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감독과 배우와의 관계에 관해 ‘배우는 가축처럼 다뤄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히치콕은 배우의 주체성보다 감독이 설정한 캐릭터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시했고 배우를 도구처럼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히치콕의 이 같은 언사를 비판했다. 배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고 주체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는 존재라며 반박했다. 물론 감독이 캐릭터를 설정하지만 배우 역시 그 캐릭터를 연구하며, 준비하는 혹은 촬영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 역시도 히치콕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비판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가축’으로 일컬어지는 동물들은 그럼 도구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가축’처럼 다뤄지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은 ‘가축처럼 다뤄져’도 되는가?
자연스럽게 비인간동물에 대한 혐오가 담긴 표현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간을 함부로 대하거나, 인간의 어떤 면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짐승처럼 지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등의 예에서 등장하는 짐승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몸에 털이 나고 네 발을 가진 동물’이지만, 세 번째 의미는 ‘매우 잔인하거나 야만적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에 의해 다른 생명을 잡아먹는 습성을 보며 이 비유를 시작했을까? 그럼 비인간동물을 공장식으로 사육해 먹는 인간은 잔인하거나 야만적이지 않은가? 약자에 대한 혐오, 착취, 폭력, 살인, 전쟁은 어떠한가?
인간과 비인간동물은 당연히 다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평균 지능이 높다. 그 지능으로 인간은 문명을 이룩했고 다양한 언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은 오로지 인간동물의 편리함을 위해서만 쓰였고, 수많은 기계가 만들어졌지만 생태계는 고장 나버렸다.
거리와 기다림
영화가 시작하고 크레딧이 뜬다. 크레딧 이후, 나무로 만들어진 우리에서 자고 있는 돼지 ‘군다’를 보여주며 첫 컷이 시작된다. 군다가 평온히 자고 있는 그 공간을 표현하기에 ‘우리’라는 단어가 완벽하지는 않다. ‘우리’의 사전적 의미는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이지만, 영화 속 군다는 갇혀 살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는 그곳을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허나 그냥 ‘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떠한 현실을 가리는 것 같다. 군다의 귀에는 인간이 달아놓은 표식이 있고, 매번 같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귀소본능일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가 담지 않은 (담지 ‘못한’과는 다르다) 영역에서 울타리 혹은 인간의 직접적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첫 컷만으로 앞으로의 연출 방식이나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다. 후반 과정에서 디지털 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일 만큼 느리고 섬세한 줌은 생명에게 쉬이 다가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확연히 보여준다. 어떤 순간을 발견했을 때 무리해서 다가가려는 욕심을 누르고 기다림으로 그 시간을 맞이한다. 군다가 출산을 한 아기 돼지들은 무척 귀엽지만 그 귀여움을 강조해 생명을 대상화하기보다는 끈질기게 지켜본다. 그 거리와 기다림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영화, 드라마 현장 속 동물의 처우
2022년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7회 방영분에는 주인공 이성계가 낙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작진을 이를 연출하기 위해 말의 다리에 와이어를 묶고 당겨 강제로 넘어지게 했다. ‘까미’라는 이름의 말은 경주마로 인간에게 학대를 받으며 살다가 폐출혈을 일으켜 은퇴하고 그 뒤에는 대여업체로 팔려와 소품처럼 촬영에 쓰였다. 까미의 삶에는 까미가 없었다. 인간의 욕심만 그득했다.
한 가지 더 의문이 든다. 현장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의 기준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굉장히 많은 비인간동물의 사체가 음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음식이 되면 동물이 아니게 되는 걸까.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하다면 모형이나 비건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지는 않을까. 4년 전 내가 연출했던 영화 〈마더 인 로〉에는 참치 캔을 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페스코 베지테리언이었던 나는 무심코 그 장면을 찍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되는 장면이다. 굳이 서사에 필요하지도 않은 인서트 컷을 찍느라 동물성 제품을 소비한 것이다. 그들의 사체가 소품으로 쓰이는 것을 동물보호의 영역과 분리해서 생각했던 무심함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리듬을 벗어나서
〈군다〉에는 돼지인 군다뿐만 아니라 닭과 소도 나온다. 영화 속 닭들은 우리에서 나와 걷는다.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내가 살면서 미디어에서 봐온 닭은 항상 어딘가로 쫓기거나 도망가고 있었다. 영화 속, 인간과 멀어진 닭은 아주 침착하고 조심스러웠다.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드러내는 장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 돼지, 닭은 인간이 식용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존재들이다. 공장식 축산에 의해 길러지고 죽고 소비되던 생명들이 진흙 목욕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인간의 입장으로 계속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 속 모든 컷의 길이가 꽤 긴데, 이를 언어로 해석하면 컷 속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이 남는다. 예를 들면 소가 서 있는 컷을 ‘소가 서있다’라는 언어로만 인식하면 긴 컷 안에서 쉽게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동물의 왕국’은 계속해서 인간의 입장으로 해석한 나레이션을 덧붙여 그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지만 〈군다〉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소가 서있다’는 정보를 받아들인 이후에 시간 동안 관객은 소의 서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바라보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인간중심의 해석으로는 그 여백을 다 채울 수 없다. 관객은 새로운 정보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그저 시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의 털을 한 올 한 올 보기도 하고 소의 머리에 붙은 벌레의 이동을 보기도 한다. 영화는 인간의 리듬을 철저히 걷어내고 그들의 리듬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며 관객에게 진정한 공존의 시간을 보내게 한다. 한 번도 기다려보지 않았던 존재를 위해 시간을 들이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군다와 아기 돼지들이 있는 공간에 큰 기계차가 등장한다. 1시간 30분 동안 자연의 소리만 듣던 관객에게 기계의 소음은 굉장히 인위적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 지나가며 보던 기계의 생김새가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부자연스러운 존재를 보자마자 ‘인간’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같은 포유류인 돼지보다, 하나도 닮지 않은 그 기계차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얼마나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일순간에 깨닫게 한다.
기계차는 아기 돼지들을 데려간다. 홀로 남은 군다가 하염없이 공간을 맴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음식으로, 실험으로, 소품으로 그들을 소비한다. 그들의 이름 뒤에 ‘고기’라는 단어를 능숙하게 붙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지점을 찾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당장의 오늘 식사부터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사실 기계보다 돼지와 더 닮았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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