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조금 ‘다른’, 소녀들의 청춘

올 여름을 빛낼 청춘 영화 〈빅토리〉

박주연 | 기사입력 2024/08/25 [12:19]

어쩌면 조금 ‘다른’, 소녀들의 청춘

올 여름을 빛낼 청춘 영화 〈빅토리〉

박주연 | 입력 : 2024/08/25 [12:19]

1999년, ‘세기말’이라는 말이 시대를 음습하고 있던 그 시절, 경상남도 거제의 어느 동네 문방구의 ‘펌프’(음악에 맞춰 발로 발판을 누르는 리듬 게임) 주변에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 부산에서 왔다는 두 남학생이 큰 도시에서 온 우리가 뭘 좀 보여주겠다며 한껏 실력을 선보이지만 그들의 점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 때 교복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다소 ‘껄렁한’ 스타일의 두 여학생이 게임을 시작한다. 노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주변 모든 이들이 환호하고 둘은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그 공간을 압도한다.

 

▲ 영화 〈빅토리〉(박범수 감독, 2024) 포스터

 

영화 〈빅토리〉(박범수 감독)의 시작이다. 영화는 춤을 너무 사랑하는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가 어느 사건을 계기로 정학 당하고 댄스 동아리도 잃게 된 후, 서울에서 전학 온 치어리더 세현(조아람)을 통해 학교에서 연습실을 확보하고자 치어리딩 팀을 만드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소희(최지수), 순정(백하이), 용순(권유나), 상미(염지영), 유리(이한주), 지혜(박효은)을 모은 필선, 미나, 세현은 9명의 치어리더 팀 ‘밀레니엄 걸즈’를 만든다.

 

밀레니엄 걸즈는 자신들이 다니는 거제상업고등학교의 만년 꼴찌 축구부를 응원해서 이들이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밀레니엄 걸즈’가 축구부의 승리에 얼마나, 잘 기여하는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영화는 경기장을 뛰는 선수들이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 자신들만의 무대를 만드는 이들을 조명한다.

 

‘밀레니엄 걸즈’의 시간

 

필선을 필두로 한 9명 여고생들의 빛나는 청춘은 연애나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또한 이들은 학교라는 공간 내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지쳐 가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소중한 우정을 쌓는다.

 

▲ 영화 〈빅토리〉(박범수 감독, 2024) 중에서


특히 주요하게 보여지는 건, 단짝 친구인 필선과 미나의 관계다. 아빠와 사는 한부모 가정의 필선과, 아들을 낳기 위해 출산을 반복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고 중국 음식점인 미나반점까지 도맡아 운영하고 있는 미나는 늘 함께 춤을 추며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공부는 다소 뒷전인 필선과 미나는 학교 선생님들의 표적이지만, 춤에 있어서 만큼은 진심이다. 그런 필선과 미나가 치어리더 출신의 세현을 만나고, 다른 ‘밀레니엄 걸즈’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들은 함께 춤과 치어리딩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빅토리〉에서 소녀들은 보수적 성향의 지역, 시대 배경 속에서 치어리딩 활동을 통해 그리 주목 받지 못했던 자신의 삶과 이름을 찾아간다. 태권도장의 딸이지만 여자애라서 태권도는 배우지 못했던, 하지만 엄청난 발차기 실력을 가진 상미는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고, 세현은 선생님 및 주변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축구부 김동현(이찬형)의 동생’이 아닌 ‘응원부의 김세현’으로 나아간다. 댄서가 되고 싶은 필선 또한 ‘멋있는’ 힙합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별 거 아닌 것 같았던’ 치어리딩의 매력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춤을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 영화 〈빅토리〉 중 미나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부모님의 가게 ‘미나반점’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오롯이 춤/치어리딩만 즐기고 집중할 수 있는 청춘이 아니라는 점도 인상 깊은 포인트다. 1999년, 대도시가 아닌 거제의 상고를 다니는 ‘여학생’들에겐 수행해야 하는 노동이 있다. 그것이 꼭 임금노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영화에선 청소년들의 이런 보이지 않는 노동도 자연스럽게 비춰준다. 미나는 동생들은 물론 부모님의 가게를 돌보고 있고, 상미 또한 태권도장 일을 돕고 있다. 세탁소집 딸 유리도 마찬가지다. 용순은 자신의 가족인 강아지 봉구를 정말 24시간 돌보고 있다.

 

유일하게 노동이라고 ‘인정’되는 일을 하는 방송부 출신의 모범생 순정의 인턴 생활은, 그가 열심히 믹스커피를 타서 다른 직원들에게 나눠 주는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점도 흥미롭다.

 

흔히 청춘이라고 하면 사랑과 연애가 필수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빅토리〉에선 그 비중이 높지 않다. 필선을 좋아하는 두 명의 남학생이 있지만, 그들과의 관계보다 밀레니엄 걸즈와 춤추는 시간이 필선을 더 행복하게 한다.

 

응원의 목소리가 앞으로, 옆으로

 

치어리딩은 응원이다. 우리 사회에선 치어리딩이 스포츠의 하나로 여겨지지 않고, 단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걸로,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걸로 여긴다. 밀레니엄 걸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결국 응원부가 될 수 있었던 건, 축구부를 응원한다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빅토리〉는 축구부를 위한 응원부가 아닌, 그냥 응원부인 이들의 모습에 조명을 비춘다. 첫 번째 실패를 겪고 와해될 뻔한 응원부가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 영화 〈빅토리〉 중 밀레니엄 걸즈가 조선소 노동자들 투쟁 현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상우조선해양’이라는 조선소에서의 응원이다. 상우조선해양은 필선의 아버지가 회사와 노동자들 사이 중간관리직인 반장으로 일하고 있는 곳이며, 소희 아버지가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인 1999년, 상우조선해양의 현장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며 ‘초과 근무, 주말 근무 폐지’를 외치며 투쟁하고 있다. 1997년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 과정 속에서 지치고 때론 싸우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건 꽤 익숙한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딸들’이 그 ‘아버지들’이 앉은 길바닥에 같이 서는 모습은 조금 새롭다. 밀레니엄 걸즈는 투쟁의 현장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민중가요와 함께 몸짓패가 하던 것처럼 힘찬 움직임으로 노동자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런 밀레니엄 걸즈는 뒤에서 손 흔들며 “아빠, 힘내세요”를 외치는 딸이라기보다 든든한 연대자의 모습이다. 그 면모가 또 한번 도드라지는 장면은 “니는 세상이 그리 쉽나?”라고 하는 아버지에게 “아빠는 세상이 그리 어렵나?”라고 받아치는 필선의 한 마디다. 싸울 때를 알고, 투쟁을 독려하는 연대자는 언제나 멋있을 수밖에 없다.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제목이 〈빅토리〉였을까 생각했다. 이 영화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승리나 성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부가 경기에서 이기는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우승을 한 건 아니다. 지역에 사는 청년이라면 모두가 꿈꾼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코 앞에 둔 필선의 선택도, 네(필선) 옆에 있으면 조연이라도 된 것 같아서 좋았다며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하는 미나도, 폼 나는 공격수 대신 필선을 위해 뒤에서 최전방 수비수가 되겠다고 하는 치형(이정하)도 승리나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소 투쟁의 결과도 알 수 없다.

 

▲ 영화 〈빅토리〉에서 '밀레니엄 걸즈'가 교복을 입고 나란히 걷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충만해 진다. 그건 〈빅토리〉가 승리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으며, 화려하고 ‘까리한’ 승리만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내내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응원하는 우리가 있다. 옆 사람의 온기마저 피하게 되는 뜨거운 여름, 필선이 “언니 손 잡아”라며 손을 내밀고 소희가 그 손을 잡았던 것처럼, 누군가의 손을 단단히 잡고 힘차게 걷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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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땃 2024/08/31 [13:12] 수정 | 삭제
  • 이 영화 흥했으면 좋겠다!!
  • 재미 2024/08/28 [13:52] 수정 | 삭제
  • 펌프부터 시작해서 추억 돋는다.
  • 독자 2024/08/26 [15:17] 수정 | 삭제
  • 오.. 극장에서 봐야겠다. 써니 생각이 조금 나네요. 그때보다 더 현실적이고 풋풋한? 갬성일 듯.
  • ㅇㅇ 2024/08/26 [12:51] 수정 | 삭제
  • 혜리언니 주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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