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다고 생각할게,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동생에게 독한 말을 내뱉은 건 나였는데, 그가 외톨이가 될까 봐 두려워한 것도 나였던 것 같다. 서로가 지켜야 하는 선을 넘어선 지 오래된 관계 앞에서, 내가 두려워한 것은 상실감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 것이었다.
모두 가 버리고
‘외톨이’는 에바 린드스트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모두 가 버리고』(에바 린드스트룀 지음, 이유진 옮김, 단추)에는 외톨이 프랑크가 나온다.
“저기 또 모여 있네. 얼마나 재미있을까.”
‘여느 때와 같이 티티, 레오, 밀란’은 같이 있는데 프랑크는 혼자다. 집으로 돌아간 프랑크는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로 마멀레이드를 만든다. 혼자라는 슬픔을 재료로 상을 차려 내는 프랑크.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모습을 티티, 레오, 밀란이 보고 있었다. 네 아이는 이제 친구가 된 것일까? 『모두 가 버리고』는 글과 그림의 맞물림과 어긋남,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과 방향을 조합해볼수록 이야기의 여운이 미묘하다. 쓸쓸함과 다정함의 신비한 공존.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아이는 이렇게 오솔길과 버스 정류장, 집과 문처럼 난데없는 것들을 만나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리고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는 목소리! “네가 돌아만 온다면.”
『돌아와, 라일라』는 짧은 문장 아홉 개가 글밥의 전부인데, 이 책 역시 읽을 때마다 해석과 여운이 달라진다. 차분한 색감과 독특한 터치, 커다란 풍경 속에서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인물을 보면서, ‘이 인물이 제목에 등장하는 라일라일까? 혹은 라일라를 찾아다니는 인물일까?’ 또는 ‘라일라는 집으로 돌아간 걸까, 돌아가지 않은 걸까?’, ‘라일라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일까?’ 같은 의문에 대해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글은 짧고 그림 속 이야기는 풍부해서 그 둘이 어우러질 때 제3의 이야기가 나타나고, 미묘한 반전과 유머가 곳곳에 실려 있는 덕분이다.
내게 이 책은 귀여운 모험 서사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의 모든 발걸음을 응원하는 연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올해 이태원 참사 추모제에 다녀온 친구와 이 책을 보았던 날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도 지키지 못한 정부를 향한 은유적인 고발문으로 다가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그리워하는 애도문으로 느껴져서 한참을 먹먹하게 있었다. 또 오늘은 내가 혼자인 것이 괜찮듯이, 당신이 혼자여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도가 되어준다.
당신이 홀로 보내는 시간
나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다. 동생은 내 유년의 결핍을 공유한, 어쩌면 그래서 특히 더 내가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들은 장군처럼, 딸은 공주처럼 키우겠다는 아빠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통제로 인해 동생은 외롭고 숨 막히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나는 그걸 미처 몰랐거나 방치했던 죄책감으로, 성인이 되고서도 오래도록 그의 실수와 잘못, 오만과 허세를 감싸주는 누나 역할을 자처했다. 그가 일으키거나 놓여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싶어 했고, 행여 다른 이가 그를 손가락질할까 봐 미리 나서서 적정한 역할을 연기처럼 하곤 했다.
아빠의 바람대로 공주는 되지 못했지만 K-장녀로서 부채감을 놓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의 결핍과 고독이, 그가 외톨이가 될 것이 두렵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부장식 문법에 길들여진 누나다. 동생에게 뿐만이 아니다. 나는 연인이나 친구에게 어쩌자고 그들의 집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 어떤 오만과 불안이 홀로 보내는 시간에서 빚어내는 회복과 만남의 과정을 기다려주지 못하게 했던 걸까. 소중하고 가까운 이라도, 타인이 내 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의 집이 될 수는 없다.
최근 동생에게 이제 그만 독립하라며,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냈다. 이것이 불온한 사회에서 가족공동체마저 무너지는 현상의 하나인지, 이제서야 각자의 자율과 책임을 존중하는 자리로 재정립하는 과정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에바 린드스트룀의 그림책을 자주 들여다 보게 된다. 이 책들은 형식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깃든 유머 너머로, 따듯하고 커다란 안심을 주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외로움은 누구나 겪는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안심!
걷는 사이
그의 또 다른 그림책 『걷는 사이』(에바 린드스트룀 지음, 신동규 옮김, 위고)에는 소유하거나 소유당하지 않은 채 좋은 속도를 나누는 어떤 관계의 ‘거리’가 웃음지게 담겨있다. 나 역시 누군가의 목적지나 집이 되고 싶다는 판타지를 그만 멈추고 싶다.
『돌아와, 라일라』의 뒷표지에는 “라일라, 넌 어디에 있니? 우린 네가 그리워.”하고 적혀있다. 세상의 모든 라일라가 세상 어느 곳에서든 마음껏 배회할 수 있기를, 새해에는 꼭 그러할 수 있기를. 그래서 안심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해도 될 수 있도록, 길가에 잘 서고 싶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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