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 2003)의 병구(신하균 배우)가 말했다. “이 더러운 외계인 놈아!” 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든 이 사회가 병구에게는 도무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병구는 인간을 참 사랑했나 보다. 감독은 그런 병구를 사랑했다. 그래서 감독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강사장(백윤식 배우)을 외계인으로 만들었다. 감독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2023)의 안사와 홀라파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다. 그들이 듣는 라디오에서는 연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가 보도된다. 홀라파는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말이 없고 조용하던 안사는 어느 날 라디오를 툭 꺼버리고는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한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 감독은 이 지긋지긋한 전쟁과 열악한 노동환경, 약물 중독 속의 둘에게 꾸준히 음악을 들려주고 영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음악과 영화들이 풍파 속의 사랑을 가능케 한다.
“괴물은 누구게?”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3)의 두 아이, 미나토와 요리가 괴물 게임을 한다. 영화는 화재로 시작한다. 이 재난 속에 또 다른 재난이 있었다. 성적 지향에 대한 고민이다. 호모포빅한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괴물 취급을 받곤 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사회야말로 괴물이라고 말한다. 끔찍한 터널을 지나도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엔딩의 질주가 마냥 판타지가 아니길 기도했다.
영화는 전부 거짓말이다. 진실을 위해 모인 거짓말이다. 이 진실된 거짓말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영화는 진실과 거짓이 서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매체다. 연출된 진실. 그것을 나는 가짜라고 부를 수 없다.
사실과 연출이 만나 만드는 진실
영화는 전부 거짓말이지만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을 토대로 한다. 〈지구를 지켜라〉 속 인간들이 만들어온 전쟁과 착취는 사실이다. 심지어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실제 르포르타주 영상이 나오기도 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우크라이나의 전시 상황 또한 사실이다. 성우가 새로 녹음을 했을 수도 있고, 이미 송출된 라디오 뉴스를 다시 활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그 내용은 사실이다. 〈괴물〉 속 성소수자 아이들을 외면하고 비웃는 사회 역시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모든 극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흔히 말하는 ‘실화 바탕’의 극영화는 사회의 일면을 담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실제 사건을 재구성할 때, 이미지화할 때 가장 세밀하게 신경을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디테일’을 중시한다. 사전적 정의로는 ‘세부 사항’을 뜻하는 디테일(detail)은 관객에게 ‘리얼함’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공간의 미술, 배우의 연기, 각본 속 대사, 의상, 소품 등 현장의 모든 것이 디테일이 될 수 있다. 특히 시대 배경이 두드러지는 영화에서 연출의 디테일은 관객에게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실화를 다룰 때는 선택과 집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상세히 다룬다면 집중해야 할 인물의 감정이나 사건에서 멀어지게 된다.
〈다음 소희〉가 보여준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은 것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 2023)는 대기업의 하청업체 콜센터로 실습을 나간 고등학생 소희의 이야기다. 전주 콜센터 실습생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 영화다. 이 영화의 디테일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치는 것에 있다. 교육이 목표가 되어야 할 학교가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다. 청소년들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보내고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않는다. 기업은 그 청소년들을 ‘실습생’이라는 이름 하에 착취한다. 노동 강도는 살벌한데, 수습 기간이라며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금방 관둘 것이 뻔하다며 몇 달 뒤에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한다. 교육청 또한 마찬가지다. 고된 노동에 내몰린 청소년들을 나몰라라 한다.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학교, 기업, 교육청 모두 발뺌한다. 학교에서는 취업률을 올려야 인센티브를 받아서 교사들의 월급을 줄 수 있다고 하고, 교육청도 실적을 올려야 예산을 더 받는다고 말한다.
오유진 형사는 소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맡게 된다. 유진은 소희가 근무하던 콜센터 업체에 간다. 기업 간부들과 팀장이 모인 자리,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소희의 집안 환경과 개인 성향 탓을 한다. 오유진 형사가 그들을 보는 컷이 있다. 오유진 형사의 시점샷으로 컷하지 않은 채 한 명, 한 명을 보는 장면이다. 오유진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는 첫 번째로 가장 높은 간부를 쳐다본다. 그가 눈을 피하자 좌측으로 패닝하여 다른 간부를 쳐다보지만 역시나 눈을 피한다. 그 다음 인물도 마찬가지고 마지막 팀장도 역시나 눈을 피한다. 자기들 잘못은 아니라며 발뺌하는 기업의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샷이다.
오유진 형사의 눈을 피하는 인물들의 샷은 교육청에서도 나온다. 교육청을 찾아가 수사를 하던 오유진은 또다시 발뺌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장학사와 대화를 하다가 오유진은 고개를 돌려 사무실의 사람들을 본다.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한다. 학교, 기업, 교육청은 모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셋은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진다. 그 점은 공간적 특성에서 드러난다. 바로 실적표다. 취업률과 콜 수가 순위로 매겨진 실적표에는 숫자가 가득하다. 세 공간마다 가장 크게 자리잡은 실적표 속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청소년, 학생, 노동자, 소희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숫자다.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집중해 전달해야 할 디테일은 이런 구조적 맥락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중요하지 않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디테일을 전달한다. 잔인한 사건의 구체적 묘사나, 불필요한 가해자의 서사 등이 그러하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가해자의 주변 평판이나 어렸을 때의 선행을 보도하기도 한다. 가해자의 입장을 그대로 옮기기도 한다. 범죄를 한 명의 악마가 저지른 끔찍한 일이 아니라 그 맥락을 파악하고 싶다면, 그 분석이 두려움을 덜고 다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있으려면, 포커스를 맞춰야 할 곳은 이를 방치하고 키운 사회의 불균형과 허술한 법의 심판이다. 카메라가 향해야 할 곳도 같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질문
영화는 열악한 구조를 상세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실감을 전한다. 인물의 감정을 강요하기보다는 답답한 상황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소희의 마음을 구태여 설명하는 대신 소희가 보는 것을 관객도 보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소희가 댄스학원을 나오며 보았던 눈, 슈퍼에서 보았던 빛, 세상을 떠나기 전 보았던 눈과 강물의 인서트는 개별 컷 자체가 슬픔, 기쁨, 좌절 등의 명확한 감정 언어를 띠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소희는 슬프다’, ‘소희는 기쁘다’, ‘소희는 좌절한다’의 마침표가 아니라 ‘소희는 이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의 물음표를 전한다.
이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유진의 태도와 꼭 닮아 있다. 쉽게 마침표를 찍는 다른 형사들과 달리 오유진은 물음표를 가지고 사건을 대한다. 그리고 영화가 관객에게 소희가 본 것을 보여주듯 오유진 또한 소희가 본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소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물을 오유진이 그대로 바라보는 인서트가 나온다. 두 인서트는 모두 프레임 가득 강물이 차 있다. 비슷한 샷 사이즈로 동일한 물질을 담는데 같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날씨와 시간대가 달라 강물의 색과 물의 출렁이는 강도가 다르다. 이를 같게 찍고 싶었다면 색보정에서 맞출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다르다. 소희가 보는 강물 시점샷에서는 카메라는 아주 느리게 이동한다. 유진이 보는 강물 시점샷에서는 앞의 샷보다 더 빠르게 이동한다.
벽 앞에서 지친 유진은 소희가 떠나기 전 들렀던 슈퍼에 간다. 소희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소희가 시켰던 맥주를 똑같이 시켜 마신다. 그 날 문틈 사이로 소희의 발을 타고 올라오던 빛이 유진의 발을 타고 올라온다. 유진은 소희가 보았던 것을 본다. 이 두 샷은 앵글이 같다. 견고한 구조 앞에서 유진의 계속된 질문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유진의 부딪힘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부딪힘이 한 번에 모든 부조리를 깨부수진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는 조금은 다가갈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틈의 시작이라고 보여준다. 그 틈의 모양새는 물음표다.
기업과 교육청은 노동자가 사망한 사실에 거짓을 더해 사실을 왜곡한다. 산업재해가 아니라 개인의 성격, 환경 탓으로 돌린다. 영화는 이 전체 사실에 연출을, 즉 ‘거짓’을 더해 진실을 전한다. 거짓을 더하는 같은 방식을 취하지만 왜곡과 탄압, 입막음이 아니라 폭로와 연대를 위함이다. 〈다음 소희〉의 거짓은, 거짓에 가려진 사실을 위해 기능한다.
계속 두드린다면
〈어느 멋진 아침〉(미아 한센-러브 감독, 2023)의 산드라는 성장하며 근육통을 겪는 어린 딸과, 노화의 시기를 한땀 한땀 보내는 아버지 사이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시작도 끝도 모두 아픈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은 오고, 그 중에 어느 멋진 아침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며 소중한 것이라고 영화는 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단지 형상의 소멸일 뿐, 기억하고 믿는다면 계속 존재함을 말해준다. 영화 속에서 소희는 떠났지만 열악한 노동환경에 실습 명목으로 끌려가는 청소년 노동자들은 계속 존재한다. 이들이 출근을 하며 하루 쯤 멋진 아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위해선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그것이 구조적 개선을 이루기도 하니까.
〈다음 소희〉의 유진은 또 다른 청소년 노동자 태준에게 욱하면 어디에든 말하라고, 자기한테라도 말하라고, 경찰한테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 태준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본다. 영화가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이어진다. 태준이 울먹이며 말한다. “고맙습니다.” 카메라는 태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샷이, 다음 씬이 있었다. 영화는 응시하면 다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음을 준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을 바꾼다. 그리고 관객이 세상을 바꾼다. 소희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개개인의 삶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껍지만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그 빛을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꼭 봐야 할 영화다. [연재 끝]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그리고 단행본 『극장 앞에서 만나』(오월의봄, 2023)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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