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촌 당숙이라고 했다. 아주 오랫동안 광주 금남시장에서 약재를 팔았다고도 했다. “거기가 다 피로 물들었지. 말로 표현을 못 해.” 성묘하고 올라오는 길에 인사차 들른 먼 친척 아저씨네 집에서, 아저씨는 1980년 5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배운 바가 있었고 믿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겐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에 더 가까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하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십 년 후, 띠동갑이 넘는 회사 선배 언니가 5.18에 겪은 일을 들려줄 때는 꽤 놀랐다. 국가가 국민에게 무슨 일을 했던 건지 알아차리게 되어서라기보다는 역사책에 나오는 일을 나와 ‘가까운’ 사람이 실제로 겪었다는 놀라움에 가까웠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팽목항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서야 비로소 5.18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국가가 무고한 사람들을 원통하게 만들었던 역사가 여러 번 되풀이돼왔다는 것을, 폭력과 권력을 휘둘러 시민의 삶을 망가뜨리는 걸 목격한 뒤에야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폭도”와 군대
『씩스틴』(권윤덕 글·그림, 평화를 품은 책, 2019)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그림책이다.
“철커덕!” 이 책의 화자는 계엄군 총으로 쓰였던 엠씩스틴(M16)이다. “하늘을 향했던 총구가 일제히 폭도들을 겨누었다.”
그런데 이상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칼을 맞으면서도 계속 광장에 모여들었고,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외쳤으니까. “민주주의 만세!” 시민들은 오히려 군대를 향해 폭도는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날 엠씩스틴은 여러 의구심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쏘았다. 많은 이들이 고꾸라지고 으스러지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동원된 가해자들
『씩스틴』을 쓰고 그린 권윤덕 작가는 5.18 민주화 운동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 어떤 관점으로 기억하고 싶은지 스스로 여러 번 곱씹어보았다. 어린이들이 주요 독자인 그림책에 총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것도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이미 ‘배틀그라운드’ 게임 등을 통해 엠식스틴은 물론 케이투며 다른 총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가깝게 느끼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총을 감추기만 할 일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총으로 대변되는 폭력의 역사에서 무엇이 드러났고 변화했고 달라질 수 있는지 직면해야겠다고 나아갔다.
엠식스틴은 ‘가해 행위에 동원된 형태로서의 가해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1980년 광주에 관한 여러 자료와 기록을 체화하듯 공부하며 이 책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다친 시민을 도우려다가 징계를 받은 계엄군의 이야기를 만났다. 그의 가해 행위는 지울 수 없지만, 동시에 그 가해 역시 어떤 피해를 담보하고 있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씩스틴은 죽음을 일으킨 행위자인 동시에, 죽음의 공포를 뚫고 피어난 민주주의를 눈앞에서 본 목격자이자, 시민들과 함께 그 시공간을 지키는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저항과 혁명의 주체로서 여성과 소수자의 존재, 그리고 과거의 사실이 아닌 오늘의 나에게 이어지는 역사의식을 느낄 수 있다.
광장 가득, 민주주의의 씨앗과 열망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이점은, 죽음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내용임에도 피가 낭자한 그림이나 어두운 이미지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얀 화판에 화사하게 부서져 내리는 5월의 햇살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작가는 이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누런 화선지의 빛깔이 가라앉도록 하얀 호분과 백반을 아교에 섞어서 종이 위에 여러 번 밑칠을 한 뒤 그림을 그렸다. 그날도 5월 햇살은 부드럽고 따스했을 것이기에, 그림 속에서라도 광장에 스러진 사람들이 햇살에 보드랍게 감싸여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먹밥을 건네는 아주머니에게서, 음료수를 내오는 가게 아저씨에게서, 죽은 몸을 닦아 주는 여공에게서, 헌혈을 기다리는 시민들 틈에서……. 작은 씨앗망울들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광장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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