 배운, 타인을 편하게 해주고 싶고 그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용당하지 않고 소중히 지키고 싶다. 가부장제가 사라진 세상에서 “베푸는 인간”들의 식탁은 더 평화롭고 풍요로울 것이다.
[필자 소개] 달리.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며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에서 프로그램과 모임을 기획한다. 지역에서 여성들과 글을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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