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신은 무얼 입고 있었나?” 강간 신화 깨다성폭력 피해자 복장을 재현하는 전시, 일본 조치대학에서 개최“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은 도발적인 복장을 하고 있던 탓”이라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은 흔히 접할 수 있는 ‘강간 신화’ 중의 하나다. 이러한 성폭력 통념에 저항하는 의미로, 미국에서 시작된 설치 전시 〈What Were You Wearing?〉(당신은 무엇을 입고 있었나?)가 세계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첫 전시가 열렸는데, 이 행사를 진행한 조치대학 다나카 마사코(田中雅子) 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주]
‘당신이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What Were You Wearing?〉은 미국의 윤리학자 메리 시머링(Mary Simmerling)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토대로 쓴 동명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설치 전시다. 2014년 미국의 아칸소대학에서 개최된 이후, 미국과 유럽 그리고 베트남 등에서도 개최된 바 있다.
2022년 8월, 나는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이 전시를 관람했다. 군복, 의사의 수술복, 남성의 평상복, 유아용 수영복, 웨딩드레스 등 성폭력 피해자의 옷으로 연상될 법한 복장과는 전혀 다른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거울에는 “what you wore should not matter”(당신이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는 상관없다)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일본에서도 이 전시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매뉴얼을 작성한 캔자스대학 성폭력예방·교육센터에 ⌜What Were You Wearing?」 시(詩)의 일본어 번역과 전시 개최에 관한 허가를 요청했고, 수락을 얻었다.
쉽지 않았던, 피해 경험 수집 과정
나는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인 11월 25일부터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 10일까지 매년 세계 각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젠더 폭력과 싸우는 16일간의 캠페인’에 맞춰, 조치대학에서 활동을 해왔다. 2023년 이 기간에 조치대학 글로벌 컨선연구소 기획으로 〈그때, 당신은 무얼 입고 있었나?〉 전시를 진행하기로 했다.
시(詩)와 전시 매뉴얼을 번역하는 작업은 학생들의 협력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 경험을 수집하는 첫 단계에서 벽에 부딪혔다. 성폭력을 경험한 학생 한 명은 기획의 의미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지만,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과거의 피해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했다.
한편, 피해 경험이 없는 학생은 어떻게 해야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피해 경험을 수집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피해 경험을 공유해달라고 학생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기존 문헌에서 공개되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옷을 전시하는 방안까지도 고려했다.
피해 경험 수집을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당시 나와 함께 뛰어준 것은 도쿄 시부야구의 편집숍 Sister 대표인 나가오 유미(長尾悠美) 씨였다. 예술을 통해 페미니즘을 전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의 격려로, 피해 경험을 모집하는 전단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그때까지 나와 접점이 없었던 학생들이 소셜미디어로 홍보를 하겠다며 나서줬다. 또한 이 전시를 본 적이 있는, 영국과 미국에 있는 유학생들이 영어 홍보를 맡아줬다.
그렇게 하여 2023년 9월 30일부터 11월 13일까지 45일간, 35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온라인 서식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줬다.(일본어 27건, 영어 8건) 그중 20명의 경험을 택해, 당시의 복장을 재현하고, 일본어와 영어로 경험을 기술하여 전시했다.
빈티지 의상 구매 전문가이기도 한 나가오 유미 씨는 공유된 피해 경험 이미지와 딱 맞는 옷을 모아 현실감 있는 전시를 실현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때, 당신은 무얼 입고 있었나?〉 전시 오픈 이후에는 다이버시티추진실, 건강지원을 하는 웰니스센터 등 학내 조직과 심리학 전공 교수들로부터도 조언을 얻었다.
다양한 피해자, 가해자의 위치 드러내
대학 안팎의 18세부터 50대까지의 협력자들이 공유해준 성폭력 피해 경험에는 남성이 겪은 피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폭력을 겪은 후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상의를 한 결과 오히려 상처를 입은 경험도 있었다.
20대의 한 학생은 어린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 두 번에 걸친 피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7~8살 때쯤, 세 살 위의 오빠가 장난감 수갑을 갖고 놀자고 했다. 부모님이 밤에 외출하면 내 옷을 벗기고 빨강색 반다나로 눈을 가리고 수갑을 양손과 양발에 채웠다. 스무 살 때, 동갑인 남성 파트너와 데이트를 하며 선술집에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러브호텔에서 성기 삽입을 당하고 있었고 옷은 벗겨져 있었다. 상대는 ‘밖에다 사정하면’ 임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날 대학 공강 시간에 혼자서 산부인과를 찾아가 긴급 피임약을 먹었다. 죽을 뻔했다. 성폭력 피해 핫라인에 전화했지만, ‘뭘 해줬으면 하는지 똑바로 말하라’는 위압적인 말을 들었다. 상담하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 기획은 언론에도 언급이 되어 많은 분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감상을 남기는 사이트에는 “나 역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글 외에도, 성폭력 경험 공유에 동의한 협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 성폭력 범죄에 대한 불처벌을 막는 액션 결의 등이 모였다.
다른 대학들과 단체들에서도 전시를 개최하고 싶다는 문의가 오고 있다. 각지에서 이 전시가 개최되어, 성폭력 피해자를 질책하는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고 싶다. [번역: 고주영] *연락 메일: mtanaka@sophia.ac.jp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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