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주 고귀해서, 네가 없으면 세상이 없을 수도 있어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연출 구자혜, 배우 색자

박주연 | 기사입력 2024/09/11 [17:06]

너는 아주 고귀해서, 네가 없으면 세상이 없을 수도 있어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연출 구자혜, 배우 색자

박주연 | 입력 : 2024/09/11 [17:06]

무대에 한 사람이 서 있다. 60대 후반, 노년의 몸을 가진 ‘색자’라는 이름의 사람이다. “나이를 먹으면 권위가 획득되고, 권태로 보이는 몸을 통해 권위가 돋보인다고 하잖아. 색자의 몸에는 권태가 없어. 권위도 없지. 권위를 포기한, 교태의 몸과 교란된 시간의 힘이 있어.”(〈“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공연 소개) 이렇게 말하는 색자의 삶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입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표현된다.

 

16살 집을 뛰쳐나왔던 때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서울 종로의 P극장을 찾아갔던 일, 1970년대 호텔에 숙박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외쳤던 영어 “웨어알유고잉”, 퍼포머로 무대에 서기 시작하고 일본에 갔던 경험과 그 때 사용했던 이름, 경찰 폭력과 ‘닭장차’에 갇혀 있던 시간, 여관방에서 겪은 일 등. 퀴어로서 살아낸 색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1인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가 지난 8월 18일 막을 내렸다. 8월 15일부터 단 4일간의 공연이었다. 제6회 페미니즘연극제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연은 빠르게 매진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 서울 이태원에서 연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연출가 구자혜(좌), 배우 색자(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웃고 있다. ©일다


어렵게 표를 구해 마지막 날 공연을 보러 갔다. K-Pop 아이돌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춤을 추며 퍼포먼스를 하고, 무대 한 구석에 앉아 프롬프터 역할을 하는 구자혜 연출과 만담 아닌 만담을 주고 받고, 관객들에게 팁을 받으며 호탕하게 웃는 색자. “이제 여성인지 남성인지 중요하지 않다”며 “주민등록번호를 2로 바꿔 사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퀴어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색자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9월의 어느 날, 배우 색자와 구자혜 연출을 서울 이태원에서 만났다. 구자혜 씨는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연출이자 작가로, 색자와는 〈드랙X남장신사〉(2021, 2022), 〈곡비〉(2023)에 이어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까지 작품을 같이 하고 있다. 두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퀴어한 에너지를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색자: 〈드랙X남장신사〉(드랙킹콘테스트 주최, 제작) 기획자 중 한 명인 문상훈 작가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자혜: 2021년 〈드랙X남장신사〉 공연의 연출 제안을 받았고, 그 때 배우 중 한 명인 색자를 처음 만났어요. 초연 할 땐 사실 그리 친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2022년 재연을 하게 되면서 친해지게 됐죠. 색자가 문상훈 작가랑 친한데, 저도 문상훈 작가랑 가까워지면서 같이 술 먹고 놀면서…(웃음).

 

-정말 친해지려면 서로 좀 맞거나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요.

 

자혜: 색자랑 시간을 보내면서 퀴어, 트랜스젠더, 라즈베리(레즈비언), 논바이너리 등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했지만 꼭 그 이야기만 한 건 아니에요. 쓸데없는 이야기도 하고, 각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배우로서의 색자, 연기를 하는 색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고, 색자는 작가인 구자혜,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구자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묻기도 했고요. 연극을 하는 기술자 대 기술자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 연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포스터

 

-이번 작품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자혜: 색자가 계속 좋은 글을 쓰라고 하셨고요.(웃음)

 

색자: 자혜가 했던 공연을 보면,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한번은 내가 “얘, 상업적인 것도 좀 써. 그래서 돈 좀 벌어” 그랬죠. 그랬더니 “니 얘긴 어떠니?” 이러더라고요.(웃음)

 

자혜: 맞아요. 반말로 “니 얘기 할까?” 그랬죠.(웃음) 근데 진짜 나, 작가 구자혜에게 이런 관심을 주고 (글 쓰라고) 압박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어떤 글을 쓸까, 글을 쓴다는 건 뭘까 고민을 하게 됐죠. 허구의 상황을 들여와서 잘 직조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의 삶을 받아 쓰는 걸 넘어서 그 삶이 동시대의 어떤 존재들과 만나게 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런 즈음에 페미니즘연극제에서 공연 제안이 와서 색자한테 이야기를 꺼냈죠.

 

색자랑 놀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어머, 너 글방 도련님처럼 잘생겼다.” 그러다가 또 언젠가는 “너는 남자야.” 이러시고, 그 다음 날엔 또 “넌 왜 이렇게 여성스럽니?” 그러죠.(웃음) 어느 날 내 눈을 보고 “자혜야, 너는 특별해. 네가 없으면 세상이 없을 수도 있어.” 하더라고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색자와의 시간은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이 교란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넌 고귀한 존재”라는 말을 듣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나만 듣는 특혜를 누릴 게 아니라 관객들한테 나눠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공연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색자: 고귀하잖아요. 진짜. 난 솔직한 편이고 누구한테든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는 편이에요. 물론 그게 나쁜 말이면 안 하고, 좋은 이야기만. 자혜한테 이야기한 것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한 거에요. 근데 얘, 나 너한테만 그런 거 아니다?(웃음)

 

-이 작품은 색자님의 경험이 담긴 구술생애사이기도 하고, 저한텐 누군가 들려주는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만드는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자혜: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대본이 어떻게 나왔지 싶어요. 꿈 같달까? 연습 시간이 긴 것도 아니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일들도 있어서 쉽지 않긴 했어요. 쓰는 과정은, 색자가 이야기하면 좀 받아적고, 색자한테 또 질문하고,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들으면서 썼던 것 같아요.

 

색자: 어떻게 이런 대본을 쓴건지, 놀라워요. 처음 나한테 보여줬을 때 제목(“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을 보고 ‘아, 됐다. 다른 말이 필요없겠다’ 싶더라고요. 참 뒤집어지는 제목이다 생각했죠. 그리고 대본 중에 이건 좀 고치자고 하면 군말 없이 바로 고쳐 줘서 고마웠어요.

 

▲ 1인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중 색자가 멋진 검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지수

 

-제목이 정말 강렬한데요. 어떻게 나온 건가요?

 

자혜: 사실 그 제목은 작년에 쓴 희곡 〈퇴장하는 등장〉의 대사에요. 너무 색자 이야기에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극 중에 트랜스젠더 바에서 공연하다 경찰한테 잡혀서 ‘닭장차’에 갇혀 있다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경험했던 고통스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또 물어보면 ‘괜찮았다’고 해요. 혹시 그 이야기를 듣는 내가 힘들까봐 괜히 괜찮았다고 하는 건가, 아니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이제 괜찮다고 하는 걸까 궁금했어요. 근데 정말 괜찮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었다고 내가 또 색자의 삶을 추앙하고, ‘색자는 참 강한 사람이야’ 이렇게 표현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건 대상화가 될 테니까요.

그 ‘괜찮다’는 말이 사실 어느 순간엔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괜찮다’고 하는 색자의 삶과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그의 선택들이 궁금했고요. 우리에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공통점, ‘지금 이 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라는 생각에선 연결되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 점에서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라는 말을 가지고 오면 좋겠더라고요.

 

-색자님 이야기 들으면서 특별히 인상적으로 남은 부분이 있다면요?

 

자혜: 모든 이야기?! 색자의 삶을 듣는 것도 좋았지만, 색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색자 집에서 같이 벽에 기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좋았어요. 또 색자 이야기 속에서 어떤 지점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예를 들어 친구들 이야기 할 때 말의 템포가 빨라진단 말이에요. 걔는 얼굴이 어땠고 뭐 이런 이야기도 하지만, 그 친구가 왜 특별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말이 빨라지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처음 「다시 만난 세계」 가사를 보여드렸을 때요. 우시더라고요.

 

색자: 어머, 나 그 때 울었니? 학생인권조례 읽을 때 울었던 거 말고?

 

자혜: 가사 보면서도 울었잖아요. 내가 왜 우냐고 했더니, 가사가 너무 슬프다고. 그 노래 퍼포먼스를 꼭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색자가 첫 장면에 넣자고 했죠.

 

▲ 연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중 배우 색자는 차별금지법과 학생인권조례 내용 일부를 읊었다. ©이지수

 

-공연에서 “라즈베리들아~”하면서, “라즈베리, 알지?” 묻는 장면이 나오죠. 무슨 말인지는 단번에 알았는데(웃음) ‘어라, 내가 모르는 (성소수자) 은어가 있었나?’ 싶더라고요.

 

색자: 내가 만들어 낸 말이에요. 레즈비언 대신 라즈베리라고 하면 ‘일반’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하지만 퀴어라면 알아듣겠지.

 

자혜: 색자님이 어휘를 잘 창조해요. 공연에 나온 “대답 없는 보지”라는 말도, 구멍이 없으니까 대답이 없다고, 그런 표현을 하시더라고요.

 

-색자님이 거쳐간 여러 이름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예전엔 트랜스젠더도 게이로 불리고 그랬으니까요. 그런 ‘변화’들 속에서 혼란은 없었나요?

 

색자: ‘여장남자’라 불리던 때도 있었죠. 근데 혼란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그때 그때 이런 이름을 쓰나 보다 했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나는 왜 이럴까 그런 생각도 안 해요.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나 보다. 어쩔 수 없지, 어머 그렇구나, 난 이렇게 태어났구나 해요. 남기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요. 어떻게 보면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주민등록번호를 2로 바꿔 사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는 말도 하셨는데요. 색자님이 원하는 세계는 어떤 건가요?

 

색자: 내가 이렇게,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의 몸으로, 게이로 살았고, 물론 여성스러운 마음이 있어서 여성스러운 몸으로 바꾸었지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바꾸면서까지 여자로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꾼다고 해서 백프로 여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주민번호 바꾸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삶도 아름다운데 뭐, 속여가면서 살아? 왜? 내가 그냥 나로서의 여자로 살아가는 세계를 꿈꿔요. 모든 사람이 우리를 자기네와 동등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 그거 외에는 없어요.

 

-퀴어들에겐 ‘죽음’과 결부되는 서사가 많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살아낸 색자님의 이야기를 보는 게 특별했던 것 같아요. ‘생존’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자혜: 사라져간 친구들 속에서 계속 생존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게 생존인 것 같아요. 새벽에 전화가 왔을 때, 아니 때론 그냥 대낮에 전화가 와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쉽진 않죠. 근데 색자랑 공연하면서 그런 마음이 좀 괜찮아졌어요. 공연 연습하다 뭔가 일이 생겨서 연습이 취소되면 연습을 못해서 초조한 게 아니라, 색자랑 못 만나니까 쓸쓸하더라고요.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이 있으면 좋고 웃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으로 조금씩 삶이 지속되는 것 같아요. 색자한테 저도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 무대 한 자리에서 연출 구자혜와 배우 색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지수

 

-공연 보고 나서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여전히 퀴어/성소수자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특히 트랜스젠더, 또 나이든 퀴어 이야기는 더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책이나 잡지 등 기록물에서 보던 과거 퀴어들의 서사를 직접 듣고 볼 수 있어서 감동적이기도 했어요. 재공연 생각은 없나요?

 

자혜: 하고 있죠.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이 색자를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색자가 “넌 고귀하게 태어났어.”라고 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색자가 항상 퀴어든 비퀴어든 모두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누구나 와서 보고 많은 힘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며칠을 더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공연하고 싶어요. 더 많은 관객들과 재미있게 놀고, 색자가 팁도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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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니미 2024/09/26 [10:18] 수정 | 삭제
  • 아유 쪼매 슬프다
  • 멋지다 2024/09/18 [16:16] 수정 | 삭제
  • 공연 제목도 기사 제목도 "끝났다"
  • ㅇㅇ 2024/09/13 [14:38] 수정 | 삭제
  • 다시 만난 세계
  • 라즈베리 2024/09/12 [13:17] 수정 | 삭제
  • 라즈베리 ㅋㅋㅋ 근데 나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 척이면 착이라 구냥 알아듣는 건가. ㅎ 색자언니. 언니라고 괜히 한번 불러봅니다.
  • CO2 2024/09/12 [11:59] 수정 | 삭제
  • 재공연해주세요! 색자 배우님의 축복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 무늬 2024/09/12 [10:51] 수정 | 삭제
  • 읽다가 눈물이 났어요..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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