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너이기 때문이야.” 『사랑 사랑 사랑하는 이유』 (므언 티 반 글, 제시카 러브 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2023)는 사랑을 찬미하는 그림책인가? 사랑하니까 “든든”하고 “세상은 놀이터”가 되고 “날마다 더 용감”해지고, “전보다 더 많은 게” 보이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랑 노래! 모진 뉴스를 잔뜩 들은 날 이 책을 만났기 때문일까. 후루룩 읽었기 때문일까. 공감은커녕 도리어 이상한 냉소가 피어오르려고 했다. 전쟁과 ‘식인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 세상에, 무슨 사랑 타령?7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린 작가가 제시카 러브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어를 믿나요』와 『결혼식에 간 훌리안』을 통해 젠더와 인종, 몸과 관습에 대한 낡은 틀을 깨트리고, 통쾌하고도 자유로운 기쁨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우아, 천천히 다시 보길 잘했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피부도 몸짓도 머리카락 빛깔도 다른 두 여자 품에서 한 아이가 웃고 있는 장면이 있다. “나를 꼭 안아 주어서 엄마 아빠를 사랑해요.” 침낭과 배낭을 멘 여자아이와 그 여자아이를 꼭 닮은 엄마가 문 앞에 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있다. “내 최고의 이야기는 바로 엄마예요.” 이제 두 사람은 저만의 여행을 시작하겠지.
책장을 더 넘기면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와 의료용 보행기에 의지해서 걷는 여자아이가 스포츠 경기장에서 신나게 응원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를 기다려 주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사랑해요.” “사랑하니까, 할아버지는 절대로 늦지 않아요.” 쌍둥이 자매가 열 번째 생일 파티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런데 사뭇 독자의 예상과 다른 모습이 펼쳐지는데... “사랑하니까, 우리는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는 거야.”
개성과 사랑스러움이 담뿍 담긴 인물 표현과 그 인물들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관계성, 흥미로운 구성 방식은 열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글을 풍성하게 드러낸다. 독자는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이는 곧 보편적이면서도 고유한 저마다의 사랑을 상상하고 응원하는 동력이 된다.
이 책의 원제는 “I Love You Because I Love You”이다. 이 책을 곱씹어 볼수록 이 책은 사랑을 찬미하는 책이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노래가 된다. 메리 올리버의 시처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어떤 존재와 몸짓이든 너를 사랑한다는 이야기! 결국 이 책의 구석구석을 사랑하게 되고 만 나는 이런 글을 쓴 이는 누구일까, 궁금해지고 말았다.
절박한 바다 위 난민이었던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비밀리에 탈출하여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하여, 가족의 구금과 이별에 대하여, 또 두려움과 상실뿐 아니라 희망과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들을 때면 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랑 사랑 사랑하는 이유』를 쓴 므언 티 반은 어릴 적 고향 베트남을 탈출해서 바다 위를 떠돌며 난민으로 살았던 여성이다. 그는 그때 기억을 바탕으로 그림책 『소원들』 (므언 티 반 글, 빅토 가이 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2023)을 쓰기도 했다.
빅토 가이는 짧은 글 안에 여러 이야기와 감정이 담겨 있음을 느끼고, 불안과 희망, 두려움과 간절함을 갖고 작은 배 위에서 떠돌아야 했던 어린 아이의 마음을 촉감과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집의 공간과 연결해서 표현하려고 여러 화풍을 연구했다. “나는 오후의 햇빛이 내 아파트 벽을 가로질러 춤추는 방식을 관찰하여 물체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었어요.”
이 책의 표지에는 밤바다를 건너는 작은 배와 그 안에 탄 사람들, 그리고 독자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겉표지를 벗겨내면 새로운 표지가 하나 더 드러난다. 본문에 등장하지 않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 있는 또 다른 난민 어린이들의 모습이다. “내전으로 인한 폭력과 박해뿐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자연재해와 기후 변화로 인해, 매일 더 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고 있지요.” 난민 당사자의 고백과 그 마음을 열심히 듣고 공감한 그림 작가의 노력이 어우러져 모두의 이야기 확장된 그림책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토록 위험천만한 삶을 살아온 므언 티 반은 어떻게 『사랑 사랑 사랑하는 이유』과 같이 사랑을 믿고 기뻐하는 글을 쓸 수 있던 걸까? 아, 그런데 이런 내 질문은 방향이 잘못된 걸까? 내 안에 있는 난민에 대한 편견으로 나는 무례한 궁금증을 갖게 되는 걸까?
여행 가방을 든 ‘이방인’이 도착한 독특한 시공간
『도착』 (숀 탠 지음, 사계절, 2008)은 홀로 배에 오르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자는 검은 연기와 뱀처럼 구불구불한 무언가가 공중에 넘나드는 황량한 도시에, 다정하게 손잡아 주는 부인과 딸아이를 남겨 두고 먼 길을 떠나온다. 하늘 모양이 수십 번 달라지는 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온 남자는 마침내 낯선 항구에 도착하고, 저처럼 큰 가방을 둘러맨 허름한 사람들과 함께 긴 줄을 선다. 낯선 문자들과 표식 앞에서 복잡한 통과 검사를 받은 남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불편한 수고를 겪고서야 간신히 한 장의 증명서를 받는다. 그리고 남자는 풍선에 매달린 작은 박스를 타고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마을에 도착한다. 먹을 것과 일터, 잠자리를 수소문하기 시작한 남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주고 받으며 점점 낯선 곳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전개와 독특한 시공간,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독자는 꽤 집중해서 이 책을 봐야 한다. 이 책은 글자가 없이, 841컷의 크고 작은 그림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또한 현실에서 익히 보아온 공간과 물체, 동식물과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과 존재들이 그림에 등장한다. 새와 물살이를 닮았지만 새도 물살이도 아닌 무엇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도마뱀붙이도 고양이도 아닌 무엇이 남자의 반려동물로 살아간다. 신비롭지만 낯설고 그래서 두렵기도 한 이 책의 그림 서사를 따라가면서 어쩌면 독자는 이주민이 된 듯한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를 낯선 방식으로 해독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어렵고 불안하다.
이 책을 지은 숀 탠은 “문화적 방향 상실과 글을 모르는 것과 ‘이방인’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그는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어느 소외된 인물의 막연한 심정이 담긴 사진”에서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인 혼혈이자 이주민의 자손으로 호주에서 살았던 그는 예술과 소속감에 대한 질문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낸 한국 출판사는 이 책을 가리켜 “가난과 박해, 그리고 다른 어떤 이유에서건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선 나라에 정착해야만 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그림으로 쓴 서사시”라고 했다. 나는 거대한 기계 노동의 노예가 된 사람들과, 강요된 노동 대신 공부를 하고 싶어서 탈출한 동양인 여성과, 해골이 늘어선 전쟁터에서 다리를 잃은 노인, 그리고 이주민보다 먼저 집과 공간에 살고 있었던 비인간동물들이 새로운 도착지에서 어울려 살며 만들어가는 새 이야기에 뭉클해질 뿐이다. 그리고 남자가 가족을 다시 만났을 때, 그다음 세대가 보여주는 희망과 여운을, 면지에 실린 사실적이면서도 거짓말 같은 여러 인물들의 역사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진다. 작가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진짜로 좋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다.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얼마나 진실과 나란히 달리느냐에 달렸다.”고도.
진실과 거짓말, 마리나의 고향 이야기
진실과 거짓말 사이에 또 한 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마리나』(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지음, 이명아 옮김, 곰곰, 2023)는 바닷가에서 어린 형제에게 발견된 여자아이다. 그는 형제네 집에 오게 되고 형제네 엄마의 돌봄을 받으며 적응해간다. 처음에는 낯설어하거나 어려워하는 것도 많았지만, 금세 새로운 언어를 익혔고, 제 까만 피부 빛을 모욕하는 이를 물어뜯을 만큼 씩씩하다.
마리나는 집도 없고 혼자지만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약자가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문을 꼭 잠그고서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바닷속 제 고향에서 겪은 이야기를 신나게 말할 줄도 알고, 재미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깔깔거리며 웃을 줄 안다. 형제네 식구들과 점점 가까워진 마리나는 자신이 바닷속 공주라고 말하는데, 형은 마리나를 믿지 않고 마리나의 고향 이야기를 깔보고 욕한다. 그러자 마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많은 어른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유아 독자는 마리나가 보여주는 입체적인 표현과 선명한 이야기에 재미를 느낀다. 나는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 집에 신이 찾아온 날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느낀다. 그 신을 돌려보낼 것인가, 환대할 것인가 생각하다 보면, 므언 티 반 작가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여기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쓴 것과 숀 탠의 작품에 나오는 여러 인물과 물체, 비인간동물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이야기가 잇따라 떠오른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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