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녀의 노트를 태우지 않기로 했다

『고야마씨 노트』로부터② 고야마씨가 살아가려고 했던 것

이치무라 미사코 | 기사입력 2023/12/09 [16:58]

우리는 그녀의 노트를 태우지 않기로 했다

『고야마씨 노트』로부터② 고야마씨가 살아가려고 했던 것

이치무라 미사코 | 입력 : 2023/12/09 [16:58]

[기획의 말] 고야마씨는 도쿄의 한 공원 깊숙이, 비밀처럼 펼쳐진 텐트 마을에 살았다. 그녀가 써 왔던 노트에는 홈리스 여성으로서 끼니가 걱정되고 추위나 더위로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지키듯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야마씨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죽은 뒤, 그 ‘쓸모 없어 빛나는 세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방대한 양의 노트를 컴퓨터로 문자화하는 ‘고야마씨 노트 워크숍’을 시작해 8년이 흘렀다. 올해 10월 30일, 워크숍 멤버들이 문자화된 노트를 편집하여 『고야마씨 노트(小山さんノート)』(etc. books)가 출판되었다. 『고야마씨 노트』중 고야마씨 노트 일부와 멤버들의 에세이를 번역하여 6회 연재한다. 1회 “어느 홈리스 여성이 남긴 기록, '쓸모 없어 빛나는' 세계”(신지영, https://ildaro.com/9768)에 이은 2회 연재다.

 

공립공원 속 텐트촌, 홈리스 마을에 사는 여성들

 

사무실과 상업시설의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대형 형광간판과 광고간판이 육박해 오는 큰 도로의 인파를 빠져나오면, 점차 하늘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이 녹음 우거진 공원이 나온다. 숲과 언덕, 연못, 광장이 있는 이곳은, 누구든지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공립공원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나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공원의 더욱 안쪽에 인적이 드문 나무들 사이로 블루시트로 만들어진 천막(小屋)이나 텐트가 비밀스럽게 줄지어 들어선 텐트촌이 있다.

 

최근 공원 관리직원들은 더 이상 누군가가 살지 않도록 매일 공원 전체를 순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30년정도 살고 있는 사람도 있어서, 이곳에 홈리스들이 스스로 꾸려 온 생활이 뿌리내리고 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일용직 일이나 폐품을 주워 재활용해서 얻을 수 있는 현금 수입은 적고, 혹독한 더위와 추위 속 빈곤생활이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임금을 받는 노동으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해도, 버려진 물품 등을 모아 나누는 등 서로 도우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 이치무라 미사코 作, 수채화, 〈고야마씨 텐트와 노란 우산〉 이 그림은 『고야마상 노트』(etc.books, 2023)의 표지로 활용되었다.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2003년 당시, 공원 텐트촌은 350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는 큰 마을이었다. 내 텐트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야마씨는 혼자 살고 있었다. 텐트 마을에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다. 몇 안 되는 여성들을 만나면,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음이 쓰였다. 특히 물건을 주고 받으면서 생기는 역학관계 속에서 성차별이 일어나기 쉽다. 이대로는 마음이 불편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바로 여성들이 모일 수 있는 티파티를 열기로 했다. 텐트 마을 안을 찾아보니, 30명 정도의 여성들이 살고 있었다.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서 좀처럼 만날 수 없었지만,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절반은 혼자 살았고, 다른 절반은 파트너와 함께 혹은 부모와 동거하고 있었다.

 

나는 텐트 마을 여성들을 찾아 다니며, 매월 티파티 안내 찌라시를 나눠주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텐트 마을 한가운데서 열리는 티파티는 매번 15명 정도가 모여 식사를 하거나, 옷이나 액세서리 등을 나누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매우 떠들썩하다. 여성들은 특별히 사이가 좋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큰 싸움이 나기도 한다. 모임을 주재하던 내가 너무 지쳐 버려도 아랑곳 않고 티파티는 싸움의 무대가 되고, 여성들은 온갖 난리블루스 드라마를 펼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느새 화해하고 다시 모여 평화로운 수다를 즐기는 식이다.

 

‘키라키라’와 물물교환

 

이런 티파티에 고야마씨는 온 적이 없다. 다른 주민들과 교류하기보다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고야마씨 외에도 티파티에 오지 않는 여성들은 많다. 그렇지만 티파티에 참가하는 사람과 참가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왕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티파티에 참가한 사람이 남은 음식 등을 나누는 일은 자주 있었다. 텐트 마을 여성들은 모두 혼자 있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던 것이다.

 

고야마씨는 물건이나 식사를 나누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매우 독특한 패션을 하고 싱글벙글 즐거운 듯이 걷고 있어서, 나는 고야마씨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프로 헤어(Afro-hair: 머리를 오글오글 지져서 부풀린 아프리카 특유의 헤어스타일) 가발에 클래식한 버킷 모자를 쓰고 조금 사이즈가 큰 하이힐을 신고 검은 무늬 양산을 지팡이 삼아 걷고 있는 고야마씨랑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꾸민 고야마씨를 만나면 나는 기뻐서, “안녕하세요, 어디 외출하세요?”하고 말을 걸고 싶어 진다. 고야마씨는 “네”하고 조금 수줍어하는 듯이 미소 지으며 나를 보고 대답하고, 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밤에는 고야마씨가 혼자 사는 텐트 속에서 긴 시간동안 화가 난 것처럼 계속 소리치는 일이 있었다. 텐트 마을에서는 누군가가 혼자 소리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웃들도 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고야마씨를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가을 무렵이었다. 그 무렵은 지방 행정부가 홈리스 텐트나 천막을 공원에서 없애기 위해 홈리스들을 쉼터나 공공임대 집합주택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텐트 마을의 주민들은 많이 줄어 여성들도 4명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건이나 지혜를 서로 나누는 동료가 줄어들어, 커뮤니티의 기능도 저하되어 갔다. 행정 지원을 받기보다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이 텐트 마을의 존속을 위해서 서로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어느 날, 고야마씨 천막 옆 사람이 “고야마씨가 쓰려져 있다”고 걱정하며 나에게 전하러 왔다. 고야마씨에게 가서 상황을 살피자, “조금 피곤했을 뿐, 괜찮아요.”라고 블루시트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가져온 음식을 시트 틈새로 건네 주자, 받고는 대신 “이거 가지세요.”라고 ‘키라키라’(반짝반짝이란 의미, キラキラ) 한 끈을 묶은 손으로 만든 듯한 소품을 주었다. 뭔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후에도 내가 무언가를 넣어 드리려고 가면 고야마씨는 때때로 그 키라키라 한 소품을 건네 주었다.

 

▲ 음식이나 포트에 담긴 뜨거운 물 등을 가져갈 때마다 고야마씨는 바로 손으로 만든 이 키라키라한 소품을 주었다고 한다. 이 글의 필자 이치무라 미사코 씨가 본인의 텐트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고야마씨의 텐트 속으로

 

1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는 고야마씨는 거리에 별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포트에 뜨거운 물이나 음식을 전달했기 때문에 고야마씨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몸은 어때요? 라고 물으면 어김없이 “다리가 무거워서요. 피곤하기 때문인데, 쉬면 괜찮아”, “어떻게 하든지 담배가 필요한데 거리에 나가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병원에 갈까요? 하고 물으면 “싫어!”라고 대뜸 대답이 돌아온다.

 

많은 홈리스들이 병원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동안 텐트를 비워두면, 관리사무소가 짐을 철거해 버려서 텐트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 설령 생활보호제도를 이용해서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그대로 시설로 보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기 때문이다. 고야마씨는 그 뿐만이 아니라 병원이나 구급차 운반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도 싫어하는 눈치였다. 또한 생활이나 신체와 관련된 일에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것에는, 당연하지만 거부감이 있는 듯했다. 지원이 필요한 상태일수록,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보호’를 이유로 생활이나 신체에 침입해 횡포를 부릴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강하게 경계하는 것은 혼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방식이다.

 

어느 날, 평소처럼 식사를 가지고 가니, 블루시트 사이로 나온 고야마씨의 가는 손에는 큰 쇠가위가 쥐어져 있었다. 이걸로 옷을 잘라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한다. 고야마씨는 텐트 속에서 자기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이나믹한 옷 갈아입기는 신체적 도움을 받는 대가로 무엇인가를 끊어내겠다는 고야마씨의 각오와 큰 결심의 표현일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큰 역할이 맡겨졌다고 생각하며 그 묵직한 가위를 받았다,

 

가위를 들고 입구의 블루시트를 벗기고, 정형적이지 않은 고야마씨 텐트 공간에 잠수하듯이 들어 간다. 구두와 옷, 식기, 빵봉지, 캘리그라피 작품, 노트 등을 짓눌러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들어가자, 우산 몇 개를 기둥삼아 만들어진 공간이 있고, 한쪽에 손으로 만든 그 키라키라한 소품이 온통 깔린 위에 고야마씨가 누워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에게는 중요한 미션이 있다. 지금은 누워 있는 고야마씨의 더러워진 옷을 큰 가위로 조심스레 자르는 일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리고 몸을 닦고 옷을 입힌다. 그 큰 일을 간신히 끝내고, 네 발로 기어서 뒷걸음질치며 고야마씨의 공간을 나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별다를 것 없는 공원의 가을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라고 어리둥절해졌다.

 

고야마씨와 연결되는 사람들

 

그 이후에도 먹는 양이 줄어 들어 고야마씨도 자신의 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늘 웃고 있으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벌 받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어느새 아침 점심 저녁마다 고야마씨의 텐트에 가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나 혼자서는 고야마씨를 충분히 지탱할 수 없었다. 의료와 연결시키고 싶어도, 고야마씨는 여전히 병원에 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텐트 마을에서 [그녀를 돌보는] 케어 체계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나는 텐트 마을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어 ‘고야마씨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했다. 나중에 ‘고야마 씨 노트 워크숍’에 참가하게 된 요시다 씨가 텐트로 음식을 가져다 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 그녀와 관계 맺기를 시작해주었다. 세츠 씨도 지원 물품을 전달해주었다.

 

걱정한 홈리스 친구가 “관공서에서 받아 왔다”며 기저귀를 가져와 준 것에는 깜짝 놀랐다. 평소 피해왔던 관공서에 스스로 찾아가 꼭 필요하다고 간청해 비상용으로 기저귀를 3개 구해 왔다고 한다. 나는 그녀를 본받아 노숙인 쉼터를 운영하는 큰 지원단체를 찾아가 고야마씨가 치료나 의료를 텐트에서 받을 수는 없는지, 또한 침대나 이불을 받을 수 있을지 상담해보기로 했다. 그런 지원단체는 텐트가 아니라 병원이나 시설에 데려가 보호하려고 할 지도 모르지만,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담 결과, 침대와 이불을 공원까지 가져와주기로 됐다. 동시에 앞으로 고야마씨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텐트에 들어가서 그녀를 돌볼 수 있도록 고야마씨와 상의해서 큰 텐트로 개조하기로 했다.

 

텐트 마을 주민들한테서 조금 더 큰 텐트를 제공받았고, 홈리스 지원자들이 작업을 돕기 위해 왔다. 고야마씨는 담배를 나눠 받을 수 있어서 기쁜 듯했다. 텐트 안에 침대를 놓고, 키라키라한 것이나 노트, 좋아하는 작은 술병은 베갯머리에 두었다. 고야마씨는 “최고예요.”라며 새 텐트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고야마씨를 지탱해 주는 마음이나 체제가 텐트 마을 밖으로도 확대되어 갔고, 고야마씨도 신체를 돌보는 일에 다른 사람이 관련되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야마씨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고, 겨우 영양 보급용 젤리 음료만 목으로 넘길 수 있는 상태였다.

 

며칠 후 아침, 고야마씨의 텐트를 찾아가 늘 하던 것처럼 밖에서 인사를 건넸다. 답이 없다. 조심스레 텐트 안으로 들어가니 고야마씨는 잠들어 있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숨을 쉬지 않는다. 나는 당황해서 결국 구급차를 불렀다. 고야마씨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고 싶어서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다. 구급 대원들이 달려와서 고야마씨를 텐트에서 옮겨 구급차에 태웠다. 나도 동행했는데, 고야마씨가 의식을 잃은 채 끌려가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병원으로 옮겨지자, 의사가 나타나 고야마씨의 손목을 만지고 눈을 들여다본 후 “사망 확인”이라고 말했다. 고야마씨는 아무 말도 없었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옆 진찰실로 불려가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왜 더 빨리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본인이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데려오지 않으면 도울 수 없잖냐며 비난했다. 나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잘못했다’라고 생각했다. 구급차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이래서 고야마씨는 병원에 오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고야마씨에게 사과하고 싶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의사들은 아직도 나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진찰실을 나와 고야마씨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경찰관들이 지퍼가 달린 봉투에 고야마씨를 넣고 있는 중이었다. 큰일이다, 어떻게 하면 당장 고야마씨를 공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마르고 가벼워진 고야마씨는 나 혼자서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야마씨가 어찌하고 싶을지를 전혀 모르는 경찰관들이 봉투에 넣은 고야마씨를 데려가려고 한다. 나는 “멋대로 데려가지 마!”라며 막으려 했지만, 엉엉 심하게 울고 말아서 힘이 빠져 손쉽게 끌려 나와 버렸다.

 

▲ 2014년 12월 27~28일에 텐트 마을에서 열린 고야마씨 1주기 추모 전람회 모습. 고야마씨의 노트, 손으로 만든 다양한 물건, 캘리그라피 작품 등을 전시하여, 생전의 고야마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추억이나 남겨진 고야마씨의 노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람회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고야마씨 노트 워크숍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도 참가했다. 또한 1주기가 될 때까지 데이터화한, 고야마씨 노트의 일부분을 발췌한 작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고야마씨노트워크샵

 

고야마씨가 남긴 것

 

며칠 지나 새해가 밝았다. 텐트 마을의 설날은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떡국을 끓이거나 새해 첫 글씨를 쓰며 언제나 떠들썩하게 지내는데, 그 해는 아주 조용한 설날이었다. 블루시트 천막에 들어가 고야마씨를 돌보던 때에 생긴 심한 허리 통증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달팠다.

 

홈리스가 사망하면 많은 경우 정부에 의해 화장된다. 우리는 관공서에 문의해 고야마씨가 화장되는 날을 알아봤다. 화장터에는 고야마씨를 지켜봐 주던 몇 명과 함께 갔다. 경찰이나 관공서가 친척이나 가족을 찾아봤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고야마씨 텐트에는 많은 키라키라한 끈 모양의 소품이나 옅은 종이에 붓으로 쓴 캘리그라피(calligraphy), 글씨가 빼곡히 적힌 여러 권의 노트 등이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물건들도 같이 관에 넣을 생각으로 가져왔다. 관이 운반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야마씨가 “노트는 읽어도 된다”고 했었다는 요시다 씨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싶어 고야마씨의 숨결이 느껴지는 노트들을 훑어 보았다. 박력 있는 글씨로 쓰여진 글들. 모두와 함께 읽어 봤다. 뭔가 호소하는 듯이 쓰여져 있다. 우리는 노트를 태우지 않기로 했다.

 

고야마씨의 사망 후 1년이 지난 2014년 12월 27일과 28일에 요시다 씨와 텐트 마을 오가와 씨, 그리고 나는 고야마씨 추도 전람회를 텐트 마을에서 열기로 했다. 고야마씨의 사상과 일상생활이 적힌 노트 몇 권을 데이터화하고, 전람회를 위해 거기서 문장을 발췌하여 작은 책자를 완성했다. 전람회에서는 고야마씨의 친필 노트와 캘리그라피 작품, 키라키라한 소품들을 전시하고, 고야마씨가 텐트 마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야마씨가 어떻게 살아가려고 했는지에 대해 모두와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

 

요시다 씨가 상당량의 노트를 [컴퓨터로] 입력해 주었는데, 키라키라한 끈으로 묶인 노트 뭉치는 아직 몇 개씩이나 남아 있었다. 고야마씨를 더 알고 싶었다. 고야마씨는 만족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살아 있던 고야마씨를 이해하는 것은, 이 노트를 어떻게 읽을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인 것이다.

 

이듬해인 2015년 봄, 추모 전람회를 계기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남은 노트를 데이터화하는 ‘고야마씨 노트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필자] 이치무라 미사코(いちむらみさこ) 2003년부터 도쿄 공원의 블루텐트 마을에서 살면서, 같은 텐트 마을 주민들과 물물교환 카페 에노아루(エノアール, 絵のあーる, 그림이 있다는 뜻)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에 홈리스 여성들의 그룹인 노라(ノラ)를 만든다. 페미니즘이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아트 작품을 제작 발표하며 일본 안팎에서 워크숍을 하고 있다. 저서로『Dear キクチさん、ブルーテント村とチョコレート』(キョートッと出版, 2006. 한국어판은 『저 여기에 있어요』신지영 번역, 올벼, 2009)가 있다. 일다에 “대도시의 잉여자원으로 만드는 공동체 생활” 에세이를 연재한 바 있다. https://ildaro.com/3931

 

#『고야마씨 노트』로부터 발췌

 

2003년 2월 21일

밝은 희망, 빛의 거리에서 뭔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음미하고 싶다. 2층 카운터 자리에 앉아 노트와 마주한다. 마치 비행기를 탄 듯한 공간. 아직 3시가 막 넘은 시간이다.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이끌려 프랑스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의식을 전환시킨다. 별의 반짝임, 절반도 못 읽은 책을 꺼내 열중해서 끝까지 읽는다. 근대 세계의 멋진 땅을 활자와 함께 보냈다. 두 시간이나 지났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다. 한 시간 남짓 밤거리를 걷고, 담배, 귤을 줍고, 은은한 네온 불빛의 배웅을 받으며 일곱 시 넘어 돌아온다.

 

▲ 이치무라 미사코 作, 수채화, 〈카페와 비행기〉

 

2004년 2월 8-9일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다. 25년. 바로 얼마 전 꿈을 꾸었다. 노인 요양원에 살고 있다.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몇 번 꿈을 꿀 때마다 장면은 다르지만, 사라졌을 그의 모습은 60을 넘은 모습뿐이다. 기일은 생일이다, 라는 말을 떠올리며, 어두운 슬픔에서 벗어나 오늘 9일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래 본다. 어제 돌아오는 길에 육교에서 큰 가위를 주웠다. 여러 쓰임새가 있겠지만, 과거의 쐐기를 끊어내자.

 

▲ 이치무라 미사코 作, 수채화, 〈밤의 거리〉

 

[역자] 신지영 연세대학교 교수. 1945년 전후 동아시아 코뮌의 형성과 기록/문학을, 현재의 마이너리티 및 비/인간 존재들의 공통성과 기록/문학과의 접점 속에서 연구하고 있다.

 

[역자] 다카하시 아즈사(高橋梓) 니가타현립대학교(新潟県立大学) 조교수. 한국근대문학. 매체와 언어라는 조건에 유의하며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이 쓴 조선어/일본어 작품을 다시 읽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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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다 2023/12/22 [19:16] 수정 | 삭제
  • “노트는 읽어도 된다”고 했던 고야마씨의 이야기에 울컥 하네요. 고인의 노트를 태우지 않고 이렇게 바다건너까지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D 2023/12/10 [19:26] 수정 | 삭제
  • 그해 겨울, 나는 크리스마스에도 쉬지 못하고 새벽부터 일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혹시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것이 우리가 동등한 위치가 아닌 것으로 느껴질까봐 주의를 기울였다. 새벽에 마주친 분들은 주로 환경미화원이었는데, 내 선물(초콜렛)을 받고 잠시 나무그늘 아래 앉아 쉬며 담소를 나누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그 시절에 그런 마음을 나누고 행동에 옮겼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내가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 비야 2023/12/10 [18:46] 수정 | 삭제
  • 와.. 글 쓴 분 정말 존경스럽다.
  • Unhi 2023/12/09 [18:25] 수정 | 삭제
  • 글이 너무 슬프지만 조금은 위로도 받고 조금은 유머러스한 느낌도 받았어요. 키라키라 하는 부적 같은 선물이 뭘까 궁금했는데 사진을 보니까 궁금증이 풀리네요. "뭔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부분 읽다가 웃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같지 않나요? 중학교 때 트리 장식을 친구한테 선물로 주었던 게 생각나서.. 아련해졌어요. 친구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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