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일본에서 단독 공연이라니…
“오늘은 내가 이내 매니저니까!” 일본 가정식 아침밥에 감탄하는 나에게 미와코 씨가 말했다. 밥과 미소시루와 정갈한 반찬들이 아리타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야키모노)에 담겨있다. 남은 밥은 오니기리(삼각주먹밥)로 변신해 점심 도시락이 되었다.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 중간에 도시락을 꼭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믿어지지 않지만, 오늘은 내가 일본에서, 오롯이 일본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 처음으로 공연하는 날.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일본 시골마을로 여행을 떠나자고 마음 먹었을 뿐인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통화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소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글자보다 한결 편했다. 내용은 아리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부산에서 노래하는 친구가 여행 온다고 했더니, 그럼 공연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 나는야 부르면 어디든 가는 동네 가수니까 무조건 오케이다. 그때부터 소라와의 대화에는 공연 기획자와 공연자가 주고받는 내용이 더해졌다.
이상한 우연과 모두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목욕탕 같은 따뜻한 동네 공연
일본어로 된 소개말이 문제였다. 평소 한국에서 쓰고 있는 ‘가깝고, 편하고, 따뜻한 - 목욕탕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라는 문장을 더듬더듬 일본어로 고치기 시작했다. 어딘가 이상하다. 부랴부랴 지난 달 부산에 놀러 왔던 미쿠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자연스러운 일본어 버전의 소개말이 생겼다. 신기하다.
또, 적당한 사진이 없어서 이것저것 공연 사진들을 보냈더니, 소라가 라인(메신저)에서 쓰고 있는 프로필 사진은 어떠냐고 물었다. 설정해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1년 전쯤 했던 공연 사진이다. 관객이 인스타에 포스팅한 사진을 캡쳐한 거라 원본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랴부랴 인스타를 뒤져서 연락을 취했고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부탁했다. 기꺼이 보정까지 해서 보내주는 다정한 분이라 다행이었다.
일본어로 만든 노래가 두 곡, 일본의 국민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를 번안해 만든 노래, 그리고 내가 부를 수 있는 일본 노래 커버곡 몇 곡을 연습했다.
가사사진집 『걷는 섬』을 좀 팔아볼까 싶어서, 이번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음악가이자 비건 셰프인 친구 나까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책 속에 끼워 둘 일본어 가사와 노래 링크가 담긴 인쇄물은 디자이너인 친구 프랭코 님이 만들어주었다. 기댈 수 있는 동료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는다. 혼자 끙끙 앓을 필요가 전혀 없다. 소망을 품고 그저 할 수 있는 눈 앞의 일을 해 왔을 뿐인데, 일본 데뷔의 날이 왔다. 이상한 우연들과 모두의 도움으로. 우연과 도움은 바다를 건너 아리타 마을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소라가 고등학교 동창에게 기타를 빌려 두었다. 더운 여름 여행에 짐을 줄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번 행사를 주최한 ‘토모스야(灯す屋)’는 2018년부터 마을 살리기 활동을 하는 NPO법인이다. ‘토모스’는 ‘불을 켜다’는 뜻. 시에서 빈 집을 지원받아 일과 생활과 창작을 공유하는 장소로 만들고, 1년에 한 번은 거리를 백화점으로 만드는 축제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빈집에서 팝업 행사를 하는데, 2023년 7월의 이벤트로 내 공연을 준비한 것이다.
공연 당일! 소라는 이벤트 장소에서 하루 종일 고서적을 판매할 예정이라 일찍 집을 나섰다.(그녀는 고서적을 매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소라의 헌책에 둘러싸여 좋아하는 녹차를 잔뜩 마시면서 목욕탕 같은 노래를 부르는 완벽한 조합이다.
나는 첫 공연시간 11시에 맞춰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미와코 씨가 “매니저인 자신이 차로 데려다 줄 거”란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공연까지 비는 시간에는 근처 카페에서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커피와 함께 첫 공연의 모니터링까지 잊지 않는 최고의 매니저 덕분에, 첫 공연에 이어 오후 2시 공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엄청 디테일한 공연 피드백 “노래를 듣다 보면 긴장이 풀려서 턱이…” 서로가 처음이라 두근두근 더욱 다정한 만남
사실 공연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긴장을 많이 하긴 했나 보다. 사진 찍을 정신이 없었던 게 가장 아쉽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싶은데 희미한 실루엣만 남아있다. 그래도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와 웃음소리만큼은 잊혀지지 않는다.
긴장하면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 버릇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로도 똑같아서 웃겼다. 별로 위트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무대에서는 웃음 욕심이 생겨서 실없는 소리를 한다. 말 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실컷 떠들었더니 목이 쉰 상태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또 공연에서 계속 수다를 떨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 관객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공연의 2/3를 수다로 채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새로운 롤모델이 생겼다고 대답하며 깔깔 웃었다.
가장 신기한 건, 언어만 바뀌었을 뿐 평소 내가 하는 공연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 번도 공연을 열어본 적 없는 장소에서 두근거리며 처음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만난다. 처음이라는 사실만으로 서로 다정하다. 모든 시도가 따뜻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 자꾸 중얼중얼 헛소리를 하는데 그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을 만들어서 분위기가 환해진다. 실수해도 다 같이 웃는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험해도 아무 문제될 게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가 ‘국민 시’라는 걸 떠올려 갑자기 관객에게 낭독을 요청했다. 맨 앞자리 청년 무리에서 토시키 씨가 용기 있게 앞으로 나와 진지하게 시를 읊었다. 바로 이어서 한국어 버전의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서 우리 두 사람이 첫 콜라보를 축하하며 악수를 나누자, 모두들 크게 박수를 쳤다. 외교관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했다.
11시 공연에서 준비해 간 커버곡으로 카네코 아야노의 ‘光の方へ’(빛이 있는 쪽으로)를 불렀는데 끝나고 토시키 씨가 오후 2시 공연에도 꼭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이따가 오는 여자친구 아야코 씨가 카네코 아야노의 팬이라서 꼭 들려주고 싶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게 된 아야코 씨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고맙다며 녹차 레몬에이드를 내민다. 귀 기울여 들어줘서 내가 더 고마운데 말이다.
디테일의 나라답게, 공연 피드백이 엄청나게 구체적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좋았어요”나 “너무 좋았어요” 정도를 표현하는데 반해, 공연 끝나고 들려주는 자세한 이야기들이 너무나 새로웠다. “경계 따위 잊어버리고 사람으로 만나자, 라는 가사가 좋았어요.” “노래를 듣다 보면 긴장이 풀려서 턱에 힘이 빠졌어요. 입을 헤 벌리고 들었지 뭐예요.” “첫 번째로 부른 노래, 밥 딜런 같았어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노래에서 전해졌어요." 등등. 일본어 배우길 참 잘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되고 싶은 노래』,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 「걷는 섬」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그램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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