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주류 질병 서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병 서사를 쓰며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을 하는 ‘다른몸들’에서 미디어 속 질병과 장애를 이야기합니다.
영화 〈55 steps〉(빌레 아우구스트 감독, 2017)는 1985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인트메리 병원에 입원한 엘레노어 리즈(헬레나 본헴 카터 분)와 인권 변호사인 콜레트 휴즈(힐러리 스웽크 분)가 정신병원에서의 지나친 약물 남용과 강제적인 약물 투여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함께 싸워가는 과정을 그린 실화 바탕 영화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일종의 ‘사건’이었다. 환자로서 원치 않는 약물 복용에 대해 의료권력에 저항하며, 자신이 진단받은 모든 약물을 기록하여 약물이 어떻게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망가뜨렸는지를 기록하는 엘리노어와, 아메리카 선주민(first nations)의 피가 흐르는 소수 집단으로서의 경험을 가진 콜레트가 만나, 거대하고 복잡하며 서로 얽혀 있어서 끊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에 균열을 낼 저항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55 steps〉는 이런 종류의 영화가 갖기 쉬운 클리셰를 피하면서 엘리노어와 콜레트의 친밀함을 그려낸다. 정신장애를 수치스러워하며 폐쇄적인 성격을 형성하기보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부당한 처치에 저항하는 엘레노어는 통상 여성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동성이나 순응성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인권 변호사 콜레트는 오랫동안 말의 권리를 잃고 살아왔던 소수자들의 언어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데, 흔히 남성적 능력으로 상징되는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콜레트 역시 기존의 여성상과는 거리를 가지고 있다.
정신장애 여성의 시민권을 묻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것’은 역사적 한계였으며, 과거의 일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정신장애인은 시민권을 갖는가?’ 물어 보자.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신장애인은 법적 주체인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형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내부적 배제’의 장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내부적 배제’란 시민권이 명시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의 모형에서 벗어나는 차이가 지적‧정치적 역량 미달로 간주되어 배제가 정당화되는 불완전한 시민권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하자면 정신장애인은 이등시민이거나 그보다 못한 자로 취급된다.
역사적으로 정치철학의 주요 관념들은 광기를 정치공동체의 ‘무질서’로 다뤄왔으며, 설사 정신장애인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더라도 그의 독특한 광기를 부정하고 그가 담지한 차이를 ‘무능력’의 표지로 간주해 왔다. 이에 대한 첫 번째 투쟁은 광기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광기의 차이를 지우는 방식의 평등 전략이었다. 광기를 부정함으로써 정신장애의 시민권이 옹호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광기의 부정을 통한 동화 전략은 차이로서 광기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일종의 변이 취급하면서, 여전히 정신장애인을 이등 시민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 되고 말았다.
‘보편적’ 인권선언은 광기와 관련해선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이러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권리의 진술 자체가 정신장애인이 처한 현실에는 거의 무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법은 소수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고유성이나 위험을 감지하지 못 한다. 현재의 법은 정신장애인에게는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의료권력과의 싸움, ‘권리의 언어’를 넘어서
〈55 steps〉에서 엘리노어는 병원의 지나친 약물 투여로 방광이 제기능을 잃지만, 또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약물을 계속 복용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지난해 살림의료협동조합 장창현 원장은 『약이 병이 되는 시대』(로버트 휘태커 지음)를 번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과학을 자처하는 정신의학의 토대가 얼마나 빈약하고 허술한지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유사-과학적 접근으로 많은 정신장애당사자들이 약으로 인한 고통받고 있으나, 현대의학의 공고한 패러다임은 그물망처럼 짜여 있는 약물중심적 권력을 좀처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제약회사와의 리베이트(의사나 약사가 의약품 사용 대가로 받는 이익. 의약품 리베이트는 환자의 약 선택권을 침해하고, 의약품 비용을 높이는 점 등에서 문제적이다)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약물의 문제는 개인이 투약을 결정하거나 거부하는 자기결정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른바 ‘생명정치’ 시대에 진입했음을 〈55 steps〉는 보여준다. 생명정치는 생명을 다루는 정치를 뜻한다. 인간의 생명의 고유한 현상들이 지식과 권력의 질서, 즉 정치 영역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생명정치가 다루는 대상은 법적 주체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살아 있는 생명 자체이기도 하다.
엘리노어와 콜레트의 소송에서, 처음 이들은 ‘권리의 언어’로 법정에 서지만 이는 실패로 끝나 버린다. 더이상 인권의 언어가 법적 권리의 이름으로 효용되는 시대가 지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법을 타고 법을 넘는 페미니즘의 지혜를 따라, 생명정치의 논리를 사용하여, 무엇이 훼손되었고 무엇이 폭력이었는지 실증적으로 밝혀 드러낸다. 그리고 법정에서 승리한다.
엘리노어-콜레트
이 영화는 법정 투쟁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서사로 읽힌다. 더 정확하게는 무관심한 대중의 전체성을 깨뜨리는 파열의 서사로서의 사랑의 서사이다.
그것은 권력의 언어가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 이를 테면 엘리노어의 낡은 LP판과 묵주와 그를 둘러싼 친밀함의 영역이다. 그리고 콜레트가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실현시키고 싶어하는 헌신의 영역이기도 하다.
둘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의 차이와 독특성을 인수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타자성에 연루됨으로써, 수평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엘리노어는 콜레트의 일상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가지지 못했던 일상을 엿보며, 콜레트는 엘리노어를 통해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야생화 같은 생명력을 본다. 서로의 차이와 거리를 보존하면서 수평적 관계 안에서 함께 일구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이 공간은 명사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동사처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는 말의 영역이다.
이로써 ‘단일한 주체’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이 주체가 대상과의 관계를 ‘지시’하기 위해 타인과 공유하는 언어가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를 전유하지 않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대상화하여 관찰하고 파악하기 위해 주체가 확보해야 하는 간격이 아니라 타자를 주체의 세계로 흡수하지 않기 위해 유지하는 거리이며, 타자의 말을 듣기 위한 침묵이다.
법정에서 엘리노어와 콜레트 둘 다의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삶을 바라보았던 경험은 깊은 울림으로 논리적이며 법률적인 언어의 배면으로 탄생하게 된다.
광기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파레시아라는 ‘진실의 용기’를 강조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했듯이 정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실천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요지부동 상태로 보이더라도, 우리는 냉소를 보내는 식으로 현실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내포한 가능성-진실 그 자체-을 드러내고 그것을 용기 있게 발언해야 한다. 이런 행위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선언하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자아 탐색이나 계발이 아니라 타자와 세계에 대한 개방적 인식에서 출발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통치하고 있는(혹은 자발적으로 형성하게 만드는) 권력 형태를 분석해야 한다.
〈55 steps〉의 의미는 엘리노어가 자신에게 행해진 정신의학 권력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오르던 법원의 계단의 수를 말한다. 그 55개의 계단은 약부작용으로 계단을 걷지 못하던 엘리노어에게는 진땀 흘렸을 노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증언을 함으로써 제약회사의 이익과 밀접히 연동되어 있는 과다한 약물 처방이 부당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보이지 않던 것이 가시화되면서 비로소 사회의 어둠에 묻혀 있던 폭력적인 실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신의 처한 상황에 대해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는 것, 저항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공동체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아내는 삶 속에서, 우리는 타자의 삶으로부터 미묘하게 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타자의 삶에 함께 기여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요절하고 마는 엘리노어는 꽃으로 둘러싸인 관에서 평화로운 모습으로 누워 있다. 죽음이란 가장 가슴 아픈 섬뜩함이지만 이제 엘리모어는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가 겪었던 폭력은 거대했으나 꽃처럼 연약한 것으로 그는 세계를 밝혔다. 우리가 상처 입기 쉬운 존재라는 것. 그곳에서 비롯된 공감과 연대는 세계의 어둠에 맞설 힘을 준다. 친밀함이라는 결속을 통해 엘리노어와 콜레트는 그 삶을 살았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삶이다. 나는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참여하고 있는가. 이질성과 타자성에 개방되어 있기 위해 어떤 친밀함을 나누고 있는가. 묻게 되는 것이다.
[필자 소개] 박목우. 정신장애 동료상담가. 다른몸들 산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출연했다. 공저로 『질병과 함께 춤을』, 『아픈 몸 무대에 서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돌봄이 돌보는 세계』가 있고, 정신장애 동료상담의 경험을 담은 소설집 『이처럼 찬란한』을 eBook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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