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초록색 자전거를 타고서 섬으로 출발!
초록색 자전거를 빌렸다. 7개의 다리를 다 건널 생각은 없어서, 전기자전거가 아닌 일반자전거를 5시간 이용하는 저렴한 코스를 선택했다. 지도를 받고 조금 복잡해 보이는 경로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으니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슬금슬금….
바닥에 그려진 파란색 라인만 놓치지 않고 가면 된다고 했다. 자전거를 배에 싣고 10분이면 눈앞에 보이는 섬에 도착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오랜만에 타 본 자전거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대면서, 코앞에 있는 항구까지 가는데 자전거 가게 아저씨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아무튼, 출발이다.
자전거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몇 년 전 타이베이에 놀러갔을 때, 대만 친구 루루와 이바가 꼭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막상 자전거로 해 질 녘 강가를 씽씽 달리자 “행복하다!”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이후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인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 봄 우도에 있는 밤수지맨드라미 책방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빌려준다고 했을 때, 바다를 따라 좋아서 실실거리며 섬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다. 오노미치에서 자전거를 탈 생각도 절대 하지 않았을 거고.(루루 이바 고마워!) 섬과 자전거는 행복의 조합이다.
처음에 낯선 길을 혼자 달리고 있으니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났다. 낯선 자전거와 시골 섬의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하자, 주변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힘껏 나를 환영하는 것만 같다. 주위는 온통 귤밭과 농부들과 익숙한 듯 낯선 나무들로 가득하다. 일본 시골에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내가 탄 자전거가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마을 길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바닷길에 닿았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은 섬의 바다는 아직 사람의 손에 훼손이 덜 되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실 나는 행복에 집착하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자전거를 타고 자연 속을 달리면 언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니까 언제든 멈추어서 맛있는 공기를 맛보거나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조금 외로워진 이유는 이렇게 좋은 순간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다는 게 아쉬워서다. 대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잔뜩 찍었다.
자전거 전국일주 경력의 70대, ‘여기가 젤 좋아’
두 번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다다르기 전에 바다를 마당 삼은 가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작은 오두막이 카페라는 걸 알아차린 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벽한 오전에 나에게 딱 하나 부족한 게 커피였으니 일단 멈출 수밖에. 따뜻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름은 유우 씨, 매일 자전거로 80킬로미터를 달리는 루틴을 가진 70대 할아버지다. 젊은 시절에는 태국에서 일했다면서 그림 같은 글자가 그려진 명함을 보여주며 ‘사와디캅’ 하고 개구쟁이 표정으로 웃었다.
유코와는 알고 보니 동갑이다. 젊은 시절 일하고 여행하고를 반복하며 지냈고, 서핑과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멋진 친구다. 남편의 고향에 돌아와 바다 풍경에 반해 이곳에 집을 지은 게 8년 전, 카페를 시작한 건 4년 전이란다. 집까지 짓고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만, 내년에는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꿈꾸듯 말하는 그녀는 자유로움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여행자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대화가 너무나 편안하고 즐겁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리 하나는 건너봐야 할 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 또 오겠다고 인사하고 다시 자전거를 탔다.
다리까지 가는 좁은 언덕길은 차와 함께 달리던 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한창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과 파란 하늘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오르막길이 그리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교각의 위는 자동차가 달리고, 그 아래 좁은 통로는 걷거나 바퀴가 두 개인 것만 지나다닐 수 있다. 바다 위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신기한 마음은 있었지만 철저한 안전 가림막이 시야를 가리는 건 아쉬웠다. 다음 섬에 도착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잠깐 쉬다가 곧 되돌아왔다. 유코의 카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다. 오르막이었던 길이 시원한 내리막이 되는 것도 자전거의 묘미다.
유코가 반갑게 맞아준다.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해서 허기도 함께 달래보기로 했다. 가방에 있던 오노미치에서 산 빵을 유코 상에게 선물로 내밀었다. 아침에 욕심부려 많이 사 두길 잘했다. 카페 마당에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또래 친구와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꿈을 이야기하는 동안 단골손님들이 하나 둘 찾아와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떠나갔다. 유코의 다정함이 이곳을 사랑방으로 만드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던 70대 할아버지가 나처럼 우연히 들러 차를 마시고 길을 물었다. 내가 오늘 가길 포기한 길을 반대편에서부터 달려온 참이었다. 자신은 도쿄 근방에서 왔는데 일본 전국을 자전거로 자주 다녀 보았지만 ‘여기가 젤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 동네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생기도 단골 카페도 생긴 곳이니까 기뻐해도 괜찮겠지. 다음에 언젠가 다시 찾아왔을 때 유코가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생각하면서, 혹시 어디론가 떠났다고 해도 우연히 만난 오늘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노미치를 향해 되돌아 나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단골 가게와 친구가 생긴 예쁜 작은 섬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겠지.
‘DJ 아니고 CJ’ 카레 자키의 재밌는 작당
신나는 라이딩을 마치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나니 갑자기 무릎이 욱신거리고 엉덩이가 아팠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화끈거리고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한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숙소 앞 벤치에 멍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위층에서 커피 로스팅하는 고소한 향기가 날아와 코에 닿았다.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듯 몸이 이완된다.
로스팅을 마친 게스트하우스 주인 히로가 나를 발견하고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한 뒤 커피 한 잔을 내려 준다. 천국이 따로 없다. 멈추지 않는 여행자의 행운에 조금 겁이 난다. 설마 내 남은 삶의 모든 운을 여기서 다 몰아 써 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일단은 매 순간을 만끽하겠어! 지금 쑤시는 무릎에 닿는 햇살과 바람, 코와 입을 채우는 향긋한 커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언어가 어느새 귀에 닿아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지는 신비까지 다 누려줄 테다.
긴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누가 봐도 여행자 한 명이 히로에게 인사를 하며 나타났다. 히로의 커피를 받아 든 고우는 내 옆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가타(新潟)에서부터 자동차에 묵으며 목적 없이 여행 중이고, 나처럼 어제 오노미치에 도착했다고 했다. 단 한 권 만들어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진 포트폴리오를 꺼내 보여준다. 평생 여행만 했을 것 같은 예술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실은 멀리 떠나는 여행도, 자신의 사진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도 모두 처음 해 보는 시도라고 했다. 함께 살던 파트너가 잠시 독일로 떠나고 찾아온 깊은 상실감이 모험의 동력이 되었다.
첫 장을 펼치면 ‘여행자 사진’이라는 낯선 단어의 한자가 나왔다. 단어만 봐서는, 사람이 여행하는 건지 사진이 여행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호했는데,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르는 특이한 단어라고 소개했다. 흑백의 순간이 잘 담긴 사진들이 인상적이다 싶으면 갑자기 나타나는 컬러 사진이 눈을 끈다. 번쩍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나중에는 사람들이 등장하다가 특이한 빛깔을 담은 자기 집 소파 사진에서 끝이 났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진 예술만이 담을 수 있는 특권, 시간이 포착되어 의미를 만드는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연금술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진집을 사이에 두고 여행과 인생과 예술과 꿈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맛있는 대화가 된다. 이제 머릿속 생각도 일본어로 흐를 정도로 편해졌다.
마침 도쿄에서 고우의 친구가 오노미치에 여행 와서 저녁에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단다. 나에게도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해서 함께 상점가를 걸어 ‘마타타비’(またたび)라는 라면 집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온 미용사이자 카레 요리를 하는 CJ(DJ에서 디스크를 카레로 바꾼 ‘카레 쟈키’의 약자)를 거기서 만났다. 고우와 CJ는 카레 가게를 하던 또 다른 친구를 통해 단 한 번 만났다고 한다. 언젠가 CJ가 도쿄에서 가게를 접으며 ‘24시간 카레 파티’를 열어 친구들을 마구 초대했단다. 오호라, 소중한 시간을 마무리하는 엄청난 기획에 감탄했다. 이후 SNS로 인연이 이어지다가 우연히 서로가 오노미치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오늘 마타타비에 모였다.
지친 여행자들에게 마타타비(캣닢)를!
6명이 어깨를 마주해야 겨우 앉을 수 있는 카운터 자리밖에 없는 작은 라면 가게 마타타비는 심야 식당처럼 마스터 타카 씨가 중앙에서 요리를 하고 술을 내어 주는 곳이다. 나란히 앉아서 각자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 보니 어제 홈파티에서 만난 낸시도 오고, 혼자 술 마시러 온 괴짜 청년 키노코도 왔다. 우연히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수다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마스터 타카 씨의 적절한 질문과 리액션 덕분이다. 맛있는 라면과 안주를 만드는 동시에 펼쳐지는 현란한 진행이라니! 사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그 상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일기 쓰면서 마스터의 마법에 무릎을 쳤다.
도쿄에서 이주해 오노미치에 정착한 타카 씨는 가게 이름을 ‘마타타비’로 지었다. 단순히 직역해서 ‘다시 여행’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취향 저격이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마타타비가 일본에서는 캣닢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향정신성 성분을 포함하는 허브의 일종인 셈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지친 여행자에게 그 잎을 먹이면 계속해서 여행을 이어 갈 힘을 얻었다고 ‘다시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알고 보니 자신이 만든 장소와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건네고 싶은 타카 씨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던 거다.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맞은편 섬에 숙소가 있어 마지막 배를 타야 하는 CJ를 배웅하러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밖에 나와 있는 걸 보고, 타카 씨는 우리를 사진에 담았다. 나는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 몰래 남겨 두었다. 멀어지는 CJ의 뒷모습을 보다가 타카 씨가 뛰어가서는 다가오는 일요일 오후에 마을에 파티가 있는데 거기에서 카레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CJ에게 고우는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전직 셰프 할아버지(물론 우연히 만난 사람)의 집에서 카레의 밑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노미치에서는 아이디어가 현실에 펼쳐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일요일까지 오노미치에 머물지 못해 카레 맛을 못 본 게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았다. 오노미치에서 예정된 마지막 밤은 그렇게 마법처럼 멈춘 듯 흐르고 있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이 기사 좋아요 1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문화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