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역고소 범람…가해자 변론 시장 형성돼있어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어느 날, 나는 지하철 교대역에 게시되었다는 한 법무법인의 광고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동성추행, 강간 범죄, 기타 성범죄’ 등에 대한 ‘부당한 처벌을 무죄, 불기소, 집행유예로 이끕니다’라는 광고였다.” -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 지음, 휴머니스트) p.6
지난 총선 기간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야당에서 ‘비동의 간음죄’(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가’ 기준으로 규정한 것을 ‘동의 여부’ 기준으로 바꾸는 것) 추진 공약이 나온다고 하자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는 말로 반대했다. 성범죄 관련 논의가 나올 때면 늘 빠지지 않고 ‘억울한 가해자, 무고, 거짓된 피해자’ 서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전세계를 뜨겁게 했던 미투 운동 이후 성범죄 피해자들의 인식과 태도가 변화되어 이전과 달리 고소/고발/공론화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이를 두려워하는 가해자도 늘어났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두려움은 사과나 사죄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억울함 호소와 역고소로 이어지고 있다. 거기엔 이 상황을 부추기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성폭력 피해자, 여성운동가, 변호사를 인터뷰하고 성범죄 판결을 분석해 그 ‘시장’을 세밀하게 탐구한다.
변호사 시장에서 ‘핫한 분야’가 된 성폭력
법은 약자의 편, 진실의 편에 서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신자유주의 경쟁은 ‘법시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책에 등장하는 14년 차 변호사 은주(가명)는 “(변호사 수는 늘어나는 반면) 점차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변호사들의 윤리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문가로서의 윤리니, 법률가로서의 윤리 같은 건 되게 우스워지고” 오히려 “변호사는 그냥 상인이라는 마인드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변호사도 광고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광고 타깃이 된 건 ‘성범죄 분야’였다. “이혼과 성범죄 분야는 ‘아는 사람한테 말하기 창피’해서 전혀 모르는 변호사를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고를 통해 손님을 유치하던 업계엔 “이른바 ‘성범죄 전담법인’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강조하며 “가해자 감형과 승소 전략을 ‘마치 1타 강사처럼’ 알려주면서 홍보”하는데, 문제는 이 홍보가 “허위광고로 이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형사재판까지 가지 않을 사안임에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게 해 주겠다고 ‘뻥’을 치면서 홍보”를 이어가는 이들은, “미투 운동 등으로 ‘핫한 분야’가 된 성폭력”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역고소는 “‘패키지’로 수임”될 정도로, 변호사들은 가해자/피의자에게 여러 역고소를 기획, 제안한다. 그 과정에서 “법률 지식이 부족한 가해자”들은 “변호사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어렵고,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수임하기도 한다. 때때로 “자신이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한 사실을 모르는 가해자도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이라니, 법시장은 피해자의 편도 가해자의 편도 아닌 자신들의 물적 이익 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정의’라는 이름이 따라붙던 법은 어디로 갔을까 묻게 된다.
구조보다 개인을 탓하는 ‘엄벌주의’ 이면, 가해자 온정주의 대두
한편, 저자는 지금의 법시장 형성 과정에서 ‘가해자 엄벌주의’ 영향도 짚는다.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구조나 성별 권력에 대한 성찰 없이 진행된 법 제·개정에 대한 백래시로 가해자 인권 및 인격권 담론이 부상하면서, 지나친 엄벌 및 부가 처분들이 가해자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온정주의도 함께 대두되었다”는 분석이다.
책에 등장하는 변호사들은 “성폭력 가해자 양형 강화와 부가 처분들로 인해 ‘가해자 쪽의 시장이 열리’게 되고, 법원의 판단 기준은 ‘오히려 피해자한테 더 보수적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가해자들은 범죄자가 돼 감옥에 가거나, 신상정보등록이 되거나, 취업제한이 될까 두려워 “극렬히 싸우는” 방법을 택한다. 자신은 “나쁜 가해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자신의 가해행위를 더욱 필사적으로 부정하거나 축소”하려고 한다. 그러니 변호사의 중요성이 강화되는 거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정보도 공유한다. “성범죄 전담법인에서 운영하는 가해자 전용 카페”는 특히 ‘전문적’이다. 법인은 카페를 통해 “법적 노하우뿐 아니라, 회원자격의 관리, 스킬의 공유, 공감과 연대를 위한 활동들을 통해 회원들을 유치하고 가해자들이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운영방식을 활용”한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함께 질문해야
성폭력 사건과 관련된 ‘법시장’은 이미 형성됐고, 점점 발전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폭력 사건 해결은 점점 경제적 기반의 싸움이 되고 있다.
저자는 “성폭력 사건 해결이 사법화되는 현상은 ‘정치의 사법화’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문제해결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짐으로써, 법원이 공동체 다수의 입장과 다른 판결을 내릴 경우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질서는 개인화되고 시장화된 피해자와 가해자를 생산해내면서 성폭력은 점차 경제적인 것으로 이동하고 피해와 가해의 의미를 재구축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분명 법은 필요하고 중요하며, 신뢰할 수 있는 법 제도가 마련되는 것과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화’ 상태를 내버려 둔다면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변호사 시장의 무분별한 홍보와 고소 남용에 대한 변호사 업계 차원의 규제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형사공공변호인제도 도입”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더불어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현재 일본,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피해자참가제도’도 검토”해 보자고 덧붙인다.
전부 법으로, 법을 중심으로 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비사법적 해결”을 고민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피해자들을 이야기를 들은 저자는 이들이 치유와 회복에 다가갈 수 있었던 건 “법적 해결 외에 본인의 경험을 드러낼 수 있는 문제 제기의 장이 있었고, 자신의 경험을 피해로 명명할 수 있었던 미투 운동과, 믿고 중재를 맡길 수 있는 단체가 있었다는 점. 무엇보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와 주변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는 현재 성폭력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을 제대로 논의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 책이다. 피해자들이 의지하는 법마저 ‘시장화’되고 있는 상황을 분석하며, 미투 운동 이후를 모색하는 책이기도 하다. 또한 독자들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떤 위치에 놓이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 좋아요 24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