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출전을 포기한 선수, 실패한 삶인가요?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

박주연 | 기사입력 2024/01/02 [15:42]

올림픽 출전을 포기한 선수, 실패한 삶인가요?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

박주연 | 입력 : 2024/01/02 [15:42]

어느새 새로운 해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 정리해 보고, 새롭게 할 일도 정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꾸 ‘뭘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누구는 뭘 했다는데, 또 누구는 뭘 이뤘다던데 이런 이야기만 귀에 쏙쏙 들어온다. 형체도, 의미도 모호한 ‘성공’이라는 말이 자꾸 내 주위를 맴돌며 질문한다. 넌 성공했니? 목표는 이뤘니? ‘육각형 인간’(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 모든 걸 갖춘 사람)이 대세라는데, 네가 가진 건 뭐니? 이런 질문들을 마주하다 보면 실패한 걸까 싶기도 하다. 어떤 시험을 통과하거나 높은 점수를 받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이름을 널리 널리 알린 것도 아니고. 한강 뷰도 아닌 집은 여전히 전세대출이니까.

 

그렇지만, 실패한 시간치곤 사실 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새롭게 도전한 일도 있었고, 오랫동안 기억될 행복한 순간들도 꽤 쌓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들은 ‘성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일 뿐이다.

 

▲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니콜라 마쉬, 지오바니 레다 감독) 포스터 ©Netflix


넷플릭스에서 2022년 공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니콜라 마쉬, 지오바니 레다 감독)의 주인공 리오는 미국의 스케이터보더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스케이트보드가 올림픽 스포츠가 된 후 최초의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에 출전하는 것, 그리고 메달을 따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자 성공의 증표였다.

 

하지만, 리오는 도쿄 올림픽이 원래 열리기로 했던 시점을 몇 개월 앞두고 국가대표에서 사퇴하고 올림픽을 포기한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긴 것도, 부상으로 출전이 어렵게 된 것도 아니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건 성공이 아닌걸까? 운동선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꾼다는 올림픽, 눈물겨운 ‘노력’을 증명해 주고 밝은 미래와 ‘성공’을 보장해 주는 올림픽을 포기한 리오는, 실패한 걸까?

 

최고의 스케이터보더가 요구받은 것

 

리오는 소위 ‘흙수저’ 출신이다. 마약중독이었던 엄마가 양육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탓에 어린 시절 위탁가정에서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때 다른 형제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걸 보고 관심을 갖게 됐고, 만 2세 때 부활절 선물로 첫 스케이트보드를 받았다. 그렇게 스케이트보드와 리오의 인연이 시작됐다.

 

11살이 된 리오는 집 근처 공원에서 열리는 스케이트보드 수업 홍보물을 발견하고 수업을 들으러 간다. 당시 선생님이었던 라이언 밀러는 리오의 실력에 감명 받아 영상을 찍기 시작했고, 그 영상의 영향으로 리오는 첫 후원사를 얻게 된다. 이후 리오는 각종 대회에 출마하며 선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14살의 나이엔 대회 역사상 최연소로 “X-Games”(스케이트보드, 스키, 스노보드, BMX, 모터크로스 등의 종목 선수가 참여하는 액션 스포츠 대회) 결승 진출자가 됐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7~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후원사들이 후원을 끊거나 줄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리오가 너무 ‘여성’ 같지 않다, ‘소녀’처럼 옷을 입거나 치장하지 않는다는 이유. 리오는 태어났을 때 사회로부터 여성이라는 성별을 지정 받은 사람이었지만, 리오는 전형적인 여성스러움, 여성다움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냥 캐주얼하게, 자신답게 운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후원사들은 리오에게 ‘여자다운’, ‘소녀다운’ 옷, 신발 등을 건넸다. 금발의 긴머리도 계속 고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여자애’임에도, 대단한 기술을 선보이며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리오의 모습을 유지해야만 시장에서 가치 있다는 것이 후원사들의 판단이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기술을 선보이고 있는 리오 베이커 ©Netflix


물론 리오는 그게 싫었지만, 현실적으로 후원사 없이 운동을 계속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흙수저인 리오가 ‘성공’하기 위해선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여해 메달을 따야 했고, 대회에 참가하려면 교통비, 숙박비, 식비 등의 돈이 필요했다. 후원사의 요구에 맞춰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 리오는 10대의 끝자락, ‘여성다움’을 요구 받는 일에 지쳐, 대학에 들어가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스케이트보드를 그만두진 않았다. 자신만의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만들어 공개했고, “X-Games”도 참가해 메달도 땄다. 이후 리오는 나이키가 후원하는 스케이트보더 선수 명단에 들게 됐고, 여성을 위한 최초의 스케이트보드 신발 디자인을 만드는 일도 도왔다.

 

리오 베이커는 2017년 스케이트보드 업계에서 유명한 “더 베릭스”에서 팬들의 투표로 뽑은 최고의 선수 11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리오는 분명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올림픽을 향한 길

 

영화는 리오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반적인 삶을 조명하긴 하지만, 주요하게 다루는 건 스케이트보드가 올림픽 종목이 된다고 확정된 2019년부터의 이야기다. 리오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올림픽을 향한 꿈을 키워나간다. 리오의 여자친구, 친구들, 가족들 모두 올림픽에 나갈 리오를 응원하며 함께 기뻐한다. 동시에 리오는 피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다. 올림픽에 나갈 선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에 맞춰져야 했고, 리오는 미국 ‘여자’ 대표팀으로 선발됐다.

 

리오는 이미 ‘그녀’(She/Her) 대명사가 아닌, ‘그들’(They, Them) 대명사를 쓰고 있었고, 자신을 논바이너리(non-binary,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분류를 거부하는 사람) 트랜스젠더(태어날 때 지정 받은 성별과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별이 다른 사람)로 정체화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인 ‘레이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리/리오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안전한 공간에서만이었다. 대외적으로 리오는 여전히 레이시라 불렸고, ‘여자’ 선수로서 대회에 참여하고 커리어를 쌓아야 했다. 특히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선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에서 뉴욕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하고 있는 리오의 모습 ©Netflix


스케이트보드 커뮤니티와 업계 내에서도 리오와 가까운 이들, 같은 대표팀 선수들은 리오의 정체성을 포용하고 있었지만, 그 외엔 리오를 압박하는 것 투성이였다. 올림픽을 가기 위한 길은, 매 순간 리오가 벗어나고자 했던 분류로 리오를 다시 구겨 넣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선보였던 시간은 사라져 있었다. 스케이트보드 위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리오를 ‘여자 선수, 레이시 베이커’로 묶어둘 뿐이었다.

 

‘선택’-경력이냐, 나 자신이냐

 

리오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소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러다 스케이트보드를 탔고,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자신을 표현했다. 넘어지고 떨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달리고 점프했다. 어느 순간 그건 재능과 능력이 되어있었고, 자랑스러운 경력이 됐다. 하지만 리오가 뛰어난 모습을 보일수록, 더 ‘여자’가 돼야 했다. 그걸 거부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리오의 엄마는 리오가 어렸을 때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금발의 긴 생머리를 잘라버렸을 때, 후원사가 떨어져 나갔던 일을 말한다.

 

올림픽을 앞둔 리오는 다시 ‘여자’가 되어야 했다. 리오는 ‘올림픽까지만. 올림픽이 끝나면 괜찮을 거’라 되뇌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깨닫는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리오는 올림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성공도, 증명도 포기하기로 한다. 대신 자기 자신을 선택했다.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력을 날려버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감추고, 버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순 없었다.

 

이후 리오는 본격적으로 트랜지션(자신이 정체화한 성별에 맞게 신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시작한다. 이 또한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리오는 다시 자신이 ‘여성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을 거친다. 이런 리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대체 이 사회는 왜 이렇게 증명해야 하는 것이 많은 걸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 준비를 그만두고 트랜지션을 시작한 후,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연기된다. 리오가 주변의 기대와 사회가 정해놓은 길에 맞춰 ‘몇 개월만 버티면 된다’며 올림픽을 계속 준비하고 있었다면, 크나큰 시련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됨을 계속 포기해 와야 했던 리오에게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을 거다.

 

▲ 다큐멘터리 영화 〈스케이트보드 위의 삶: 리오 베이커 스토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리오의 모습 ©Netflix

 

리오는 자유를 되찾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다시 힘차게 달린다. 퀴어이고 스케이트보더인 친구들과 함께 퀴어/트랜스친화적인 스케이트보드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한 회사도 만들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로 한다. 이런 리오의 삶을 과연 실패했다 말할 수 있을까?

 

성공, 노력, 능력, 목표 등의 말들과 함께 마음이 조급해 지는 시기, 스케이트보더 리오 베이커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 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냐고. 새해 목표를 세워야 한다면,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이 나의 할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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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박눈 2024/01/09 [00:09] 수정 | 삭제
  • 이 기사를 읽어서인지 넷플에 추천영화로 떴어요!
  • 추천감사 2024/01/03 [19:02] 수정 | 삭제
  • 넷플릭스에 있네요!! 새해 첫 영화를 뭘 볼까 하고 찾고 있었는데 멋진 사람, 리오 베이커를 만나봐야겠어요.
  • ㅇㅇ 2024/01/03 [18:47] 수정 | 삭제
  •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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