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한걸음 내딛는 용기를 얻다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8편: 소름 돋는 오노미치와의 인연

이내 | 기사입력 2023/12/23 [12:44]

“덕분에” 한걸음 내딛는 용기를 얻다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8편: 소름 돋는 오노미치와의 인연

이내 | 입력 : 2023/12/23 [12:44]

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20대 시절을 함께했던 옛 친구와의 조우

 

여행의 끝이 추억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여행과 인연으로 이어진 경험이 전에도 더러 있긴 했다. 그러나 오노미치와는 뭔가 특별한 인연이랄까. 그렇게 느끼게 된 사건들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하나 둘 생기게 되면서, 특별한 느낌을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오노미치에서 만난 여행사진작가 ‘고우’가 보내준 오노미치 사진 중 하나. 이 사진들 “덕분”에, 글만 쓰고 미뤄두었던 출판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먼저 에피소드 하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어느 날, 인스타 프로필에 ‘오노미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라고 써 둔 누군가가 나를 팔로우했다. 궁금해서 링크를 따라가 보니 썸네일(Thumb nail, 영상의 메인 이미지)에 오노미치 여행에서 만난 ‘타마’의 얼굴이 있는 영상이 있었다.

 

오노미치 친구들이 내 얘길 했나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필모그래피를 살피다가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은 나의 20대 시절 영국 런던에서 같은 영화학교에 다녔던, 그리고 수업에 제출해야 하는 나의 영상 과제에 무려 출연도 해주었던 일본인 친구 ‘토시'였다. 런던 생활 이후 얼마만인가!

 

나는 먼저 곧바로 타마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고. 알고 보니 토시는 히로와 타마 가족(게스트하우스 사장과 스텝이면서 부부 사이)과 매우 가까운 사이란다. 14년 만에,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토시와 라인(일본이나 대만에서 주로 쓰는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으로 대화를 나누고 나서 팔에 돋은 소름이 2주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슈퍼 로컬 히어로

 

현재 토시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마을 만들기 활동을 하고, 섬에서 자연농으로 농사도 짓고, 생태 친화적인 소수 정당 활동에도 참여하고, 대학교에서 영상을 가르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한다.

 

내가 만났을 당시, 20대의 토시는 음악을 하다가 밴드 생활에 염증을 느껴 무작정 영국으로 떠나왔던, 멋있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꾼 건, 일본의 3.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다. 유럽에서 접한 고국의 비극적인 소식은 젊은 토시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귀국을 결심하게 했다. 나아가 자신의 예술 활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 20대 때 런던에서 나와 같은 영화학교에 다녔던 친구 토시는 지금 오노미치에서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첫 장편 〈슈퍼 로컬 히어로〉(다나카 토시노리, 1시간31분, 2014) 포스터.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다양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는 노부에 씨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담아내며 ‘원전 반대’ 메시지를 전한다. ©이내

 

오노미치에서 원전 반대 운동을 하는 ‘노부에' 씨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슈퍼 로컬 히어로〉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 토시는 자기 작품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몇 개 보내주었다. 친구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특히 〈슈퍼 로컬 히어로〉는 나의 오노미치 사랑을 더욱 부채질해 주었다.

 

오랫동안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해 온 노부에 씨는 공연장 하나 없는 시골에서도 좋은 라이브 공연을 만들고 싶어 도쿄와 오사카의 인디 음악가들을 초청했다. 마을회관을 빌리고 동네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얻어 지역의 문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 갔다. 원래도 마을에서 손이 필요한 일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나서던 노부에 씨는 3.11 이후에 원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후쿠시마 피난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레코드 가게는 몇 장 남지 않은 음반과 함께 건강한 지역 먹거리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회 운동에 뛰어든 토시는 좀 더 영리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영화의 주된 주제는 원전 반대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닿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에 씨와 음악가들의 관계, 인구 소멸로 유행이 시작된 로컬 활동으로 주제의 범위와 재미를 넓혔다. 노부에 씨가 만든 공연 영상, 그때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유명해진 음악가들의 인터뷰 등 마침 사용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았다.

 

토시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전국의 커뮤니티 상영을 통해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때마다 원전 반대의 본심을 전했다. 영화와 상영의 이야기를 담은, 같은 제목의 책도 만들어 사회를 바꾸어 나가자는 메시지를 더욱 발신했다.

 

영화도, 토시의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어서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 말이 너무 잘 통했다. 영상과 노래라는 도구는 달랐지만,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동안 해 온 활동에서 우리는 겹치는 게 아주 많았다. 선물로 받은 『슈퍼 로컬 히어로』 책에 토시가 써 둔 자기소개의 마지막 글귀는 내 노래의 거의 모든 주제와 같았다. “자신만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노미치에 이주하고 10여 년의 다양한 활동을 이어온 토시는 조금 지친 듯했다. 육아와 가족에 대한 책임, 크게 변하지 않는 사회가 약간의 매너리즘을 가져다 준 모양인지 창작의 욕구가 별로 없어졌다고 말했다.

 

언젠가 이내와 뭔가 재밌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토시의 말을 덥석 붙잡아, 일본과 한국의 지역을 잇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나의 꿈 곁에 나란히 두었다.

 

우선 〈슈퍼 로컬 히어로〉를 한국에 소개할 궁리를 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시간을 기록하는 방법

 

그리고 오노미치와 연결된 두 번째 에피소드.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골목을 걸으며 발견하고 생각한 것들을 써 둔 글을 모아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독립출판물 『길과 말』의 작업을 드디어 완성할 수 있었다. 오노미치에서 만난 여행자 고우 “덕분”이다. 무슨 말이냐면, 글만 써 두고 출판을 미루었는데 여행사진작가인 고우의 사진을 책에 넣어서 완성이 된 것이다. 고우가 오노미치에 머무는 동안 찍어 둔 사진을 몇 달 후 이메일로 받았고, 그 오노미치 사진들은 『길과 말』 책자에 인쇄되었다. 고우에게서 배워 자주 쓰게 된 인사처럼 모든 게 “덕분(おかげさまで)”이었다.

 

▲ 여행에서 돌아온 후, 에세이집 『길과 말』을 독립출판으로 제작해 ‘2023 전주책쾌’(독립출판 북페어)에 들고 갔다. 여행사진작가 고우가 찍어준 사진을 표지에 넣었다. ©이내


표지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음 여정에 나서는 나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오노미치의 구석구석에 닿은 고우의 시선이 느껴지는 다른 사진들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너스 부록으로 모두 실었다. 사진 덕분에 얇은 책에 깊이가 더해졌다. 우편으로 자기 사진이 실린 책을 받아 본 고우는 기뻐하며 “계속해서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책의 뒷표지에 써 둔 글로 답장을 보냈다.

 

“백지인 나의 지도 위에는 언제나 골목이 흐른다. 걸어서 만들어 가는 지도다. 혼자 걸어도 좋고, 함께 걸어도 좋다. 걷다 보면 발걸음마다 이야기가 쌓인다. 그러므로 골목에는 반드시 이야기도 함께 흐른다. 골목이라든가, 걷기라든가, 걷다가 만난 이야기는 사소하기 짝이 없다. 세상을 바꿀 만한 빠르고 강하고 거대한 이야기는 고속도로와 터널과 공항과 교각처럼 이미 너무 많이 있으니까, 나 하나쯤 계속해서 골목을 노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걷기와 노래가 기도였던 어느 시절을 상상하며 골목을 걸으며 노래한다.”

 

기억을 위해 누구는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면, 나는 노래를 만든다. 일본 여행에서 소중하게 담아온 순간을 가사에 실어 「여행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 무려 일본어로! (인스타 라이브 영상 https://www.instagram.com/p/CqDa6CptLHR/?utm_source=ig_web_copy_link)

 

「여행의 노래」 (한국어 버전 가사) - 이내

 

바람을 좇아 우연을 기다려

필요한 건 기울인 귀

여기저기 벚꽃처럼 피어난 사람들

“기다렸어” 말 안 해도 알지

커피가 따뜻해

이야기가 맛있어

국경 따위 잊어버리고

사람으로 만나자

모든 건 선물이구나

모든 건 덕분이구나

 

기차를 타고 건너편 섬에

자전거 페달에 바다 냄새가

여기저기 닿는 웃는 얼굴들

“다시 만나자” 그러니 분명 이어져

아침밥이 힘을 줘

노래는 힘이 세

시간 따위 잊어버리고

지금 여기에 살자

모든 건 사랑이구나

모든 건 이어져있구나.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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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4/01/04 [22:05] 수정 | 삭제
  • 아침밥이 힘을 줘 ㅋㅋ
  • Umin 2023/12/27 [18:29] 수정 | 삭제
  • 여행사진작가가 찍은 오노미치 사진을 뚫어져라 봤습니다. ㅎㅎ 너무 많이 개발되지 않고 훼손되지 않은 지역의 느낌이 흑백사진의 잔잔한 물결 속에서도 느껴지는 게 신기하단 생각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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