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빵 끈, 채소 묶은 ‘폐철사’로 작업합니다

기후우울의 시대, 다른 내일을 만드는 여성들➂ 철사 아트

좋아은경 | 기사입력 2024/03/29 [13:31]

달력, 빵 끈, 채소 묶은 ‘폐철사’로 작업합니다

기후우울의 시대, 다른 내일을 만드는 여성들➂ 철사 아트

좋아은경 | 입력 : 2024/03/29 [13:31]

여성환경연대에서 주관한 제8회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 “우리는 멸망하는 세상에서 틈새를 만든다”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기사입니다.

 

▲ 환경 예술가 좋아은경. 여성환경연대에서 주관한 제8회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 “우리는 멸망하는 세상에서 틈새를 만든다”에서 강연하는 모습. (출처-여성환경연대)

 

[강연자 소개] 좋아은경. 환경 예술가. 버려지는 철사로 작업하는 철사 아티스트. 달력의 용수철에서 시작된 첫 작업에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을 붙이며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전시, 워크숍을 통해 균형과 공존의 메시지, 20세기 환경과학을 이끈 레이첼 카슨의 유산을 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숲과 나무가 우리를 지키고 있음을 전하고자 매주 목요일마다 철사로 나무 글귀를 필사해 공개하는 ‘나무 읽는 목요일’에 몰두하고 있다.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의 예술

 

저는 철사 아티스트입니다. 일상 속에서 버려지는 철사를 수집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의 예술’을 주제로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제 작업을 보여드리면서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 〈침묵의 봄 Silent Spring〉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12


제 첫 작업 〈침묵의 봄〉입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달력이 먼저 보이는 분도 있고, 새가 보이는 분도 있네요.

 

해가 지난 달력을 분리 배출하려면 종이 위의 철사를 빼야 하는데요. 어느 날 용수철의 동그란 부분이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새의 발로 연상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동그란 부분을 하나 남겨두고 나머지를 풀어내 새 모양을 만들어 올렸어요.

 

작업 제목은 레이첼 카슨의 혁명적인 환경 고전 『침묵의 봄』(1962)에서 따와서 붙였고, 이어서 첫 개인전 〈레이첼 카슨에게 보내는 편지〉를 열었습니다.

 

이후로도 버려지는 철사로 작업하고 있는데요. 사실 버려지는 철사만 사용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아니었는데, 철사를 재료로 삼고 보니 일상 속에서 버려지는 철사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주변에서 모아주셔서, 재료 걱정 없이 작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버려지는 철사, 하면 또 어떤 것들이 떠오르나요?

 

▲ 〈Dead Bird〉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13


〈Dead Bird〉라는 작업은 생명을 잃은 새들을 작은 틴케이스에 담았습니다. 이 새들은 우리가 흔히 빵끈 철사라고 부르는 포장용 철사의 금박을 벗겨내 만들었어요. 언젠가는 쓰겠지 하고 어딘가에 빵끈 철사를 모으는 분들이 꽤 계실 것 같은데요. 전자제품을 구입하면 전선 묶는 철사도 흔히 버려집니다.

 

▲ 〈who are we?〉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13

 

이 작업(who are we?)은 언뜻 꽃다발처럼 보이나요? 자세히 보면 길게 올라온 철사의 윗부분에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각자 기다란 안테나가 돼서 네트워킹하는 것을 표현했어요.

 

이 작업은 시금치나 열무 같은 채소를 묶는 단철사로 만들었습니다. 보통 붉은 색으로 인쇄된 종이 안에 얇은 철사가 길게 두 세줄 들어가 있어요. 요즘 한창 김장철이라 제게 많이 수집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철사의 긴 성질을 이용해서 모빌을 만들어서 균형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고, 함께 읽고 싶은 문장들을 옮기기도 합니다. 철사로 하는 필사인 것인데요.

 

▲ 〈나무읽는목요일 - 첫 번째 문장〉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20

 

숲과 나무에 대한 좋은 글귀를 나무 요일인 목요일마다 철사로 옮겨서 공개하는 〈나무 읽는 목요일〉 프로젝트의 첫 문장입니다. 〈나무 읽는 목요일〉은 100주를 진행하고 지금은 잠시 쉬면서 나무 문장을 고르고 있습니다.

 

제가 나무에 특별히 집중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여름이에요.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2018년 여름이 굉장히 더웠습니다. 폭염일수가 무려 31.5일이었는데요, 여름은 더운 게 당연하지 않냐는 분들도 계시지만, 폭염은 야외활동을 자제하거나 야외작업을 중단해야 할 정도의 맹렬한 더위입니다. 그게 31.5일이었던 것인데요.

 

제가 유년기를 보냈던 1990년대의 폭염일수, 며칠이었을까요? 9.6일이었어요. 그러니 제 기억에는 한여름 무더위를 열흘 정도 보내고 나면 서서히 시원해져야 하는데, 요즘은 열흘이 덥고, 또 열흘이 덥고, 또 열흘이 더 더웠던 거죠. ‘30일도 너무 힘든데, 60일이 되면 어쩌지? 90일이 되면 어쩌지?’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기후위기가 먼 미래, 먼 남극 북극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로소 나의 일로 다가왔어요. 그러면서 여러 자료를 찾고 책을 읽던 중에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큰 울림을 주는 문장이기에 여러분께도 소개합니다.

 

“희망은 지표면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라난다.

숲과 산과 강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상적인 투쟁에 나선 사람들의 어깨동무 안에서 자라난다.” ―아룬다티 로이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中, 나오미 클라인 저, 이순희 역, 열린책들, 2016

 

인도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아룬다티 로이의 글 일부인데요, ‘희망은 숲과 산과 강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어깨동무에서 자란다’는 내용이에요. 저는 이 ‘숲과 산과 강이 나를 보호한다’는 말을 계속 곱씹으면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그동안 당연하게 지구를 보호하자, 숲을 지키자, 라는 말들을 해왔는데,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나무가 정말 저를 보호하고 있더라구요.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탄소를 흡수하고... 나무가 어떻게 우리를 지키고 있는지 하나둘 떠올려 보세요.

 

이렇듯 버려지는 철사를 통해 제 생각을 전달하고, 그 덕분에 여러분도 만나고 있는 저에게, 버려지는 철사는 정말 소중한 재료입니다. 하지만 저는 버려지는 철사를 구하기 어려워서 더는 작업할 수 없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그러려면 불필요한 생산, 소비, 폐기를 끝내야겠죠.

 

▲ 〈더 편한 달력〉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21

 

그래서 조금이라도 버려지는 철사를 줄여보려고, 철사 없는 탁상달력을 만드는 〈더 편한 달력〉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달력은 보시다시피 자투리가 나오지 않는 크기로, 한 가지 종이를 사용해서 병풍 형태로 제안했고, 나아가서 탁상달력 제작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한 해 얼마나 많은 달력이 만들어질까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달력의 총 부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4대 은행에서 배포되는 달력의 숫자는 매년 집계되는데요. 2023년에는 4대 은행에서만 약 505만 부를 배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동네 병원들, 학교, 기관 등에서도 달력을 만들고 또 요즘엔 굿즈 형태로 판매되기도 하니까, 엄청난 숫자가 매년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버려지고 있어요. 대부분의 달력에 철사가 들어가겠죠.

 

달력의 철사는 왜 문제일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종이의 문제였어요. 가지고 계신 탁상달력을 보시면, 날짜가 인쇄된 종이와 두꺼운 판지 삼각대로 구성되어있을 텐데요. 이 두 종이는 따로 분리 배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삼각대 판지는 재활용이 어려워서 종량제 봉투에 버려야 하는 색지나 코팅된 종이로 싸여있어요. 그래서 달력의 철사를 빼지 않고 그대로 종이류에 배출하면, 이 모든 종이가 뒤섞여서 재생 종이의 품질이 낮아지게 됩니다. 철사 대신 종이스프링으로 제본된 달력도 있는데, 종이류 분리 배출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그대로인 거죠.

 

물론 실물 달력 안 쓰시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제가 프로젝트 중에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해보니까, 응답자의 1/3이 이미 탁상달력을 쓰지 않는다고 했고, 사용자의 경우 절반이 무상 배포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겠다고 답했어요. 지금처럼 거의 모든 기업과 기관에서 과잉 배포할 만큼 필수품이 아닌 거죠.

 

달력의 사용 목적을 살펴보면, 바쁜 업무 중에 재빨리 날짜를 확인하는 데에 그 편의성이 있었어요.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재빨리 달력을 보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덜 해로운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상상하고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나무읽는목요일 - 100번째 문장〉 좋아은경 作, 폐철사, 2022. “In nature nothing exists alone.”(자연에서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침묵의 봄(Silent Spring), 1962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 예술’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우리가 버리고 버려지는 것이 세상이 아니라 낭비, 기후 위기가 되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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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4/04/02 [10:50] 수정 | 삭제
  • 올해 전국 벗꽃축제마다 벗꽃이 피지 않아서 난항을 겪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바로 다음해의 개화 시기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후위기는 앞장서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남 얘기 같지 않습니다. 개인의 힘은 미약하다지만 누구나 경각심을 가지고 지금보다는 노력한다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멋진 작품들도 잘 보았습니다.
  • ㅇㅇ 2024/03/30 [16:38] 수정 | 삭제
  • 나무읽는목요일에 폐철사로 쓴 문장이 의미심장하네요. 봄을 가져다 주는 것 같기도 하고.
  • sze 2024/03/29 [23:13] 수정 | 삭제
  • 폐철사로 만든 작품들이 다 아름답고 감각적이네요.
  • 야미 2024/03/29 [23:12] 수정 | 삭제
  • 정크아트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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