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 임금’ 한국, 여성파업이 성공한 나라에게 배울 것아이슬란드 톺아보기② 1975년 여성파업의 배경과 과정한여름, 매체들을 화려하게 달궜던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은 8위를 차지하며 막을 내렸다. 쟁쟁하게 큰 국가들 사이에서 높은 성적을 거둔 걸 보면 참 저력 있는 곳이다 싶어 새삼 놀랍다. 그뿐 아니다. 한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도 이제는 크게 올라, 2020년 이래 OECD 평균의 90%를 넘어선 후 계속 상승하는 중이다. 그런 한국이 최근 두 분야에서 또 1등을 차지하고야 말았다. 바로 낮은 출생률과 높은 성별 임금 격차다.
OECD 가입한 이래 27년째 1위, 성별 임금 격차!
OECD가 7월 발간한 ‘2024 한국경제보고서’는 한국의 저출생과 성별 임금 격차가 회원국 중 가장 심각하다고 밝히며, 주요 원인으로 여성이 경제활동과 출산 및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일·가정의 불균형’을 꼽았다.
실제로 한국은 회원국 중 여성의 교육 수준은 가장 높지만, 여성 관리자 비율은 가장 낮은 축에 속하며, OECD에 가입한 1996년부터 27년째 변함없이 성별 임금 격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빈센트 코엔 OECD 국가분석실장은 “한국이 챔피언이 되면 안 되는 분야에서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라고 일침을 가하며, “격차 대부분이 교육이나 연공서열같이 관찰할 수 있는 요인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이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규범과 관행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와 정책이 없던 건 아니다. 1987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을 제정해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자 했고, 여성 고위직 진출을 확대하고자 여성임원할당제 같은 제도도 만들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육아휴직 제도 확대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도 있다. 성별 임금 격차를 줄이고자 서울시를 필두로 작년 하반기부터 공공기관과 지방공사·지방공단 등 509곳에서 ‘성별 근로공시제’도 시행 중이다.(관련 기사: 성별임금격차 줄이기 위한 성별근로공시제…“저절로 좋아지는 건 없다”, 경향신문, 2023년 3월 24일자)
그러나 여전히 격차는 좁혀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역차별적인 제도라거나, 여성이 고소득 직종을 택해서 종사하면 될 일이라는 반응도 흔하다. 조직 구성원의 다양성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들이 의사결정과 성과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또한 성별 임금 격차가 채용과 배치, 교육·훈련, 승진 등 고용상의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을 알고 나면, 더더욱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때문에, 더 많은 여성이 고소득 일자리나 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에 기댈 것이 아니라, 여성이 동등하게 일할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논의가 확대되어야 한다.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제도와 현실 사이의 틈새가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지금, 아이슬란드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차곡차곡 그려온 성평등을 향한 궤적을 살피기에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다.
1975년에 어떻게 ‘여성파업’이 대대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성평등 천국’으로 알려진 아이슬란드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이슬란드는 1915년, 뉴질랜드와 핀란드에 이어 비교적 이른 시기 여성 투표권을 획득했지만, 그 후 60년간 단 9명의 여성만이 국회의원 자리에 올랐다. 1975년에는 단 3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이는 전체 국회의원의 5%였다. 그 당시 다른 북유럽 국가들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6~23% 정도였던 걸 고려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아이슬란드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 된 1975년 10월 24일, 아이슬란드 여성의 90%가 참여했던 ‘Women’s Day Off(여성의 날 휴업)’로 50년간 실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했는지, 여성 파업이 일어나기까지의 배경과 과정에 천착하면서 세세하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먼저 가장 궁금했던 첫 번째, 1975년 여성 파업이 그토록 많은 여성의 참여를 독려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아이슬란드의 5대 여성 단체 대표들(총 회원 수 3만 명)은 여성의 해를 기념하고자 UN 대표와 함께 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 해 6월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여성대회(The Women's Congress)를 조직했다. 여성대회에는 자선단체, 여성노동조합, 주부협회, 정당 여성 분과 등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때, 급진적 여성운동 단체 ‘레드스타킹스’(Redstockings)는 여성 파업이 가정과 직장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강력한 방법이 될 것이라 주장하며, 파업을 통해서 여성들의 노동 가치와 기여가 성별로 인해 어떻게 격하되는지에 대한 여성들의 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끝에, UN의 날인 10월 24일 하루 동안 여성들이 일을 멈춤으로써 여성 노동의 사회적, 경제적인 기여를 상기시키고, 전세계 여성들과의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발의문이 제안되었다. 발의문을 작성한 8명의 여성들은 연령과 경험, 정치적 배경을 고려해 폭넓게 대표할 수 있도록 신중히 구성했고, 이는 여성 파업의 성공과 이후의 변화들에 큰 역할을 했다.
‘파업’(strike) 대신 ‘하루 쉬기’(Day Off) 이름 붙여 더 많은 참여 독려 전체 여성 절반 가까이에 ‘왜 여성의 날인가?’ 설명 편지 보내
이들은 처음부터 가능한 많은 여성의 참여를 목표로 기획했다. 위원회는 논의 끝에 10월 24일 행사의 명칭을 ‘파업’(strike) 대신 ‘하루 쉬기’(Day Off)로 명명해 이 아이디어가 대중과 고용주들에게 더 쉽고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했다. 파업에 참여한다고 하면 해고당할 수도 있지만, 하루를 쉬겠다는데 이를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Women’s Day Off’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노동조합의 확고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임에도,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홍보에 총력을 기울인 것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슬란드 전역에는 19세기 말부터 지역 곳곳에 ‘여성협회’(Kvenfélög)가 만들어졌는데, 여성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교류하며 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했다. 각 지역의 여성협회들은 1975년, 파업에 대한 필요성을 홍보하고, 여성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며 지지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행사의 전 과정은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을 포함하기 위해 세심히 고려되었다. 47,000부의 편지, 당시 전체 여성의 절반 가까이에게 ‘왜 여성의 날인가?’(WHY A DAY OFF FOR WOMEN?)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냈다.
배부한 편지에는 ‘무역과 상업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임금이 남성의 75%다’, ‘농부의 아내는 농민조합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부의 노동 경험이나 유치원의 사회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등 다양한 여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문장들을 써서 다 함께 단합하자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또한 5,000부의 포스터를 직장에 배포해 남성 노동자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다는 것 등 파업에 대비토록 했다. ‘Women’s Day Off’라 적힌 스티커 25,000장을 제작 판매하고, 파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하면서 연대감을 북돋웠다.
대중매체가 여성파업의 필요성과 여성인권을 심도 있게 다뤄 전체 여성 90%가 파업 참여, 남성들에겐 가혹한 ‘긴 금요일’(Long Friday)
전국의 모든 대중 매체와 아이슬란드 주재 외국 라디오 방송 기자들에게는 보도 자료를 배포해 여성 파업이 아이슬란드의 모든 여성을 포함할 것이라 선언했다. 두 개의 일간지는 1년 내내 성평등에 대한 주간신문을 발행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성차별과 성별 간 불평등에 대한 프로그램이 편성되는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활용해 사람들에게 이 행사에 대해 알렸다. 대중 매체가 파업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남성들도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인식하게 되어, 남성들이 파업의 목적을 이해하고 지지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여성들은 일터로 출근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요리나 청소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회가 여성에게 무급 노동자로서 돌봄노동을 강제해 온 것을 드러냈다. 가정에서 여성이 파업하자,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직장에 함께 데려가야 했고, 색연필과 종이를 아이들에게 쥐여주거나, 첫째에게 용돈을 주며 동생들을 돌보게 하려 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소시지나 핫도그 같은 즉석식품이 슈퍼마켓에서 매진됐고, 처음으로 설거지를 해본 남성들도 있었다. 남성들에게 매우 가혹했던 이날은 그래서 ‘긴 금요일’(Long Friday)로도 불린다.
레이캬비크의 국회의사당인 알싱 앞 아우스투르볼루르 광장에는 25,000명의 여성이 모여 연설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다.(관련 영상: https://url.kr/h31scg) 집회에서는 여성의 낮은 임금과 낮은 정치 참여에 대해 다루어졌는데, 이는 공식적인 권고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슬란드 각지의 도시에서도 대규모 회의와 시위가 조직되었다. 마을 곳곳에 자발적으로 제공된 가정과 커뮤니티 공간을 오픈 하우스로 마련해 집회가 끝난 후, 여성들이 이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자원봉사로 참여한 엔터테이너들이 오픈 하우스를 오가며 그날과 어울리는 노래와 공연을 선보였다. 이 오픈 하우스는 단순히 파업 후의 휴식 공간을 넘어서, 이곳에서 형성된 네트워크와 교류를 통해 여성운동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녁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국에서 조직된 집회에 대한 뉴스를 전했다. 뉴스 앵커들이 말하는 동안 배경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렸고, 라디오 진행자들이 가정에 전화 연결해 여성들이 그날 일을 쉬었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때, 전화를 받은 것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머물던 남편들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전국 일간지 ‘모르귄블라디드’(Morgunblaðið)의 발행을 책임진 여성들은 ‘신데렐라’처럼 가정과 일터로 돌아왔고, 파업 다음 날 신문은 평소의 절반 크기로, 여성 파업에 관한 기사 외에는 아무것도 실려있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이슬란드 여성들과 사회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듯 눈 감아온 것들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파업의 영향은 상당했고, 여성들이 사회의 주요한 기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론을 변화시켰다.
바로 다음 해인 1976년,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다. 당시 성별 임금 격차는 40% 이상이었고, 여성들은 남성 임금의 60% 이하를 받고 있었다. 1983년에는 아이슬란드의 첫 번째 여성 정당 ‘여성연합’(Women's Alliance, Kvennalistinn)이 창립되어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한다. 이 정당은 세계 정당 역사상 중앙의회에서 의석을 얻은 최초의 여성 정당으로, 파업 이후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성파업 4년 후 1980년, 파업 주도했던 이혼한 싱글맘 대통령 당선 16년간 재임해 아이슬란드 어린이들 “대통령직이 여성의 일”인 줄
더 극적인 예는, 파업 5년 후인 1980년, 아이슬란드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여성 국가 원수인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당선된 것이다. 비그디스는 이혼한 싱글맘 출신 대통령이라고 으레 소개되곤 하지만, 실은 여성대회 발의문을 작성한 8인 중 한 명이다.
한편, 파업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1975년 이후, 1985년, 2005년, 2010년, 2016년, 2018년, 그리고 2023년까지 총 7번 파업을 벌였다. 임금 차이를 반영해 2005년에는 수만 명의 여성들이 오후 2시 8분이 되자 퇴근했고, 2010년에는 오후 2시 25분, 2016년에는 오후 2시 38분에 퇴근했다. 2018년 아이슬란드의 노동시간에 대한 성별 임금 격차는 16%였지만, 성별 소득 격차는 더욱 컸다. 그해 여성들은 오후 2시 55분에 퇴근했다.
2023년에는 48년 만에 온종일 파업을 했다. “당신은 이것을 평등이라 부르나요?”(You call this equality?)라는 슬로건 아래, 성별 임금 격차와 젠더 기반 폭력, 외국 출신 여성들의 고용 불안정, 돌봄 영역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저임금, 장애 여성에 대한 폭력 등에 대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면, 이번 파업에는 여성과 논바이너리(non-binary, 남성/여성으로 이원화된 젠더 체계를 따르지 않는 성별 정체성)가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다. 가부장제라는 체제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로 참여 범위가 확장된 셈이다. 이날 파업에는 ‘감정 노동’과 같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무급 노동을 떠맡지 않는 행위도 포함되었다. 하루 동안 남편, 아버지, 형제, 삼촌들이 ‘아침과 도시락 준비, 친척들의 생일 기억하기, 시어머니를 위한 선물 사기, 아이 치과 예약’ 등 가족과 가정에 관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받았다.
또한 의료계나 돌봄노동 종사자, 아이들을 맡길 수 없어 파업에 참여하기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 ‘여성파업’을 의미하는 해시태그 ‘#Kvennaverkfall’을 사용해 지지와 연대를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파업을 안내하는 홈페이지에는 ‘FAQ(자주 묻는 질문)’를 만들어, 파업에 참여하길 원하는 이들이 품을 수 있는 의문에 대해 답했다. 파업에 참여한다고 상사에게 알려야 할지, 상사가 반대하거나 급여를 줄인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누군가 내 일을 떠맡게 되는 것은 아닐지 등등 파업에 참여한다고 가정하면 궁금해질 법한, 그러나 어디에 물어야 할지 망설여질 만한 내용들이다.
2023년, 파업 동참한 여성 총리 ‘정부 수반으로서 참여한 것’ “우리는 아직 완전한 성평등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파업에 동참한 카트린 야콥스도티르 총리는 자신이 여성이라서 파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정부 수반인 총리로서 이번 파업에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명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총리는 또한 “우리는 아직 완전한 성평등이라는 우리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라며, 2023년에도 여전히 성별 임금 격차와 젠더 기반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청소 노동자도 총리도 전일 파업 나선 아이슬란드 여성들, 경향신문, 2023년 10월 24일자, 남지현 기자)
성평등 세상을 향한 아이슬란드의 움직임은 속도가 빨랐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함께, 한 발 한 발 내디뎌온 데에 그 비결이 있었다. 파업 너머의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활동을 지속해 올 수 있는 힘이자 공동체 전체의 역량이 된 것이다.
[참고 자료] -국립·아이슬란드대학교 도서관 The Women's History Archives: Women's Day Off 1975 -Participedia: Icelandic Women’s Strike https://participedia.net/case/8000 -The day Iceland's women went on strike, BBC 2015년 10월 23일자
[필자 소개] 정이예슬. ‘함께 배우는 사람’.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다정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지속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클라이밋(Climeet)을 창업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역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사회적경제·기후환경·ESG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육 워크숍을 진행한다. 2023년에는 울산 남구 장생포에서 지역문화기획단을 조직하고, 마을축제 ‘2023 다이버-시티(Diver-city) 장생포’를 열었다. 기후위기, 젠더,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탈성장과 다양성, 시민정치로 관심사를 넓혀가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18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