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열고 “우리는 할 수 있다”…독일은 지금‘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⑧ 기본법 16조 망명권과 난민의 권리 (하)기본법 16조(망명의 권리) 수정에 초당적 합의, 단서 조항 추가
극우주의자들에 의한 이주민 혐오와 테러가 극단으로 치달은 1992년, 정치권은 난민과 외국인을 불법적 집단과 합법적 집단으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불법 난민과 외국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며 여론을 달래려 했다. 무자격 난민과 외국인에 대한 ‘강제 추방’은 당시 정치인들의 유행어였다. 그리고 결국 12월, 집권당인 기민/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은 제1야당인 사민당과 의회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 기본법 수정에 합의한다. 독일의 핵심 정당이 모두 참여한 초당적 합의였다.
1993년 5월 26일 의회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국 512개의 찬성표와 132개의 반대표로 기본법 16조 a에는 단서 조항에 해당하는 2항이 추가되었다. 1992년 당연히 모든 시민이 난민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인 중 일부는 자신의 돈을 부담하며 직접 발칸 난민을 다른 나라에서 독일로 데리고 오기도 했고, 난민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다. 1992년 초반 독일 언론에는 난민에 대한 독일인들의 이런 연대 의식이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는 결국 난민에게 더 높은 벽을 세우기를 택했다. 연대보다는 불안과 공포의 조장이 더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난민 신청자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메르켈 “독일은 강한 국가입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오래가지 않은 환영문화, 구 동독 지역 외국인 혐오 시위 빈번
2000년대 초반 10만 명 이하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던 독일의 망명 신청자 숫자는 2014년부터 다시 급증했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을 뿐 아니라, 발칸의 코소보와 알바니아에서도 난민이 유입되었다. 2014년 독일에서 망명을 신청한 난민의 숫자는 약 30만 명에 달했다. 1993년 이후 최대였다. 난민 숫자가 증가하자 구 동독 지역에서는 ‘페기다(Pegida)’라는 난민 반대 극우 그룹이 만들어졌다. ‘서양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이라는 뜻의 독일어를 줄인 이름이었다.
독일의 지자체들은 늘어난 난민 숫자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5년 5월, 독일의 내무부 장관은 2015년 독일로 유입되는 난민 숫자가 45만 명이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상황은 1992년과 같지 않았다. 독일은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2015년 8월 메르켈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난민의 권리를 언급하며, 폭력으로 난민을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법치 국가의 공권력으로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 기자회견에서 메르켈은 2015년 세계 언론을 장식하게 될 문장을 이야기한다. “독일은 강한 국가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해낼 수 있습니다.”
기자회견 며칠 후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9월 4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머물던 난민 일부가 고속도로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1990년 더블린 협약을 통해 1997년부터 발휘된 유럽의 난민법은 난민이 처음 도착한 유럽 국가에서 난민 신청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었지만, 헝가리는 난민 신청을 제대로 받지 않아 난민들은 숙소 없이 거리에서 지내야 했다. 이들이 이동하자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오스트리아 총리인 베르너 파이만에게 전화를 걸어 난민들의 행렬을 멈추길 원하는지 물었다. 결정의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넘긴 것이다.
헝가리가 강제로 난민 행렬을 멈출 경우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오스트리아 총리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난민의 상당수를 독일이 수용하기를 부탁한 것이다. 상황을 납득한 메르켈은 내각의 책임자들에게 동의를 얻기 위해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너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연락이 모두에게 닿지 않았다. 상황이 긴급했기 때문에 메르켈은 결국 일부의 동의만을 얻은 상태에서 오스트리아로 들어오는 난민을 독일로 데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환영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5년에는 약 45만 명의 난민이, 2016년에는 약 75만 명의 난민이 독일에서 망명 신청을 했다. 난민 숫자가 증가하자 극우 세력의 목소리는 커졌다. 구 동독 지역에서는 외국인 혐오 시위가 빈번하게 벌어졌고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당은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했다. 기성 정당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AfD의 지지율이 올라가자, 기민당과 함께 정권을 이끌던 기사당은 메르켈의 결정을 비판하며 난민 숫자를 제한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비록 1990년대 초만큼 폭력의 강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구 동독 지역에서 극우의 목소리가 커지자, 언론은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1992년과 다르지 않은 결과였다. 외국인과 접촉이 적고 실업률이 높으며, 통일 이후 더 불안정해진 삶의 조건과 황폐해진 동독의 모습 속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원인이었다. 25년이 지났지만 문제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전체로 본다면 1992년과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았다. 극우에 반대하는 목소리의 힘은 그때보다 더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2023년 다시 ‘불법난민’과 ‘강제송환’을 말하기 시작한 독일 정치
2023년 10월, 독일의 헤센주와 바이에른주에서 있었던 주의회 선거에 관한 글을 쓰다가, 난민을 환영했던 독일 사회의 목소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극우정당 AfD는 헤센과 바이에른에서 각각 18.4%와 14.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2위와 3위에 올랐다. 지난 선거보다 각각 5.3%포인트, 4.4%포인트 더 높은 성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민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선거 전체를 지배했다. 선거를 전후로 AfD만이 아니라 난민 정책에 대한 독일의 대다수 정당의 목소리가 조금씩은 더 보수적으로 변해 있었다.
AfD는 2017년 구 동독 지역의 인기를 기반으로 12.6%의 득표를 받으며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3위의 성적이었다. AfD가 본격적으로 독일의 기성 정치에 위협이 되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또한 2019년 구 동독 지역의 3개 주에서 벌어진 주의회 선거에서 모두 20%를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구 서독 지역에서는 여전히 AfD의 지지에 대한 심리적 저지선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AfD가 독일의 정치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2018년에도 헤센주와 바이에른주 주의회 선거 결과를 분석해 기록했다. 당시 AfD는 두 개 주에서 처음으로 주의회에 진출했다. 하지만 보수 정당들이 AfD의 성공에 흔들리며 난민 정책에 대한 보수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난민의 권리에 대해 가장 일관적으로 열린 반응을 보였던 녹색당은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녹색당은 헤센과 바이에른에서 각각 9% 가까운 지지율 상승을 기록하며 19.8%와 17.6%의 성적으로 2위에 올랐다.
2020년 구 서독 지역에서 있었던 주의회 선거에서 AfD는 계속해서 10% 이하의 성적을 거두며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반면 녹색당은 점점 높은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2021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AfD는 약 2% 하락한 지지율로 5위를 기록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 또한 큰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하지만 사민당과 녹색당은 선전했고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연정이 만들어졌다. 비록 우파 성향이 강한 자민당이 함께하는 연방 정부였지만, 난민에게 가장 호의적인 녹색당도 함께하는 정부였다. 그리고 2021년과 2022년 주의회 선거들에서도 AfD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10월의 선거는 달랐다. 헤센주와 바이에른주의 AfD는 난민에 대한 빠른 송환을 요구했으며, 필수적인 전문인력도 독일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이웃나라 출신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분리해서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치인 중에서는 불법 극우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AfD는 독일의 정보기관인 헌법수호청에 의해 극우 조직 혐의가 있는 것으로 분류되었으며, 일부 지역 정당은 확실한 극우 조직으로 분류되었다. (헌법수호청은 독일 기본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인간 존엄성, 법치주의 등의 가치에 위배되는 극우나 극좌 조직을 그 정도에 따라 검토, 혐의, 명백한 극우 또는 극좌 조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혐의가 있다고 분류되면 정보기관은 해당 조직을 공식적으로 감시하고 정보를 조사할 수 있으며, 확실한 극우나 극좌 조직으로 분류된 경우 사법 절차를 통해 조직이 해산되거나, 조직 구성원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헌법수호청은 인종주의를 주장하거나, 과거 나치 같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집단, 혹은 법 질서를 파괴하는 테러 행위를 도모하는 조직에 대해 해당 분류를 실시한다.) AfD가 헌법수호청에 의해 극우 조직으로 판단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헌법에 위배되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AfD에 투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론조사기관 인프라테스 디맵(infratest dimap)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헤센주에서는 이민정책이 경제, 기후에 이에 세 번째로 투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의제로 나타났다. 바이에른에서는 이민정책이 두 번째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인프라테스트 디맵의 선거 직전 조서에 따르면 바이에른주에서는 전체 응답자의 48%가, 헤센주에서는 전체 응답자의 42%가 AfD의 강력한 이민 제한 정책에 찬성을 표시했다.
선거 직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에 머물 권리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빠른 강제송환을 강조했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송환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주민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을 경우 국가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다고까지 발언했다. 숄츠의 발언은 1992년 정치인들의 유행을 떠올리게 한다. 불법 난민과 망명의 권리가 있는 난민을 구분하고, 불법 난민의 강제송환을 강조한 것 말이다.
결국 11월 독일 연방정부와 주 정부들은 불법 난민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망명 신청을 신속히 진행해 빠른 강제송환을 하고, 난민 신청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줄이는 합의안을 마련했다. 목표는 난민이 독일로 들어올 수 있는 긍정적 유인 요인을 줄이는 것이었다.
난민을 대하는 언론의 보도, 국가의 정책, 사회의 태도 차이
올 여름 나는 수영장에서 가족과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10대 중반의 여자아이 한 명이 계속해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한참 그렇게 맴돌던 아이는 내 아이의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우크라이나에서 온 아이였다. 독일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벌써 조금이나마 독일어를 배운 상태였고, 그 아이의 엄마는 지금 수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잠시 아직 4살이 되지 않은 나의 아이와 독일어로 대화도 하고 놀기도 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독일어가 많지 않았다.
그 아이가 우리 가족에게 굳이 말을 걸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영장에서 작은 아이와 함께 있는 가족이라 위협적이지 않게 보였을까. 독일인에게 독일어로 말을 거는 것보다 같은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 그 아이가 짠하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올 10월까지 독일로 들어온 우크라이나 난민의 숫자는 120만 명에 달했다. 난민의 숫자가 최고치에 달했던 2015년과 2016년 전체 난민 숫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난민에 관해서는 당시와 같은 사회적 논란이나 반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난민은 유럽연합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특별 지위를 부여 받았다. 우크라이나 난민은 별도의 심사 없이 신속하게 거주와 노동 허가를 받았으며, 어학 코스를 제공받았다. 행정 당국은 난민 심사를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지자체도 우크라이나 난민을 별도의 시설에 수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지원을 통해 빠르게 집을 구했고 독일인의 일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우크라이나 난민이 유럽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70% 이상이 여성인 것 또한 사회적 불만과 논란을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독일 언론에 러시아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긍정적인 모습이 주로 보도된 것도 이들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인식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언론 보도 태도, 인종, 종교, 문화에 따라서 난민을 대하는 국가의 정책과 사회적 태도에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의 이웃에 갑자기 나타난 우크라이나 난민에게는 잘못이 없다. 어쩌면 우크라이나인의 예는 독일 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수영장에서 단 한 번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이가 독일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2015년과 2016년 그렇게 많은 난민이 독일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 삶에서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본다. 난민만을 위한 숙소, 지난한 망명신청의 과정, 낮은 망명 통과 비율, 그리고 불법 난민의 강제송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많던 난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를 생각해 본다.
[필자소개] 김인건. 대학 졸업 후 잠시 철학 교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평등’ 개념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지금은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언론사 해외통신원,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독일의 역사적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모습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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