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9편: 국가의 경계 넘어, 지역과 사람 잇기

이내 | 기사입력 2024/01/07 [12:16]

말이 씨가 된다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9편: 국가의 경계 넘어, 지역과 사람 잇기

이내 | 입력 : 2024/01/07 [12:16]

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오노미치에 사는 일본 친구 ‘토시’(20대 시절 런던에서 같은 영화학교에 다녔는데, 오노미치 여행 후 우연히 재회했다. 지난 8회 https://ildaro.com/9796 참고)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로컬 히어로〉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내 생각의 씨앗은, 예상보다 빨리 작은 싹을 틔웠다.

 

관악구 영화책방 ‘관객의 취향’과 노부에 씨의 레코드 가게

 

2023년 11월 25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영화책방 ‘관객의 취향’에서 “퇴근길인문학 - 나의 작은 극장에서”라는 기획의 작은 상영회가 열렸다. 한국까지 올 수 없었던 영화감독 토시를 대신해 내가 프로그래머로서 〈슈퍼 로컬 히어로〉 상영회의 진행을 맡았다. 친구의 영화를 한국의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서 반응을 살피느라 상영시간 내내 온몸의 감각이 바삐 움직였다.

 

여기 오고 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았던 제주도 사는 친구는 대신 귤 한 박스를 보내왔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난롯가에서 귤을 까먹으며 토시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었다. 난롯불과 귤의 색깔만큼이나 따뜻한 시간이었다.

 

▲ 2023년 11월 25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영화책방 ‘관객의 취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로컬 히어로〉(다나카 토시노리, 1시간31분, 2014) 상영회가 열렸다. 일본에 있는 감독 토시를 대신해, 내가 프로그래머로서 진행을 맡았다. (이내 제공)


영화는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마을의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온 노부에 씨가 3.11 이후에 원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 속 노부에 씨가 루돌프 옷을 거꾸로 입었을 때는 다 같이 웃었고, 에고래핑(EGO-WRAPPIN’) 공연에서 가림막 대신 노부에 씨의 몸과 꽃이 무대의 울타리가 되는 장면이 나왔을 때도 역시 함께 웃었는데, 그 웃음의 마지막에 하나 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슈퍼 로컬 히어로〉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라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끝나고 감상을 나누는 자리에서 모두 입 모아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재미와 감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영화였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구성이나 감각적인 편집과 음악이 좋았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게 진정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에 씨처럼 자기답게 자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10여 년 전 영화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 현 상황에서 너무나 필요한 영화 같다.’

‘이 영화를 한국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자기가 사는 동네인 관악구의 책방 ‘관객의 취향’이 마치 노부에 씨의 레코드 가게 ‘레이코도’와 같다며, 책방과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는 감상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작은 용기의 한 걸음을 걷기를 원한다는 감독 토시의 바람이 영화를 통해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 것 같아 기뻤다.

 

아이디어를 ‘말’에 실어 여기저기 날려 보내는 거야,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민들레 씨앗처럼

 

영화 속 주인공 ‘노부에’ 아저씨를 알리고 싶다는 게 토시가 영화를 만든 이유였다면, 이 영화를 한국의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내 마음은 작은 상영회로 이어졌다.

 

▲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영화책방 ‘관객의 취향’에서 진행된 〈슈퍼 로컬 히어로〉 상영회는 열 명 남짓 참여하여 난롯가에서 제주도 친구가 보내준 귤을 까먹으며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었다. 난롯불과 귤의 색깔만큼이나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내 제공)


무언가 강렬한 감동이 열량을 가득 담은 아이디어가 되더라도, 그것이 현실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점 그 열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쉽게 감탄하는 내 천성에 감사하지만, 손실되는 열정만큼 자책이나 후회도 큰 터라 나는 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에너지’의 출처를 궁금해한다. 이번 상영회를 통해 나의 오랜 궁금증에 실마리를 조금 얻게 되었다.

 

아이디어를 혼자서 실현할 능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방법은 여기저기 말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마치 민들레 씨앗이 정처 없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을 뿌린다.

 

일본 여행 시기에 나는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의 내용을 따라 12주 온라인 워크숍 모임을 만들어 진행하던 중이었다. 멤버들은 기본적으로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글을 써 내려가는 ‘모닝페이지와 일주일에 한 번 자신과 노는 시간을 가지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서로 독려하고,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 후기를 나눈다.

 

그때 나는 오노미치에서 극적으로 만난 토시의 이야기나 그의 영화를 한국에서 상영하고 싶은 소망 같은 것을 현재형 열정으로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관객의 취향 대표님은 로컬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그걸 떠올려주었다. 말은 씨앗이 된다.

 

서신교환 프로젝트 ‘어떤 물길’과 오노미치 영화제

 

한편, 토시의 어떤 말이 나에게 씨앗이 된 일도 있다. “언젠가 이내와 같이 재밌는 작당을 해 보고 싶다”는 토시의 말이 떠오른 건, 부산의 영상예술집단 ‘탁주조합으로부터 서신교환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을 때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예술로 고민해 보는 프로젝트 ‘어떤 물길’은 세계의 다양한 예술가 사이에 편지가 흐르는 모습을 그린다고 했다. 편지를 주고받을 일본인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토시를 떠올린 건, 그에게서 건네 받은 말의 씨앗 때문이었을 거다.

 

▲ 부산의 영상예술집단 ‘탁주조합’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화두로 한 예술가들의 서신교환 프로젝트 ‘어떤 물길’을 진행했다. 소책자 안에는 나와 토시가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도 실렸다. (이내 제공)


편지와 함께, 나는 3년 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해 만든 노래 「까만 바다」를 보냈다. 토시는 〈서로 울리는 세계 RESONANCE〉라는 신작의 한 장면을 보내주었다. 각자가 처한 답답한 상황과 고민을 바다 건너 흘려 보내는 시간이 서로에게 자극과 위로가 되어 준 고마운 기회였다.

 

마지막 편지에서 토시는 ‘관객의 취향’에서 열린 작은 상영회 후기에 기뻐하며, 코로나로 인해 상영이 어려웠던 신작이 ‘오노미치 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부산의 작은 카페에서 〈슈퍼 로컬 히어로〉의 상영회를 열어볼 계획이다. 프로젝트 ‘어떤 물길’에서 세계를 오간 여러 편지들은 전시를 위한 소책자로 만들어졌고, 곧 단행본으로 만들어질 계획이라고 한다.

 

아이디어의 씨앗은 언제 어떻게 퍼져나갈지 모르니, 열량 가득한 말을 더욱 퍼뜨려볼 생각이다. 우선 1월 12일 토시의 새 영화가 상영되는 ‘오노미치 영화제에 가고 싶다!

 

-‘까만 바다’ 듣기 https://youtu.be/2hzhgAIS8O0?si=W4IxgAvyaO19RKzO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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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주의숲 2024/01/09 [00:06] 수정 | 삭제
  • 잘 읽었는데 끝까지 읽고나니 왜 탁주조합밖에 생각이 안나는 거죠 ㅋㅋ
  • 푸우곰 2024/01/08 [13:53] 수정 | 삭제
  • 넘 재밌게 읽었어요. 길 위의 음악가라는 말이 딱 맞는 분 같아요!
  • 쩌리 2024/01/07 [17:17] 수정 | 삭제
  • 관악구에 영화책방이 있다니ㅡㅡㅡㅡ 놀러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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