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끄트머리, 동쪽 바다에 몸을 담갔다.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 헤엄을 치다가 윤슬을 바라봤다. 새끼손가락만 한 아기 물살이들이 발밑에서 살랑거렸다. 내 발과 친구들 발이 바닷모래에 닿을 때 모래 소용돌이가 일었고, 물살이들은 그 사이에서 먹이를 찾는 듯 보였다. 꾸무럭꾸무럭 대던 거였니? 작은 입과 꼬리, 눈동자가 물안경 너머에서 흐릿하게 보였지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 바다 어딘가에 고래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낮거나 높은 주파수로 이야기하고 있겠지. 오늘도 아름답게 호흡하자고 응원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인간 동물인 내 몸과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울림이 대부분이겠지만 한 마리 포유류로서 겸손하게 느껴본다.
“해도 닿지 않는 심해에서” “귀와 이빨은 감추고서” “추위에도 공포에도 떨지 않으며 유영하는 거예요. 빛의 언어가 미치지 않는 곳은… 숨 막히도록 고요할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그림책 『그건, 고래』 (김미래 글, 다안 그림, 고트, 2024)는 아이가 어른에게 들려주는 현명한 대답이기도 하기에, 삶이 나아지는 방법은 고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깜깜한 바닷속에서도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고래! 유선형의 유연한 몸으로 “눈부시게 엉킨 수중 세상”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고래!
그런데 이 그림책에는 고래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 그림책이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는 누군가의 하루가 담긴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독자가 고래를 만나게 되는 비법은 무엇일까? 눈으로 보지 않아도, 만지거나 만나지 않아도, 내가 선 일상 그 자리에서 고래와 연결되고 마는 신비로움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러하기에 결국 햇빛과 나무, 바다와 공기를 넘어 당신에게까지 연결되고 마는 풍경들이다.
나는 늘 다른 여자들과 농부들, 할머니와 어린이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최근에는 『떠오르는 숨』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접촉면)이라는 책 덕분에 해양 포유류에게도 배울 수 있게 됐다. 이 책의 부제는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이다.
“자본주의로 인해 우리가 지구를 익사시키는 데 가담하게 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돌고래이자 영매이자 미래를 보는 존재입니다.”
이 책을 쓴 알렉시스는 퀴어 흑인 페미니스트로서, 소유물로 전락해 바다 너머로 납치되었던 이들의 후손으로서, 한쪽 귀를 열고 자는 이민자 출신 불면증 환자의 딸로서, 장애 아이를 둔 여성이라는 특징으로 수용소에 갇혀 죽은 증조할머니를 기억하는 존재로서, 해양 포유류의 친족이자 수습생으로서, 포획된 모든 해양 포유류와 연결된 존재로서, 고래와 물범에게 배우고 이를 전파한다.
외뿔고래, 흰고래, 북극고래에게서 숨쉬기를, 고양이고래에게서 조직하고 연대해서 나아가는 길을, 동시에 혼자서 잘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 대신, 순환하는 보살핌으로 서로를 돌보는 법도 돌고래에게서 배운다. 범고래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협력하고, 때로 공공장소에서 몇 달, 몇 년 동안 슬픔을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컷으로 지정된 큰돌고래들은 수십 년 혹은 평생 결속된 한 쌍으로 살아간다. 암컷으로 지정된 큰돌고래 무리는 ‘연결된 암컷들’로서 온 세계를 함께 여행한다. 이런 삶은 흔하고 ‘일반적’이라서 과학자들은 큰돌고래들을 ‘퀴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수십 년이 지나도 동성 서로의 휘슬음을 잊지 않는 이들의 사회적 기억력과 적극적인 ‘헌신’에서 나도 삶을, 사랑을, 이별의 아름다움을 배워간다.
해양 포유류와 그림책 속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뉴스와 SNS는 우리나라 전국에 퍼져있는 딥페이크(인공지능 기반 합성 이미지) 디지털 성범죄 소식으로 가득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윤진이, 정윤이, 경옥이, 하영이, 선하. 내 어릴 적 여자친구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오늘도 무사히 출근했을까.
그리고 다시 『그건, 고래』의 아이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 동물이 해양 포유류를 닮을 수 있다면, “다른 생물에게 과시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배꼽과 젖은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떠오르는 숨』의 작가 알렉시스 폴린 검스는 숨 쉬기, 나로서 잘 존재하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다.
“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숨 쉬기란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로 점철된 자본주의가 목을 조르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매일 잘못된 이름으로 호명 당하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 시적 실천을 하기 위해.”
인간 동물에게 몇 가지 존재하기 방법을 권하기도 한다. “파도가 밀려와 나를 뒤흔들고, 예고 없이 몸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를 안정시키고 길을 뚫고 나갈 수 있게 하는 진화적 실천” 중 하나는 ‘매일 쓰기’이다. “글쓰기는 중심을 잡아 주고, 지탱해 주고, 주변 바다에서 무엇이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준다고.
또한 우리 여성 공동체는 “대체로 주거와 경제적 안정을 이루기가 어렵고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우리의 뿌리를 찢어놓기에” 함께 숨을 쉬고, 손을 뻗고, 요가 같은 몸의 언어, 나의 호흡, 숨 쉬기를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동쪽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잠시 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친구들의 말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발가벗고 헤엄치고 싶어.” 파도처럼, 모래처럼. 물살이처럼. 여자들이 존재 자체로 안전하게 헤엄치는 곳을 상상하며 나는 다시 물속으로 몸을 넣어 헤엄쳤다. 뜨거운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바다에서 발가벗고 헤엄을 칠 것이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오늘 밤도 달이 참 예쁘니 “지금 당신의 진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여자들은 늘 나아가니까, 고래처럼.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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