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각 분야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 ‘변화의 순간’에 초점 맞추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과제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이번엔 다를 거야, 체육계를 변화시킬 마지막 기회가 왔다
2019년 1월, 소치 올림픽과 평창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한 세계 최정상의 빙상 종목 선수가 오랜 시간 동안 코치로부터 신체적 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려왔음을 폭로했다. ‘스포츠 미투’의 상징적 사건이자 변화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여론은 체육계의 자성과 혁신을 촉구하며 정부와 체육계를 압박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관심과 지지였다.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응원하고 지지했던, 올림픽에서 선전하며 기쁨과 환희를 선사한 국가대표 선수가 지도자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폭력 및 성폭력이라는 범죄를 지속적으로 겪어왔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 빙상연맹과 같은 종목단체 및 대한체육회가 이를 제대로 관리하기는커녕 은폐해 왔다는 점에 분노했다.
체육계 내 유사한 사건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시민단체들도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다양한 매체와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으며, 국회도 기자회견과 토론회 등을 통해 체육계를 규탄하고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특히 이런 문제가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올 수 있었던 배경으로서 빙상계를 비롯한 체육계의 위계 문화와 성적 지상주의, 파벌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을 요구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까지 수보회의 등 공식 석상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자, 문화체육관광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성폭력과 같은 스포츠 인권침해를 양산하는 체육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과 여론을 반영하여 ‘스포츠 혁신위원회’를 발족했다. 2019년 2월, 문체부 주도로 기획재정부, 교육부, 여성가족부 차관과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체육, 인권, 장애인, 여성, 법조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해온 전문가로 구성된 민·관합동 위원회였다.
이제껏 체육계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고 지적해 온 선수 출신의 체육인이나 스포츠 전문가는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 사람들이 ‘스포츠 혁신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전의 충격적인 체육계 성폭력 및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대응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규모와 무게를 가진 위원회였다.
스포츠계 혁신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나
‘스포츠 혁신위원회’는 1년간 170여 차례의 회의를 통해, 성적과 성과 중심의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을 지향하는 ‘국가 스포츠’ 패러다임을 체육인 중심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이를 토대로 스포츠계의 구조 혁신을 목표로 총 7차에 이르는 권고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체육계는 이러한 권고안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중과 시민단체들의 관심이 잦아들자, 이제는 체육계가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체육계는 ’스포츠 혁신위원회’가 체육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며 비난했고, 체육계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며 문제의 원인을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했다. 심지어 직접 가해자만 처벌을 받았을 뿐, 선수를 보호하지 못한 체육 관련 기관의 어떠한 장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한체육회 및 종목단체를 통한 체육계의 집합적 목소리는 큰 힘이 있었다. ‘체육인’이라는 이름으로 내는 혁신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정부를 침묵하게 했고, 권고안 이행을 멈추게 만들었다.
급기야 현 윤석열 정부는 성적 지상주의와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이전 정부의 ‘스포츠 혁신위원회’ 권고가 ‘현장을 반영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며 방향을 틀었다. 스포츠 국가 경쟁력 증진을 위해 엘리트 체육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체육인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2023년 업무계획을 세웠다. 선수를 도구화하고, 성폭력과 같은 반복적 인권침해를 만드는 구조적 원인인 성적 및 성과 중심의 체육정책을 지향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1차 권고는 체육계 인권침해 피해자의 보호 및 지원 체계 확립과, 정부 및 체육계 인권침해 대응 시스템의 전면 혁신에 대한 것이었다. 실효성 있는 구제조치와 예방시스템을 이행할 것과 독립성, 전문성, 신뢰성을 갖춘 ‘스포츠인권 기구의 설립’을 권고한 것이다. 1차 권고를 위해서 스포츠 성폭력 사례의 구조적 환경 분석, 진단과 기존의 스포츠 분야 인권보호 대책을 분석, 평가하여 스포츠 인권침해 예방 대책과 한계를 진단하고 이를 개선하고 보완할 수 있는 인권침해 대응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행점검에서도, 신설될 스포츠인권 기구가 실효성을 갖도록 권고의 취지를 잘 살려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할 것을 강조하였다.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한 거라고 하지만, 스포츠인권 기구 설립이라는 당위만 있을 뿐 독립성, 전문성, 신뢰성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한 기구였다. 그렇게 조사권도, 직접 징계권도 없는 ‘스포츠윤리센터’란 이름뿐인 스포츠인권 기구만 남았다. 2019년 스포츠 미투를 계기로 새로운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를 위한 혁신을 꿈꿨지만, 말 그대로 꿈이 되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였다.
체육계 시민운동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돌아보았을 때 2019년의 스포츠 미투는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이를 계기로 출범한 ‘스포츠 혁신위원회’ 활동이 스포츠 정책의 역사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스포츠 미투가 남긴 큰 흔적이다.
그 동안 체육계에서 폭력과 성폭력 사건, 비리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부는 체육계 ‘내부’에서 자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방식을 택해 왔다. 체육계의 특수성이 있고, 체육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당사자주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체육계는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보다는, 사건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지 않도록 은폐하려고 했다. 가해자에 대한 꼬리자르기식 수사와, 온정주의가 발휘된 보여주기식 솜방망이 징계를 반복했다.
이런 식의 대응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포츠 혁신위원회를 통해 체육계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체육계를 대상으로 ‘독립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
결과적으로 스포츠 혁신은 실패했다. 오히려 스포츠 혁신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케케묵고 시대에 뒤떨어진 체육계를 바꾸고 고쳐서 새롭게 하고 싶었고, 이번만큼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품었다. 인습이 오래된 만큼 굳고 두터워져 있다는 것을, 그땐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을 벗겨낼 만큼의 역량이 우리에겐 부족했다.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활동은 체육계 시민운동의 표지석이면서, 일종의 가이드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으로, 시작은 창대하였지만 마지막은 초라하고 아쉬웠던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체육계 시민단체의 열악한 현실과 역량의 한계를 절감했다.
스포츠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스포츠 혁신이 필요하다’는 당위의 근거를 탄탄하게 만들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여 공감을 얻고 연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체육계 시민운동이 꾸준히 잘 이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한 토대와 역량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보다 더 많은 인적 자원과 학문, 이론적 토대, 연대 등 네트워크 자원이 필요하다.
나는 운동(스포츠)을 매개로 연대하여 운동(무브먼트)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좌절도 하고 의심도 하지만, 스포츠 혁신의 길을 향해 우리는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필자 소개] 함은주. 하키선수 출신으로 운동(sport)하는 운동가(activist)를 지향한다. 스포츠사회학을 전공했으며, 문화연대 집행위원을 맡아 스포츠 문화정책, 스포츠인권, 성평등 스포츠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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