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는 취직을 위해 고용주에게 보여주는 노동자의 구직 자기소개서이다. 이와 의미가 좀 다른 이력서로서, 청년 페미(feminist)+워커(worker)들이 같은 노동자의 위치에서 서로 “지금까지 해온 노동 이력”을 질문하고, 이야기하고, 소개하는 연재를 싣는다. 기록자와 인터뷰이는 모두 한국여성노동자회 청년여성 소모임 페미워커클럽 6기 노동기록팀이다. [편집자 주]
20대인 현은 글 쓰는 사람이다. 대학생 기자 활동과 인턴 생활,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이미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사 공채 준비에 들어갔다. 기사 쓰기가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잘 맞는 일로 현실과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글쓰기와 기자-되기 사이에서 그는 자기 노동의 가치와 쓰임에 대해, 잘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에 대해, 자신감과 좌절감에 대해, 생계와 미래에 대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어떤 부분은 결론을 내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처럼 막막하다. 그래서 지금의 현을 기록하는 일은, 밥벌이와 이상의 괴리에 아득해하며 자기 길을 부단히 찾기 위해 열심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자를 꿈꾸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한국의 진로 교육 과정은 토론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현에게 ‘있어 보이는’ 직업으로 ‘기자’를 제안했고, 현은 이를 받아들였다. 대학도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그때까진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정론 직필하는 이미지가 좋았지만, 곧 깨지고 말았다.
대학 2학년 때, 한국여성노동자회 기자단에 참여하며 가정폭력 생존자에 대한 기사를 쓰고 나서다. 기사는 현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내가 그랬다. 폭력이 있는 가정을 벗어나 살아가는 주체적인 사람. 가정폭력 생존자를 이해하는 나의 언어였다. 빈약한 언어만 가지고 있었기에, 폭력 피해자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 집을 나가야지!”라고 섣부른 조언을 했다. 자신이 겪은 폭력을 빨리 간파하지 못하는, 얼른 가정을 벗어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답답했다. 탈출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멋져 보였다. 그렇게 가정에서 탈출하는 여정을 낭만화했다. (…) 맨 처음, 내가 생각했던 생존자들의 삶에서 ‘생계’는 빠져있었다. 여성의 독립과 주체적인 선택이라는 자긍심에 국한되어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구체적 삶, 생존자가 혼자 해결해야 했던 불안정노동, 이러한 불안정노동에 엮여있는 빈곤한 삶은 놓치고 있던 것이다.]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한 여성들의 ‘생계’는요? 일다 2020/11/16 https://ildaro.com/8893
양육자의 폭력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당장 오늘 밤의 잠자리와 앞으로의 먹고 살 걱정 앞에 전전긍긍하는 마음. 집을 뛰쳐나가고 싶지만, 생계 걱정에 머뭇거리던 밤. 현은 이 나약한 감정을 ‘밑바닥’ 혹은 ‘날것’이라고 표현한다. 생존자의 ‘밑바닥’을 비굴하다고 해야 하는지, 책망해야 하는지, 감싸 안아야 하는지 고민하며 기사를 써 내려간 현은 그때 “진짜로 알아야 할 이야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넌지시 물었다. 생존자의 ‘밑바닥’은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느냐고. 질문을 던지며 함부로 넘겨짚었다. 으레 기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사안에 한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겠지. 기본적으로 기자는 중립적인 자세가 필요하니까.
대번에 아니라는 답이 날아왔다.
“한 발 떨어져서 보는 게 아니라 더 깊숙이 가야 해요. 오히려 현장에 밀착해 있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아요. 자기를 그저 외부에서 관망하러 온 사람이라고, 취재하러 온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순간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많이 느꼈어요. 기자는 ‘기자라는 직업’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면 안 된다는 거죠.”
이상했다. 기자가 사건의 외부에서 취재하는 사람이지 뭐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기자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것 아닌가. 기자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 찾아와, 바깥의 시선으로 질문한다.
그러나 현의 해석은 좀 달랐다. 기자가 외부자의 영역에만 남으려 하며 바깥의 시선만 고집한다면, 권위를 남용하는 것과 같다. 현은 이를 ‘기자들이 어깨에 힘주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현은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 인터뷰를 하며 어깨에 힘을 뺀 뒤에 발견할 수 있었던 당사자의 속 깊은 이야기, 그러니까 ‘밑바닥’이 스스로를 확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객관과 중립도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이것이 현장에 밀착하지 못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기자라는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달라졌다. 그렇게 현의 세계가 깨졌다.
“제 말을 좀 더 정리해보자면, (기사를 쓰는 건) 내 세계가 계속 깨져가는 걸 느끼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다 부서지고,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다 깨지고, 그렇게 해서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여노(한국여성노동자회) 기자단에서 가정폭력 생존자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평생 그렇게 ‘어깨에 힘 준 기사’만이 멋진 기사라고 생각을 하고 살아갔을 것 같아요.”
현은 당사자로서 스스로의 ‘밑바닥’을 그대로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록산 게이의 책 『헝거』에 대한 서평에서는 비만인 자신을 고백하며 세상에 질문한다. 당신들은 자기 몸을 정말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냐고. 수치심 느낀 적 없냐고. 나는 있다고. 내 몸이 부끄럽다고. 마치 ‘감옥에 갇힌 기분’이라고.
[많은 여성이 외모와 몸을 변형하고 싶은 욕구, 다이어트라는 말조차 방어막 없이 말하기 두려운 마음, 때로는 자기 몸을 사랑하기보다는 푸념하고 미워하고 싶었던 많은 순간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대개 이 감정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꺼낼 수 없었을 고통스러운 화제였을 것이다. 『헝거』가 강력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헝거는 몸에 대한 고백이 “내 몸을 긍정하자!”는 슬로건으로 일축될 수 없음을 말한다. (…) 대신에 당신과 같이 그 모순적 감정과 경계들을 말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 발화가 몸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내밀한 욕망에 떳떳할 수 있는 용기, 당신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기를 원해도 괜찮을 수 있다는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만인의 모순, 그렇지만 모순된 욕망과 함께하기, 오마이뉴스 2021/06/08
이렇게 고백한 자신을 두고 현은 ‘쫄보’라고 한다. 나는 뚱뚱한 사람이라고, 다수가 보는 매체에 대차게 공개해놓고는 자꾸 자신을 ‘쫄보’라고 하는 그.
‘쫄보’는 또 다른 대목에서도 등장했다. 현은 글 쓰는 게 무섭다고 한다. 특히 특정 사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이 보기에, 그저 정보를 나열하여 피상적으로 다루는 기사가 나올까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누가 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기사를 쓴다고 한다. 이 또한 자기가 ‘쫄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현이 말하는 ‘쫄보’라는 게 뭘까?
“쫄보라고 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어떤 걸 접할 때 신중해야 하고 대상을 똑바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고. 중요한 것은 진짜 바닥에 있는 쫄보 같은 감정들. 그러니까 가장 날것의 면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들춰보기 싫어하는 감정에 진짜가 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기자가 기사를 쓸 때, 좀 작아 보이고 수치스러운 감정일지라도 누구나 한 번씩 느껴봤을 그 감정을 폭로하는 게 더 널리 보편적으로 읽히지 않을까 해요. 비겁한 감정들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 놓여 있다고 느껴요. ‘(내 몸이) 자랑스럽지 않고 여전히 수치스러운데, 다른 사람들도 한 번도 안 느껴봤을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고, 이 감정을 모두 함께 알자는 게 제가 쓴 『헝거』 서평의 취지였어요.”
밑바닥 감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기사에서 팩트보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현에게 ‘쫄보’는 당사자가 가진 문제에 더 열심히 밀착하고 더 성실히 바라보겠다는 다짐이다. 한편으로 스스로의 ‘밑바닥’을 외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다른 이의 ‘밑바닥’만 보려고 하는 것 또한 기자가 저지르는 무례함일 수 있다. 스스로를 쫄보라고 표현하는 건, 혹시 저지를지 모를 무례함을 경계하겠다는 약속의 말이다.
그래서 현이 스스로를 ‘쫄보’라고 할 때마다 이상하게 자신 있어 보인다. 기자라는 직무를 누구보다 잘 해낼 거라고. 나는 앞으로 당사자들의 곁을 지키면서 그의 밑바닥에서 진실을 길어 올리는 기자가 될 거라고, 또 그 마음으로 내 삶도 살아낼 거라고. 그야말로 거침없는 출사표다. 세상 가장 대찬 ‘쫄보’다.
언론사 공채는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어려운 시험이다. 대부분 대학 졸업장이 있는 사람이 ‘언론고시’에 도전한다.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사건 현장에서부터 국회, 심지어 전쟁터까지 일반인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현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러한 사회적 권위를 현도 갖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현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도 남들에게 들키기 싫은 불편한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학벌을) 내세워야 할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당락이 갈리는 취업 시장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다는 그 만족감이 숨겨지지 않아요. 그게 가장 잔인한 점인 것 같아요. 그럴 때 어떤 기분이냐면, 무력해요. 그냥 이 속에 살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무력감들이 있어요. 내가 뭘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게 있잖아요. 그렇다고 그냥 놔버린 건 아니에요. 저는 이 무력한 감각을 끝까지 갖고 가려고 해요. 그래, 나 먹물이다. 내가 이만큼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걸 지금 잘 배워두자. 적어도 자기 주제파악을 하는 거죠. 그리고 다짐해요. 오늘 더 똑바로 알고 가자고.”
현은 한국 사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아왔다. 그게 두려워질 때가 있다. 전형적인 루트를 걸어온 주제에, 전형적인 루트에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정말 그 사람의 밑바닥에 장벽 없이 다가갈 수 있을까. 이 두려움을 그는 ‘무력’하다고 표현한다.
현은 밑바닥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기존의 관념이 깨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이미 겪었다. 더 이상 밑바닥 감정이 불쑥 올라오는 것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다. 떨쳐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력함을 곁에 두고, 무력함을 의식한 채 취재 현장에 다가간다면,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걸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현과 두 번의 인터뷰를 거쳤다. 두 번의 만남 사이에 그가 쓴 글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어떤 글은 현이 말한 ‘쫄보’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내딛고 있었다. 또 어떤 기사는 성큼 앞서나가 있기도 했다. 다들 여기 와서 이 문제 좀 들여다보자고 손짓하고 있었다. 현은 이미 자기를 녹여 글을 빚어내는 작가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글을 쓰며 안정적으로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미래를 꾸려가고 싶다. 언론사 공채는 앞으로를 기획하는 과정 중 하나다. 그런데 공채는 시험이다. 떨어질 때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탈락과는 익숙해지기 어렵다. 취업준비생의 일상은 만만치가 않다. 공채 시즌에 몰려드는 서류전형 일정과 각종 테스트 일정을 챙기는 것도 스트레스다. 그런데 현은 말한다. “버틸만하다”고.
현은 알고 있다. 스스로가 무엇을 재밌어하고 무엇을 시시해 하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지. 내 쓰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이것들을 깨닫기까지 현은 쉼 없이 취재했고, 인터뷰 녹취를 풀었고, 자료를 정독하며, 기사를 썼다. 정식 기자 신분도 아니었고 고료는 적었지만 쉬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내가 이렇게도 뭘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하며 실망할 때도 있다. 기사 한 편을 쓰면 현의 세계가 깨져버렸다가 머지않아 다시 구축됐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취업준비생의 하루가 버틸만하다. 이 버티는 힘으로 현은 나아간다.
[필자 소개] 사월. “꽃피는 좋은 계절에 태어났군요.”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업무를 볼 때. 숫자 여섯자리 주민번호 앞자리를 보고 어떤 이가 말합니다. 늘 좋은 계절처럼 살아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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