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필자 김신아 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입니다.
2023년 상반기 ‘성적 동의’는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다. 1월 말, 여성가족부의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있던 ‘비동의 강간죄 검토’ 과제가 법무부의 반대로 9시간 만에 철회되는 일이 있었다. 남초커뮤니티 이용자들부터 법무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동의’ 여부가 강간의 판단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박하며 나섰다.
이 시기 확산된 반대 근거 중 하나는 여성이 동의하에 이루어진 성관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고 변심하거나 무고할 의도로 말을 바꾸면, 남성이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6월 유엔의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도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반대하며, 비동의 강간죄가 “입증 책임을 사실상 피고인에게 전가시키고, 여성의 의지나 능력을 폄하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비동의 강간죄와 관련하여 활발해진 ‘동의 담론’에 여성들의 목소리는 쏙 빠져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은 성적 동의를 주제로 여성들을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동의’를 질문하며, 위험 너머 나아가는 여성들
우리는 혼인, 연애, 데이트, 썸, 캐주얼 섹스 등 친밀한 관계에서 ‘동의가 고민된 적 있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여성들을 모집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생애 전반의 성적 경험을, 성폭력이라고 명명한 경험부터 난감하고 불편했지만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웠던 경험, 즐겁고 만족했던 경험까지 폭넓게 듣고자 했다. 연령도, 하는 일도, 성적 정체성도 다르지만 ‘동의’와 관련해서 무언가 할 말 있는 여성들 15명이 인터뷰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해주었다. 연령 별로는 10대 3명, 20대 4명, 30대 4명, 40대 2명, 50대가 2명이었으며, 혼인 경험이 있는 참여자는 3명, 비이성애(범성애, 동성애, 무성애 등) 참여자가 4명이었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실험과 모험, 상처, 실패, 즐거움, 존중, 깨달음 등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단지 ‘동의’에 대한 특정한 에피소드만 다루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뷰에 할당된 2시간은 늘 짧았다. 각기 다른 여러 이야기가 쌓여가면서 공통된 그림이 그려졌다. 여성들은 당시 상황이나 관계 자체의 위계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섹스, 연인이나 부부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몸과 감정을 살필 틈 없이 해야하니까 했던 섹스, 여성의 쾌락과 즐거움은 배제된 시나리오를 수행한 섹스, 친밀함을 기대했지만 섹스만 요구되었던 경험을 ‘동의’라는 키워드로 질문했다.
한 인터뷰 참여자는 바쁜 남자친구의 일상에 맞춰 자신의 자취방에서 패턴처럼 했던 섹스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서 추방당하는 느낌’을 설명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과 경험에서 주도권을 잃고 소외될 때의 느낌을 말한 것이었다. 이런 경험의 연장선에서 가정폭력, 성폭력, 스토킹 등의 폭력이 인터뷰 참여자들에게도 존재했다. 일터에서의 성폭력이 성차별적인 조직 문화와 업무에서 비롯되듯이, 친밀한 관계에서도 폭력은 상호적인 관계 맺기가 깨진 곳에서, 개인의 감정과 의사와 몸이 통합된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유진의 이야기
유진에게 있어서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중보다는 남자친구의 욕구에 맞추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유진이 잠깐의 쾌락이 아니라 즐거운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다. 유진은 그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며,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 삽입과 사정 위주가 아니라 긴 스킨십과 전희, 존댓말을 하는 사이, 자신을 보살펴주는 태도가 즐거움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돌아본다. 이후 유진은 새로 맺는 친밀한 관계 내에서 나를 존중하는 방법과 나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세세한 절차들을 만들고 상대방과 합의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관계할 날짜와 장소, 애무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미리 상의했다.
‘동의’에 대해 좌절한 사건도 있었다. “내 철학에 공감하는 척하고, 성관계도 내가 정해놓은 단계대로 따라와주는 척”했던 애인이 자신이 잠든 틈을 타 강간했을 때, 유진은 성관계에서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만든 촘촘한 절차들이 “소용없다” 느꼈다. 유진은 그러나 적극적인 합의가 무용하다는 생각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적극적 합의를 시도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좌절했던 경험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만의 의지만 있으면 안되는 거였구나, 의지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현재 애인은 최초로 ‘말로 동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현재 남자친구는 성관계 도중 이전 성폭력 경험으로 인해 유진이 경직되거나 불안해지거나 아파하면 “바로 멈추는 사람”이다. 상대방도 성관계 시 망설임이나 신체적인 어려움을 먼저 털어놓는다. 서로의 취약성을 공유하고 살피는 섹스에서 유진은 다시 적극적 합의를 할 수 있었다.
#상지의 이야기
상지는 주로 대학 학생회, 페미니즘 관련 단체 등 공익적 가치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내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동의를 묻고 답하기는 어색한 일이 아니었고, 상대 남성들은 여성의 비동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지는 ‘문제 제기 당하지 않기 위한 동의 구하기’도 많이 보아 왔다. ‘받아내는 식의 동의’는 상지에게 매력 없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사귄 남자친구와는 명시적 동의 얻기 말고 다른 방식을 합의해 나가고 싶었다. 우리의 섹스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고, 둘 간의 언어와 즐거움을 합의하고자 했다. 둘이 합의한 것은 ‘약한 뉘앙스로 하는 거절의 말은 무시하는 섹스’였다.
그런데 남자친구와 반동거 상태가 되면서 “다양한 시간대나 다양한 상황”에서 섹스를 하게 되자 상지는 고민이 생겼다. 데이트만 할 때에는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아예 아무런 신호를 주지 않는 방식을 취하면 되었다. 그러나 일상을 촘촘하게 공유하다 보니, 거절의 세팅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30%만 하고 싶을 때”도 하게 되는 상황이 빈번해졌다. 그런데 상대방은 상지가 좋아하는 줄 아는 상황이 반복되자, 상지는 “이게 맞나? 이렇게 해도 되나? 지금 내 말이 정확하게 전달이 되고 있나?” 고민하게 되었다. 상지는 관계가 놓인 상황에 따라 “동의의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변화된 조건을 상호 확인하고, 새로운 합의 내용을 만들어갔다.
※유진과 상지의 구체적인 ‘동의’ 이야기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에 공개된 인터뷰집 『동의를 질문하며 위험 너머 나아가기』에서 볼 수 있다. https://sisters.or.kr/data/report/321
유진과 상지의 이야기를 통해 ‘적극적 합의’는 나만의 의지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의지도 있어야 한다는 것, ‘동의’는 계약서처럼 한 번 정해두면 끝이 아니라 달라진 상황과 맥락 위에서 실행되는 구체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여성들도 ‘동의’에 대한 여러 의미 있는 통찰을 전했다. ‘동의’를 둘러싼 갈등은 관계 내 힘의 불균형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일상과 성적 관계에서 나 스스로가 힘이 있는 상태와 위치에 있는 것이 ‘동의’에서도 중요하다는 것 등을 경험적인 지식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15명의 인터뷰 참여자뿐만 아니라 현실 속 많은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동의’를 시도하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과 관계를 구성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성적 동의도, 성적 권리도 관계 안에서 실천되고 보장된다. 법제도라는 틀이 개인들의 인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동의 강간죄’는 어서 도입되어야 한다. 상호 성적 행위에서 ‘상대의 동의’는 필수적이고, 상대의 의사는 존중해야 한다는 상식, 어떤 위치에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언어를 쓰건, 모든 사람들은 동의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자리잡게 할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담아내지 못한 다양한 몸과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성적 동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익숙한 섹스 각본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서로의 취약성을 공유하고 살피는 대화가 가능한 섹스에 대해서, 협상과 선택 앞에서 무력하지 않고 힘이 있는 상태에 대해서,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는 방식의 성적 규범과 실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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