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푸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폭력이 숨어있다”

일본 드라마 시리즈 〈펜스〉

박주연 | 기사입력 2024/05/13 [08:33]

“따뜻하고 푸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폭력이 숨어있다”

일본 드라마 시리즈 〈펜스〉

박주연 | 입력 : 2024/05/13 [08:33]

일본이라면 몇 번이고 여행으로 방문한 곳이지만 일본 본토와는 떨어져 있는 섬, 오키나와는 아직 가본 적이 없다. 나만의 아껴둔 여행지라고 해야 할까? 한국의 제주도 같은 곳,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이미지 덕분에 언젠가 한번 ‘쉬러 가야지’라고 생각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나의 안일한 생각을 거침없이 헤집는 드라마를 보게 됐다.

 

1화를 보다 중간에 일시정지를 누르고 작가와 연출을 검색해 볼 만큼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게 된 이 드라마는 알고 보니 국내에서도 유명한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등을 쓴 노기 아키코 작가 작품이었다. 믿고 볼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빠져들었던 이 작품은 바로 〈펜스〉(フェンス)다.

 

▲ 일본 WOWOW채널 드라마 〈펜스〉(フェンス) 포스터 ©WOWOW

 

일본 위성채널 WOWOW에서 2023년 3월 방영한 〈펜스〉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짧은 드라마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단 5화에 풀어냈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펜스〉는 힐링, 휴식으로 포장된 관광지가 아닌 오키나와 그 자체,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 거리 위 소녀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질문한다. 오키나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말 오키나와만의 문제냐고. 한국, 서울이라는 장소에 사는 나에게도 이 질문은 무겁게 와닿았다.

 

관광지가 아닌 진짜 오키나와를 보여줄게

 

드라마는 ‘주간BOWOW’라는 잡지사에서 호스티스 바(일본 ‘유흥업소’의 일종으로 여성 직원들이 손님을 접대한다) 체험기를 연재 중인 프리랜서 작가 키/키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는 편집장에게 왜 고료를 더 올려주지 않냐며 연재를 이제 그만 두겠고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자 편집장은 나가려는 키에게 회사에서 숙소와 비행기 티켓 다 제공할 테니까, 바다 보며 쉬면서 오키나와에서 취재 하나만 해 오라고 한다. 그렇게 키는 오키나와로 향하고, 카페 바 ‘모아이’를 운영하는 사장 사쿠라를 찾아간다.

 

키에게 주어진 임무는 몰래 사쿠라를 탐색하는 것. 그의 성격, 평판 특히 남자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사쿠라에게 접근한다. 왜냐고? 사쿠라가 얼마 전 경찰에 성폭력을 신고했으며, 가해자로 개인을 특정하진 않았지만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군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다. 키는 이 상황을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오키나와로 향하기 전,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를 전하며 편집장은 키에게 묻는다.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키는 오키나와가 원래 류큐(왕국)라고 불린 지역이었다는 것, 메이지 시대(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일본에 합병됐고,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치러진 곳이며, 그로 인해 2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 일본의 패전 후 미국에 편입됐다가 일본으로 반환됐다는 건 안다고 답한다. 그 외 오키나와에 대해 아는 건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동물인 시사(사자상), 오키나와 특산물인 사탕수수, 오키나와 국수 정도라고. 내가 아는 것도 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키나와가 원래 일본이 아니었고 그래서 언어도 다르다는 것, 미군기지가 있으며 그로 인한 문제들이 있다는 정도.

 

〈펜스〉는 오키나와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아는 ‘그 정도’를 묘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휴양지로서 명성이 높은 오키나와가 가진 ‘그림’을 예쁘게 담아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펜스〉는 미군이 신기지를 건설하려고 하는 헤노코(辺野古, 산호 군락과 멸종위기종 해양생물이 산다고 알려진 오키나와 연안)가 매립되고 있는 모습을, 오키나와 안에 존재하지만 뚜렷하게 선이 그어진 공간인 미군기지, 미군과 오키나와 사람들이 혼재된 밤의 거리를 보여준다. 마치 ‘이런 오키나와는 어때 보여?’라고 묻듯이.

 

오키나와 소녀들, 여자들이 마주하는 세상

 

▲ 사쿠라와 키가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WOWOW


사쿠라의 가게로 간 키는 자연스럽게 사쿠라와 친분을 쌓아간다. 한부모 가정에서 엄마와 함께 산 키와 흑인 미군이라 알고만 있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할머니와 같이 산 사쿠라는 또래 여성으로서, 비슷한 배경을 둔 여성으로서 어떤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도쿄에서 온 키는 오키나와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다.

 

오키나와 밤거리를 헤매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탐구한 우에마 요코가 쓴 책 『맨발로 도망치다 -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과 나눈 오랜 대화와 기록』(양지연 옮김, 마티)에서 저자는 “따뜻하고 푸르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폭력이 숨어 있다”고 밝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 1이 전장을 피해 떠돌다 사망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2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미군의 점령 아래 있었고, 일본에 반환된 뒤에도 주일 미군의 80퍼센트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다. 지금도 오키나와에서는 군인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한다.”(p.13)

 

그 뿐만이 아니다. 오키나와는 관광업 의존 비율이 무척 높아 그 외 산업이 그리 발전하지 않았다. 고로 직업이나 일자리가 다양하지 않으며 주민들의 삶 또한 그리 풍요롭지 않다. “2016년 오키나와현에서 발표한 아동 빈곤율은 일본 국내 아동 빈곤율의 약 두 배 이상인 30퍼센트이며, 2017년 아동학대 건수는 과거보다 휠씬 높은 수치를 보였다. 가정이라는 밀실에서의 폭력 또한 여전하다.”(p.13)는 우에마 요코의 지적은 〈펜스〉에서도 발견된다.

 

가난해서 혹은 가정폭력 때문에 거리를 떠도는 소녀들은 쉽게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성적인 피해자가 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노출시킨다. 때론 둘 다가 되기도 한다. 이 소녀들은 지속적으로 가족에게도, 사회나 국가에게도 보호 받지 못한다. 특히 오키나와는 더 그렇다. 미군들이 저지른 범죄는 일미지위협정(한국의 주한미군지위협정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에 의해 불평등하게 처리된다. 예를 들어, 미군이 음주운전으로 오키나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고를 내고 도망쳤다고 했을 때, 이것이 직장(군)에서 퇴근 중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 또한 ‘공무중’인 상황으로 간주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키나와 경찰이 손댈 방법이 없다. 미군과 오키나와인의 위치는 이미 기울어져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가 신고하기도 쉽지 않다. 신고한다고 해서 제대로 처벌이 될까? 하는 불신도 크다. 일본 또한 (최근에 개정되긴 했지만) 강제성교죄 요건이 엄격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합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피해자를 위축시킨다. 더욱이 거리 위의 소녀/여자라면 그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따라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신고를 주저한다. 그렇게 묻히는 사건도 여전히 많을 것이다. 오키나와 여성들은 이렇게 종전 이후에도 오랜 기간 전쟁의 상흔을, 국가의 방치를 오롯이 마주하며 버텨내고 있다.

 

오키나와 내에서도 복잡해지는 위치들

 

▲ 드라마 〈펜스〉의 한 장면. 주인공 키가 미군기지를 뒤로 하고 걸어나오고 있다. ©WOWOW

 

사쿠라가 정말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했는지 알아내고자 했던 키의 목표는 사쿠라 그리고 오키나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키는 자신이 몰랐던 세상과 이야기에 조우하고 자신의 과거도 되돌아 본다. 키와 사쿠라의 관계, 성폭력 사건과 둘러싼 이야기, 범인 찾기는 분명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펜스〉는 조금 더 연결고리를 확장시킨다.

 

〈펜스〉 속엔 오키나와 사람, (본토에서 온) 외지인, 미군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가진 위치성도 제각각이다. 평화운동 및 기지건설반대운동을 하는 할머니를 둔 사쿠라는 운동에 함께 하고자 하지만, 그의 의도는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이유로 멋대로 재단 당한다. 전쟁의 피해를 온전하게 입고 가족을 잃은 기억이 있는 예전 세대와 달리,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미군과 미군기지를 또 달리 본다. 미군들과 함께 자란 세대, 미군기지에서 일하거나 일하는 지인이 있는 사람들은 미군을 단순히 ‘악마화’하기 어렵다. 한편, 미군기지 주둔을 정당화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오키나와 사람들조차 현혹시킨다. 거대한 힘과 함께 주입되는 정보 속에서 진실을 알아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본심을 숨기고 말을 아낀다. 외지인들은 ‘난 외지인이니까 오키나와 일엔 뭐라 말할 수 없다’고 발을 빼고, 오키나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족이 기지에서 일해서, 미군과 친구여서, ‘혼혈’이어서 등의 이유로 오키나와의 ‘문제’를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펜스〉는 그 부분을 짚음으로써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자 노력한다. 당장 어떤 판단을 하자는 게 아니라 함께 이야기 하자고.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펜스〉 속에서 인상적인 장면이나 대사는 여럿이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건 오키나와 사람의 한맺힌 목소리였다. “본토 사람들은 미군 기지 때문에 돈 받으니까 (기지로 인한 문제가 생겨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잖아. 근데 왜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낮고 빈곤률이 높냐는 거야. 그러면 오키나와는 노력이 부족하대. 나라가 (문제들을) 바꿀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노력으로 바꾸죠?”

 

이러한 목소리는 내가 한국의 평화운동, 반빈곤운동, 반성폭력운동, 청소년인권운동 내에서 듣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펜스〉의 이야기가 나와 연결되고 있었다.

 

▲ 책 『맨발로 도망치다 -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과 나눈 오랜 대화와 기록』(우에마 요코 기록, 양지연 옮김, 마티) 표지


〈펜스〉를 본다면, 책 『맨발로 도망치다 -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과 나눈 오랜 대화와 기록』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펜스〉 속 여성들의 삶을 조금 더 깊고 내밀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 자리한 여성들이 계속 잘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펜스〉는 현재 IPTV 유플러스 VOD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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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하수 2024/11/18 [02:19] 수정 | 삭제
  • 일본이기에 겪는 피해~ 한국이기에 겪는 피해~ 여성이기에 겪는 피해~ 누구를 원망하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 죄인가? 여성인 것이 죄인가?
  • ㅇㅇ 2024/05/19 [12:49] 수정 | 삭제
  • 멋진 작품이 나왔구나
  • 2024/05/16 [11:50] 수정 | 삭제
  • 사쿠라 역 맡은 배우가 궁금하네요.
  • 세화 2024/05/14 [11:46] 수정 | 삭제
  • 노기 아키코 작가 이름은 이제 나도 외우겠다.. 꼭 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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