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사라졌다! 함께 무지개 축제를 즐기자던 할아버지는 어디로 간 걸까? 꼬마 소녀 밀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해리 우드게이트 지음, 김다현 옮김, 쥬쥬베북스, 2023)를 처음 봤을 때는 이 안에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퀴어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씩씩한 그림책이라고만 여겼다. 최근 내게 이 책은 구시대의 답습을 끊고 나온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상징하는 이야기이자, 그리움과 애도가 담긴 사랑 이야기, 동시에 혼인이나 혈연으로 묶이지 않으면서도 더 가까운 가족으로, 동반자로 살아가는 이들을 담아낸 생활 그림책으로 다가온다.
화자는 꼬마 소녀 밀리이다. 밀리네 가족은 여름마다 안경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간다. 안경 할아버지의 집은 바다랑 가깝고 정원에는 닭들이 살고 있다. 분홍빛 캠핑카와 보물찾기 놀이에 안성맞춤인 다락방도 있으니, 모험을 좋아하는 소녀 밀리에게 그곳은 신나는 탐험 공간이다.
그해 여름에도 밀리는 다락방에서 잡동사니를 뒤지며 해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된 상자에서 제 몸보다 커다란 무지개 무늬 옷감을 발견한다. “오, 나의 옛 무지개 축제 깃발을 찾았구나.” 때마침 들어온 안경 할아버지는 그것이 무지개 축제에서 쓰던 깃발이라고 일러주며, 무지개 축제에 대한 밀리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누구를 사랑하고 또 어떤 성을 가졌든 평등한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께 나눈단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밀리와 밀리네 엄마 아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경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덕분에 할아버지의 흥이 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옛날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에 나와 수염 할아버지는 많은 무지개 축제에 갔단다. 우리는 행진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많은 친구를 사귀었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밀리는 할아버지와 그 축제에 가고 싶어지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안 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밀리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나이 든 건 사실이지만, 그게 축제를 즐길 수 없는 이유는 아니라는 걸! “여기서 무지개 축제를 열면 되잖아요!” 밀리의 제안은 가족들과 할아버지를 거쳐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이제 마을은 무지개 축제 준비로 들썩인다.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는 구성이 화려하지 않음에도,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볼수록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고, 단편적인 이야기 안에 숨겨진 새 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 장면 중 하나는 앞서 말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할아버지가 회상하는 무지개 축제의 모습들,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있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수염 난 긴 머리 사람, 그 사람이 든 팻말과 글자들, 타투를 한 사람, 아이를 목에 태운 사람, 몸집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사람들! 이렇게 개성 넘치는 인물 한 명 한 명은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독자로 하여금 눈을 맞추게 하고 어떤 성격일지 상상하도록 만든다.
내가 이 장면에 오래 머물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한 가지 질문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펴낸 쥬쥬베출판사는 어린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 할아버지의 이름을 ‘안경 할아버지’, ‘수염 할아버지’로 일컬었지만, 원서에는 이 둘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 있다. 안경 할아버지는 ‘Grandda’, 수염 할아버지는 ‘Gramps’이다. 그렇다면 안경 할아버지는 밀리의 외할아버지일까, 아닐까? 피부 빛깔도, 나이 대도, 어쩌면 성별도 다 다른 삼 대인 밀리와 밀리네 엄마 아빠, 그리고 안경 할아버지, 과거 사진 속에서만 등장하는 수염 할아버지는 서로 어떤 친인척 관계에 속하는 걸까?
밀리와 안경 할아버지의 관계는?
이 책을 더 풍부하게 누리기 위해서 한 권의 책을 더 살펴 보면 좋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의 전편인 『Grandad’s Camper: 할아버지의 캠핑카』(해리 우드게이트 지음, Little Bee Books. 2021)는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출간 후 유럽에서 큰 관심을 받은 그림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안경 할아버지와 밀리이다. 밀리는 그해 여름날에도 안경 할아버지 집에 머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Your gramps was quite the adventure!”(너희 할아버지는 꽤나 모험가였지!)
“우리가 알게 되고 얼마 뒤, 너희 할아버지와 나는 함께 휴가를 보냈단다. 우리는 캠핑카를 타고 해변에 가서 낮에는 서핑을 하고, 영국식 생선튀김도 먹고, 모래성 쌓기 시합도 했어. 그 시합에서는 내가 이긴 것 같구나.” “저녁에는 해변에 모닥불을 피웠고 파도가 드나드는 걸 지켜봤어.”
눈치 빠른 밀리는 안경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One afternoon, Gramps said to me ‘There are so many wonderful things in this world, and I want to see them all with you.’ So, That’s exactly what we did.” (어느 오후에 수염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단다.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나와 같이 보고 싶다고. 그래서 어떻게 했게? 우리는 그렇게 했지!)
동성혼이 합법화된 영국 사회에서 안경 할아버지와 수염 할아버지는 혼인을 했을까? 생활동반자 관계로 살았을까?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긴 시간 많은 추억을 쌓으며 함께 살아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밀리는 수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안경 할아버지가 많은 일을 예전처럼 느끼지 않고 침울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그래서 안경 할아버지에게 공감과 위로를 보내며 특별한 방법으로 애도의 시간을 함께 맞이하는데…….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는 『Grandad’s Camper』의 속편이기에, 이 둘을 함께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들과 밀리와 밀리의 엄마, 아빠의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림을 꼼꼼하게 본다면 이들의 관계성을 더 일찍 짐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곱씹을수록, 밀리와 안경 할아버지의 관계에 자꾸만 뭉클해진다. 안경 할아버지는 바닷가 마을에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이지만, 이런 ‘가족’들이 있다면 한국 사회가 독거노인을 묘사하는 것처럼 우울하거나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세상은 두 가지 색깔이 아니니까
『Grandad’s Camper』는 2021년 출간된 이후, 2022년에 영국의 워터스톤즈 어린이 도서상과 미국 도서관협회가 주관하는 스톤월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2023년에는 영국 북 어워드에서 올해의 어린이 그림책으로 꼽혔다. 세대 간의 소통과 공감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몸과 사랑을 긍정하는 이 이야기를 출판계와 언론에서 주목하고 칭찬한다니, 부러움이 인다.
주요한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에서 나 혼자 팬심을 키운 인물이 몇 있다. 그중 한 인물은 “아요의 형제자매”라고 번역된 테미이다. 테미는 글 원고에는 딱 한 번 자세히 등장하지만, 그림 장면에서는 곳곳에 나타나 멋진 패션과 용기를 보여준다. 여섯 빛깔의 빵을 쌓아서 무지개 축제에 어울리는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고 “내 성은 내가 정해.”라는 팻말을 들고 퍼레이드에 동참하기도 한다. 드래그 쇼 분장을 한 안경 할아버지의 친구들도 빼놓을 수 없는 멋쟁이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어린이 책에서 드러나지 않은 보통의 우리들, 우리 친구들의 모습이 다정하게 담겨 있다.
해리 우드게이트(Harry Woodgate)는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He나 She 대신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담아 They나 Them을 쓰는 작가이다. 그는 더 다양한 퀴어 이야기와 성별 이분법과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은 한국의 어린이와 어른들이 만나면 좋겠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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