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서독)과 손님노동자(동독)로 온 베트남 이주민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⑤ ‘모범 이민자’로 불려온 베트남계

손어진 | 기사입력 2023/11/12 [10:05]

보트피플(서독)과 손님노동자(동독)로 온 베트남 이주민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⑤ ‘모범 이민자’로 불려온 베트남계

손어진 | 입력 : 2023/11/12 [10:05]

베를린에 살 때 꽃을 자주 샀다. 3유로면 튤립 한 다발로 자취집 분위기를 환하게 할 수 있고, 집으로 초대한 친구에게 건네기에도 좋은 선물이었다. 베를린 지하철 역사의 꽃집 운영은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이 하고 있다. 묻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하고, 손님들이 고른 꽃을 보이지 않게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준다. 한국 꽃집에서 포장을 해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투박하다. 가끔 내게 자신들의 모어로 이야기를 했다가 내가 못 알아들으면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한국은 참 좋은 나라다.”라고 말한다. 독일인들이 내 독일어를 듣는 순간 혹은 듣기도 전에 내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괜스레 기분 나쁘고 귀찮은데, 꽃집에서 물으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나도 당신처럼 고향을 두고 이곳에 살고 있어요.’

 

‘적은 월급에도 열심히 일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베를린 생활의 대부분을 서베를린 지역, 그 중에서도 2차 세계대전 후 영국군의 통치가 있었던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구에서 보냈지만, 1년 넘게 동베를린 지역이었던 리히텐베르크(Lichitenberg)구에 산 적도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통일이 되기 전까지 과거 소련의 영향에 있었던 지역답게, 여전히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노인들과 러시아 성을 가진 자녀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유독 나와 같은 아시아인들이 많이 보였다.

 

동베를린 지역에는 동수안 센터(Dong Xuan Center, 베트남 도매시장)를 중심으로 옷가게, 네일샵, 식당, 꽃집 등을 운영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산다. 리히텐베르크 동네 지하철 역 입구마다 서서 담배를 팔던 베트남 남자들이 있었다. 저걸 누가 살까 했는데, 말없이 돈과 담배를 교환하는 백인 남자들이 종종 보였다. 독일인 동료 중 하나는 꼭 동수안 센터의 베트남 이발사에게 머리를 잘랐다. 별 다른 대화 없이 싸고 빨리 이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수십 년 이용하고 있단다. 먹을 것이라곤 소시지와 감자가 전부인 것 같은 독일인들에게 분넴, 분짜, 쌀국수 등 다양한 식재료와 조리 방식의 음식으로 독일인들의 배를 채우며, 이렇게 베를린에만 베트남에 뿌리를 둔 4만여 명이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독일 전역에는 18만5천 명의 베트남인과 베트남계 독일인이 거주함, 2020년 기준)

 

▲ 섬유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베트남 여성 노동자들, 1988년 브란덴부르크 (출처: 하인리히 뵐 재단

 

독일 사람들에게 아시아인들은 오랫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집단’으로 서독의 터키나 이탈리아 이주민 집단보다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조용하고 성실하게 독일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작은 아시아계 이주민은 무해하다고 느껴졌을까. 특히 베트남인들은 “부지런하고, 학교에서 성적이 좋고, 적은 월급에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비춰졌다. 이들은 독일사회에서 오랫동안 종종 ‘모범 이민자’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독일 정부가 자신들을 책임지지 않으려 할 때 노동권과 거주권을 위해 투쟁했고, 아시아 이민자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에 저항했으며, 이곳에 남아 본국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기도 하고, 자녀를 낳고 키웠으며, 독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같은 사회주의권 동독으로 온 베트남 이주노동자 7만여 명

통일 후 강제송환…남은 이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

 

베트남인들의 독일 이주는 1950년대에 시작했다. 당시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과 북베트남은 ‘연대는 승리를 돕는다’는 기치 아래 우호조약을 맺고, 북베트남 학생들과 견습생들이 동독 학교에 초청이 되어 몇 년 동안 유학을 한 뒤 돌아갔다. 1950년대에만 300여 명이 동독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갔고,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약 4만2천 명이 왔었다.

 

1963년부터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독 정부는 서독 정부와 마찬가지로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근로계약을 체결해 손님노동자를 받았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자 약 310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동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표적인 한자도시(필자주: 13세기 초~17세기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연합해 무역 공동체를 이룬 것을 한자동맹이라고 함)였던 로스톡(Rostock)과 동독의 수도가 있던 동베를린 지역에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 손님노동자들을 맞았다.

 

1980년에 동독과 베트남 간의 노동협정이 체결되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는 주로 동독에 숙련노동자로 일할 자격을 갖출 수 있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왔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직업훈련을 받지 않고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왔다. 이들은 집단 거주시설에 생활하면서 특별한 훈련 없이 청바지 제조 공장을 중심으로 값싼 노동력을 대신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 지역에 거주하던 베트남 노동자들은 약 7만 명에 달했다.

 

동독 계약직으로 파견된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정부의 관리 하에 있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자국 노동자들이 독일인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금지했다. 정해진 숙소에만 살게 했으며, 술집에 가는 것도,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도, 데이트를 하는 것도 금지했다. 당시 동독 지역에서 유행하던 나체해변(Frei-Körper-Kultur, FKK)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만약 파견된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임신했다면, 임신중절을 하거나 계약을 파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이들은 동독사회에서 자신들끼리 조용하고 성실한 이주노동자로 살아갔다. 하지만 독일 통일이 되고 나자 상황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통일 직후 동독 지역의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문을 닫고 파산하면서, 많은 실업자들이 생겼다. 동독의 이주노동자들도 타격을 받았다. 더이상 국가간 노동 계약을 유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상당수의 고용 계약이 종료되었다. 1990년 통일협정에 따르면, 동독 계약직 노동자는 원래 체결한 계약기간 동안 근무할 수 있다고 했지만, 파산 위기의 기업들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많은 기업들이 기숙사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주노동자들 집단 거주지를 떠나야 했고 홈리스가 되었다. 독일 연방정부는 귀국하는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퇴직금 명목의 3천 마르크 보상비와 무료 비행기편을 제공했다. 사실상 강제 송환과 다름 없었다.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에 따르면, 당시 약 4만5천명에서 5만명 사이의 베트남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 독일에 남아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베트남 노동자들, 1995년 에어푸르트. 라이즈트롬멜 협회(Reistrommel e.V)에서 2018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아 제작한 책자 「25 Jahre Reistrommel e.V. 」에 실린 사진이다.

 

일부 베트남 노동자들은 유럽에 머물기 위해 체코와 폴란드 등으로 이주했다. 독일에 계속 머물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은 당시 독일 정부와 어떻게 협상해야 할지 몰랐다. 실업수당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들은 수년 동안 법 바깥에서 살았다. 어떤 이는 1992년까지라고 찍힌 노동 계약서만 들고 살았다. 당시 취업시장의 어려운 상황과 독일어 실력의 부족으로, 회사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다수의 베트남 전직 계약노동자들은 식료품점, 스낵바, 꽃집 등을 시작했고, 가게를 빌릴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점상을 했다. 어떤 이들은 담배 밀수입으로 빠지기도 했다.

 

1993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라이즈트롬멜 협회’(Reistrommel e.V)는 베트남 노동자 강제 추방 과정에서 일어났던 폭력, 인종차별 등에 항의하며 베트남 계약노동자의 독일 잔류와, 본국에 있는 가족들의 독일 이주를 위해 일했다. 일부 베트남인들은 협회에서 활동하며 합법적 거주권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1997년, 독일 정부가 이민자 정책에 변화를 주면서 남겨진 베트남인들은 영주권을 받고 살게 됐다. 거주권 없이 몇 년간 독일에 머물러왔던 사람들도 처벌 없이 독일에 거주할 수 있게 됐고, 가족을 데려올 수 있게 됐으며, 어떤 이들은 그제서야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 중에는 훗날 동수안 센터를 설립한 응우옌 반 히엔(Nguyễn Văn Hiền)도 있었다. 그는 1987년 동독으로 손님노동자로 왔고, 통일 이후 실업자가 됐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베를린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폴란드 한 도매회사로부터 새 옷을 구입해 베를린 사람들에게 팔았다. 2003년 그는 한 독일 민간 건설업체에 돈을 빌려 현재의 부지를 구입했고, 2005년 동수안 센터를 설립했다. 독일 최대 베트남 도매시장인 동수안 센터에는 약 4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상점에서 2천여 명이 일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의 결과, 서독으로 온 베트남 ‘보트피플’

적십자선 보내 태평양에서 1만 명 넘는 베트남 난민 구출

 

서독에는 베트남 난민이 있었다. 1978년 서독으로 들어온 베트남인들은 보트피플(Boatpeople; 과적된 보트를 통해 탈출하는 난민을 가리키는 말로, 베트남전쟁 이후 발생한 난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가 지금은 보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모든 난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이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종결된 후, 남베트남의 많은 사람들이 추방을 당하거나 탈출해 전 세계로 흩어졌다. 1970년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베트남을 떠난 난민들은 최대 40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며, 육로와 해로로 탈출 중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여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열악한 난민선과 보트피플에 관한 내용이 독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당시 서독에서도 이들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독일과 유럽연합의 대표 정치인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의 아버지이자, 당시 니더작센 주 총리였던 에른스트 알브레히트(Ernst Albrecht)는 1978년 베트남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 독일 시민사회에서 구입해 베트남 주변 해역으로 보낸 '캅 아나무르(Cap Anamur)' 난민선.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캅 아나무르’호는 태평양에서 1만 명 넘는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출했다. 출처: 베트남 아카이브(vietnamese-archive)

 

1978년 12월 3일, 163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들은 유럽 밖에서 독일로 이주한 최초의 난민이었다. 첫 번째 베트남 난민이 니더작센 주의 임시 난민숙소에 수용된 후, 서독 정부는 베트남 난민을 데려오기 위해 적십자선을 설립했다. 동시에 수많은 시민들도 보트피플을 위한 시민사회 차원의 활동에 참여했고, 유명인사들도 앞장섰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을 비롯한 작가, 언론인, 시민들이 설립한 ‘베트남을 위한 보트 협회’(Ein Boot für Vietnam e.V.)는 선박을 구입해 베트남 주변 해역으로 보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캅 아나무르’(Cap Anamur)호는 태평양에서 1만 명 넘는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출했다.

 

이렇게 정부 및 민간단체들의 구조활동으로 독일에 온 보트피플을 위해, 1980년대 말까지 서독 정부는 구조활동, 어학연수와 취업알선, 숙소 마련으로 약 5,200만 마르크 이상을 사용했다. 이후 1990년대 독일에 있는 베트남 보트피플은 고국에 있는 가족들 데려올 수 있었고, 이 수는 4만6천여 명에 달했다.

 

역사학자인 요헴 올트머(Jochen Oltmer)는 “당시 보트피플로 독일에 들어온 사람들은 최대 5만 명에 이를 수 있으며, 오늘날 이들은 독일 사회에 잘 정착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베트남 출신의 독일 시민은 오랫동안 성공적인 통합의 모델로 여겨져 왔으며, 독일사회의 난민에 대한 열린 태도는 베트남 난민들에게 큰 동기를 부여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 난민들의 사회통합을 연구해온 올라프 보이쉴링(Olaf Beuchling) 교수는 “배움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유교문화를 간직한 베트남 가족은 독일에 와서도 자녀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자손의 성공이 궁극적으로 부모의 지위 향상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및 문화가 이들의 독일 내 경제적 성공과 번영을 이루는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2008년 당시 이주민들의 자녀 중에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다니는 비율이 20% 미만이었던 것에 비해, 베트남 자녀들은 60%에 달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이들은 종종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고, 독일 사회에서 의사, 엔지니어, 과학자,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역할로 자리매김한 사례가 많다.

 

외국인 혐오증, 베트남 노동자를 향한 폭력

1992년 로스톡-리힌텐하겐 해바라기 하우스 방화 사건

 

독일 사회의 열린 태도와 성공적인 통합에 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있는 베트남인들이 종종 인종차별과 혐오,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동독에 거주하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동독인들에게 ‘피지’(Fidschis; 동독 지역에서 아시아인들은 모두 피지인처럼 생겼다는 편견이 입혀지면서 모욕적인 말로 사용됨)라고 불리며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높이 샀던 동독인들은 통일 전후 경제상황이 안좋아지자 이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는 사람들로 여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동구권의 난민들이 증가했으며, 난민들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거라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독일 정부가 난민을 수용하면 할수록 외국인 혐오증을 기반으로 한 공격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1991년 여름부터 작센주 호이에르스베르다(Hoyerswerda) 지역에 있던 이주노동자 기숙사와 난민숙소가 여러 차례 젊은 네오나치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지역에는 베트남과 모잠비크 노동자 120여 명이 살고 있던 기숙사와 베트남, 루마니아, 가나 등에서 온 망명자들을 수용하던 난민숙소가 있었다. 9월, 수십 명의 네오나치들이 이들이 사는 숙소 앞에 모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떠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이를 구경하는 5백여 명의 사람들도 폭력에 가담하거나 혐오세력을 응원했다. 경찰은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기숙사와 난민숙소에 살던 사람들을 프랑크푸르트나 베를린 등으로 긴급 대피시켰다.

 

▲ 극우주의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에 탄, 베트남 노동자 12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해바라기 하우스’, 1992년 로스톡-리히텐하겐. 영상 출처: 하인리히 뵐 재단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혐오는 1992년 8월 메클렌부르크 포어포메른 주의 로스톡-리히텐하겐(Rostock-Lichtenhagen)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네오나치들의 타깃은 망명신청자 중앙접수센터가 있는 해바라기 하우스였다. 외벽에 해바라기 모자이크 장식이 있어서 ‘해바라기 하우스’라고 불렸는데, 300명 이상의 망명신청자들과 120여 명의 베트남 노동자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네오나치들의 공격으로 건물이 불타는 장면이 전국으로 방영됐다. 건물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베트남 노동자 가족들과 망명국 직원, ZDF 텔레비전 팀원들이 있었다. 약 500여 명의 네오나치들이 해바라기 하우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3천 명 가까이 되는 군중들이 이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들은 경찰과 소방대 출동을 방해하며 “독일인을 위한 독일! 외국인들은 나가라!” 외쳤고, 불꽃이 번질 때마다 환호했다. 이 중에는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재는 진압되었고, 기적적으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과 연방 국경수비대까지 투입되어 폭동이 진압되었고, 베트남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인근 체육관과 학교 등으로 옮겨져 생활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노동 계약이 끝나는 대로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다른 유럽 국가 또는 독일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폭동에 연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독일 전역에서 네오나치들은 베트남인, 루마니아인 할 것 없이 이주노동자들과 망명신청자들의 거주시설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폭행을 당해 죽은 사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민자 난민을 향한 혐오와 폭력은 이를 반대하는 더 많은 독일인들을 결집시켰다는 점이다. 1991년 9월 호이에르스베르다에서 발생한 폭동 직후, 약 4천 명의 독일 시민들이 모여 전체주의, 인종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로스톡-리히텐하겐 폭력 시위가 있었던 1992년에도 그 해 말 독일 전역에서 3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외국인 혐오와 극우들의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2002년 또다시 발생한 원인미상의 해바라기집 방화 사건, 2012년 로스톡 시청사에 1992년의 폭동을 반성하는 기념패가 훼손됐을 때도 많은 이들이 모여 외국인을 향한 끝나지 않은 혐오와 폭력에 항의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8월이면 로스톡-리히덴하겐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또 드러난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고 영리한 아시아인’ 진부한 편견을 깨라

 

독일인들 중에 1992년 로스톡-리히덴하겐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것 때문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1992년 로스톡-리히덴하겐 사건을 언급하는 언론도 일부 있었다. 보도를 보고 새삼 새로운 일인 것처럼 놀라는 독일 사람들이 많았고, 어렴풋이 1992년 동독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팬데믹 동안 일어난 일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고,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팟케스트 ‘라이스 앤 샤인’(Rice and Shine) 공동 진행자이자, 베트남계 이민자의 자녀인 바네사 부(Vanessa Vu)와 민 투 짠(Minh Thu Tran)  출처: 라이스 앤 샤인 팟캐스트 페이스북 페이지


다행인 것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계속 얘기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베트남계 이민자 자녀인 민 투 짠(Minh Thu Tran)과 바네사 부(Vanessa Vu)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팟캐스트 ‘라이스 앤 샤인’(Rice and Shine)을 시작했다. 베트남 이민자 가족의 일상, 노동, 사업, 음식, 음악, 이민 1세대인 부모와 이곳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2~3세대 간의 갈등, 일상적인 인종차별, 문화적 전유(도용), 독일에서 겪는 문화적 갈등, 정체성 고민 등은 라이스 앤 샤인의 소재가 된다. 보트피플 또는 손님노동자로 온 부모의 이야기, 1980년 8월 네오나치에게 살해당한 두 명의 베트남 청년 응우옌 넉 짜우(Nguyễn Ngọc Châu)와 도 안 란(Do Anh Lân)의 이야기, 1992년 발생한 로스톡-리히텐하겐 폭동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종종 베트남에 뿌리를 둔 사람이 게스트로 초청되기도 한다. 개중에는 독일인 부모에 의해 입양이 되어 독일에서 자라, 이후 자유주의 정당인 자민당(FDP) 의장이자 전 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필립 뢰슬러(Philipp Rösler)처럼 ‘독일에서 한번도 인종차별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부모가 동독 시절 손님노동자로 온 베트남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인처럼 자랐지만 끊임없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는 독일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2~3세들도 만날 수 있다. 보수적인 베트남 부모에게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베트남으로 다시 이주했다가 독일로 또 돌아온 유투버,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아시아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도 초대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아시아 남성을 이해하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가족 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코로나 시기 베트남인을 비롯해 아시아인들이 겪은 폭력, 아시아인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에 대해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느끼는 지까지 솔직하게 나눈다. 라이스 앤 샤인에 나오는 독일 내 베트남 이주민들은 시끄럽고 크게 웃으며 비판하며 분노한다. 이들은 ‘독일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조용해 이민자들의 모델이 된다’, ‘영원히 열심히 일하는 영리한 아시아인’이라는 진부한 편견을 깨고 있다.

 

[필자소개] 손어진. 한국과 독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정치/사회 부문 기고, 리서치, 번역, 라디오 방송 리포팅을 하고 있으며, '지속 가능한 삶'이란 키워드로 독일에 사는 한국 녹색당원들과 만든 〈움벨트〉(umweltkorea.com)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다」에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 독일 녹색당 이야기”, “베를린에서 온 기후 편지” 등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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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미 2023/11/21 [10:47] 수정 | 삭제
  • 나도 외국에서 베트남 사람 만나면 기분이 왠지 편안해지던데... 베트남 난민들이 그렇게 많았는 줄 몰랐네요. 이주 역사가 쉽지 않았을텐데, 한국도 전쟁을 겪어서 그런가 왠지 동지애가 느껴집니다.
  • 2023/11/14 [15:53] 수정 | 삭제
  • 베트남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같은 아시안이라 그런가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독일이 왜 이민자의 국가라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고용 기한을 엄청 짧게 제한하고 있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한국도 이주민들이 많지만 그만큼 포용성이 있는 사회가 되려면 먼 것 같아요.
  • ㅇㅇ 2023/11/14 [11:26] 수정 | 삭제
  • 우와! 베를린에 동수안센터를 세운 베트남 이주노동자 출신의 사업가 이야기는 너무 멋지네요. 전설 같다. 이 연재 열심히 읽고 있는데..너무 좋아요.
  • lord8green 2023/11/14 [00:53] 수정 | 삭제
  • 두 번째 사진 피켓 문구는 "8년 동안 내가 무엇을 위해 세금을 낸 것인가?"라는 뜻으로, 강제출국에 반대하는 베트남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 사진입니다:)
  • 당나귀 2023/11/13 [19:24] 수정 | 삭제
  • 독일의 아시아인 중 많은 분들이 베트남 사람인데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민 2,3세가 많군요!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크게 느껴져서인지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져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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