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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페미니스트 저널 일다&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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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발적으로 왔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구조적 착취와 인신매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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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 사는 A가 있다.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어느 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된다. “서울시가 연결해주는 해외 일자리 프로그램.” 시청에서 설명회를 연다는 말에 A는 그 자리에 가본다. 설명은 솔깃하다. 한국보다 최저임금이 두 배 높은 나라에서 5개월에서 8개월 정도 일하고 돌아올 수 있고, 숙식도 제공된다. 언어를 몰라도 되는 단순 노동이며, 이미 다녀온 한국인도 많다고 한다. A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다. 그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현지에 도착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함께 온 관계자는 여권을 맡기라고 요구한다. 행정비용을 이유로 돈을 빌리게 하고, 그 대출금은 매달 임금의 3분의 1씩 공제된다. 일을 중간에 그만두면 이탈보증금과 벌금을 내야 하고, 가족은 이탈 방지 보증인이 된다. 계약을 어기면 민형사 소송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미 한국을 떠났고, 돌아갈 돈도, 여권도 없다. 그저 정해진 기간을 버티고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상황을 두고, 처음에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운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한국에 온 외국인 계절노동자들이 실제로 마주한 현실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계절노동자 제도 설계와 현실의 간극, 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외국인 계절근로비자(E-8)는 단기 인력이 필요한 농어촌에 최대 8개월간 외국인을 고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자이다. 고용노동부가 아닌 법무부가 관할하며, 일손이 필요한 한국의 농어촌 기초지방자체단체가 필리핀·베트남 등 인력을 보낼 수 있는 외국 지자체와 업무협약(MOU)를 맺어 운영된다. 외국 지자체에 거주하는 주민을 계절노동자로 초청하고, 고용주에게 배정하여 일하게 하는 방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도상 핵심 원칙은 명확하다. 노동자의 모집과 송출, 배정 전 과정은 공공기관이 담당해야 하며, 사적 중개나 알선, 수수료 수취는 엄격히 금지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지방자치단체의 인력과 관리 역량이 부족한 틈을 타 이른바 ‘브로커’들이 제도 전반에 개입하고 있다. 이들이 노동자 모집부터 입국, 사업장 배정, 통장 개설, 보험 가입, 비자 업무까지 사실상 전 과정을 장악한 상태다. 공공이 통제해야 할 영역이 민간 브로커로 대체되면서, 제도 설계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70024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농번기, 성어기 등 농어촌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외국인 노동자를 국내에 초청하는 ‘외국인 계절노동자 제도’가 점점 확대되어 왔다. 원칙적으로 민간의 중개나 알선, 수수료 수취를 금지하지만, 현실은 ‘브로커’들이 제도 전반에 개입하여 착취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은 한국 농가의 비닐하우스 고추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 (사진 출처-우춘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런 상황에 대해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정된 필리핀 계절노동자를 인터뷰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들은 필리핀에서 계절노동자 설명회를 열어 사람들을 모았다. 주 5일, 하루 약 8시간 일하면 월 2백만 원 이상의 월급을 벌 수 있다고 홍보했다. 필리핀의 경우, 한국의 최저임금만 받아도 자국 대비 약 4배의 소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이는 큰 기회이자 생계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계절노동자로 선발되어 출국하는 때부터, 착취는 시작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들은 서류 처리·행정 비용 명목으로 빚을 지게 하고, 월급에서 75만 원씩 3개월간 공제한다. 합법적 직업소개소도 임금의 1% 이하, 1회 소개비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명백한 불법적 이익 취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업장 이탈을 막는다는 이유로 여권을 빼앗고, 이탈 방지 보증금을 요구하고, 가족과 친인척을 이탈 방지 보증인으로 세웠다. 만약 사업장을 이탈하면 본인 및 보증인에게 각각 100만 페소(약 2,5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고,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국 또는 필리핀에 갈 수 없게 되고, 민형사 소송이 벌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환경 역시 열악했다. 계절노동자들은 휴식일 없이 12시간씩 일했고,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았다. 숙소는 CCTV로 통제되기도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간 노동자가 나오자, 브로커는 다른 계절노동자들에게 이탈한 자들을 잡아 오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했고, 필리핀에 있는 이탈자의 집을 찾아가 보증금을 요구하기도 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단순 노동 문제가 아니다, 취약성 이용한 인신매매 구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부 수사기관은 이것을 단순 임금체불이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로 한정하여 바라본다. 브로커는 주선, 관리만 했을 뿐이고, 돈을 적게 주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만든 건 사업주가 아니냐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해석이다. 브로커의 개입은 단순한 중개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를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24127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올해 2월 6일,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 고소대리인단이 외국인 계절노동자 인터뷰를 위해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에 방문하여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 정효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국제사회는 이미 인신매매의 개념을 확장해왔다. 인신매매는 기존처럼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가 아니라,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모집, 수송 또는 제공 받는 행위’로 새롭게 정의된다. 여기서 착취란, 성매매, 기타 형태의 성적 착취, 강제노동 및 서비스, 노예 및 노예와 유사한 관행, 노역, 장기 적출 등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려먹거나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강제로 잡아 와서 억지로 가두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상대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착취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취약하다는 건 무엇일까? 불안정한 체류자격, 낮은 경제적 지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이주노동자를 취약하게 만든다. 취약하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 정교하게 짜둔 착취의 구조가 있을 때, 그것이 착취인 줄 알든 모르든 그것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임금 격차와 빈부격차가 지속되는 한, 더 나은 소득을 기대하며 국경을 넘는 이주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동일한 구조에 편입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는 “뭔가 이상한 걸 알았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결국 자기 선택인데 이제 와서 피해받은 것처럼 구네.”라고 말한다. 결국 그래서 돈을 벌었으니 된 것 아니냐는 정서, 네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네가 감당하라는 논리다. 이러한 시각은 그 선택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외면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결정,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신매매방지법은 분명히 말한다. 피해자가 착취에 동의했더라도 인신매매 범죄 성립 여부에는 영향이 없다. 취약한 조건에 있는 사람의 ‘선택’은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브로커 처벌에 힘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브로커의 적극적 개입이 사람을 착취하기 쉬운 조건 자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권 압수, 채무 부과, 가족 보증, 현상금 추적—이 모든 장치는 노동자가 스스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설계된 통제 수단이다. 사업주의 저임금 착취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구조가 먼저 노동자의 선택지를 봉쇄해놓았기 때문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32185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올해 3월 19일, ‘계절노동자 브로커 처벌 및 계절근로제도 전면 개선’을 촉구하며 열린 기자회견. [사진 제공-계절노동 전면개선 대책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계절노동자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농어촌의 인력난은 현실이고, 국가 간 노동 이동 역시 불가피하다. 그러나 제도의 공공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브로커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착취 구조를 만든다. 제도의 이름이 ‘계절노동’이라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신매매의 정의에 부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신매매라고 불러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이 출발점이다. 인신매매, 착취라고 불러야 수사가 시작된다. 계절노동자들이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되었음에도, 수사기관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설명을 듣고 동의했다”는 이유로 노동력 착취 약취·유인을 부정한다. 전국의 농어촌에서 피해가 확인되고 있어 큰 틀의 공조가 필요함에도, 관할을 이유로 수사가 미뤄지고 있다. 그 사이 계절노동자 제도는 더 확대되어 시행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127d8;">[필자 소개] 정효주</span>.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 고소대리인단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1 16:59: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정효주)]]></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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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부족해도 실천해보는 거야,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title>
       <link>https://ildaro.com/1043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돋움;">[연구 소개]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914" target="_blank">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 연구 : 지속가능한 페미니스트의 실천적 연대를 위해</a>」는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이 겪은 경험을 소개하고 이러한 실천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는 연구이다. 논문을 쓴 비화 역시 페미니스트이자 7년 전부터 비건 실천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비화’라는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해주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화이팅’의 줄임말입니다. 비건(Vegan,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에 반대하며 그로 인해 생산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소비를 지양하는 사람)으로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남들도 나도 이렇게 부르면서 응원하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별칭 가지고도 비건 얘기 한 번 더 하고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61041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비건 요리는 맛없다는 편견을 박살내는 야무진 도시락 모음. 논문 「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 연구 : 지속가능한 페미니스트의 실천적 연대를 위해」를 쓴 비화는 페미니스트이자 7년 전부터 비건 실천 중이다.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된 계기에도 이러한 응원의 의미가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그렇고,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경) 이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많죠.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비건 실천을 결심한 사람들도 꽤 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페미니즘 각성이 비건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요. 페미니스트 각성으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해 나가는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이 만만치가 않잖아요. 비건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둘은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논문은 제가 비건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살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됐구요. 페미니스트가 되었던 경험과 마찬가지로, 비건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소외, 갈등, 백래시 같은 것들을 살펴 보았어요. 견고하고 촘촘히 얽혀있는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육식주의 등 사회의 맥락 안에서 ‘비건 실천’이라는 일상적 행위가 갖는 한계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난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 이런 사람들은 별로 없잖아요.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도 많은 고민과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등 시민 내지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체감하게 됐달까요? 그전에는 제가 여성폭력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했어요. 내 인생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마치 제 자신은 그러한 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처럼 살다가, 딱 느끼게 된 거죠. 대중교통에서도, 학교, 도서관, 직장에서도 내가 자라고 살아온 모든 공간에서 불법촬영부터 성폭력까지…. 그러면서 나의 사회적 공간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동안 내가 외면해 왔던, 도처에 있는 이 폭력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된 거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서 보면,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폭력에 무뎌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비건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다른 종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인간종으로서 피해자의 위치에서 누적된 여성혐오의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 즉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과 비건이 되는 일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런 성찰은 여성 내에서의 ‘차이’에 대한 성찰적 감각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인간. 이런 식의 이분법적 도식이 성이나 종에 대한 본질화의 우려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착취의 측면에서는 인간은 때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누구나 그냥 태어나서 살다 보면 연루되어버리는 동물착취를 비롯한 축산업이라는 구조가 구축되어 왔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이 ‘여성’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고, 비건 실천도 마찬가지로 ‘동물’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위계와 차별 그리고 이분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기에 분명히 연결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러한 감각으로 비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이전까지는 동물에 대한 시혜적인 시선이 더 컸고, 동물도 불쌍하고 환경도 살리기 위해 비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64894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행진하고 먹은 비건감튀.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위계적으로 아래에 있는 대상에게 베푸는 시혜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대목도 생각나네요. 비화님 본인이 ‘동물화된 여성과 여성화된 동물’이라는 자각을 한 계기가 궁금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축산업 안에서 동물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 건 오래전이거든요. 도살 장면도 나오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엄청 충격적이고 끔찍해요. 그렇지만 한 번의 충격으로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후에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세미나도 하면서, 조금씩 공감을 쌓아갔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사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기도 했고요. ‘가임기 여성 지도’(2016년 한국에서 행정자치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임신이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얼마나 분포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표시한 ‘출산지도’)를 만들어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처럼 여기는 것에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했었잖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젖소는 그냥 ‘우유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로 여기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축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야 하는 어미가 필요하고요. ‘젖소가 임신하고 출산해야 젖이 나오는구나’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 거죠. 이윤을 목적으로 임신 주기가 매우 짧게 이루어지고, 젖을 짜내야 하는 도구로 개량되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강제 임신과 출산 착유를 반복해야 함을 알았을 때.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라고 나오는 젖을 인간이 대량으로 가져가기 위해 동물들을 가두고 태어나게 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치즈, 유제품을 좋아했는데요. 그랬던 과거의 저를 포함해 사람들은 젖소를 우유가 나오는 기계 정도로 여기고, 실제 그 동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관심갖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죠. 익숙한 무지와 무관심을 뚫고, 젖소도 인간 여성과 다르지 않은 임신-출산의 재생산 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아주 어렵게 제 인식체계로 비집고 들어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안다고 해서 모두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진심으로 와닿는 순간은 컨트롤이 불가하죠. 수나우라 테일러(예술가이자 장애운동가, 동물권 운동가)는 감옥, 요양시설에 있는 사람들, 돌봄 및 식사 준비를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 심각한 건강 문제로 비건 식생활이 어려운 경우 등을 이야기하며, 비건이 되는 데 따르는 가장 큰 어려움이 개인적 층위가 아니라 구조적 층위,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데서 비롯된다고 짚는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말은 비건 실천을 할 수 없거나 실천이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두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에 기대어 비건 실천을 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기보단, 일상의 매 순간 빠짐없이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비건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비건 실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안하는 팁이 있다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실천을 거창하게 말고 플라스틱 줄이기, 쓰레기 줄이기 정도로 생각하고 웬만하면 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기 자신을 포함해 실천하는 사람을, ‘완벽할 수 없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실천에 시행착오와 모순과 한계가 당연히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지향하는 지인이 있으면, 웬만하면 그 사람 만날 때만이라도 비건 실천한다 생각하고 비건으로 먹는 것부터가 시작이 될 수 있죠. 회식이나 행사 시 비건으로 준비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을 참여시킨다는 측면에서 훨씬 더 파급력 있는 실천이죠. 전부 비건으로 준비하기가 어려우면, 비건 옵션이라도 마련하면 좋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다과 준비는 디저트, 빵류보다 간단한 과일이나 떡을 준비하고, 기타 기성제품일 경우 미리 성분표(밀, 대두만 들어가면 대충 비건일 가능성 높다!)를 확인해서 주문해 놓는 것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습니다. 행사 당일이나 시일에 닥쳐서 사려면, 살 수 있거나 아는 메뉴 등이 없어 논비건을 사게 될 확률이 높아요. 비건으로 음식이나 간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주변에 비건 지인이나 친구에게 문의하면 어떤 것들이 가능하고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지 기쁘게 알려줄 거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71447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비건 짜장면은 가원(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중식당)이 가장 취향. (비화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카페나 식당에서 비건 옵션을 물어보는 것도 좋은 실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물어보다 보면 메뉴에 넣어줄지도 모르죠. SNS나 프로필 등에 논비건을 전시하지 않는 것도 실천의 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할 수 있는 것이 많네요. 비건 앞에서 고기타령 같은 거 안 하는 것부터 시작해 봐도 좋겠습니다. 논문에 ‘킬조이’(Killjoy: 흥을 깨는 사람)라는 말이 눈에 띄였어요. 폭력에 눈감으면 모두가 편안하다고 퉁쳐지는 것을 거부하고, 친밀한 관계 및 사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고집스럽게 ‘킬조이’로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도처에 있는 폭력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겠지요. ‘킬조이’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동시에 흥을 깬 일화들도 궁금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흥을 깨는 일화는 너무 많죠. 매 순간? 하하. 여럿이 모이거나 단체 행사 같은 때에 누군가 애써 준비한 음식이나 다과 같은 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감사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상황 속에서 저는 혼자 속으로 ‘나는 못 먹는데…’ 하며 생각하는 거죠. 좋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저도 너무 잘 알고 고맙기도 해요. 근데 또 그 자리에 비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분위기에서 저만 소외되고 지워지는 듯한 경험은 어렵고 복잡하거든요. 때론 상대방도 배려해준다고 하고 나도 어느 선에서 눈감고 넘어가려고 해도 서로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자리에서 결국 ‘비건으로 다과를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을 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얼어붙죠. 어떨 땐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만 하기도 하고, 고민하고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달라요. 고기나 회 같은 게 대단히 좋은 것을 대접한다는 식으로 음식이 문화적으로 깊숙하게 의미로서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예외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나 예외적 존재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훈련이 부족한 문제인 것도 같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사람들은 저의 존재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칠 때도 많고요. 저만 아니면 불편함 없이 즐거운 식사나 디저트 시간이 될 수 있는데, 신경 쓰이고 저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기도 하고 불편하니까요. 저를 소외시키거나, 불편한 티를 내거나, ‘너만 아니면…’ 식으로 저를 문제화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게 누적되다 보면, 사람이 아무래도 예민하고 화가 많고 불평불만이 많고 억울함이 쌓여 있는 상태가 되죠. ‘고작 먹을 것’ 때문에 별것도 아니고 치사스럽고 짜치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 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데요. 세상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듣지 않죠. 이미 억울한 제가 어떤 말을 하면 친절하지 않다고, 감정적이라고 또 문제를 삼고요. 저도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요.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해서, 내가 더 포용력 있지 못해서, 내가 모난 성격이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그거, 페미니즘에서도 똑같잖아요. 내가 완벽하게 빈틈없이 설명하면 다를까? 내가 좀 더 친절하게 말하지 못해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거는 패턴이다 라는 생각. 약자들이 무언가에 항의하면 ‘좀 더 친절하고 정확하고 부드럽게 말해줄래?’라고 대응하며 문제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돌린다는 생각.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라 아메드가 『페미니스트 킬조이』 책에서 ‘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계속 튀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느껴질 것이다.’라고 썼는데, 현실이 변화하지 않고 (우리의 말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속 고장난 레코드판이 될 수밖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74158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내가 만든 비건 두쫀쿠’, 라이스 페이퍼로 만들어도 맛있다!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논문에서 “인터뷰 참여자들의 일상 속에서 겪은 어려움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규범의 구조를 드러내고 문제 삼는 이들에 대해, 사회가 이들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또한, 스스로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썼는데요.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도 ‘킬조이’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벽을 깨려다 내가 깨질 순 없잖아요? 포기하거나 깨지지 않기 위해 저는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라고 계속 주문처럼 되새기는 것 같아요. 또 ‘킬조이’가 되면서 좋은 점들을 생각합니다. 다른 ‘킬조이’들을 포착하는 시선을 갖게 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장애 접근성, 트랜스젠더 화장실 이용 문제 같은 것들을 보며 이들이 겪는 곤란함,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비건 실천을 하게 된 후로 더 많이 공감하게 되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논문에도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낫고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두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각자의 상황과 조건 안에서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최선을 실천하는 나쁜 비건이 낫다.”라고 썼습니다.<span style="font-family: 돋움;">(※기사 제목에서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는 록산 게이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착안한 표현이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맛있는 걸 먹는 건 정말 큰 기쁨이고 행복이죠. 저도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당연히 사람마다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 안에서는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한 비건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비건 실천이 딱히 자신을 희생하면서 대의를 위하는 실천이지만도 않아요. 속도 편하고 건강하기도 하고 환경에도 좋고 비인간 동물에게도 좋은,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좋은 실천입니다. 비건이 좁게만 보면 먹는 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종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등 엄청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봐요. 그게 페미니즘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도 많이 연결되어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더 관심 가지고 덜 소비하면 좋겠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돋움;">비화 씨는 ‘실천하고자 하는 주체들은 현실에서 어떻게든 모순과 불안전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하며 비건을 시도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자신을 성찰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돋움;">오늘도 도시락을 싸는 비건화이팅 씨를 응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126d8;">[필자 소개] 박지하</span>는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돈을 써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남겨두고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0 10:58: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지하)]]></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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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비혼 여성들, ‘할머니가 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자’]]></title>
       <link>https://ildaro.com/1043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이 듦과 주거 불안을 고민하는 2030 여성들이 모여 생각했다. ‘늙어가고 아파지고 정착할 장소와 관계가 필요해질 우리, 어쩌면 “생활공동체”가 필요한 건 아닐까?’ 우리는 생활공동체를 고민하며 ‘가족’, ‘나이 듦’, ‘주거’에 관한 공부를 함께 했다. 또, 이미 생활공동체가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궁금한 걸 묻고 대화를 나누어 보자고 기획했다. 이른바 〈예비할머니 프로젝트〉다. 어떤 이들과, 어떤 동네에서, 어떤 연대와 돌봄의 관계를 맺으며 나이들 것인가? 작년부터 느리지만 꾸준하게, 20명 남짓한 청년 여성들이 1년간 만들어 온 ‘예비할머니 질문’들을 살며시 소개한다. [기획의 말]</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왜 ‘할머니’ 되는 것을 걱정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도 결국엔 피 나눈 가족이 최고야.” “아플 땐 가족밖에 없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말이겠지만, 때로 누군가를 작아지게 만드는 이런 말들 사이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은 길을 잃는다. ‘젊은 여자’가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토록 당연한 순리에 두려움이 붙는다. 예비할머니들이 수십 년 뒤에나 펼쳐질 ‘노후’를 생각했을 때 벌써부터 막막한 이유도 이 언저리에 있다. ‘나이 듦’이 내포하는 ‘취약성’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에서 취약해진 개인이 기댈 곳은 가족, 특히 혼인과 혈연으로 이어진 ‘정상가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상가족’ 바깥에서 무방비하게 취약해진 개인은 안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기 어려운 질서가 뿌리깊다.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펴낸 책 『가족 신분 사회』(202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복지의 책임과 역할이 과도한 사회에서, 가족을 벗어난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과 돌봄은 불안정하고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84441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예비할머니 프로젝트 2025년 첫 모임. 노후에 대한 두려움의 ‘이유’부터 함께 파헤쳐보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가족’이 대체 뭐길래? 예비할머니 프로젝트에 모인 17명의 2030여성들은 ‘가족이 필요한 순간’을 곱씹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집안일이 벅찰 때부터 급하게 돈 필요할 때, 집 구하기나 장례 등 큰일이 닥쳤을 때, 갑자기 아프거나 몸을 가누기 힘들 때, 백수가 되었을 때 ‘가족’에게 기댄다(또는 기댈 수 있길 기대한다). 나만의 공간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을 때, 오늘 있었던 일 얘기하고 싶을 때도 ‘가족’이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또는 그런 가족이 있다면 좋겠다고 느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같이 살면서 정서적, 물리적 안정감을 느꼈을 때 이런 ‘가족’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고,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아닌 채로 원가족 안에 있을 때는 ‘다른 가족’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품는다. 가족이 필요한 순간이란 즉, 빌붙을 수 있는 장소와 관계가 필요할 때를 의미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가족’에 갇히지 않아도 괜찮은, ‘돌봄’을 주고받으며 ‘생활’이 서로 연결된 ‘공동체’ 자체다. 『가족 신분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활공동체를 소개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는 민법상 가족의 범주를 넘어 (…) ‘이성애 핵가족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는 ‘생활공동체’를 포괄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생활’과 연결되는 화두가 바로 가족 간의 ‘돌봄’이다.” 책은 이어서 묻고 제안한다. “서로를 돌보고, 위기의 순간에 뒤를 맡기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픈 상호의존의 관계를 누구와 맺을 것인가? 나는 그러한 관계를 누구와 맺고 있는가? 시설과 가족을 넘어서 이 질문을 상상할 때, 우리 사회에 더 폭넓은 시민적 유대 관계가 자리할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누구’와 함께, 어떤 ‘동네’에서 늙어가고 싶은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구와,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디서’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탁자 두 개만한 밭뙈기를 원하는 예비할머니가 있다. 음식점을 운영하긴 하는데 하루 4시간만 열고픈 예비할머니가 있다. 일 없이 은퇴하겠다는 예비할머니가 있고, 또래 할머니와 어울릴만한 노인일자리에 취직하겠다는 예비할머니도 있다. 자가를 갖고 싶은 예비할머니도 있고, 50년 또는 영구 공공임대를 노리는 예비할머니도 있다. 많은 돈을 상상하는 예비할머니도 있고, 가난을 생각하는 예비할머니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토록 다양한 삶을 상상하는 우리가 각자 또는 함께 어울려 살고 싶은 공동체란, 구체적인 물리적 장소와 관계로 구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땅 위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을지 알아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책방’, 페미니즘 ‘의료사회적협동조합’, 페미니즘 ‘커뮤니티 공간/카페’ 등이 지역사회 안에 자리잡은 동네들을 함께 탐방하면서 지난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구체적인 장소를 경험해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미래 계획 안에 공동체적 삶의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서 지금 구현되고 있는 일상이자 얼마든지 낙관할 수 있는 구체적 삶의 장면으로 다가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92362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마포구 성산동 탐방. 페미니즘 책방과 마을공동체 동네, 지역 커뮤니티 공간에 함께 머물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할머니가 된 내가 어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 좋을지를 ‘함께’ 그려나가는 것은, 나와 우리의 불안을 ‘함께’ 해소시켜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겐 아주 대단한 전략이 필요한 게 아니라, 서로 무언가를 함께 꾸준히 하며 서로의 일상에 엮여 드는 관계와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해볼수록, ‘예비할머니’들의 상상은 더 가까운 현실이 될 것임을 느꼈다. ‘정상가족’ 너머의 삶을 함께 시작할 용기를 모으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예비할머니들의 더 구체적인 작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나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은평구 ‘살림’ 의료협동조합, 전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의 사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어른이 내게 말했다. “나이 들면 손주 보는 재미로 사는 거야.”</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손주 보는 재미‘만’ 추구하는 삶은 우리에게 없는 선택지다. 게다가 우리에겐 이미 대단한 (예비)할머니들이 있다. 2030 여성들이 가진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뒤집어 내는 관계와 실천들이 이미 지역곳곳에 있다. 〈예비할머니 프로젝트〉를 통해 대표적으로 찾아간 곳은 ‘살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 “믿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있으면 좋겠다.” “아플 때 좋은 돌봄을 받고 싶다.” “병들고 장애가 있더라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끝까지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고 싶다.”와 같은 공통의 필요와 바람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이 만든 협동조합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살림은 “여성주의 건강관을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이 협동하여 의료·복지·돌봄 기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곳”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많은 이들이 ‘아픈 몸’을 응당 당사자 개인과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을 경험해볼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살림 견학은 예비할머니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취약해진 몸을 시설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일상이 될 수 있는 곳이 여기 있다. 살림을 알아간 시간은 예비할머니들이 “안전하게 나이 들고 서로 돌보는 지역 공동체”의 가능성을 긍정할 수 있는 경험이었고, 구체적인 실체를 체감하는 시간이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30대에 만나 20년 넘게 이어져 온 여성들의 생활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전북 전주에 위치한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도 방문했다. 이제 50대가 된 비비 멤버들은 ‘여성주거공동체 비비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주거’의 중요성과 집단적인 주거실천 사례를 함께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가 주체적으로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비의 주거공동체 실천이 멋지게 구현되길 바라면서, 우리의 바람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0대 때부터 50대 현재까지 이어져 온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의 공동체 경험은 이제 겨우 ‘예비할머니 모임’ 활동을 한 지 1년차인 우리들이 좀더 가볍고 자유롭게 마음가짐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계기이기도 했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가 누군가의 현재일 때, 우리는 좀더 자신 있게 기대하고 낙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가 관계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운 마음을 나눌 수 있어 든든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948751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함께 만든 예비할머니 작전노트. 안전하게 나이 드는, 서로의 존엄한 노후를 위해! 서로를 꼬시기 위한 예비할머니들의 작전은 계속 된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내 바람은 너희랑 같은 동네 사는 할머니가 되는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예비할머니 모임을 가지며 주고받은 질문과 대화들을 엮어서, 〈예비할머니 작전노트〉를 만들었다. 작전노트를 통해 1)나이 듦과 함께 누리고 싶은 존엄한 삶의 조건들을 살피고, 2)누구와 생활공동체를 함께 할 것인지, 3)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꼬실 것인지, 4)이들과 어디서 모여 살 것인지, 5)어떤 가족을 만들고 싶은지 상상해볼 수 있길 바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후를 생각하며 마냥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음에 안도하는 마음, 여전히 막연하지만 혼자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확인을 주고받는 관계, ‘정상가족’ 질서 바깥에서도 주거 불안과 나이 듦에 따르는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근거를 확인하는 과정. 이것은 더 많은 ‘예비할머니’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삶의 장면들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이 되어주는 관계 네트워크는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미 이런 마음을 확인한 20명 남짓의 예비할머니들이 2026년을 함께 맞이했다. 즐겁고 안전하게, 나이 드는 서로를 환대하는 생활공동체를 꿈꾸며 말이다. 올해도 예비할머니들이 모여서 가족, 돌봄, 주거와 동네, 공동체 문화 등 ‘노후’를 둘러싼 질문과 고민을 해소할 좋은 답들은 찾아가는 과정은 계속된다. 그 길을 함께 가보자고, 온갖 공동체를 함께 고민해보자고 소문 내고 싶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부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82bd3;">[필자 소개] 호랑집사.</span> 가난한 페미니스트로 나이 든다는 건 뭘까? 가임기는 끝날 테고 몸은 취약해질 테고 주거는 쭉 불안할 텐데.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와 노후를 낙관할 수 있는 증거들을 얻기 위해 예비할머니 모임을 구상하고 시작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8 15:5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랑집사)]]></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8012624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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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돌봄…혼자 하면 ‘불안’, 함께 하면 ‘대안’이 돼]]></title>
       <link>https://ildaro.com/1043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2년 6월, “예상치 못했던 파트너 돌봄이 나에게 왔다”(<a href="https://ildaro.com/9366" target="_blank">https://ildaro.com/9366</a>)라는 제목으로 ‘동성 파트너를 간병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에 관한 글을 기고해 SNS상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캔디 씨가 관련 책을 집필했다. 올해 2월 출간된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는 열두 해를 함께 한 동성 파트너의 투병과 죽음, 장례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한 캔디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성 파트너 관계, 투병과 간병, 파트너의 죽음, 장례, 이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 그 어떤 것도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꺼냄으로써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누군가에겐 따끔한 회초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나와서 ‘큐라이프 협동조합’의 활동가가 됐다. 누구나 자신답게, 존중 받으며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돌봄과 배움,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들고 키워가는 협동조합을 목표로 하는 큐라이프는 지난 3월 말 창립총회을 열어 그 시작을 알린 상황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33820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캔디 작가가 책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를 들고 웃고 있다. (제공: 캔디)</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몇 년간의 강렬한 경험이 작가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걸까? 캔디 작가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동성 파트너 간병과 죽음, 장례를 겪은 경험을 책으로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출간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요, 소감이 어떤가요?</span>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책을 읽을까 봐, 또 반대로 안 읽을까 봐 무섭다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어요. 신곡이 나온 연예인처럼 매일매일 검색하는 게 스스로 좀 부끄럽기도 하고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집필 과정이 길어지면서, 책에 담으려고 했던 내용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봄과 장례의 과정 자체를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했고 그 마음은 변함없었어요. 다만, 책 쓰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제가 새로운 연애를 하고 결혼식까지 하게 되었어요. 파트너를 보내고 1년 만에 새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을 책에 쓰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죠. 또, 법이나 제도가 없어서 불행해진 성소수자 서사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과, 사실 그런 불행 서사를 내세우는 게 나라는 사람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정말 복잡한 마음이 왔다 갔다 했던 거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393560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지난 2월 출간된 에세이집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캔디 글, 들녘) 홍보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바탕;">책엔 동성 파트너의 간병, 돌봄을 하며 여러 부분에서 장벽에 부딪힌 경험이 담겨있는데요. ‘동성 파트너’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또 어떤 게 있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력사의 커밍아웃 정도가 달랐던 점이요. 력사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이어서 직장이나 학교 친구들과의 교류와 나와의 생활, ‘이쪽’ 활동을 철저히 분리했어요. 내가 무지개 굿즈 같은 걸 하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요. 력사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너무 잘 알았지만, 그게 저에겐 힘들었다는 것도 사실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을 쓸 때도 력사가 어떤 사람인지 쓸 수 없는 부분도 많았죠. 그가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공부를 했는지도요. 력사 장례식 때도 그랬어요. 파트너의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을 내가 모른다는 점이... 참 그랬죠. 력사가 왜 그렇게 자신을 숨길 수 밖에 없었는지 알죠. 그가 불안해 하고 걱정했던 것들을 이해하지만... 서운하진 않았어요. 아니, 서운하기도 했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운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라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친구 중에 이성애 커플인데 결혼은 하지 않은 이가 있어요. 10년 넘게 같이 살고 있고 양쪽 가족도 다 알긴 해요. 근데 한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에요. 그때 어땠냐고 물어봤거든요. 파트너로서의 일은 다 하는데 인정은 못 받는 위치라고 하더라고요. 사위 같은 거지만 결국 사위는 아닌 거죠. 이성애 커플이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어서 좀 인상적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력사님과의 관계에서 돌봄과 장례를 겪으며, ‘공동체’ 커뮤니티의 중요성도 언급하셨어요. 친구들이 캔디 님에게 중요한 버팀목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많은 이들이 그런 커뮤니티를 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죠</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이 들수록 커뮤니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앨라이(Ally, 퀴어의 연대자) 친구도, 비혼인 친구도 좋죠. 하지만 때때로 이들은 내가 고민하는 것에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는, 삶의 결이 맞는 사람들을 찾게 되는 이유죠.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이트에 ‘그동안 잘 살았고, 학벌도 좋고, 직업고 좋은데, 40대가 되니까 만날 사람이 없다. 친구를 찾고 싶은데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가 종종 올라와요. 내가 파트너랑 헤어지거나 파트너가 죽어서 슬픈데, ‘너 갑자기 왜 울어? 왜 슬퍼해?’ 하는 사람만 주변에 있으면 너무 괴롭잖아요.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친구들, 커뮤니티를 갖기 위해선 사실 노력이 필요한 거 같아요. 요즘 사람들이 생각보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더 그런 거 같은데요. 온라인으로 적당히 교류하고 실제로 만나지 않거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나마 다같이 만나도 감자튀김 먹으면서 피상적인 말만 나누다 헤어지죠. 그건 노력하고 싶지 않은 거고, 갈등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거고, 귀찮아지고 싶지 않은 거에요. 하지만, 그걸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 커뮤니티가 나에게 큰 힘이 될 거니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020273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큐라이프 협동조합 홍보물 중. 누구나 자신답게, 존중 받으며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돌봄과 배움,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들고 키워가는 협동조합을 목표로 지난 3월 말 창립총회를 열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바탕;">이제 ‘큐라이프 협동조합’의 활동가가 되셨는데요. 캔디 님의 일련의 경험이 협동조합을 만드는데 영향을 줬을까요?</span> </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무래도 그렇죠. 협동조합에 들어간다는 건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거고, 나 혼자 있을 때 10을 노력해야 한다면 협동조합 안에선 8정도만 노력해도 무언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잖아요. ‘함께’ 하니까요. 또, 내가 무서울 땐 다른 조합원들 등 뒤에 숨어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서 힘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힘을 줄 수도 있고요.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사실 퀴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고요. 돌봄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할 때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관계망, 그러니까 협동조합 안에서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책에서 “난 운이 좋았다”는 말이 몇번 언급되는데 공감이 됐어요. 저도 그런 표현을 쓰거든요. 운이 좋았으니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고,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력사 장례식 때도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많은 것에서 도움을 얻었죠. 하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리진 못하잖아요. 그렇게 좋은 친구가 없으면, 당연한 권리를 획득하거나 소소한 위로조차 누리기 힘들다는 사실, 즉 “운이 좋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좀 비참하고 속상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전히 주변엔 “파트너가 죽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더라, 20~30년을 같이 살았고 (파트너의) 조카들도 ‘이모’라고 불렀는데 막상 파트너가 죽으니까 내용증명부터 보내더라...” 등의 이야기가 들리잖아요.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이 그 순간 혼자였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요. 하지만, 그들에게 모두 투사가 되라고 할 순 없잖아요. 어쩌면 그냥 다 포기하고 잊는 게 편안한 삶을 보내는 방법일 수도 있고요.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래서 큐라이프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큐라이프 홍보하면서 쓰는 문구가 “혼자 하면 불안이지만, 함께 하면 대안이 된다”거든요.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을 보고 ‘아,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저렇게 친구를 만들면 되는구나. 어떤 서류를 준비하면 되는구나. 어떤 기술이 필요하구나...’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퀴어 친화적인 공간도 더 많이 만들고 싶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에도 썼지만, 지금의 파트너(책에선 ‘오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와 혼인신고를 하러 갔을 때 구청 직원한테서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 직원도 분명 동성 커플의 혼인신고를 받아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걸 오히려 창피해하고 미안해 하는 모습을 봤을 때 뭔가 위안이 됐어요. 그런 태도가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당장 혼인평등권이 마련되지 않더라도, 담당 공무원들이 많은 동성파트너가 존재하고 그들이 파트너로서 혼인신고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교육’받는다면, 인식이 많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큐라이프를 통해 해나가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작년에 ‘큐라이프’ 프로젝트로 일본, 대만, 필리핀을 방문해 각 나라 퀴어들의 돌봄과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만 타이베이의 노인센터에서 “성소수자인 노인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아직 센터에 성소수자 노인은 없지만, 언젠가 올지 모르는 일을 준비한다는 거요. 그리고 성소수자 단체와 협업하면서 센터 내 노인들과 관계망을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있어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리핀의 퀘존(Quezon) 시에선 2023년부터 필리핀 지방정부 최초로 “Right to Care Card”라는 제도를 도입했대요. 일종의 파트너십 같은 거죠. 이 카드를 가진 커플은 파트너의 의료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보호자로서 결정을 할 수 있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필리핀이 소위 ‘잘 사는’ 나라는 아니고 복지 시스템이 잘 마련된 곳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퀴어들이 함께 살아낼 방법을 많이 고민하더라고요. 커뮤니티 내에서 노후 인식 조사를 할 때도, 문맹인 사람들은 일단 글부터 가르치고, 또 핸드폰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성소수자 관련 용어도 알려주면서 조사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는 놀라웠어요. 단지 조사만 하고 끝이 아니라,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계속 연결지점을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다 싶더라고요. 큐라이프 활동에서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과 대만에서 모두 ‘부모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비혼 1인가구가 부모 돌봄을 하는 것과 성소수자가 부모 돌봄을 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어요. 어느 날 엄마를 모시고 와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파트너와 20년째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파트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소수자로서 돌봄을 한다는 건 분명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이 올 거라 생각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툭 터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할 거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04813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캔디와 오쓰의 결혼식 중 밝게 웃고 있는 캔디의 모습. 두 사람은 (반려될 것을 알면서도)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제공: 캔디)</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누군가는 캔디 님이 겪은 것과 유사한 일들을 겪고, ‘그냥 다 잊자’ 이러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그 경험을 토대로 배운 걸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활동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걸 돕고 연결하고 싶은 오지랖?!(웃음)인 거 같아요. 호기심과 애정이기도 하고요. 이 책을 쓴 계기를 굳이 나누자면 1/3은 오지랖이고, 1/3은 활동가로서의 직업병, 1/3은 전 파트너에 대한 애증과 내 이야기를 쏟아내며 자랑도 하고 위로도 받고 싶은, ‘관종’같은 개인적 욕망인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파트너의 장례식도, 장지도 못 가본 사람이나, 많은 퀴어가 죽어가는 걸 봤으니까요. 동시에 퀴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도 봤죠. 그 모든 장면이 나에겐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지난 일들을 겪으며 캔디라는 사람이 변한 부분이 있다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당한 것들을 더 이상 참지 않게 되었고, 현실적인 법제도가 내 근본적인 욕망과 직결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력사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운이 좋아서’ 할 수 있는 게 있었지만, 사실 법적 권리가 없으면 고인의 물건 하나 지킬 수 없다는 걸 경험했으니까요. 단지 예쁜 드레스 입고 축하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들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 아니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소수자임을) 인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결혼이라는 걸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작성해 놨지만 사실 지금 상황에선 와이프인 ‘오쓰’는 그걸 확인하지도 못해요. 직계가족이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한 거에요. 가족들이 오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그걸 인지시키기 위해서 한 거죠. 그런 게 변화된 점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앞으로 또 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쓰와 함께 ‘퀴어 동네 이장’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한 3번 정도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뉴스레터를 발행해 보려고 하고요. 거창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보단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인연이나 정보를 연결해 주는 ‘홍반장’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퀴어가 질병이나 생활고 등 남들도 겪는 불안 외에,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겪는 추가적인 불안 없이 남들만큼 ‘슴슴하게’ 살 수 있도록,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이 책을 어떤 분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솔직히 모든 사람이 다 읽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성소수자 당사자에겐 공감과 레퍼런스가 되길 바라고, 무엇보다 성소수자 이슈에 관심 없는 비-당사자들이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으면 해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해지는지 그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의 절박함을 꼭 알아줬으면 해요.</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6 14:35: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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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I “Cross the Sea” Every Week to Study]]></title>
       <link>https://ildaro.com/10433</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former hagwon teacher who applied for insurance after being fi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a teacher at a hagwon[private academic institute]. In my mind, a hagwon teacher is a temporary worker who can get fired anytime, but from the outside, it was a teaching position that appeared good.  When I was seeking a job, I hadn’t even heard about the 4 main insurances, severance pay, or unemployment insurance. I just started work after hearing about pay raises and the working hours. Still, my mom always proudly said I was a teacher, and I often heard, “You must be good at English!” from those aroun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hagwon teachers, dyspepsia is common. I also suffered from indigestion at least 3 times a week after having to eat in a rush during the 20 minutes allotted for meals. Still, I had to be grateful of the fact that I could eat and teach. After 10 minutes of break there were continuous classes, and paperwork I had to do piled up. ‘When on earth are you supposed to prepare for class and do the paperwork?’ I found myself teaching classes without preparing for them and filling out paperwork whenever I could during class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could only be a teacher who improved the grades of the students; I couldn’t talk to them of dreams and aspirations. The more time passed, the more I came to choose teaching methods that were easy for me as a teacher and that could raise the grades of the students, instead of a ‘good’ way of teac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till, I liked the children. On Ppeppero Day [Nov. 11, when people give each other the snack called Ppeppero] and Valentine’s Day, I even made chocolate with the students. I was interested in them, about what went on in school and whether they got along with their friend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lucky (according to another teacher) to receive two weeks’ notice. It was a place where being fired over the phone, on the day of, and incidents of unpaid wages occurred too easily. Of course, there had been no contract stating the promise that my salary would get increased after one year, so I couldn’t prove it. There were no severance pay or unemployment benefi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filed a report to the Labor Administration to receive my severance payment and ‘advance notice payment’ (If the employer intends to fire a employee for reasons of management, they must give notice at least 30 days in advance, and if not, they must pay them the regular wages for 30 or more days). Even though it was a reasonable demand, I went through the process asking numerous times whether I was doing the right t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met my employer and her husband again, I was astonished at their brazenness. Since you can receive severance payment if you worked 1 year or longer, my employers weren’t able to say anything about this. But to receive advance notice payment, I had to prove that I had actually been fired, and they lied, saying that I had stopped coming to work without informing them. Although there was circumstantial evidence that I had been fired, there was no certain evidence such as a recording of when I was getting fired. Furthermore, my employer told me that if I sued, they would sue back for false accusations. Consequently, I was not able to receive the advance notice pay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as I was starting to question whose words were the truth, feeling like my own words were a lie, I submitted the unpaid wage report that the labor inspector had fortunately issued to the unemployment insurance center, and was able to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I paid the premium and got unemployment insurance coverage—which I hadn’t had when I was working at the hagwon—to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only after I was fired. I was finally learning the rights a worker was entitled to, one by o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is way, I secured my severance pay and my unemployment benefits in the small community of Jeju Island. Many hagwon teachers don’t, because if you do this, it becomes difficult to find a job within the hagwon circle. The reason why I could do this was because I wasn’t going to do this work anymore.   </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50342221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sea is a 5-minute walk from my home. But for me, Jeju Island is not an island of romance. ©Lee Yeon</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Saying goodbye to a loved o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fell in love with someone. It was a love where it wasn’t certain whether I loved that person, or I lovedloving that person. It felt as if I could do anything because that person existed. It was because of them that I decided to go abroad to study women’s studies. (Even though, ironically, we would not be able to be together if I went abroad…) Luckily, they were going to wait for me. It was when I was preparing to study abroad that I received the notice that I was fired from the hagw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receiving the notice, I started to clear out my previous life, piece by piece. I let go of my affection towards the children, and emptied out my passion towards working as a hagwon teacher. The day I packed and carried out the heavy pile of all my things from the hagwon, the person I loved was waiting in their car for me. They threw out all the used paper from my boxes, and ate dinner with me. I was able to endure the whole process thanks to that person. But my plans to study abroad became the reason their friends could not welcome me, and why I gave that person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wards, I gave up the dream of studying abroad due to my own reasons. Even now, I wonder what would have happened if I had decided earlier that I wouldn’t go abroad to study, or whether the fate of that person and I might have been different if I had discovered the reason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earli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person had always been supportive, and particularly during the time when I was going through a difficult time after getting fired, the person’s existence itself was a big help. They supported me when I flew to Seoul every Saturday by plane to study women’s studies. On Fridays, I would get home after 10pm at night, go to Seoul on Saturdays to study, and rest my tired body next to that person on Sundays. But had I ever been supportive of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was struggling against the hagwon that person was worried that I would get hurt, but they left in the end without knowing whether I succeeded. After that, I sought that person and then said goodbye numerous times in my mind every day. Now their voice and face have faded awa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s the reason I want to study women’s stud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good to stop working and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After consulting people around me, I decided to study feminism not abroad but in Korea. I studied hard while receiving training in sexual violence counseling. But my teacher told me I needed to find out why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in order to be good at studying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o be honest, I didn’t have a reason for studying women’s studies. No, I didn’t know. I asked myself over and over again. ‘Why do I want to study women’s studies? What is it that I want to do after graduating from graduate school?’ But asking myself these questions made me realize that the reasons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would not get resolved through women’s studies. It was because the answer I was attempting to find through women’s studies was already inside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first encountered women’s studies during college, I was finally able to forgive my relationship with my mom and give myself freedom. Women’s studies was a source of liberation for me. But I had been mistaken in believing that I could resolve the even-now troubled relationship I had with my dad through women’s studies. I was confused. Getting along well with your family. It occurred to me that maybe the presumption that one should get along well with family itself was wrong. You could get along well but also not that well too… I calmly dissected the feelings I had towards my family. And I realized that I had come to want to forgive my d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was not a problem that would be solved by going to graduate school. But still it was clear that women’s studies had let me know what the problem I had wa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plans to go to graduate school next year all disappeared. I became very confused when thinking of what I should do for a living. I was 28 years old. A friend of mine already had 2 kids. Of course, I don’t think marriage will be my liberation. Plus, I don’t have someone to marry either, so ‘chwijip’ [marriage as one’s job] is impossible for me. What in the world have I been doing since graduating college? I still don’t know what I like or what I want to do. In dramas, at this age, people are already good at their jobs and are dating people they are planning to marry after several past relationships… I had thought I would become like that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had always dreamed of living in another country, and I decided to earn money, travel, study English more, and do work related to English. So I obtained a working holiday visa for Australia. Even after receiving the visa I continued to ask myself, could I do physical labor in another country? Could I, who hadn’t physical strength, clean and work in restaurants? Wouldn’t I be regarded as wasting time by doing such work as a person of 30 years old? I decided that I would first just go. And if it didn’t work out, that I would return… you can’t prepare everything perfectly. And so I reserved a flight to Australia for September 16th.</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phone call I made to my dad in 29 ye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ast February, I happened to learn that they were doing a ‘Healing Drama Professional Course (a program designed to liberate participants by finding the cause of pain and sickness through internal guidance) at the Healing Drama Research Center NOW and participated in it. I only had to go to Seoul once a month so the schedule wasn’t difficult, and I had a lot of interest in dram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day, I sat in a circle with strangers and told them my story. Things gradually started to change, as if wounds heal the moment they are spoken in words. I, who had tried to take responsibility for everyone’s emotions, was able to think of myself first and protect myself. Now (who is the head of the research center) said, “Other people change only when I change." Indeed, as I started to change, my surroundings started to,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ad had always been strict. To me, my dad was a scary person. He was someone who caused me distress. He was an abuser… Speaking these words, I was able to separate myself from my past. I was no longer afraid to look at my dad. I had been dragging the dad who had always frightened me with his anger (past) into the present and confusing him with the dad who merely chastises me (reality). Even when my dad was chummy with me, I had clung to the wounded self inside me and had been ang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day, my dad came back from Dongsaseob (a happiness meditation program) and, having had a good experience there, wanted the rest of the family to go as well. To tell the truth, I had been thinking that the Drama course would be sufficient, and I resented it since it seemed as if Dad was saying ‘you should go and change too.’ I had endured and made efforts within our family until now, and I resented my dad for starting to make efforts only now. But even after returning from Dongsaseob my dad did not change, and I then thought going there and changing myself would be bett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suspicions about my dad were wrong. I realized there just how much I had been hating my him. In my heart, I had been thinking ‘I am doing more than enough, but I’m here [using my precious time] because of my dad. (At that time, I was quite busy preparing for my working holiday in Australia.) There, I considered my heart, which blamed my dad, and as each day passed, I reflected upon myself more and mo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strange. I saw my fellow trainees getting in touch with those that were significant in their lives even without being told to do so. I also called my dad and told him I was sorry. It was the only phone call I’ve made to my dad in my 29 years. In fact, if he hadn’t called me on my way to Dongsaseob, I wouldn’t even have known the number. I hadn’t been able to forget how brusque I had been upon answering the phone. Not just that. Whenever my dad had been warm towards me, I had ignored his affections because of the moments in the past when he had been angry and made my life difficu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I realized that he hadn’t wanted to go because he wanted me to change, but because he genuinely had had a good experience and had wanted to share it. Just like the way I talked about Dongsaseob to the people around me these days. Looking into myself and looking at my dad, I realized that I had been wrong in thinking it was only I that had been making efforts and had been a victim…</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5030543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Currently, I’m helping out at my parents’ shop ©Lee Yeon</p></td></tr></tbody></table><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ambiguity of life ‘helping out at one’s parents’ sho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plans to go to Australia on a working holiday were postponed due to health issues. Currently, I’m helping at my parents’ shop. People around me envy me in that I can do that and also do what I want to do. They also say that since I can inherit this business in the future, I don’t have to worry about making a l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 do at the shop isn’t fixed. This is because what I do changes depending on what the customer orders. In other words, I do everything. These days, I do paperwork or prepare study plans and material needed for when mom lectures. This is because my mom isn’t that good at using computers. I also prepare lunch for us to eat at work and mind the shop. On Sundays, I look after the shop alone, and when my mom has errands to take care of I also mind the shop. Because it’s something I’ve been doing since I was very young, it’s not difficult. When a customer comes, I sell products, connect them with my mom, and make further appointments for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is feeling of not working even though I am working, and having issues with my parents from time to time is something I can’t do anything about. I dream of becoming completely independent, but it feels as if I will not be able to do so… Sometimes, when I discover myself giving up on what I want to do because of my parents (even though they themselves say nothing about it), I get frustrated. Sometimes the words ‘our family’ pressure me to hide my desires and be patient. Also, I have to protect myself from the views that see me as living off my parents instead of my own abil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se days, I go to Seoul every Friday for a class. The fee is 200,000 won. I needed my parents’ support in order to pay the fee upfront. Since I go to Seoul from Jeju Island to listen to these lectures, the additional cost for a total of 6 lectures is around 1,500,000 won. The reason I was able to put up with those gazes of incomprehension from others is my own will and my mom’s support. (When it cost around 3,000,000 won to study women’s studies before, I didn’t tell those aroun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is moment, the place closer to me is not the sea, which is a 5 minute walk away, but the area near Hongik University. Is Jeju Island really the island of romance? For me, it’s merely the place I make a living, my hometown, and a place where the beautiful sea can be seen from time to time. I’m beginning to grow tired of the impressed looks I get when I say I’m from Jeju Island, since for me, who has to deal with the expensive airfare, living in Jeju Island is neither a privilege nor romantic.</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urrently, I am an unmarried woman who lives with her pet (Namu) and doesn’t have a job or any savings. I went through a lot and had to continuously let go in order to be able to say this without difficulty. I’ve started to study the mind recently, and my teacher said that the question ‘what am I?’ is different from the question ‘who am I?’ Honestly, I’m not sure I completely understand this. But I’m sure of the fact that this question makes me grow and is helpful to my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ve been struggling over and over with the question ‘what am I?’ during my 20s. Questions such as ‘why was I born into this world, and what was I meant to do? What would be the thing I would be best at?’ . . . But now, I think about ‘who am I?’ Although it’s a question whose answer I don’t know, it occurs to me that it’s okay if I don’t in the end. Even though there’s a beginning, there doesn’t necessarily have to be an end. Sometimes even the start itself is valuable. I just want to live, gratefully, together with someone who will always be on my side.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Ros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6873" target="_blank">http://ildaro.com/6873</a> Published: November 2, 2014</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5 15:00: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ee Y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83'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50529556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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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낯선 곳에서 헤매길 좋아하는 사람의 ‘길’]]></title>
       <link>https://ildaro.com/1043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의 3년의 시간을 지나 마주 앉은 연임과의 대화는 당연히, 건강 이야기로 시작됐다. 유독 검던 우리의 머리칼이 절반은 하얘진 이슈, 여성호르몬 이슈, 연임의 몸에 기어이 나타난 유전성의 의료적 징후 이슈, 지난 한 해 나를 쥐고 흔든 각종 증상과 병원 순례 배틀… 나이는 그냥 지나가는 젊음을 아쉬워하는 척하며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우리가 처음 만난 20년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909545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널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엄마 마주하기-“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따져보니 나의 아빠가 갑작스럽게 암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간병 교대도 할 수 없던 시기, 40년 넘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깝지 못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무력하고 혼란스러웠던 때, 연임에게 그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의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 연임의 아빠도 세상을 떠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빤 학교에서 영어교사이자 상담교사였어. 시도 쓰고 먹그림도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지. 덕분에 나도 어릴 때부터 전시나 공연, 영화관 같은 델 자주 갔지. 내 기억에 엄마는 아빠와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어린 나는 엄마 편이 되어주고 싶어서 아빠를 되게 미워하고 못되게 굴었어. 엄마는 무섭고 슬퍼보였고, 아빠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 믿었거든. 시간이 흘러 아빠 돌아가신 후에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서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었어. 죄책감과 원망하는 마음이 뒤엉켜 엄마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웠고 거리를 뒀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 년 넘게 상담 받고 괴로워하다 알게 됐어. 엄마는 누군가의 정서나 감정을 받아주기 힘들었던 거야. 엄마도 당신의 감정을 읽어줬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려운 환경에서 너무 힘든 일들을 혼자 경험해야 했으니까. 탱크처럼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방법밖에 몰랐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 험한 전쟁터에도, 사랑만 바라는 꽃밭 같은 딸이 손을 내밀어도,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 느끼지 못하고 탱크처럼 밀어붙였던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엄마와의 어려움이 나한텐 큰 공부가 됐어. 엄마와의 관계는 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였지만, 그걸 들여다보고 해결하려다 보니까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하는) 나에겐 결국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엄마의 하소연, 아빠의 하소연을 가운데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경험도 경청의 조기교육이었던 것 같고.”</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질문 마주하기-“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연임이 기관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 직장에 머물며 연임의 탁월한 영어 실력이 필요할 때 일을 부탁하기도 했고, 그러다 나 역시 바깥으로 나와서 공연예술 영역에 속하게 되었을 때 어느 지점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다니곤 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53386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이후로도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나곤 했다.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 대학에서는 영어교육 전공해서 정교사 자격증도 땄었지. 그런데 그땐 교사가 되긴 싫었어. 부모님 두 분 다 교사라 너무 익숙해서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 대신 예술에 관심이 있었지. 하지만 어떻게 그 분야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거야. 대학 때 어느 날 갑자기 춤을 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학교 무용과에 전화를 한 거야. ‘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랬더니 전화 받은 조교 분이 자기 과 동기가 하고 있는 개인 강습을 소개해줬어. 거기로 무용을 배우러 다녔는데, 그 무용 선생님이 나중에 대학원 ‘예술경영과’에 들어갔다더라고. ‘아!’ 그래서 나도 예술경영과를 들어갔어. 그 공부를 하고 (우리가 함께 일했던) 예술지원기관에 들어간 거였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케팅을 좀 더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기도 하고. 아카데믹한 공부보다는 나의 삶에 필요한 공부를 찾아서 하고, 일과 삶에 적용해 보고 했던 것 같아. 공공극장, 민간축제, 무용단체, 음악단체, 개인 아티스트, 드라마제작사, 비엔날레 사무국, 그리고 대기업 전략팀까지... 뭔가가 궁금하면 일단은 책을 읽거나 물어보고,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필드에서 일해보고, 또 다시 공부하고 일하고,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래도 되나 싶고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않는 게 괜찮은가.’ 스스로 불편할 때가 있었어.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 됐고. 그런데, 결국 내가 계속 불안함을 느끼고 걸려 넘어진 건 편가르기 같은 ‘집단문화’, 층층시하의 ‘조직문화’였던 것 같아. 나의 그런 패턴을 발견하면서 심리 공부를 시작했어. 2009년에 대기업을 퇴사하면서 가능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내 호흡에 맞게 사는 방식을 찾아보자고 결심했던 것 같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침내 ‘무소속’이 된 연임은 공연예술 매거진 편집일을 꽤 오랫동안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무용전문극장을 표방했던 LIG아트홀이 발간하던 계간지 [inter-VIEW],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산하 서울무용센터가 발행했던 웹진 [춤:in]. 매우 개인적인 평가라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두 잡지 모두 무용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하지만,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가 얼마나 혁신적으로, 흥미롭고 아름답게 확장되고 기어이 무색해질 수 있는지를 보기 좋게 실험했던 매체였다. 내 딴에는 열심히 연극을 기획하고 있는데, 별로 연극으로 보여지(보아주)지 않아 외롭던 시절에 나는 이 매체의 지향에 열렬히 공감했고 지지했고 힘과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두 매거진이 가장 빛나던 시절을 연임이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책상 앞에서 공부만 했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무용하는 사람들을 만난 게 나에겐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던 거야.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인식하고 있었던 몸을 섬세한 연장으로 쓰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본 거지. 있는 곳이잖아. 그 무용단엔 다양한 몸들이 있었어. 땀내 나고, 멍들고, 까매진 발에, 땅딸막한, 길고 가냘픈 몸들이 함께 움직이는 걸 보면서 ‘아! 아름답다!’ 생각했어. 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터부, 선입견 이런 것들이 완전히 깨진 거야.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세계관 자체가 달라진 거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 그 경험이 나를 예술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것 같아. 그래서 고마움이 있었고, 이 분야에 진 빚을 갚고 싶다,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심 없이’ 잡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얇고 넓게 엄청 다양한 경험들을 해왔으니 그것들이 어떻게 세상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감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무용도 내가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거리를 두고 보니, 곁의 무엇과 연결되는지가 보였던 것 같고.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내가 이런 걸 잘, 혹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런 일이 나에게 잘 맞는구나, 하는 걸 발견해서 기쁜 경험이었고, 굉장히 많이 배우기도 했어. 마무리가 좀 갑작스럽고, 문화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방식이었던 게 아쉽긴 했지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935267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임은 현재 심리상담사 겸 상담코치로 일하고 있다.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마음 마주하기-“누군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은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음이 힘들어서 혼자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했잖아. 그때 찾아간 대학 심리학과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상담을 받고 싶은 건지, 상담을 하고 싶은 건지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생각해보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거더라고. 그래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코칭을 공부하며 숙제를 하다가 깨달은 거야. ‘아, 나는 누군가 성장하고, 치유되고, 편안해지도록 돕는 게 기쁘구나. 이젠 그 일을 해야겠다.’ 나를 좀 알게 됐고, 내 삶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기쁨을 느끼는 일을 알아챈 거지. 그래서 상담코칭 전공으로 대학원에 갔어.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만난 이들이 성장하고, 편안해지고, 건강해지는 게 너무 좋아.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대학 상담소에서 학생들 상담도 하고, 개인 상담도 해. SNS(<a href="https://www.instagram.com/a___dear___friend" target="_blank">@a___dear___friend</a>, 언더바 3개씩)로 가끔 홍보를 할 때도 있는데, 상담 받으셨던 분들이 소개해주셔서 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하고 있어. 지금은 딱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은데, 물론 현실적인 고민은 되지. 어쨌든 지금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 그냥 하루하루를 잘 지내보자, 그냥 그런 정도.”</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 마주하기-“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그리고 제가 요새 관심 있는 건요, 아니면 요새 하는 일은요, 그렇게 덧붙이지. 내 직업이 뭔지, 직함이 뭔지, 어디 소속인지를 계속 증명해 도구로 삼아 봤자 뭐 어쩌겠어. 나는 맨날 변하는 사람인데, 구르는 돌 같은 애인데 뭐 어쩔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명확한 선택과 결심’의 바탕엔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있는 힘껏 다 하는 삶을 살 거야’, 그거 하나. 나에게 명확함이 있다면 그때그때 순간의 명확함이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명확함, 비전 같은 건 없어. 대신 그런 믿음은 있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길을 헤매는 걸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진짜 길도, 내 삶에서의 길도 있는데, 실제로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난 헤매는 걸 좋아해. 낯선 길로 계속 가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 빨리 가는 길, 쉬운 길이 있겠지만, 모르는 길을 계속 탐험하거나 탐색하는 게 좋아, 그러다 길을 만들기도 하고. 막혀 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하지만 돌아온 그 자리가 같은 자리가 아니라고 믿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 아님 말고.(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62ed0;">[필자 소개] 고주영</span>.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4 13:51:00</pubDate>
	   <section>sc8</section>
	   <section_k><![CDATA[일다의 방]]></section_k>
	   <section2><![CDATA[인터뷰]]></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고주영)]]></author>
	   <category><![CDATA[인터뷰]]></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458075344.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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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우경화, 배외주의 넘어 ‘경계’에서 이야기가 열리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3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골적으로 배외주의를 드러내며 더욱 우경화되는 일본의 정치 현황 속에서,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의 올해 신년호 1면을 장식한 것은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OMURA-Yaki,　大村焼き) 작품 이미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니치(在日)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 씨의 이 작품은 뿌리 깊은 일본의 배외주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보여준다. 〈페민〉은 “우리 사회가 붕괴되기 전에”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외국인혐오와 인종차별, 그리고 군사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신년호 기획을 내놓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무라 도자기〉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리타(有田) 등 도자기 산지에서 만들어진 ‘도제 수류탄’의 형태를 본 따, 아리타 도자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아리타 도자기는 임진왜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이 조선을 침공했을 때 연행해온 조선인 도공들이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작품 제목에서 ‘오무라’(大村)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 있는 ‘오무라입국자수용소’를 가리킨다. 1950년 ‘불법입국자’로 분류된 조선인을 조선반도로 강제송환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만들어진 장소이며, 현재는 출입국관리센터가 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1044943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자이니치(在日)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チョン·ユギョン) 作 〈OMURA-yaki〉(오무라 도자기, 2023) 사진. 로고 마크는 ‘Zainichi Against Raicism’(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자이니치)의 머리글자. 노예무역을 통해 제국으로 번성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일본에서 수입한 아리타 도자기에 새긴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네덜란드어 표기의 약칭)를 비꼰 것이다. (촬영: 마나베 유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작년 11월, 일본에서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를 소재로 책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가 출간되었다. 출판사인 하나타바책방 대표 이토 하루나(伊藤春奈) 씨에게 이 책의 의미에 관한 글을 기고받았다. </span><span style="color: #3366ff;">[편집자 주]</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작가가 ‘오무라 도자기’를 통해 던지는 질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나타바책방(花束書房)에서 출간한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는 〈오무라 도자기〉라는 작품이 기점이 된 책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자이니치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チョン</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ユギョン) 씨, 그리고 한일관계사 등을 연구하는 야마구치 유카(山口祐香) 씨의 대담과 에세이 등을 모은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7년 정유경 작가는 창작의 거점을 한국으로 옮겼지만, 한국으로 이주하기 얼마 전 해외 출장에 불리한 ‘조선 국적’(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후예들이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선택하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경우 갖게 되는 행정상의 적. 관련 기사: ‘조선적(籍)’자의 변치 않은 현실 <a href="https://ildaro.com/4400" target="_blank">https://ildaro.com/4400</a>)에서 ‘한국 국적’으로 전환하는 등 국가가 자의적으로 긋는 경계선의 폭력성을 체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한국에서 예술 활동을 하던 그는 한국 병무청으로부터 “3년 이상 한국에 거주할 경우 징병 대상이 된다”는 서면 통보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다. 작가는 일본에서 조선학교에 다니며 북한에 친화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대한민국은 그의 체류 조건으로 북한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군 복무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관련 기사: “꽝! 균열의 양쪽을 응시하는 힘” <a href="https://ildaro.com/10353"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53</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작가는 일련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포함해 100년 이상 이어진 일본의 식민지주의, 재일조선인이 당하는 차별, 남북 분단으로 인한 갈등, 자신에게 덮쳐온 한국전쟁의 여파 등. 일본 사회에서는 이야기되지 않는 역사의 과제를 작은 〈오무라 도자기〉에 집약시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임진왜란 시기 조선에서 돌아온 무사가 호랑이를 풀어놓은 데에서 오무라 지역 일대가 ‘호코바루’(放虎原, 호랑이가 풀린 마을이라는 뜻)라 불렸던 것도, 당시 연행되어 온 조선인 도공들로 인해 ‘아리타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진 배경도, 그저 일본에서는 ‘흥미로운 역사거리’로만 소비된다. 이런 사회에서 정유경 작가는 회화 작품 등을 포함한 〈오무라 도자기〉 연작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는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창작을 하는데, 도자 작품인 〈오무라 도자기〉는 아리타에 체류하며 완성했다고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0444285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필자 이토 하루나(伊藤春奈) 씨. ‘하나타바책방’(花束書房)의 설립자이며, 『왕언니의 문화사』 등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인터뷰 기사: “100년 전, 가부장제 사회의 ‘역할’에 저항한 여성들” <a href="https://ildaro.com/10289" target="_blank">https://ildaro.com/10289</a>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落合由利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조선인의 ‘이동’ 역사와 자의적으로 그어진 ‘경계’ 사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처음 〈오무라 도자기〉를 알게 된 건, 우연히 소셜미디어를 통해서였다. 작품의 모습과 함께, 작품의 개념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400년 이상 전부터 이어져 온 조선인의 ‘이동’을 다시 생각하고, 자의적으로 그어지는 경계선에 질문을 던지는, 현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도자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로부터 얼마 후에 정유경 작가와 야마구치 유카 씨의 대담을 듣게 되었다. 야마구치 유카 씨는 아리타 출신으로, 어머니 쪽이 조선 혈통이다.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무라출입국수용소, 아리타 도자기 제작의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배경도 야마구치 씨가 연구자가 된 이유의 일부가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두 사람이 만난 사실에 우선 놀랐고, 규슈 각지의 식문화와 그릇 등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조선반도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야마구치 씨의 글에도 매료되었다. 연구자와 생활인의 관점이 절묘하게 섞인 넓은 품, 개인사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엮는 경지, 거기에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의 유머까지 담겨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씨과 야마구치 유카 씨의 대담에서 각자 자신과 연관된 역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온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오무라 도자기〉 작품해설에서는 사람의 무의식에 작동해 무언가를 열어젖히는 듯한 힘을 느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개인의 절실한 이야기, 그리고 지역의 발자취에서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게 하는 힌트가 가득하다고도 느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 사회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유경 씨의 이야기를, 첫 대면인 야마구치 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지막에는 캐치볼을 주고받는 듯한 장면이 전개되며 정 작가의 말이 훅 열리는 장면도 봤다.(책의 제목-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는 그때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대화’가 억압이 되기도 하는 지금, 둘의 솔직한 대화에서 순순히 희망을 느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052228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를 소재로 엮은 책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정유경, 야마구치 유카 공저, 이토 하루나 편집, 하나타바쇼보, 2025) 표지 이미지. 하나타바책방 홈페이지 <a href="https://www.hanatabasyobo.com" target="_blank">www.hanatabasyobo.com</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것 - 나와 사회와 역사의 ‘연결’을 깨닫고,</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 부제(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의 지명에도 많은 의미를 담았다. 그 땅에서 살고자 모색하거나, 혹은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던 조선인과 그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 것, 오무라수용소와 출입국관리로 이어져 온 조선인/외국인 학대와 폭력, 그와 연속선상의 경찰 권력, 돌연 ‘경계선’을 긋는 국가, 눈곱만큼도 역사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휩쓸리는 ‘국민’, 그들의 근원에 있는 ‘식민지주의’를 묻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가 너무나 뿌리 깊어 설명이 길어지고야 마는 책이지만, 모든 것을 새겨넣고 싶어 제목에 전부 담아버렸다. 복잡한 역사는 복잡한 대로 알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나의 바람이 패키지에 담긴 데는 멋진 디자인의 힘이 크다. 미야코시 사토코 씨가 북디자인을 맡아주었다. 미야코시 씨에 따르면, 아리타 도자기가 도자기 흙에서 만들어지니, 꺼칠한 질감의 표지에서 광택이 있는 커버를 향해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표현했다.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표지의 질감에 이 책의 주제를 노이즈처럼 울려 퍼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니 기쁠 따름이다. 정형에서 벗어난 미묘한 판형과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는 ‘질문을 던지는’ 오무라 도자기를 떠올리게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무라 도자기〉 작품의 배경을 생각해 보니, 이것이 내가 페미니즘에서 얻은 여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사회, 나아가 시대와 역사의 연결을 깨닫고,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경험. 내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전전/전후’라는 고정화된 서사, 비대해져버린 전후민주주의 ‘신화’, 그것을 일부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끌어왔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다 깊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한마디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는 읽으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당신이 몰랐던 역사와 만나게 된다면, 관련된 책을 더 찾아 읽어보거나 그 의문을 누군가에게 전하며 사유를 열어나가길 바란다. 그러다보면 분명, 왜 일본이 지금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일부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 <span style="color: #3366ff;">[번역-고주영]</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3 17:00: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토 하루나)]]></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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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역할, 성폭력, 침묵…조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title>
       <link>https://ildaro.com/1043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조카가 예닐곱 살이었을 때, 함께 유원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이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가 조카에게 물을 뿌리고 지나갔다. 조카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서 있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누르는 모습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안고 달래준 뒤 아이는 곧 기분이 풀렸지만, 나는 걱정이 되었다. 마음이 상해도 구석에서 얼굴만 일그러뜨릴 뿐 항변하지 않는 모습을 전에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을 삭히는 게 몸에 배어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는 사람으로 자라는 건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누가 너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람한테 말해야 돼. 화가 날 땐 참지 말고 화를 내도 돼. 알았지?”</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너는 그렇게 자라지 않기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이전에도 둘째 조카를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적이 있었다. 아이가 다섯 살 때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흥얼거리며 크레파스를 고르다가 이렇게 말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핑크색 골라야지. 나는 여자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일 수도 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분홍색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은 성 역할 고정관념으로 이어지기 쉬워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모 역할에 익숙지 않았고, 오빠네 부부의 자녀교육에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해 참견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그게 오래 아쉬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 번째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겼을 때는 오빠에게 나의 염려를 털어놓고 상의했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탄 그네를 밀어주다 힘에 부쳐 옆에 있던 오빠에게 대신 밀어달라고 하니, 아이가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모는 여자라 힘이 없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자와 남자의 평균적 신체 능력에 격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전에 느낀 찜찜함 때문에 아이의 머릿속에 ‘여자 = 힘이 없다’라는 공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조카가 나처럼 ‘고분고분한 소녀’의 모습을 학습하지 않기를 바랐다. 평소 주변 상황 파악이 빠르고 타인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는 아이였다. 나는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보다 상대의 만족과 관계 안정을 우선시하며 자란 내 모습을 그 애에게 겹쳐 보고 있었다. 혹시 나처럼 성폭력을 겪으며 자신을 잘 방어하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안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성폭력 교육에 대한 동화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오빠에게 연락해, 아이가 이미 성폭력 예방 동화책을 가지고 있거나 관련 교육을 받았는지 확인했다. 오빠는 자신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가르쳤고 유치원에서도 배울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세대랑 환경이 다르긴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342503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정이숙 글, 센·이주연 그림, 키움북스, 2019)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찾아본 동화책 중 하나. 성폭력 대처 방법을 담고 있다. 나는 여자아이의 신체, 복장, 행동 단속에 집중된 성교육 동화책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의사 표현 능력을 키워주는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왜 나는 남자인 첫째 조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둘째 조카의 교육만 신경 쓴 것일까. 더욱이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99%가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첫째 아이에 대한 교육 역시 중요하다. 혹시 내가 무의식에서 나의 부모 세대처럼 성폭력을 ‘여자가 조심해야 할 일’로 여긴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깊이 생각해 보니, 첫째 아이는 내게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염려될 만한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둘째 아이가 이 사회의 여성으로 살아가며 다 피하기 어려울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 경험에서, 적어도 자신의 태도를 원인 삼는 생각이나 ‘잘 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만은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 내 마음은 둘째 조카만이 아니라, 어릴 적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비슷한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음으로써 내가 어렵게 지나온 과정을 헛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일과 이어져 있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달라진 원가족의 모습</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아이는 밝고 해맑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애도 주변과 사회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 때문에 빛나는 웃음에서 진정성이 점점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 겪고 치유해 나가야 할 일임을 안다. 다만 나와 같은 어른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인 나 스스로가 어떤 상황에서도 의견을 분명히 얘기하고 가족 안에서 마땅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몇 년 사이, 원가족 안에서 내가 받아온 대우는 상당히 달라졌다. 나는 ‘저것 좀 가져와라.’라며 내게 습관적 명령을 하는 오빠에게, ‘부탁하는 말로 바꾸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맞받았다. 어린 조카들 앞에서였다. 아이들에게 ‘장남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엄마와 오빠에게 나를 능력 없는 존재로 깎아내리는 말 습관을 고치도록 거듭 요구했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가족들은 점차 바뀌었다. 후에 오빠는 내 글을 읽고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엄마가 너를 그렇게 대하길래 나도 생각 없이 그런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가장 다행인 것은, 가족 안에서 ‘엄마에 대한 존중’을 이끌어낸 것이다. 3년 전, 추석 연휴이자 엄마의 생일이던 날, 나는 본가에 엄마와 오빠, 조카들과 함께 있었다. 전부터 엄마 생일이라는 개념은 명절에 묻혀 흐지부지 사라지기 일쑤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때 나는 조카들과 놀아주느라 상차림을 돕지 못했지만, 적어도 상을 차려준 사람이자 그날의 주인공인 엄마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 게 가족 식사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어서 앉아서 같이 먹자는 내 말에도 엄마는 여전히 주방을 오가며 “나 신경 쓰지 말고 먼저들 먹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오빠와 두 조카, 나까지 식탁에 앉아 의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엄마는 “나는 서서 먹어도 돼.”하면서 정말로 서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오빠는 엄마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고, 울면서 오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돌봄노동은 식구들에게 당연했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조차 없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가족들에게 화가 났다. 내가 어릴 적 이혼한 뒤 거의 혼자 생계와 돌봄을 책임져온 엄마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 이해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자 엄마는 “엄마 괜찮으니까 울지 말어.”라고 하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내가 아이들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은 분명 잘한 일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식구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집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 남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설에 본가를 방문했을 때는 크게 놀랐다. 오빠는 내게 앉아서 쉬라고 한 뒤 엄마와 함께 밥상을 차렸다. 식사를 시작할 때는 엄마가 먼저 수저를 들기를 기다렸고, 아이들에게 “이 음식들 누가 해주신 거지?”라고 물은 뒤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도록 가르쳤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안 분위기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달라져 있었다. 3년 전 나 말고는 아무도 기이함을 느끼지 못하던 밥상의 풍경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정말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족들의 변화를 본 뒤 우리 집으로 돌아와 누운 밤, 나는 문득 양손을 들어 내 머리와 어깨, 양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너 참 잘해왔어. 너 진짜 장해.’ 어려서부터 내가 ‘말 잘 듣는 소녀’의 역할을 하며 살아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원가족을 내 힘으로 바꾸어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3년의 여러 장면이 머릿속에 천천히 흘렀다. 성폭력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고 연습하던 밤들, 꾸준히 해온 심리상담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다양한 집단상담·사이코드라마·캠프, 온라인으로 나눈 대화, 성폭력과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며 ‘숨이 쉬어진다’고 느끼던 시간, 내 이야기를 써나가며 얻은 용기.</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43787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제 모든 여성들이 치유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로라 데이비스 저, 이경미 옮김, 동녘, 2012)에서 와닿았던 부분. [사진 출처=민바람]</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여기까지 걸어온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겨우 성폭력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내가 세상에 만들어갈 수 있는 변화는 먼지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자신을 성희롱한 민원인을 계속 마주했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같이 그 민원인을 욕해주고 그 기관의 성폭력 대응 매뉴얼에 대해 묻는 일밖에는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저 확실한 것은, 살면서 겪어온 많은 성폭력을 들여다보고, 대응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지나오며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구조’를 본다.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여성들이 어째서 엄격한 자기검열과 무력감을 갖게 되었는지, 내가 분노하고 원망했던 남성들의 언행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안다. 과거 나의 남성 친구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했던 말들 속에 어떤 모순과 기만이 숨어 있었는지도 밝혀 말할 수 있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에서도 내게 자연스레 반말을 섞는 남성에게 존댓말을 요구하고, 여러 번 잘못을 하고도 아무 일 없듯 넘기는 남성에게는 왜 사과하지 않는지 차분히 묻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과거라면 나를 잠 못 들게 했을 일들에 대해 ‘또 쓸 만한 에피소드가 생겼군.’하고 반색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 앗아갈 수 없는 힘이 나에게 있음을 믿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는 안다. 조카의 말 한마디를 그렇게 신경 썼던 것은 단지 내 가족을 지키자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부정의한 세계를 다음 세대에 그대로 넘기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459124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그러니 기억하라. 치유 작업 하나하나가 이미 세상을 치유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로라 데이비스 저, 이경미 옮김, 동녘, 2012)에서 필사한 문장들. [사진 출처=민바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뒤는 없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 몇 편인가 쓰다 마무리 짓지 않은 채로 두던 개인 매거진의 발행 글에 누군가 그렇게 댓글을 달았다. 3년 전의 글, 그것도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을 읽어주고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아직은 없지만, 이어가 보겠다.’라고 답했었다. 그렇게 일단 던져놓은 말이 14화의 칼럼 연재가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Muriel Rukeyser)는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당신을 구속하던 당신 안의 무언가는 깨지고 터질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뒤는 없나요?’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자유가 우리 자신, 나아가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상이 심어놓은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자. 당신이 하고 싶은 그 이야기는 분명히, ‘해도 되는 이야기’이다. <span style="color: #d126d8;">[끝]</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126d8;">[필자 소개] 민바람</span>.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2 09:4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민바람)]]></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24640693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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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세례 받던 날, 나는 ‘크리스티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2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들어가는 말 – 아직도 동성 부부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릴 때 나는 소꿉놀이를 하면 아빠 역할을 맡았고, 조금 커서도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치마 정장 대신 바지 정장을 고집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고집이 결국 나를 설명하게 될 거라는 것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지금의 파트너와 함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채, 2013년 동성혼이 합법인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우리의 결혼은 미국에서도 법적으로 유효하지만, 정작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동성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국내 항공사에 ‘가족 등록’(2019년 12월, 대한항공에서 마일리지 합산이 가능한 스카이패스 가족 고객으로 등록)을 하였고, 최근에는 대법원의 동성 동반자에 대한 피부양자 인정 판결이 나옴에 따라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까지 마쳤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가 부부임을 인정받지 못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390584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와 배우자는 2013년에 동성혼이 가능한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우리 결혼의 증인 ‘게이 부부’가 찍어준 결혼식 직후 사진.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버지 역시 오랫동안 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는 우리의 혼인 관계를 인정해 주는 친인척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그 사실이 긴 시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 신자이자 성소수자인 나는 오랫동안 내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온 시간과, 이제는 더 이상 숨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자주 묻는다. ‘사랑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인정하는가.’ 이 질문이, 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만히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첫 세례식, 여자 아이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치원 옆 성당에서 세례를 받던 날, 나는 ‘크리스토퍼’가 되고 싶었다. 슈퍼맨을 연기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이름이었다.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을 구하러 온 영웅. 세례명으로 그 이름이 갖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그 시절, 여자아이에게 남자 성인의 세례명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크리스티나’가 됐다. 크리스티나. ‘티나’라는 꼬리가 문제였다.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혀끝에 닿는 발음이 어색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예의 바르게 웃어야 하는 연극 같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당에서 첫 영성체 예식 때 여자 아이들만 미사포를 쓰고 흰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지침이 참 싫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엔 고집을 부려 바지 정장에 넥타이를 맸다. 중학교는 사복을 입을 수 있는 학교에 다녔지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무렵 교복 자율화가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여학생이 치마 교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치마를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생애 처음으로 54일 묵주 기도를 했다. 매일 밤 촛불을 켜고 정성껏 기도했다. 당시 내가 치마 입기 싫어하는 마음을 잘 알던 어머니 주변 성당 분들도 함께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천주교 재단 여고였는데, 놀랍게도 그 학군에서 교복 의무화가 시행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학교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신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왜 여성 남성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오랫동안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명칭이 내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갈증을 느꼈다. 크리스티나가 그러했듯 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여러 젠더 개념들을 접하면서 나는 논바이너리(non-binary, 성별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틀에 갇히지 않는 정체성), FTM 스펙트럼(여성으로 지정된 출생 성별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범주)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근육을 가진, 키 큰 몸을 갈망한다. 여성스러운 가슴의 형태를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다.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다. 매일 거울 속에서 실감하는 언짢은 현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머니가 나를 향해 일컬었던 ‘중성’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지만, 그 비하 섞인 명명은 어린 내게 뜻밖의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 말을 통로 삼아 나는 비로소 ‘여성’이라는 견고한 틀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으며, 하느님과 천사들은 성별을 초월한 존재라고 가르친다.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 대천사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왜 이 땅에서는 반드시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교회에서 세례명은 한 번 받게 되면 수도자가 되거나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평생 바꿀 수 없다. 고(故) 변희수 하사는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세상은 그녀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가브리엘라’라고 부르며 그녀를 추모한다. 죽어서야 온전한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때로는 성직자들의 비밀스러운 도움을 받아, 기존 이름의 주인을 ‘망자’(亡者)로 처리한 뒤 새 이름을 다시 등록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죽어야만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3950336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배우자와 나는 캐나다에서 결혼을 하였고, 대한항공에 ‘가족’ 멤버십으로 등록되었고, 최근 대법원 판결 이후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을 마쳤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가 부부임을 인정받지 못한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또한 교회는 하느님이 세상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둘이 결합해 자녀를 낳는 것이 ‘자연의 질서’라고도 가르친다. 수컷과 암컷이 짝을 이루어 종을 이어가는 생태계처럼, 인간도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 그 질서를 벗어나는 존재는 ‘무질서’하고 ‘비자연적’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정작 자연을 들여다보면 어떤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자웅동체로 태어나는 생물이 있고, 수백 종의 동물에서 동성 간 성적 행동이 관찰된다. 자연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이와 관련한 생물학 연구로 브루스 배게밀의 『생물학적 풍요』, 조안 러프가든의 『진화의 무지개』 등이 있다.) 무엇보다 신의 이름을 내세워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과연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 깊이 되묻지 않을 수 없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퀴어가 닉네임으로 살아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 시절부터 아버지는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호하고 이성에게 무관심한 나를 보며, ‘결혼은 자식의 도리’임을 역설하셨다. 결국 내 정체성이 당신의 세계관과 충돌하자, “너 같은 자식은 없는 자식 취급하겠다”는 말로 선을 그으셨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동성 배우자와 결혼한 사실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가 무슨 결혼을 해? 니가 뭔 남자랑 결혼했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캐나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대한항공에 배우자와 가족으로 등록되고,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받은 뒤에도…. 아버지에게 받은 그 모멸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성소수자들이 겪는 통증의 뿌리는 대부분 가족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흉터로, 어떤 이에게는 끝내 닿지 못한 후회로 기록될 그 파편 같은 말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그 파편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깊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는 이들도 꽤 있다. 가족에게 상처받을까 봐, 혹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 숨죽이며 살아가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그렇게 날카로운 말들과 무거운 침묵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각자의 삶을 버텨내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배우자가 만든 가족에게 이름을 붙이다, 아콘네(Acor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부모가 지어준 한글 이름이 불편하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불효하는 마음이 따라온다. 성소수자 대부분이 커뮤니티에서 실명을 쓰지 않는다. 신분 노출이 두렵기 때문이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가족에게 알려질 수도 있고, 때로는 안전이 위협받기도 한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인터뷰에서도 — 우리는 닉네임으로 존재한다. 이름을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서, 내 영어 이름 크리스(Chris)가 더 편한 이유다. ‘크리스’는 크리스토퍼도 크리스티나도 아닌, 그냥 ‘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이 담긴다. 젠더, 가족, 신앙, 두려움, 그리고 살아남는 방식.</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401615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우리 부부의 영어 이름이 적힌 결혼 1주년 기념 케이크. Ari와 Chris의 첫 자를 따서, 우리 둘이 함께 구성한 가족의 이름을 만들었다. 아콘네(Acorne)라고.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내겠다던 자리에, 나는 새로운 이름을 넣곤 한다. 아내의 영어 이름 Ari와 내 영어 이름 Chris의 첫 자를 따서, 우리 둘이 함께 구성한 가족의 이름을 만들었다. 김가네, 최가네처럼 — 아콘네(Acorne)라고. 작은 도토리(acorn) 한 알이 참나무(oak)가 되듯 우리가 함께하면 크게 자란다는 뜻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을 짓는 존재는 결국 나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0 09:36: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크리스)]]></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04248398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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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강제 퇴거의 폭력, ‘우리에게 다른 땅은 없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2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이 글은 씨네큐브에서 진행된 〈노 어더 랜드〉 씨네토크(유운성 영화평론가, 이종찬 문화평론가)에서 공유된 발언과 설명을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 일부 내용은 해당 자리에서 소개된 구술 정보를 바탕으로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 시절,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이 있다. “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은 시리아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상에 가장 아픈 곳 중 하나는 아마도 팔레스타인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마사페르 야타(Mosfaret Yatta)에서 일어나는 강제 퇴거를 담았다. 강제 퇴거 혹은 점령, 분쟁 등 사실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하지 못 하는 이 현재진행형의 폭력은 영화를 보고 있는 매 순간마다 눈을 감거나 영화관을 뛰쳐나가 도망가고 싶게 만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432997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바젤 아드라, 함단 발랄, 유발 아브라함, 라헬 쇼르 감독, 2024)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사페르 야타는 1980년대 초 이스라엘에 의해 ‘사격 훈련 구역’(Firing Zone 918)으로 지정된 곳이다. 군사 훈련이라는 명목이지만, 이 지정은 그곳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불법 거주자’로 만드는 행정적 장치로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이 서안을 점령하기 이전인 1967년 이전부터 살아온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주민들은 동굴과 간이 주거지에서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삶을 이어왔다. 그럼에도 1999년 이스라엘 군은 약 700명의 주민들을 “사격 구역에 불법적으로 거주한다”는 이유로 강제 퇴거시켰다.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2022년 이스라엘 대법원은 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민들의 삶은 사실상 보류된 상태에 놓였고, 이 판결 이후 마사페르 야타 지역의 일상은 더 이상 일상이라 부르기 어려운 상태로 밀려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 〈노 어더 랜드〉는 바로 그 마사페르 야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라 부르기 어려운 시간을 기록한다. 영화는 공동 감독 중 한 명이자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젤 아드라가 자신의 마을이 파괴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에 저항해온 가족의 역사 속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활동을 이어 카메라를 들었다. 이들에게 카메라는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집과 마을 공동체,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의 도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젤이 기록한 영상들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집을 철거하고, 우물을 메워 없애고, 전기를 끊는다.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스스로 떠나게 하는 방식의 폭력은 노골적인 전투가 아닌, 일상의 형태로 지속된다. 거대한 충돌은 없다. 대신 불도저가 밀어버린 집을 주민들은 밤 새워 다시 짓는다. 다시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다시 짓고, 또 다시 철거된다. 이 반복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구조가 되고, 폭력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영화는 이 일상의 붕괴를 끝까지 보여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45738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국적이 다른 네 명의 공동감독이 ‘합의’한 원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네 명의 공동 감독이 만들었는데, 두 명은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다른 두 명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중 바젤 아드라와 유발 아브라함은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바젤은 앞서 언급했듯 활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마사페르 야타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기록해왔다. 유발은 이스라엘인이자 기자로서 바젤과 함께 현장을 기록한다. 둘은 집을 철거하러 온 군인들에게 항의하기도 하고, 무너진 집을 주민들과 함께 다시 짓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은 현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함께 활동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다른 식으로 버거워져 간다. 바젤은 법을 전공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불확실한 삶을 이어간다. 그의 활동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군이 아버지를 연행하는 일까지 벌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발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원망을 듣는다. 이스라엘 군이 마을을 휩쓸고 가면 주민들의 감정은 유발에게 향한다.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잖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 유발은 이 현실을 이스라엘 사회에 알리면서, 동시에 그 사회 내부에서도 ‘반유대주의자’라며 비난 받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가 더 불행한가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위치에는 분명한 조건과 한계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조건이 하나의 영화 안에 함께 담길 수 있었던 것은 네 명의 공동 감독이 합의한 원칙과도 연결된다. 이들은 네 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장면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합의의 원칙은 영화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마사페르 야타를 철거하는 군인들이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라는 점에 주목한 이스라엘 감독은 그 맥락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감독은 이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군인의 출신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맥락은 영화에서 제외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의 원칙은 폴란드-독일의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양국은 하나의 단일한 역사 서술을 만드는 대신, 서로 다른 시각을 함께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같은 사건을 두 국가의 관점에서 병렬적으로 서술하며, 차이를 드러낸다. 물론 이 사례를 현재진행형의 점령 상황과 동일하게 놓을 수는 없다. 또한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보는 것과 소거적으로 보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하나의 결과물에 도달하기 위해 합의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합의 속에서 〈노 어더 랜드〉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선명한 폭력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525577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러한 합의 원칙은 제작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합의를 위해 네 사람은 당연히 함께 편집을 진행하려 했지만, 팔레스타인 감독들이 이스라엘로 이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동 자체가 이스라엘의 허가 아래 통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 감독들이 마사페르 야타로 들어가 함께 편집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드러나듯 마사페르 야타는 철거가 계속되는 지역이다. 이들은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환경에서 작업해야 했고, 전기가 들어오는 짧은 시간마다 편집을 이어나갔다. 편집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을에서는 철거가 계속되었기에, 그들이 기록한 영상 속 철거 장면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철거가 겹쳐지는 가운데 작업이 이루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탄식하게 되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세계에 알릴수록, 미국이 이스라엘을 압박할 거야.”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다르다.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강력한 우방이며,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 속에서 그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아픈 곳을 기록하는 이들의 마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노 어더 랜드〉는 이후 전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마사페르 야타의 현실을 알렸다. 하지만 2025년 3월, 영화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함단 발랄(Hamdan Ballal)이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공격을 받은 뒤 이스라엘 군에 의해 연행·구금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지의 영화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함단 발랄은 다음 날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영화가 기록한 폭력이 스크린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세계의 여러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고 관객들을 만나왔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 중 한 명은 차가운 감옥에 갇히고 무너진 폐허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55683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3월, idfa(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a href="https://www.instagram.com/idfafestival" target="_blank">인스타그램</a>에 업로드한 함단 발랄(Hamdan Ballal)의 석방을 촉구하는 이미지 게시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들의 고통이 담긴 프레임을 넘어 직접 가 닿을 수 없는 무력감과 막막함 속에서도 우리가 이 다큐를 꼭 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질문 속에서, 이 영화를 추천한다는 말이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전 교수님이 말했던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은 매번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감히 추측하건대, 가장 아픈 곳을 기록하는 이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기록되고 전달되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바라는 것. 그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그리고 이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길 바라는 것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 어더 랜드〉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우리에겐 이 땅 말고는 다른 땅이 없다고.(No Other Land) 그러니 여기서 끝까지 버티며 서로를 기록하겠노라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이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까지 지켜보는 일,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연대이자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에 보낼 수 있는 응답일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632cd;">[필자 소개] 김수민</span>. 2026년 프로젝트 활동가로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연극과 극작을 좋아한다. 아시아 4개국의 퀴어 부부 이야기를 담은 중편 다큐멘터리 〈모던 패밀리〉를 공동 연출했으며, 지금은 예술 대학 내 위계폭력에 대한 다큐멘터리 〈블랙박스〉를 만들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729d5;">[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span>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다큐멘터리·극영화·웹 콘텐츠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a href="https://pinks.or.kr/" target="_blank">pinks.or.kr</a></span></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8 12:02: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수민)]]></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80748344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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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Don’t try to be a nice girl; set your boundaries!]]></title>
       <link>https://ildaro.com/1042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ore than anything, I realized, ‘Ah, I don’t have to smile’.”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is what one participant said on the last day of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that took place in a small town in southeast Jeju for 8 weeks. She said that she had long been concerned that she ‘looked like a pushover.’ She said that she had difficulty refusing requests from others and that the times she had tried to please others in order to be loved were recorded in detail in her diary. Through this training, she finally gained the ability not to smile, and she was practicing it in her daily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the instructor for the program, and as a fellow citizen trying to produce better responses to issues in my everyday life, I think I’ll remember her saying that for a long tim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61292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Learning about the base of support. Many participants were unfamiliar with the mechanisms of even simple bodily movements.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The joy of speaking up for the first time - ‘I can’t keep this good thing to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time I encountered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was in the spring of 2007, when I was 21 years old, while participating in the planning team for a program at the Korea Sexual Violence Relief Center called “Training for Teen Girls to Become Different Bodies - Beyond Your Gaz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over three months, I moved my body and used my voice alongside the teenage ‘girlz’ (the participants in the program at the time were called ‘girlz’ instead of ‘girls’ to give them a slightly tougher image), experiencing new possibilities for my body outside of the norms of femininity. Above all, it was really fu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was, so to speak, the 'red pill' of my life. From then on, there was no going bac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anges in daily life followed. At the time, the student I was tutoring was starting to pay me later and later, and although everyone told me to confront them about it, I hadn’t been able to bring myself to. However, with the weekly practice in raising my voice firmly and destroying wooden boards, plus arguing with some old men at bar where we had our after-party, I absorbed these teachings into my body again and again, and finally one day I was able to speak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h… you know… it seems like you keep paying me lat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n't a firm and cool voice like in the practice room. I thought to myself, 'Shoot, I’m not doing this right,’ and I was disappointed. But still, from the next month, the money started coming in on the right date. The experience of being able to effect change, even if it wasn't with the ideal cool speech, made a strong impression on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ith a mindset of ‘I can’t keep this good thing to myself!’, I organized several 10-week self-defense training sessions with my friends under the name of “Let’s Fly!” In addition, at the high school where I did my student teaching internship, I trained and drilled the female students on effective strikes and refusal skill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I knew it, I became a self-defense training instructor, and this year, I am conducting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program with women living in towns and rural areas in Jeju.</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lf-protection is learned in the body, not the min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people think of self-defense training, they often think of martial arts,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I talk about in my workshops is boundaries. In my trainings, I define boundaries as “the power to distinguish between what is mine and what is not mi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example, the power to refuse a request by saying, “That would be difficult.” And, even if I expect the other person to feel embarrassed or upset about my refusal, the power to realize that those feelings are theirs to handle, not mine, and to let go of responsibility for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time I encountered the concept of boundaries was when I participated in a program at the IMPACT Bay Area Center in San Francisco, USA. IMPACT is a non-profit organization in the U.S. that provides self-defense and empowerment training.</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647901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author (center front) with “Model Mugging” instructors from the IMPACT Bay Area Center in San Francisco, USA. The picture was taken at Hwa Rang Kwan Martial Arts Center, the setting for the [Korean-language] webtoon San Francisco Hwaranggwan. (Photo credit: Shin-yul)</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With IMPACT, trainers who are fully clad in protective gear take on the role of assailants, and trainees repeatedly practice defending themselves and counterattacking in threatening situations that are staged as if they were real. The concept most emphasized in the training is that of muscle memory. Through repeated drills, the body becomes able to react automatically even in a crisis situ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same time, another concept they emphasize is boundaries. They repeatedly stressed the importance of being able to recognize and set not only physical boundaries, but also emotional and psychological bounda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IMPACT instructors constantly trained us in dealing with boundary violation situations. We role-played refusing a request to borrow a pen, or countering an invitation to an unwelcome activity with a suggestion to do something we’re comfortable with. We practiced speaking in a way that protected us even while under emotional press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after the training was over, other participants and I would send emails to each other about our experiences with “BOUNDARY!” in all caps. And one thing stuck with me the strongest: boundaries are learned not in the head but with the bod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sponding honestly to situations that I used to just accep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experience at IMPACT has become the foundation of the classes I teach.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is not just about surviving in emergency situations. Of course, we also practice using our bodies and asking for help in dangerous situations; but more importantly, we train ourselves to put a stop to situations in our daily lives that we used to just tolerate and reorient them in the direction we w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the work of connecting your body and mind so that words like, "Just a moment," "Please stop that," or "I'll take care of this myself," can come out of your mouth in the tone you wan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71276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raining on basic response posture. This is a training that combines boundary-protecting nonverbal and verbal responses to ingrain them in your body.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t the start of each week's session, we sit in a circle and share our experiences from the past week—moments when we set boundaries, or moments when we didn't, and how we felt afterward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got a call asking me to help out at an event. Last time this happened I’d felt I couldn’t refuse. But this time, I took a beat and then said no. My heart was pounding so har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as someone who kept blabbing everything I told her to others, so I spoke to her privately and said, ‘What you’re doing isn’t ri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garding suggestions made by others:) “In the past, I would have just smiled, said, ‘Okay!’ and went along, but this time, when it was something I didn’t want to see, I just said, ‘I’m good,’ and left it at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applaud each other’s small successes, and when one of us experiences regrets about how she handled a situation, we brainstorm better responses together. We grow by listening to each other's stories in this way every wee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conduct trainings on response skills with participants living in rural Jeju, as well, we practice engraving into our bodies phrases to protect our bounda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ost interesting phrases have been “Please speak from there (where you are)” and “Please go back there and talk.” The countryside is a place where boundaries are blurred. There are people who feel entitled to suddenly come into our yard, our vegetable garden, and even inside our house. Spatial boundary violations that are hard to imagine for those used to living in apartment buildings occur on a daily bas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one participant said the above sentences, which mean, "Let's talk in a space other than the space you have just invaded," it set the other participants abuzz. I heard murmurs here and there that these were very useful sentences and resolutions to practice them. These are sentences that are never mentioned during self-defense training in Seoul or other metropolitan area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raining to understand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my body”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we fail to protect our boundaries, we often blame ourselves, saying, “Why didn’t I speak up?” or “Why did I just smile like an idiot?” But it’s not really our fault. We have been trained to respond that way since we were young. A daughter who goes along to get along, a child who is well-behaved, a student who tries to read the room—they were praised as a “good child” and a “good pers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nt to emphasize this: what you did back then [in whatever situation bothered you] was not stupid at all. Whether you froze, avoided addressing it, laughed to relieve the tension, or even ran away, that choice was the best you could have mad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are gathered here to develop the response skills that no one ever taught us. From now on, I can set my boundaries in my own 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can avoid traps like the fear of not being seen as ‘nice,’ the desire to quickly escape from awkwardness and silence, and the prohibition, “The countryside is dangerous, so you can’t move there,” and instead develop the ability to feel and utilize our own bodies and minds. A sense of self-efficacy, not fear, awaits u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737392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Practicing striking posture with participants in a self-defense training workshop. (Photo credit: UNNInetwork) *Related [Korean-language] video: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FUbhf9zjRBM&amp;t=12s" target="_blank">Interview with a participant of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 The Body That Shouts and Responds’</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would like to pass on a phrase that I have used as a lighthouse during my time trying to share better coping skills and wisdom as a self-defense instructo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lf-defense training is not training to become stronger, but training to understand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my body.” – Kwon-Kim Hyun-young (foreword to the Korean version of Thomas Mathieu’s The Crocodile Project, published by Blue Knowledge, 2016)</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nt more people to have the opportunity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their bodies. To be able to build relationships while respecting their boundaries and those of others. To be able to live where they want to live and not be confined by the words, “You can’t live there because it’s dangerous.” To have more and more choices in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that possibility, we will keep gathering and training joyfully, tomorrow and the day after.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d12eca;">About the Author: Shin-yul</span> is the head of Annyeong Gongjakso [Hello Workshop]. She is a self-defense instructor, the captain of FC Sanjunghogeol, and a National Singing Contest Popularity Award winner. These are her proudest achievements. She lives with her partner and one old dog. Instagram: <a href="https://www.instagram.com/shinyul___" target="_blank">@shinyul___</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s://ildaro.com/10198"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98</a> Published June 5, 2025</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7 14:10: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Shin-yul)]]></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67'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72057879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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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우리 노동의 결과물은 공간에 새겨진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2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연구 소개]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 집수리</a></span><span style="color: #0000ff;">·</span><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도배</a><span style="color: #0000ff;">·</span><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청소 업종을 중심으로</a><span style="color: #0000ff;">」는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에 종사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노동 경험을 조명한 연구이다. 논문을 쓴 조영주 씨는 본인 스스로가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동시에 여성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spa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1539857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일명 ‘돌돌이’(마루광택기)라고 불리는 바닥 세척 장비를 사용하여 사무실을 청소하는 모습. 조영주 씨는 본인 스스로가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동시에 여성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청소업체 사장님이면서, 시민단체 간사로 지역사회에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와중에 어떻게 여성학 대학원을 진학하고 논문까지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태어나 20대 후반까지 서울시 중랑구에 살았어요.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하며 연극과 음악을 만들면서 마을 공동체 활동을 했어요. 중랑구 마을 공동체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제가 ‘여성주의 관점’이라고 인지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수성을 갖게 되고, 페미니즘 강좌를 함께 들으며 ‘이런 세계가 있구나’ 알게 되었죠.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혼하고 이사를 하면서 인천에 터를 잡게 되었어요. 생계를 위해 ‘먹고 살려고’ 청소일을 하게 되었고, 중랑구에서 해왔던 활동들을 이어가고자 시민단체 간사 일도 반상근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바라왔던 여성학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청소일을 하면서 오히려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거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청소일을 하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시간이에요. 일하는 사람의 리듬에 맞게 운영되는 조직은 드물잖아요. 조직의 리듬에서 벗어나 내 리듬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조금일지라도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이전의 노동 경험에서는 장시간 일하다 보니 건강이 계속 악화되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지속 가능한 삶인지 고민하는 시간도 꽤 길었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청소일을 하며 길고양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거든요. 길고양이를 돌보며 고양이들을 입양하기도 했고요. (지금 막둥이, 강냉이, 꿀떡이와 살고 있습니다.) 청소 일은 고될 때도 있지만, 내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한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714396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무실 정기청소 방문 시 쌓여 있는 일회용 음료 컵을 모으고 정리하는 과정.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시간을 뜻대로 쓰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자영업자가 되었고,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아 논문을 쓰셨네요</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원 면접을 본 날, 일기에 ‘이런 내 생애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한번 풀어보고 싶다’고 썼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렇게 흘러온 시간의 기록이 단순히 내 개인 삶의 기록이 아니라,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기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과 정말로 만나고 싶었고, 제가 청소일을 하는 것에 대해 신기해하고 의아해하던 사람들에게 제 삶을 설명하고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즘 다양한 채널에서 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 콘텐츠가 나오고 있는데, 그런 콘텐츠들은 ‘월 천만 원 수입’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힘든 부분을 주로 조명해요.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쑥스럽고 낯설어할 것 없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또 이 일이 굉장히 (주로 남성들의 일자리라고) 젠더화된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다는 말이 인상깊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가 정한 성공의 척도와 위계가 있잖아요. 이를테면 변호사, 의사 등 ‘성공’이라 여겨지는 일에 대해서는 다들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많은 필수노동에 대해서 상당수는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노동들은 가시화되지 않죠. 저는 그걸 드러내고 싶었어요. 사회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게 세상을 굴리니까요. 힘든 일이기도 하고 당연히 어려움도 많지만, 단순히 노동을 고통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 제목을 보며 왜 ‘공간을 다루는 노동’이라고 범주화했을까 생각했는데, 20쪽에 “이 노동의 결과물은 공간에 새겨진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이해가 되었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청소하러 들어가면 한 주 간의 생활감이 쌓여 있어요. 쓰레기도 많고 오염도 많죠. 어떻게 보면 그곳을 쓰는 이들의 치열한 노동의 흔적이기도 하죠. 생각해 보면 저도 회사 다닐 때 분리수거를 그렇게 잘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일이 힘들면 힘들수록 망나니처럼 살았던 것 같네요. 그런데 청소하고 나면 전/후의 차이를 확실히 느끼게 돼요. 집수리하는 것도 그렇고, 도배를 하는 것도 그렇고 공간을 바꿔놓는 작업이고, 노동이 그 공간 안에 새겨진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을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고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74795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무실 바닥 세척 후 왁스코팅을 시공하는 모습. 입주청소가 끝난 뒤 청소 전후의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보람과 성취를 느낀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우리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필수노동이지만, 가시화되지 않았죠.</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이게 세상을 굴리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자영업 진입 배경에서 ‘조직에서 배제되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과 ‘대인관계 감정노동에서의 피로감’을 이야기하셨더라고요. 논문을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받을 거 같아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여성 청년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경험과 감정 같달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주변의 여성들이 일을 하며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동시대의 여성들이 왜 약 없이 일을 할 수 없을까? 이게 저에게는 큰 질문이었어요. 저도 일을 하면서 많이 지치고 소진되었고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요. ‘내가 이걸 왜 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답을 찾을 수 있어야 내 몸을 갈아 넣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특정 조직에 대한 욕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부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수량화·표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끝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느낌?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순간을 돌아보니 병든 나만 남아있네? 일한 건 다 어디로 갔지?’ 조직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더라고요. 활동가는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요. 자다가도 눈물이 흐르는 날들을 지나며 곰곰이 생각하고 많이 아파하다가 결론을 내렸어요.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새로 정한 일이 청소에요. 청소를 하니까 내가 한 일이 눈에 보이고 일의 전 과정이 내 손에 들어와서 좋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노동으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던 다른 노동 경험과의 차이라는 대목이 떠오르네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맞아요. 책임을 어디까지 져야 할지 몰라서 오는 모호함이 없고 담백해요. 청소는 군더더기가 없는 일이에요. 내 성과가 눈에 보이니 스스로 인정도 되고,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보완도 해결도 내가 책임지는 일이에요. 요령이 없던 시절에는 일을 마치고 나면 몸이 아프기도 했어요. 연구 참여자분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몸을 관리하는 요령이 다 있어요. 이 일이 몸을 갈아 넣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감각들이 내 몸에 쌓여가는 숙련노동이에요. 많은 여성들이 자기가 했던 일이 ‘물경력’이 되어버린 경험들이 있잖아요. 몸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경력이 몸에 새겨지는 게 되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82269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터뷰를 하는 조영주 연구자. 석사 논문으로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을 중심으로</a>」를 썼다. 테이블에 자영업자들이 즐겨 쓰는 메모지가 눈에 띈다. (박지하 촬영)</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가장 두려운 건 ‘미수금’…“일하고 돈 못 받는 여성들 많아요”</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영세 자영업자들, 사회적 보호망이 너무 없다고 느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고용된 노동자들과는 달리 자영업자들은 보호망으로부터 취약하잖아요. 뛰어들 때 이런 부분이 걱정되지는 않았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연구 참여자 분이 ‘자영업자들도 경제인으로서 이 세계의 경제의 축을 떠받드는 하나의 존재고, 자기도 이 수레바퀴를 같이 돌리고 있는데 완전히 배제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도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인데, 자영업자가 가장 취약한 지점이 뭐냐면 일하고 돈을 못 받는 거에요. 〈장인의 나라〉라는 웹사이트를 만드신 분도 필름 시공일 하고 밤에 코딩을 공부해서 웹사이트를 개설한 이유가 못 받은 돈 때문이에요. 공익을 위해 만든 거죠. 돈 못 받는 여자들 너무 많아요. 저도 청소 자영업을 하며 가장 두려운 일이 미수금인데요. 대금 독촉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영업자는 모든 게 자기 책임이에요. 물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한국의 산업 구조를 무시한 채 ‘자영업자는 사장이기 때문에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있다 보니 영세 자영업자들의 경우 보호망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꼬우면 남 밑에 가서 일하세요’, ‘니가 능력이 안 되면서 사장 타이틀도 달고 싶고 대우는 받고 싶냐’라고들 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여러 조직을 거치면서 일할 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는 왜 안 될까?’라는 자기혐오가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걸 견디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벼랑이나 저 벼랑이나’라는 생각에 자영업자가 되었죠. 프랜차이즈로 자영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본사만 돈 벌어주는 일은 싫었고요. 내가 과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어요. AI 시대에 대체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청소일을 시작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몇 년 만에 친척분들을 만났어요.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데, ‘회사 다녀요’ 하면 대충 뭉개지는데 청소일을 한다고 했더니 다들 뜨악해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께서 헛기침을 하다가 자리를 뜨셨어요. 친척들의 걱정이 이어졌죠. ‘아니다 싶음, 빨리 취직해라’ 같은. 이 일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와 위계를 느끼긴 했어요. 제가 다른 사람 눈치를 엄청 보는 성격이지만, 어차피 망해도 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영향은 안 받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금은 아버지께서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신다구요. 논문에서 ‘노가다’라는 인식을 넘어 이 일에 대한 존중을 만들기 위해 업계 사람들이 하는 다양한 시도들도 소개해 주셨는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몸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매체에 더 많이 나와서, 이 노동을 가시화하고 또 자긍심을 많이 드러내면 좋겠어요. 저 역시 논문을 쓰고 지금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고, 요즘 유튜브도 시작했는데요. 이런 시도들은 이 일을 하는 동료들과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만드는 흐름이기도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이 논문이 쓰여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집수리·도배·청소 의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 자영업자 카톡방이 있어요. 그 방에 6백여 분이 계시는데, 그 단톡방이 사실 여성 자영업자, 예비 여성 자영업자들에겐 노조 같은 곳이에요. 하루종일 카톡방 알람이 울려요. 일터에서 겪은 고충을 이 방에서 이야기하면 서로 응원해 주고 도움 주고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구 참여자분들께 굉장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해당 업종에서 일하시는 여성 자영업자들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달려가야 먹고 살 수 있기에 휴무가 유동적이거든요. 인터뷰 약속을 잡았는데 일이 들어와서 취소된 경우도 있어요. 저도 견적 보러 오라고 하면 바로 달려 나가니까 이해가 되죠. 인터뷰를 해주신 분들은 하루 일을 빼고 만나주신 거예요. 그간 모르고 살았던 여성 자영업자들로부터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연구한다는 마음에 앞서서 연대한다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85815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조영주 씨는 청소일을 시작하고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되자, 길고양이 친구들을 입양하여 살고 있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구가 끝난 지금, 더 확장하고 싶은 주제나 질문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여성 자영업자들이 정말 많았어요. 앞으로 차차 자영업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보고 싶고, 나아가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이 바쁜 와중에 단행본도 쓰고 계시고 유튜브를 시작하셨는데, 사실 자영업자는 홍보 마케팅도 다 자신의 몫이잖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NS 관리를 비롯한 홍보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안 하면 가라앉으니까. 기본이에요. 요즘 유튜브에 몸 쓰는 여성 기술자, 자영업자 영상이 많이 나오는데 다 찾아봤어요. 월 천만 원파/실력-성과파/사연파 등등 차고 넘치는 에피소드를 다 분석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이야기, 저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행본의 경우 논문에 못 담았던 이야기들, 이를테면 자영업자의 노후나 지금 얘기 중인 디지털 노동 관련해서도 담아보려 해요. 올해 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많이 알려야 더 열심히 쓰겠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술자×사장×연구자×페미니스트 조영주 씨는 ‘남성들의 영역’, ‘노가다’ 그리고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기존의 편견에 균열을 내며 자신만의 기술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b2dd2;">[필자 소개] 박지하</span>.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들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 돈을 써서 대학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학교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남겨두고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6 16:00: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지하)]]></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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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title>
       <link>https://ildaro.com/1042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 교칙을 보면 여학생 규정과 남학생 규정이 따로 있다. 그런 걸 보면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즉 ‘학생다움’의 기준에는 단지 학생으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성별’로서의 몸과 태도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몸의 사용 범위를 제한해버린 치마 교복</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치마를 입고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치마 안에 바지를 입으면 안 됐고, 스타킹을 신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건 선택이 아니었으나 이내 익숙함이 되었고, 익숙함은 곧 당연한 것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단속은 더 이상했다. 치마 길이를 본다며 학생을 책상 위에 올려 세우고, 치마 안이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나는 ‘학생’이기 이전에, 통제를 받는 몸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마는 단순한 옷이 아니다.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다리를 편히 벌리고 앉을 수 없었고, 움직임은 늘 조심스러워야 했다. 나는 체육을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사복을 입고 자유롭게 뛰어놀던 때와 달리, 운동장에서 놀이와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조차 스스로 제한하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체육시간 외에는 체육복 착용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그 제약은 더 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나와 같은 여학생들에게 단지 ‘입는 옷’이 아니라, 몸의 사용 방식을 바꾸는 규율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509299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7년,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염색을 하고 등교한 모습.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학생’이라는 표식이 드러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졸업식 날은 사복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었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입고 싶었다. 그런데, 사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지적을 받았다.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내가 무엇을 입는지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종종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다. 한 번은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탈색을 하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하교하는 길, 교복을 입고 있은 여자가 머리를 탈색했다는 이유로 낯선 아저씨에게 시비가 걸렸다. 그 순간 교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학생’이라는 표식으로 드러내어 위험하게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교복을 입고 다니며 ‘어린 X’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위에 드러내고 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사회에서 그 위치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준 적은 별로 없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정부에서 교복 가격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복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가격 조사, 불공정행위 대응, 편한 교복 전환, 바우처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교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빠져 있는 것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을 옹호하는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는 말도, 나에게는 조금 의아하다. 이미 학교에서는 가방, 패딩, 휴대폰, 학원 등 수많은 방식으로 학생들이 서로의 경제적 조건을 알고 있는 상황인데, 교복 하나가 그것을 가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로 ‘가리는 것’이 해결일까. 격차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드러나도 그것이 조롱이나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장 교복’과 같은 ‘비싼 교복’ 문제도,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싶다. 한편에서는 “몽클레르가 교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옷은 또 다른 방식으로 위계를 만들어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으로는 ‘편한 교복’이라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체육복처럼 편하게 만들면 된다고. 하지만 그냥 체육복을 입으면 되는 일 아닐까. 왜 그것조차 ‘학교가 정해주는 형태’로만 입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실제 ‘편한 교복’ 역시 학교의 로고가 부착되고, 다양한 형태가 있다 하더라도 카라가 있는 디자인이 대부분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5101835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8년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광장에서 “우리는 청소년 서프러제트”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했던 운동가들을 칭하는 용어이며, 이를 인용하여 선거연령 하향 등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한국의 청소년 인권활동가를 뜻함.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가격이냐, 형태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학교가 특정한 옷을 정해놓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제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가격과 형태만이 문제가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 오래된 이야기다. 이미 한 번 폐지되었다가, 통제의 논리로 다시 돌아온 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 학생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학생을 일정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가. 교복은 과연 학생을 보호하고 평등하게 만드는 장치인가, 아니면 특정한 ‘학생다움’의 기준을 강제하는 기성세대의 규율 장치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3594;">[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5 09:07: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십대]]></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십대]]></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51217399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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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모순 속에서 헤엄치는 여자들의 이야기]]></title>
       <link>https://ildaro.com/1042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끔 체력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면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곤 한다. 이를테면 빙하 아래로 내려가 프리 다이빙을 하는 요한나 노르드 블라드가 세계 기록을 깨기 위해 도전하는 이야기나, 에베레스트를 열 번이나 등정한 유일한 여성인 락파 셰르파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린 여자라서, 나이 든 여자라서, 시골 여자라서 절대 못 할 거라는 우려를 납작하게 해주며, 주위의 만류나 무시하는 시선 너머로 도약하는 여자들. 나는 그들의 강한 정신을 욕망하고 건강한 몸에 경탄하며 내 안의 무언가를 회복하곤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돌이켜보면 언제나 나를 회복시켰던 그 이야기들은 그저 강한 여자의 성공 신화나 건강한 몸으로 ‘정상성’이나 미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이야기 혹은 개인주의적 자기계발 서사 따위와는 달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이야기들은 ‘과연 강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었던 경험에 가까웠다. 그 이야기들은 ‘약함을 긍정하는 마음’과 ‘강함을 욕망하는 마음’을 모순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한다. 약함을 긍정하면서도 강함에 끌리는 모순, 그러면서도 강함의 매혹을 경계하는 끝없는 모순에 대해서 말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3480976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영화 〈파도를 헤치고 - 다이애나 나이애드 스토리〉(The Other Shore) 포스터 이미지 (출처: Netflix)</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64세에 쿠바에서 미국까지 상어와 해파리가 가득한 바다를 횡단하는 기록을 세운 장거리 수영선수 다이애나 나이애드(Diana Nyad)의 이야기는 나처럼 모순 속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여자를 끌어당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육체적 한계 너머로 가는 도전 </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몸은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영혼과 마음에 달린 일이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균형의 극치에 이르러서 고통이 쾌락을 능가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수영할 겁니다.”(다이애나 나이애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큐멘터리 영화 〈파도를 헤치고〉(The Other Shore)는 20대에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고 은퇴 후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살던 수영선수 다이애나 나이애드가 60대에 접어들며 자신이 과거에 한 차례 실패했던 쿠바-플로리다 횡단에 재도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이야기는 2023년에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원제-Nyad, 엘리자베스 차이 바서렐리, 지미 친 연출)라는 제목의 극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해상 거리가 165km라는 것만으로는 이 도전이 얼마나 힘든지 가늠할 수 없다. 육지에서의 이동과 달리, 바다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파도와 해류에 온몸으로 맞서야 한다. 바다에서는 직선으로 갈 수 없으며 바람에 따라 우회하고 또 우회하며 목표로 설정한 해변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건 실제 거리보다 더 많은 거리를 움직이게 된다는 의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60시간 이상 걸리는 이 도전 동안에는 잠을 잘 수 없으며,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며 탈수증, 저체온증을 견뎌야 한다. 더군다나 쿠바-플로리다 해역은 상어와 독성 해파리가 출몰하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의사도 60대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한계 너머로 가는 도전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347332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영화 〈파도를 헤치고 - 다이애나 나이애드 스토리〉(The Other Shore, 티모시 휠러 감독, 쿠바 멕시코 미국, 2013)에서 다이애나 나이애드 (출처: Netflix)</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나이애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바다 수영을 하는 동기가 뭐냐는 질문에 “제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드넓은 수역에서 헤엄치는 겁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불멸의 존재가 된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울 속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는 할 수 있어. 문제는 몸이 아니야. 몸은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영혼과 마음에 달린 일이야.”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신이 몸을 한계 너머로 이끌고 갈 거라고 믿으며 그는 매일 훈련을 거듭한다. 바다에서 10시간 수영, 13시간 수영, 15시간 수영 이런 식으로 훈련을 늘려가고 마지막 훈련인 24시간 수영까지 마치자, 횡단에 도전할 준비가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도전하는 날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미디어의 관심 속에서 그는 자신 있는 모습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하지만 첫 시도에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절반도 채 가지 못하고 실패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나이애드의 고된 훈련과 거듭된 실패로 러닝타임을 채운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자신하며 감행한 두 번째 도전 역시 해파리에게 가로막힌다. 독성 해파리에 쏘여 마치 모닥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수영을 멈추지 않지만, 결국 몸이 회복되지 않아 완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348317856.pn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첫 번째 도전에서 실패 후, 저체온증으로 몸을 떨고 있는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모습. 다큐멘터리 영화 〈파도를 헤치고〉 장면 중. (출처: Netflix)</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세 번째 도전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열대 폭풍을 만나서 실패하는 것까지 보다 보면, 이 도전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실패했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하며 엔딩크레딧을 마주하는 순간, 엔딩크레딧 옆 작은 내화면으로 다섯 번째 도전에 기어코 성공하여 플로리다 해변에 발을 딛는 나이애드의 뒷모습이 나타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그렇게 ‘수없이 실패한 끝에 도전에 성공했다’라는 그럴듯한 결론이 아니라, ‘찰나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기며 끝난다. 나이애드의 뒷모습은 자신이 가야 한다고 믿는 곳을 향해, 옳다고 믿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고독한 수많은 여정에, 그리고 어떤 자긍심을 향해 응원을 보내는 듯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신을 향한 분노와 싸우는 여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은 제가 매 순간에 충실하고 굉장히 강인하다고 생각할 거에요. 맞습니다. 전 강인하고 늘 행동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제게도 연약한 면이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건, 단지 그의 몸과 마음이 남들보다 건강해서일까? 물론 나이애드는 강인한 정신력과 60대치고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장벽이 존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그래서 나이애드가 끝까지 갈 수 있게 도왔던 수많은 조력자 또한 보여준다. 상어를 퇴치하는 팀, 해파리 전문 팀, 날씨를 예측하는 팀, 의료 전담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최소 35명 이상의 사람이 하나의 팀이 되어 나이애드와 바다에서의 며칠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이애드가 심적으로 의지했던 건 그의 트레이너 보니 스톨(Bonnie Sue Stoll)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니는 나이애드가 ‘너 없이는 결코 이 도전을 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던 절친이기도 하다. 보니는 나이애드의 강함을 가장 믿는 사람이지만, 그의 약함 또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니는 첫 번째 실패로 도전을 끝내지 않는 나이애드를 보며, ‘사람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이 정도의 집념이 생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많은 일을 겪은 나이애드가 이 도전에 성공하면 많은 걸 떨쳐낼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 때문에 자신을 한계로 밀어붙이는 마음이 생기는데, 나이애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쿠바-플로리다 횡단 도전은 나이애드에게 단지 기록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3485892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이애나 나이애드와 그의 절친이자 트레이너인 보니 스톨. 다큐멘터리 〈파도를 헤치고〉 장면 중. (출처: Netflix)</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쿠바-플로리다 횡단을 준비하는 나이애드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며, 부분적으로 그의 과거 이야기 또한 함께 삽입한다. 유년 시절과 유망한 청소년 선수 시절을 회고하며 흘러가던 나이애드의 이야기 속에는 자신이 가족처럼 생각하던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경험과, 가스라이팅 속에서 코치와 수년간 관계를 이어간 경험이 등장한다. 그 이후의 삶은 영화에서 자세히 서술되지 않지만, 나이애드는 자신이 20대 동안 수영할 수 있었던 힘은 ‘분노’에서 나왔다고 언급한다. 젊고 강했으며 충분히 힘이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돕지 않았던,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분노는 한계를 시험하는 바다 수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나이애드의 과거 경험과 분노의 힘, 수영을 향한 애정, 한계를 넘으려는 열망을 촘촘히 엮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이애드의 일부로 느슨하게 그를 구성하며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바다에서 엄청난 거리를 수영하고, 미디어 앞에서 자신 있게 성공을 확신하는 나이애드의 강한 모습은 거친 파도와 낮은 수온과 몸의 통증 앞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약한 모습과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도전에 성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은 과거에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약한 자신을 마주할 힘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아니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때 나이애드가 추구하는 ‘강함’은 약자를 힘으로 누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강함도 아니며, 남들보다 더 뛰어난 기록을 세우는 강함도 아니고, 튼튼하고 건강한 육체를 과시하는 강함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나이애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강함에 대한 욕망’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약함’을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강한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약함을 긍정하는 강함’에 더 가깝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긍심에 관한 이야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에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의 성정체성에 대해 암시적인 입장만 취한다. 퀴어 서사로 모든 삶이 수렴되는 것 또한 경계하는 것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이애드는 과거에 트랜스젠더 선수의 스포츠 참여에 대해 비판적 입장(트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와 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 사이의 “신체적 격차”)을 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의견이 만든 파장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태도를 바꾸고, 스포츠계에서 트렌스젠더의 완전한 평등을 위한 투쟁에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밝히기도 하는 등,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감추지 않는 담대한 모습도 보여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34922131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플로리다 해변에 발을 딛는 순간의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모습. 그 뒤로 작게 프라이드 깃발이 보인다. 〈파도를 헤치고〉 예고편 중. (출처: Netflix)</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플로리다 해변에 도착한 나이애드의 모습은 여러 기사에서 사진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를 환대하러 마중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는 펄럭이는 프라이드 깃발을 본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계를 넘는 나이애드의 이야기가 어떤 은유가 되어 어떤 의외의 구체성들과 만났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이애드의 일화를 자긍심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좋은 이야기는 한 사람의 당사자성을 넘어, 그리고 그가 지닌 정체성의 종류를 넘어, 더 구체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연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에게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이야기는 ‘강함을 욕망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약함 또한 긍정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을 영화 바깥의 현실로 확장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a34cb;">[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3 09:45: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35204555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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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보좌관은 국회의원의 OO이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23</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3366ff;">질문:</span>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어렴풋이 “셜록과 왓슨” 같은 걸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언론에 보도된 일부 의원의 ‘보좌진 갑질’ 논란을 보면 수직적 상하관계 같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나라에는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고, 의원 한 사람은 아홉 명의 각급 보좌진과 한 팀이 되어 서로 긴밀하게 관계 맺으며 입법부터 선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정활동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스테레오타입은 두 가지입니다. 정치적 이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신뢰하는 끈끈한 동지적 관계이거나, 이른바 ‘갑질’이 난무하는 상명하복의 위계적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실제에 더 부합할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생각에 대부분의 의원실은 그 양극단의 중간쯤에 입체적인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국회에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다면 300개 스타일의 의원실이 있고 다시 2,700개의 의원-보좌진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시 ‘갑질’ 국회의원도 있지만, 툭하면 보좌진 눈치를 보는 의원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보좌진도 있지만, 의원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보좌진도 있습니다.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돈독하게 만나는 의원실이 있는가 하면,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서로 저주하는 의원실도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나의 의원실 안에도 다양한 의원-보좌진 관계가 존재합니다. 의원의 선수, 보좌진의 이력과 급수, 소속 정당, 성별, 나이, 실력, 성격 등 많은 요소가 보좌진과 국회의원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에, 보좌진과 의원의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단정지어서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허나 모든 것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답하고 끝내기는 좀 아쉽지요. 그러니 오늘은 저의 개인적 경험에 기대어 보좌진과 국회의원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 보고자 합니다. 이는 국회에 존재하는 2,700개의 의원-보좌진 관계 중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 드립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13027375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국회의원 한 사람은 9명의 각급 보좌진과 한 팀이 되어 서로 긴밀하게 관계 맺으며 입법부터 선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정활동을 수행한다. 정의당 의원 시절 보좌진과 함께 찍은 사진. (출처: 장혜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진보정당 비례대표 당선인으로서 처음 보좌진을 구성했을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의원은 보좌진에게 확실히 ‘갑’입니다. 채용과 면직에 관해 전권을 언제든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원실은 하나의 작은 사회이고, 그 사회는 정당과 의원 사회, 보좌진 사회라는 더 큰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21대 총선이 끝난 뒤, 당선인 신분으로 처음 보좌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인사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마 제가 소수 진보정당의 비례대표 초선 의원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선 제가 속한 정의당에는 당선인이 일정 비율 이상의 보좌진을 기존 당직자들 가운데 채용해야 한다는 당내 규정이 있었습니다. 재선에 실패한 같은 당 의원들의 보좌진을 ‘이어받는’ 문화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권한의 제약이면서 동시에 실질적인 도움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선이기에 제가 기본적으로 닿을 수 있는 보좌진 인력 풀 자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국회에는 의원실의 상시 기본 업무에 맞추어 ‘정무, 정책, 공보, 홍보, 행정, 수행, 지역’이라는 표준적인 역할분담 체계가 있습니다. 의원실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에도 나름의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직급인 4급 보좌관을 우선 내정하고, 그와 함께 나머지 보좌진 구성을 상의하는 방식입니다. 4급 보좌관은 의원 다음으로 의원실에서 높은 직급으로 의원실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겸하기에, 팀워크를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인 셈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면접 역시 일방향이 아닙니다. 의원이 보좌진을 면접하듯, 보좌진도 의원을 면접합니다. 당내 선배 의원들의 소개로 4급 보좌관 지원자 A를 만나 서로를 면접 보던 날, 제가 기후위기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했을 때 그가 던진 질문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당선인님, 그렇다고 개원 후에 자전거로 출근하지는 않으실 거죠?” 딱 봐도 정치 초년생에 이상주의자처럼 보이는 제가 국회의 관행에 비추어 너무 무리하게 ‘컨셉’을 잡는 사람은 아닐지 걱정하는 심각한 멘트에 얼마나 웃음이 터졌는지 모릅니다. 저는 자전거 대신 전기차로 출퇴근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우리는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 보좌진 구성을 완료한 후, 의원실 보좌진 안에 저와 선거를 함께 치른 사람은 20대 초반의 인턴 보좌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보좌진은 전부 제가 이제 막 알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성 보좌진 비율을 50% 이상으로 하고 싶다’, ‘수행 보좌진을 여성으로 하고 싶다’는 저의 뜻은 관철되었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호형호제’ 식의 소속감 대신 공적 책임감과 업무가 중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좌진과 의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의원이 방향성을 제시하고 보좌진이 이를 뒷받침하는 공적 업무관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적’이라는 부분입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소위 ‘의원 갑질’의 대부분의 문제는 공사 구분의 영역에서 발생합니다. 국회의원의 집을 청소하거나 장을 봐주는 것은 보좌진의 공적 업무라고 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미연의 실수를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가능하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선을 그으려 노력하곤 했는데, 가끔은 오히려 그런 태도가 냉담함으로 받아들여져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보다 사람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 끝나고 저녁 같이 하자’는 얘기 한 마디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꼭 필요한 경우에만 그렇게 하곤 했습니다. 의원과 보좌진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권력관계가 원치 않는 일정을 강요하게 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확실히 여의도 문법에서 칼 같은 공사구분은 ‘끈끈한 동지애’를 형성하는 데에는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친밀한 남성 의원-남성 보좌관 관계에서 ‘호형호제’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청년 여성’으로서 저의 나이규범과 젠더규범이 국회의원이라는 역할, 그리고 전통적인 보좌진의 구성과 충돌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13052833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는 의원실마다 다르며,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의원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공공을 위해 업무를 수행하고 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공적 책임감’이다. 정의당 의원 시절 보좌진과 함께 찍은 사진. (출처: 장혜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호형호제’ 류의 소속감 대신 장혜영 의원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바로 공적 책임감과 일 그 자체였습니다. 의원실의 존재 이유는 우리끼리 끈끈하게 잘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서입니다. 국회는 직장이지만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의원실의 역할은 의원과 정당이 시민 앞에 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의원도 보좌진도 예외가 아닙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에 맞서는 의정활동을 하겠다고 시민들 앞에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 욕심’을 한껏 부렸습니다. 차별금지법, 페미니즘, 탈시설, 난민 인권 등 논쟁적이기에 사람들이 껄끄러워하는 이슈들에 대해서도 좌고우면 하지 않고 진보정당의 국회의원답게 양심껏 발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압도적인 의석 차이로 인해 어차피 통과되거나 좌절될 법안들이라 해도, 우리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관점과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료를 들여다보고, 보도자료를 내고, 기자회견을 하고, 회의장에서 ‘말이 되는 말’을 하기 위해 부족할지언정 노력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모든 것은 자연히 의원실의 업무 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거나, 아예 대놓고 보좌진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민원전화에 보좌진들이 괴로워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응대하고 때로는 아예 회선을 잠시 돌려놓고 숨을 고르면서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버텼습니다.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의원실 내에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함께 견디며 저와 가까워진 보좌진들은 종종 “애증의 장혜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의원실 업무는 힘들지만, 내가 이 의원실 소속이라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점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미안하면서도 뿌듯한 얘기였습니다. 의원실의 든든한 보좌진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 시기를 쉽게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고마움은 평생 간직할 것입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도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의원과 보좌진의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습니다. 장혜영 의원실은 힘은 없는데 일은 차고 넘쳤습니다. 업무 강도를 버티다 지쳐 다른 길을 향하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치적 판단의 차이로 떠나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동료들을 보낼 때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지만, 당신이 여기에서 일하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두말 없이 보내주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든 헤어짐이 아팠지만,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역시 낙선 후의 헤어짐이었습니다. 마치 4년 전 국회를 떠나던 선배 의원들이 그랬듯, 국회에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다음 자리를 알아보고 부탁하면서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의 자리 하나 지키지 못한 스스로가 참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권력을 잃은 국회의원은 보좌진을 볼 낯이 없어집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저희 의원실의 보좌진들은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의원실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끝내 마무리되지 못한 의제를 촉구하는 고집스러운 의원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도 원외 정치인이 된 저의 곁에서 함께 지역정치를 도모해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좌진과 국회의원의 관계는, 역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a32cd;">[필자 소개] 장혜영</span>.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a hre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366f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span></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1 14:2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장혜영)]]></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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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누가 여대 시위를 ‘폭력적 난동’으로 몰아갔나]]></title>
       <link>https://ildaro.com/1042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11월, 동덕여대에선 공학 전환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서울여대와 성신여대에서도 각각 학내 성폭력 대응절차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와 국제학부 남학생 입학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그런데 이들 시위는 언론과 온라인 공간 그리고 극우 성향 정치인의 발화에 의해 낙인 찍혀 ‘폭력적인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난동’으로 규정되며, 혐오의 대상이 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15520652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25일,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성평등노동연구소 소소 주최로 이슈 테이블 “여대 시위를 다시, 생각한다 - 혐오를 쌓는 플랫폼, 민주주의를 깨우는 저항”이 열렸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3월 25일, 성평등노동연구소 소소는 “여대 시위를 다시, 생각한다 -혐오를 쌓는 플랫폼, 민주주의를 깨우는 저항”이라는 주제로 이슈 테이블을 열었다. 성평등노동연구소 소소 이영희 공동소장이 사회를,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으며, 유현미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연구위원, 박정훈 오마이뉴스 기자, 이영희 이화여대 박사과정 연구자가 토론자로 참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슈 테이블 참여자들은 여대 시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이것이 단순한 ‘젠더 갈등’이 아니라, ‘학내 민주주의’ 문제이자 젠더화된 대학 구조의 문제임을 지적했다. 또 학생들을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된 것은 이윤을 위해 혐오를 조장하는 ‘플랫폼 자본주의’와 언론의 문제임을 드러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혐오를 돈으로…플랫폼 자본주의에 편승한 방송사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신현경 서울여대 학부대학 교수는 여대생들의 저항이 온라인 공간에서 어떻게 ‘비체화’(abjection, 사회적 규범이나 경계 내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혐오스럽거나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배제되는 과정) 되었는지를 낱낱이 분석했다. 특히 그러한 과정이 플랫폼에 의한 수익 창출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교수는 유튜브에서 동덕여대 관련 조회수 상위 20개 영상을 분석한 결과, “개인 유튜버뿐만 아니라 제도권 언론이 무려 12개를 차지하며, 혐오 콘텐츠 생산을 주도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JTBC, KNN, SBS 등의 방송사 채널은 “50억 누가 낼래”, “래커칠 범벅 1년째”, “의리의 동덕, 대반전... 학우끼리 폭탄 돌리기 시작”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과 썸네일로 영상을 유통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반적으로 혐오 콘텐츠는 개인 유튜버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제도권 언론은 방송법상 공정성 의무와 인권 보호 규정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방송법 제5조는 ‘방송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동덕여대 사례에서 제도권 언론은 이 규정을 망각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15544198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수의 발표 자료 중 “검색어 ‘동덕여대’ 조회수 상위 20개 유튜브 동영상 표”</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김신현경 교수는 “상위 20개 영상의 총 조회수는 1,600만 회를 넘는다. 유튜브 광고수익을 보수적으로 잡아 계산하더라도 최소 5천만 원 이상 수익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고 설명하며, “여성들의 저항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이윤을 창출하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문제는 생각보다 그 여파가 크고 심각했다. 김 교수가 알고리즘 실험을 해봤을 때, “JTBC News의 ‘50억 누가 낼래, 래커칠 범벅 1년째’를 시청하자, 세 번째 추천 영상으로 ‘동덕여대 또 한번 레전드 갱신한 최신 근황 3편이 등장”했다. 이후 추천 영상들은 점입가경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쇼츠의 추천 흐름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러하다. ‘한때 래커칠 했던 동덕여대 학생들의 근황?’으로 시작해, ‘윤석열 아직도 존경하냐 물었더니 소름돋는 대답’으로, 그리고 ‘전장연 시위에 폭발한 서울시민 근황’, ‘무임승차를 참교육하는 역무원’, ‘동덕여대 출신을 직원으로 뽑으시겠습니까?’, ‘상대를 잘못 고른 동물권리운동가’로 이어졌다. 약 3분 동안 장애인 혐오, 빈곤층·노년층 혐오, 여성혐오로 계속 연결되며 혐오의 연쇄에 자동으로 편입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교수는 “이것은 알고리즘의 오작동이 아니라 설계된 결과”라는 것을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언론사 디지털 부서의 ‘짜깁기 보도’, ‘따옴표 저널리즘’ 문제 드러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정훈 오마이뉴스 기자는 동덕여대 혐오 프레임이 확산된 구조적 원인을 언론사 내부의 문제에서 찾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초 커뮤니티의 근거 없는 혐오 프레임이 언론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시위의 본질인 ‘해방 공간으로서의 여대 수호’라는 메시지는 지워졌다.”는 분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언론사 디지털 콘텐츠 부서의 관행인 ‘짜깁기 보도’와 ‘따옴표 저널리즘’을 강하게 비판했다. “디지털 콘텐츠 팀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현장취재 없이 기존 보도 화면을 재가공하거나, 이준석 의원과 같은 정치인의 혐오성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사태를 조롱거리로 전락시켰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선 “언론사 내 디지털 부서의 윤리교육 부재”와 “데스킹(게이트키핑) 기능의 상실 때문”이라고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정훈 기자는 “조회수만 따오면 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쉬운 구조와 언론사 내에도 만연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분위기가 겹쳐지면서, 언론이 젠더 이슈를 유희로 소비하고 혐오 확산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고발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온라인과 현실은 달라, 서울여대 청소노동자들의 연대 선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대 시위가 온라인에서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안,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어땠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신현경 교수는 본인이 재직 중인 서울여대의 사례를 들며, “학생들이 남긴 래커칠과 포스트잇이 폭력이 아닌 학내 민주주의를 향한 ‘대화의 시도’이자 ‘물질적 저항’이었음”을 강조했다. 더불어 이 공간에서 이뤄진 연대의 장면을 중요하게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위가 시작된 지 5개월이 지난 2025년 4월 9일,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등장했다. ‘서울여대 청소노동자들은 서울여대 학생들과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선언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신현경 교수는 이 연대가 지속되었다고 설명했다. 래커 시위가 마무리된 이후 청소노동자들이 용역업체와의 재계약 거부 투쟁을 전개했고, 이때 학생들이 연대 서명에 동참했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교수는 이 장면을 통해 “여대 컴퍼스는 단일 정체성의 공간이 아니라, 학생과 청소노동자가 교차하며 민주주의를 함께 실천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고 의의를 설명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동덕여대 ‘래커칠’보다 중요한 사학비리,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덕여대 시위 또한 래커칠이라는 ‘과격함’이 화면에 주로 비춰졌지만, 정작 시위가 이렇게 된 이유나 학생들이 처한 현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영희, 송하윤, 전유나 세 연구자는 동덕여대 시위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고 참여자들을 인터뷰해왔다. 이영희 연구자가 연구를 통해 밝힌 점들을 보고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은 2024년 11월 7일, 학교가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하고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학내에 알려지자 직접행동을 시작했다. 피켓 시위와 과잠(학과 점퍼), 근조 화환 시위 등을 진행하며 11월 11일 처장단과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학교 측은 불참했다. 이 연구자는 “학교의 소통 거부는 학생들이 우발적으로 본관을 점거하고 본격적인 농성을 시작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1561290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동덕여대는 창립 55주년을 맞이한 중앙자치언론 『목화』의 교지비 예산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도 학생들의 목소리를 막았다. 학생들은 소셜 펀딩을 통해 교지를 발간하며 계속 목소리를 내려 하고 있다. 동덕여대 교지편집위원회 〈목화〉에 따르면, 55집 교지가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텀블벅 펀딩을 통해 무사히 발행되었지만, 대학 측이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며 배포를 방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 동덕여자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목화 X 계정)</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동덕여대는 오래 전부터 사학비리 문제와 학내 민주주의 이슈가 제기되어 온 곳이다.(참고: 윤석열 퇴진 광장의 목소리를 넓히는 사람들 </span><a href="https://ildaro.com/10101"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01</a><span style="font-family: 바탕;">) 최근에도 학교 측이 학생들의 대자보를 떼는 등 학생 행동을 탄압해 온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영희 연구자는 “이처럼 학교를 향해 불신이 누적된 상태에서, 대자보 부착을 방해받은 학생들이 우연히 래커를 발견해 칠하게 된 것이 래커 시위의 발단이 되었다.”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목해야 할 것은 래커 시위가 아니다. 이 연구자는 “이 일은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했다. “시위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돈이 필요한 대학의 구조조정 맥락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영희 연구자는 “학교 측이 연구 용역을 통해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에서 여성의 경쟁력을 제고하려면 남성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시장논리를 내세워, 공학 전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추천 기사: 단지 또 하나의 공학이 탄생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a href="https://ildaro.com/10066" target="_blank">https://ildaro.com/10066</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덕여대 시위는 단순히 공학 전환이라는 단일 사안에 대한 반발을 넘어, 재정 확보와 시장논리를 앞세워 구성원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대학 본부에 맞서 ‘학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분석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은 ‘학내 민주주의’ 요구하며 탄핵 광장과 만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영희 연구자는 “학교 측이 의도적으로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등의 전략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탄압하며, 시위를 외부세력과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소행으로 프레이밍”했기에 학생들이 교내에 고립되어버렸지만, “12월 ‘비상계엄’ 정국을 거치며 변곡점을 맞이한 부분”도 중요하게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탄핵 광장으로 나간 학생들은 대학 측의 폭력과 국가폭력을 연결 지어 사유하게 되었고, 시민사회 단체들과 연대하며 학내 민주주의 의제를 확장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대 시위를 다시, 생각한다 - 혐오를 쌓는 플랫폼, 민주주의를 깨우는 저항〉 이슈 테이블 참여자들은 여대 시위가 “구성원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시장논리만 좇는 대학본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약자의 외침을 자극적인 썸네일로 포장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무책임한 언론과 플랫폼 자본주의”를 고발하고 있다고 평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능력주의에 잠식되어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대학 조직 안에서 학내 민주주의는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혐오와 조롱으로 얼룩진 알고리즘의 시대에 우리는 연대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질문하는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고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유현미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연구위원은 “취업과 성적 위주의 ‘능력주의’가 대학을 휩쓸면서 공동체성과 소속감이 크게 약화”되었고, “‘여성도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착시 속에서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은 주변화되었다”고 분석하며, “페미니즘이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대학이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15657260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대학이 시위 학생들을 고소하고 검찰이 불구속 기소를 한 것에 대해, 동덕여대 학생들이 규탄 기자회견에 이어 ‘민주없는 민주동덕’ 4차 집회를 예고했다. (출처: 동덕여대 공학전환 공론화 X 계정)</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슈 테이블이 열린 25일, 서울북부지검은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 11명을 업무방해, 공동퇴거불응, 공동감금,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에 학생들 또한 다시 한번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여대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31 09:50: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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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Self-Defense and Coping Skills for Those Living in the Countryside]]></title>
       <link>https://ildaro.com/1042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live in this town, and these other people live around here too! We hope you enjoy our performance! I’ll start things off. One, two, three! Elder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friends and I started shouting and beating drums with all our might. The 80-or-so senior citizens who filled the senior center clapped their hands to our rhythm. It was our small town’s Senior Citizens’ Party, held on Parents’ Day. At the request of the head of the town, I performed Batucada (a type of Brazilian percussion music) with a few young female friends. The sky was clear and expansive, everyone had pretty red carnation brooches, and I was energized by the atmosphere of the elderly audience treating us akkopgeh (a word in the Jeju dialect meaning ‘with love and as something precious’), looking at us as if we were their grandchildr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mmediately after the performance, we put on our Saemaul [New Village] Movement vests and went to help with the meal for the party. The local volunteers and women's association members had taken charge of the senior center’s kitchen, so we were put to work serving. After carrying hundreds of plates, we went outside and had lunch together. What a dazzling day, I thought. Yes, it's a day like the ending of the Japanese movie Little Forest 2.</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05611220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Jeju Women’s Association is holding “Trainings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in regards to gender-based violence in 2025. Here, participants at a session are sharing their experiences of gendered violence in rural life.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For young women, neighborhood events are often a battle as well as a par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has been 11 years since I pulled up my roots in Seoul with my own hands and moved to Jeju. At this point, I can say that I have successfully escaped from the mainland. And I have spent eight of those years in the countryside—that is, in an eupmyeon [township, as opposed to city] area. I came to this town last year, and I liked it so much that I am actively expanding my network. This is for surviv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rural areas, there are many unexpected living expenses, such as heating costs, transportation costs, and consumer goods that are more expensive than in the city. In such cases, if you have no social network within the region, you have to depend on specific people or pay high costs for the information and services you need. Therefore, building social connections is important for basic material support in the early stages of migr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above was pointed out in the 2019 ‘Regional Tailored Youth Migration Support Program’ survey report issued by the Gurye Daum Research Association. As someone who has experienced it, this is absolutely true! Even if you move to the countryside because you are struggling with the competitiveness of society and your interpersonal relationships, your social network is still important—really, it becomes even more import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dditionally, if you are someone like me who absolutely hates regretting your decisions, you may find yourself engaging in an invisible struggle against patriarchy because you want to reterritorialize your sp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at sense, the party for the elderly people was both a festival that expanded my network of relationships and a site for invisible struggle. In fact, not all the scenes of the day described above were beautifu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midst objectification as young women – “agassi [young lady]” - and friendly(?) attempts to set us up with young men, the iffy compliments(?) that we should serve them because we were pretty girls, and the clear wariness and curiosity toward newcomers on display in the 50 times we were asked, 'Where on earth are you from?'  we were continuously put in situations where we had to serve people neatly and tactfully in this unfamiliar sp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I was not alone, I was more of a guest than a host, I had a lot of interpersonal experience, and I understood why Jeju’s elders are wary of newcomers. I had also been consistently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with another attendee at the party since February. So I was able to deal with the various situations that arose that day, and I will remember it as a fun and exciting even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ore women are moving to countryside alone, and they need suppor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can rural life be a festival for everyone? Could I, too, feel like that every day? There is zero possibility of this. The genre of the movie Little Forest is rural fantas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a survey of 114 rural women conducted by the provincial feminist group Culture Planning Month in June 2018, 89.5% agreed with the statement “rural sexual culture is unequal,” largely citing “discriminatory gender role division” (31.6%) as the cause. When asked “Have you ever experienced sexual harassment, sexual assault, or other sexual violence?”, the majority, 65.5%, answered that they h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research didn’t take place in Jeju, but the situation is so similar. In all types of private situations, I often end up doing a kind of tai chi to avoid unwanted touching. I think of a story from a friend in the west of Jeju who said that when she went to help out at a community event, she was classified as a ‘kitchen woman’ and trapped there boiling noodles throughout the whole event. I also think of a friend who completed classes at a haenyeo training school and managed to claw her way into the fishing industry by catching dozens of kilos of sea urchins, but who ended up leaving Jeju last year due to gender-based violence in the industry and worsening conflicts within the haenyeo community. Before she left, my friend told the others, “You shouldn’t accept people [into the school] if you’re just going to treat them like thi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0570714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poster made by the Jeju Women’s Association’s 2030 Committee for its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lthough this culture is not improving at all, the number of women taking up farming and/or moving to rural areas is steadily increas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ccording to K-Farm News, the number of women choosing to take up farming and/or move to rural areas increased from 200,000 in 2013 to 240,000 in 2021. In 2021, 46.4% of all new farmers/ rural residents were women, and more than half of them were young or middle-aged. Recent new female farmers and rural residents are setting up mainly single-person households, and the proportion of women who are moving with a companion is decreas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K-Farm News concluded that the trend toward a female-led gwinong [return to farming]/ gwichon [return to rural areas] is deepening. I also continue to encounter women who have finally packed their bags and come to Jeju after wanting to settle here for ye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someone who is working to support young people settling here, I began to think, “Then how can a woman live alone in the countryside? What kind of safety net does she need?” Even I, a person who is not very concerned about what others think and lives according to her own standards, do not always stand up and respond ideally to every situation, so I thought that people who have just moved and are unfamiliar with a place would have a harder time. If they mustered up the courage to uproot themselves and move, but cannot settle into their new place because they keep being hurt there, their roots will weaken and they may wander around. I wanted to create a safety net to the extent that I coul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n I met Shin-yul, a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instructor. She is a young woman who moved to rural Jeju three years ago and was working as an instructor at the Jeju Women’s Association’s Gender Equality Education Center. She gave a “Living Book” lecture about her story of starting self-defense training, and I happened to hear it. After the lecture, she even gave a two-hour mini workshop, and I felt relieved and overwhelmed with joy at this fortuitous encount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has been working for years on a variety of ways to deal with physical and verbal boundary violations. She completed a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course in the US a few years ago and is now on her own path, one that draws from psychology, coaching, and self-defens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project to improve our ability to deal with everyday gender-based viole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in-yul and I were both active members of the Jeju Women's Association, and the Jeju Women's Association had also been increasingly concerned about gender equality in rural areas while working on a project related to that issue for the past five years, so we all came together to work on this projec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rural feminism project! We came to these conclusions: there are many grey areas in rural life; it’s often not clear what is your space and what is mine; we have to live in these grey areas with the older generation whose boundaries regarding bodies and relationships are as different from ours as the times they lived through; let’s improve our abilities to deal with everyday gender-based violence in rural areas; and that is also the way for rural women to take charge of their li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act that we were selected for a Korea Foundation for Women support project to address gender-based violence,  and thereby gained resources, was also a great driving force. The Korea Women's Foundation is funding activities to combat various forms of gender-based violence in order to expand the scope of what society recognizes as gender-based viole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ender-based violence is any type of harm inflicted on an individual or group because of their gender, sexual orientation, or gender identity. Because it stems from a power imbalance, it can be sexual, physical, verbal, psychological/emotional, or socioeconomic violenc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05735485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session on understanding gender-based violence at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course held in February and March.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s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We refined our plans to meet the requirements of the support project. The main points of our project were as follows: 1) Describe the various forms of gender-based violence occurring in rural areas; 2) Run a pilot program to respond to these situations; 3) Develop a manual to be distributed to approximately 70 gender-equality stakeholders nationwid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eeting rural women who had been invisible and hearing about their experienc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ince then it has been just a matter of finding participants. Starting from February, we have conducted eight-week training courses in two small towns and also held one-week intensive trainings for certain groups. In all, we have met 22 wom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ain participants have been people rearing children who moved to Jeju so that those children could run around and play, young people who relocated here recently, middle-aged natives who have a clear feminist identity but have been living quietly in the region, people who may not have a feminist identity but have a desire to strengthen their daily coping skills, and young women from high-risk remote areas. Only one person was already participating in organizations such as women’s associations and village steering committees. I was secretly happy that people who had not been seen in local community women’s activities were really coming out to join u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first week, we share our experiences of gender-based violence, and from the second week, we focus on respect for boundaries and self-defense training. In the last week, we role-play dealing with difficult situations. The participants build intimacy and trust among themselves, and they even give coping advice to each o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all the sessions are completed, we have the participants fill out a feedback survey, and they have said that the best parts are meeting every week to share how they have responded to recent experiences and the training to reinforce their boundaries. I am a member of the planning team and assistant instructor for this project, but as an individual, I also like those times the mos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305831995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participants learn how to approach each other with a delicate sense of their own boundaries.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s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We have sometimes learned of contexts that were different from those targeted by our project, such as young women having difficulty standing up for themselves in minor conflicts or incidents in daily life that could not be considered gender violence, and who blame themselves for this or avoid such situations. Watching them take great care to use (unnecessary) cushion words and take responsibility for others’ emotions, it seems like a reflection of our anxious society, and it makes me sad. Their difficulties are also areas to tackle and potential activities for future projects, so I have decided to look into it more after this project end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dream of making a gender-equal countryside by widening the spectrum of respons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project, which aims to expand the spectrum of responses available in everyday situations for its participants, is still ongoing. Long-term trainings in two towns will conclude in mid-July, and training is also being conducted in Jeju City because of pestering(?) from the women there. We are using materials previously published by the Korea Sexual Violence Counseling Center and Chungbuk Women's Foundation and overseas sources for reference as we write the manual on our training methods, but it is still very difficult. We are worried about whether we can produce materials useful enough to enable local gender equality stakeholders to hold real training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hope that our clumsy efforts in Jeju will have a positive impact on realizing gender equality in every corner of the country. I hope that our sincerity, which we are sending out in the manual, will eventually reach those of you who want to live in the countryside, and that you too, in your own way, will enjoy rural living that feels like a movie or a festiv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bout the Author: Eunyoung is the chair of the Jeju Women's Association’s 2030 Committee. A Jeju-lover living the dream, she’s up for doing anything fun and well-intentioned on Jeju. She is a member of the Jeju Women's Association Policy Committee. She created the only(?!) female Batucada group in Korea, Blocku Japari, and lives a happy life behind the drums. She founded and continues to operate Sinsulmok School, a program that lets young adults experience life on Jeju, in Seogwipo. <span style="color: #ae26d8;">[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s://www.ildaro.com/10186"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86</a> Published May 21, 202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30 10:5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Eun-young)]]></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67'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30043422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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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강간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title>
       <link>https://ildaro.com/1042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밤, 나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친구의 무대를 보기 위해 소극장에 찾아갔다. 극장에 모인 관객은 열 명 남짓이었다. 친구의 순서를 기다리는 중 한 외국인 남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영어로 코미디를 했는데, 국가와 도시, 이웃에 대해 이야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는 동안 몇 번이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rape’였다. 중간중간 어딘가에서 작은 실소가 들렸지만 극장에는 전반적으로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그 남성은 ‘훼손하다’, ‘약탈하다’는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굳이 ‘rape’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보다 더 내게 충격을 준 것은 통역 중 해맑은 얼굴로 “강간? 강간?”이라고 되묻던 코미디언 A의 모습이었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 말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니. 대체 강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관객 중에 성폭행 피해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 드는 건가?’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충격과 불쾌감에 머리가 뜨거워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93956535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강간(rape)’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던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무대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이미지 출처: geralt via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는 주위의 여성들을 흘긋거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모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만일 저들 중 정말 성폭행 피해생존자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고 가슴이 저렸다. 내게 성폭행 피해 경험을 얘기해준 친구들의 얼굴도 스쳐 갔다.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친구의 공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연이 모두 끝난 뒤 친구는 A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내게 인사를 건네는 A에게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먼저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근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채 가시지 않은 충격과 직접 모욕을 당한 듯한 불쾌감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돌이켜볼수록 화가 났다. 웃으며 “강간? 강간?”이라고 되풀이하던 A의 모습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진짜 공개적으로 강간을 농담으로 쓰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니. 인류애가 다 사라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회도 되었다. 끝나고 인사를 나눌 때 왜 A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방관한 것이 동조처럼 느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연장을 정리하고 나온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순서를 준비하느라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몰랐다며, 자신이 동료로서 A에게 의견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친구에게, 의견을 전할 때 같이 공연을 본 내가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강간 농담’과 ‘강간 문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강간 농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미국의 사회평론가 록산 게이(Roxane Gay)의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를 통해서였다. 저자는 “우리는 어쩌면 성폭행의 공포에 면역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그리고 강간이라는 말을 농담으로 사용하는 예로 “나 방금 강간 샤워했어”(I just took a rape shower. 강간 피해자처럼 부끄럽거나 괴로운 일이 일어난 후에 그 기억을 잊고 싶어 급하게 샤워했다는 의미), “내가 연봉 인상을 요구했더니 사장이 내 말을 완전 강간해 버렸어.”(My boss totally just raped me over my request for a raise. 묵살해 버렸다는 표현) 등을 들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9410172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록산 게이(Roxane Gay)가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문제, 그리고 정치에 대한 비평과 에세이를 엮어낸 책 『나쁜 페미니스트』(노지양 옮김, 문학동네, 2022) 표지. 록산 게이는 “우리는 어쩌면 성폭행의 공포에 면역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강간 농담은 ‘강간 문화’의 일부이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여권운동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소개한 정의에 따르면, “강간 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일부 젊은 남성들이 몸담은 하위문화로서 여성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특징이 강한 문화를 묘사하는 표현처럼” 쓰이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강간 문화에 대해 ‘한국도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시인사이드의 대학 갤러리에서 ‘전쟁 나면 OO학과의 ××를 강간하고 싶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이 같은 게시판 문화가 대학 내 익명 게시판과 단체 채팅방으로 이어졌다. 강간 문화는 폭력 자체를 ‘섹시한 것’으로 취급하고, 성폭력은 ‘섹스라는 모험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작은 실수’ 정도로 사소화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많은 경우 여성들은 강간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조심하며 자란다. 나 역시 살면서 ‘만약 강간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수시로 머릿속에 그려보았고, 그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한 적도 많았다. “따르는 척하다가 급소를 공격해야지”, “주온에 나오는 귀신처럼 몸을 까뒤집고 네 발로 기어갈 거야. 그럼 안 건드릴걸?”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진담이었다. 그 정도로 강간은 체화된 위협이었고, 평소 나와 친구들이 머무는 장소와 시간을 제약했다. 어느 밤, 모르는 남성이 내게 접근해 위협을 느낀 일도 몇 번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에 대한 위협은 온라인에도 존재한다. 2011년 말, 영국의 칼럼니스트 로리 페니(Laurie Penny)는 온라인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 여성을 향해 남성 사용자들이 강간 협박을 하는 현상을 두고 “(여성의) 의견이란 인터넷의 미니스커트인 모양이다”라고 표현했다. 나 역시 이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페미니즘 논조로 글을 쓰면 페미니즘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강간 협박을 비롯한 온라인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것이 여성의 ‘보통의 삶’이 되는 것에 대해 남성들은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리베카 솔닛의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김명남 옮김, 창비, 2015)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여름, 누군가가 내게 편지를 보내 대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강사는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을 취하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젊은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늘 교묘한 방식으로 경계하고, 세상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사전에 조심하며, 기본적으로 아주 자주 강간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했다.(내게 글을 쓴 남자가 덧붙이기를, 남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세상을 가르는 간극이 일순간이나마 갑자기 가시화된 순간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러내어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 ‘강간’이라는 단어로 많은 남성과 미디어, 대중문화가 은연중 여성을 통제하고 기존의 성별 권력구조를 강화한다. 페미니스트 작가 이라영은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동녘, 2018)에서, 언론이 나서서 강간을 부추기고 공유하는 상황을 비판하며 말했다. “모든 남자가 강간범은 아니어도 모든 여자는 강간을 조심하도록 길러진다. 그것이 바로 강간 문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당신의 강간 유머는 전혀 웃기지 않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고 해서 ‘강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코미디에서 무조건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채식주의자,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진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은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정 소재를 유독 조심히 대하는 것, 유독 겸허히 대하는 게 더 비윤리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온정적 태도야말로 그 사안을, 관련자를 더 소외시키는 게 아닐까”라는 그의 질문을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 ‘적절한 강간 농담’이라는 것도 있을까? 코미디언이자 팟캐스터 금개는 저서 『적정 코미디 기술』에서 작가이자 코미디언 안담의 강간 농담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 안담은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코미디캠프 2023: 관찰〉 무대에서 자신이 꼭 성공시키고 싶은 농담의 구조를 시연해 보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열여섯에 당한 강간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현재의 트라우마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코미디로 엮어낸다. 이 농담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당사자성을 띠기 때문이며, 피해생존자를 ‘숨어야 할 존재’로, 성폭력 피해를 ‘부끄러운 일’로 묶어두는 ‘피해자다움’을 벗어던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94336297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강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코미디에서 금기시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코미디언이자 팟캐스터인 금개의 저서 『적정 코미디 기술 – 우리만의 농담을 개발하자』(오월의봄, 2025)에서는 코미디언 안담의 강간 농담 사례를 예시로 소개한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좋은 농담과 나쁜 농담, 성공한 코미디와 실패한 코미디를 갈음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코미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성폭력을 유머로 사용할 때, ‘농담이니까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이 폭력의 문화적 허용 범위를 넓히는 데 일조하기 쉽다는 점은 분명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의 코미디언 다니엘 토시(Daniel Tosh)는 자신의 쇼 〈Tosh. 0〉에서 시청자들에게 여성의 아랫배를 살짝 만져 보라고 권했다. 그 자체도 타인에게 성추행을 권유하는 부적절한 일이지만, 더 문제는 그의 팬들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토시는 자신의 쇼에서 강간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록산 게이는 그가 구사하는 농담의 문제점을 이렇게 꼬집었다. “여성의 아랫배를 살짝 만지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고 싶어 할 정도로 그를 따른다면, 그중에 다니엘 토시가 강간이 웃기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토시가 할리우드에 있는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에서 강간 농담을 구사했을 때, 객석의 한 젊은 여성이 일어나 이렇게 소리친 일이 있다. “당신의 그 강간 유머는 전혀 웃기지 않아요.” 당시 쇼를 보던 수많은 사람 중 그의 농담에 의견을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 그 여성뿐이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로 인해 해당 여성은 토시가 내뱉는 더 심한 강간 농담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발언하지 않음으로써 쇼의 모든 관객이 그 농담을 묵인하고 넘어갔다면 어땠을까? 훨씬 많은 이들에게 강간 농담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문제없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들 중 일부는 ‘강간’이라는 행위나 단어를 전보다 폭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코미디 공연을 했던 내 친구는 후에 A에게 우리의 의견을 전했다. A는 당황한 듯 ‘알겠다’, ‘주의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만일 또 다시 납득하기 어려운 강간 농담을 접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상대에게 물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강간’이라는 말을 쓰는지,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처를 주고 착취적인 문화를 강화할 수 있는 말이라면 왜 굳이 그 단어를 선택하는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는 어설픈 한마디만 겨우 꺼낼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순간 우리는 함께 성폭력에 노출된 것이며, 그건 누구에게도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단순한 조롱거리로 삼는 태도는,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만이 아니라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다치게 한다는 것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830ce;">[필자 소개] 민바람</span>.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9 08:34: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민바람)]]></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294827193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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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홀로 아버지 돌봄을 떠맡는 게 부당하다고 느꼈어요]]></title>
       <link>https://ildaro.com/1041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년 시절, “침대방과 공부방, 피아노방까지 갖춰진 집”에서 보냈던 시간은 부모의 이혼으로 한 순간에 사라졌다. 딸의 일상은 공장 사무실에서의 생활로 변경됐다. 외도로 이혼을 맞이한 아빠는 이후에도 여러 여자들과 만났고, 그렇게 ‘가족’도 매번 바뀌었다. 딸은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지나 “어쩌다 독립”했고, 홀로 ‘가족’에서 벗어난 삶을 꾸려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어느 날, “예고 없이 닥친 돌봄”을 마주하게 됐다. 심상치 않은 아빠의 행동은 결국 ‘치매’ 판정을 받았고, 돌봄은 딸 혼자의 몫이 됐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와 상속처리 등의 일도 마찬가지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 『가족 없는 시대』의 저자, 차해영의 이야기다. 현재 서울 마포구의회 의원이기도 한 그는 ‘청년’ 정치인으로서, 이전엔 지역 활동가로서 1인가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차해영 구의원은 지난 얼마의 시간 동안 예상치 못한 일들의 겪으며, 한국 사회의 ‘가족’과 돌봄에 관련된 문제, 비어있는 제도, 필요한 장치들에 대해 더욱 각성하게 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74134675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마포구의회 의원실에서 차해영 의원을 만나 책 『가족 없는 시대- 혼자의 삶을 지키는 돌봄의 기록』(오월의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예기치 않게 치매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던 딸</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돌봄, 장례, 상속 문제까지 거치며 ‘가족 제도 정말 바꿔야 한다’ 깨달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버지 돌봄을 하고, 이후 돌아가시고 상속 문제까지 겪으면서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걸 혼자서 감당하는 게 말이죠. 특히 두 가지가 그랬는데요. 하나는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을 때, 보호자가 2명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물론 보호입원 할 때 보호자가 1명이 아닌 이유(가족에 의한 강제입원 문제로 법이 개정됨)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 말고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렇다는 게 답답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상속 포기를 할 때, 나 혼자 한다고 끝이 아니니까(4촌 이내 혈족에서 채무가 승계될 수 있음),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사촌들한테 알려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빠의 친가 쪽 친족(할아버지 형제자매의 자녀), 외가 쪽 친족(할머니 형제자매의 자녀)을 파악해야 했는데, 한국의 가족제도가 부계혈통주의에 기반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할머니 쪽 정보를 제가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거기다 상속 범위가 4촌이나 된다는 것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봐요. 요즘 누가 아빠의 사촌까지 아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분노의 마음이 컸어요. 가족 제도를 정말 바꿔야 하는구나 싶었죠. 일단 그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생각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책 읽으면서 해영님한테 여러 힘든 일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요. 아버지의 돌봄 과정과 그 이후의 일들도요. 그 중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단 아빠한테 인지증이 올 지 몰랐다는 거. 물론 나이가 들면 여러 질병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 일도 생길 수 있겠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은 몰랐죠. 그리고 아빠가 나이 들면 내가 돌봄 노동을 어느 정도는 하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렇게 전담을 하게 될 줄 몰랐고요. 아빠에게 파트너가 있었고, 그 사람과 아빠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어서 입원한다는 것 자체도 너무 낯설었고, 그때 뭐가 필요한지도 몰랐어요. 또, 신체가 건강한 남성 인지증 노인을 받아 주는 요양시설이 별로 없다는 것도요. 특히 폭력성이 있는 인지증이어서 돌봄 회피 대상이더라고요. 내가 돌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겨우 한 곳을 찾아서 입원을 시켰는데 한 시간 만에 연락이 왔죠. 도저히 데리고 있을 수 없으니 퇴소시키겠다고요. 그나마 아빠가 요양시설에 들어가면 나를 좀 지키면서 돌봄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공공에 도움 요청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게 너무 많았다</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보호자가 나밖에 없는데, 보호입원 시 2명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거예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런 막막한 시기에 도움이 된 게 있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포에서 지역 활동을 계속 해왔으니까, 그 (인적) 자원을 그래도 쓸 수 있었다는 점이요. 지역 돌봄 네트워크 하는 분들, 무지개의원(마포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병원) 선생님한테도 남성 인지증 환자에 대한 정보를 물어볼 수 있었죠. ‘이런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게 인지증인가요?’ 이런 것들부터요. 요양시설 알아볼 때도 주변에 물어볼 수 있어서 분명이 도움이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만 ‘외부인’에게 받을 수 있는 도움이 한정적이라는 거죠. 실질적으로 날 도울 수 있진 않은 거에요. 내가 시간이 안 될 때 나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 주지는 못하는 거죠. ‘힘내’라는 말을 하거나 밥 한끼 사주거나... 그것도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요. 정말 도와줄 마음이 있어도 내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 제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게 답답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도 전 활동하면서 쌓아온 지역 네트워크가 있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구의원이기도 하니까 제도나 행정을 아는 사람인 거잖아요.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적어도 그걸 찾아볼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네트워크가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정말 누군가는 죽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이런 기록을 남겨두는 게 필요하겠다 생각한 거죠.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74201424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책 『가족 없는 시대 -혼자의 삶을 지키는 돌봄의 기록』(차해영 저, 오월의봄) 표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구의회에서 일하고 있는 게 도움이 됐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죠. 원래 복지 쪽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어르신 정책도 많이 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빠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치매노인’ 관련 지역 정책과 제도를 찾아봤어요. 장기요양등급도 확인해 봤고요. 이런 걸 찾아보고 주변에 물어볼 수 있다는 건 분명 큰 도움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점에서 전 ‘공공’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어떤 지원체계가 있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아니까, 그래도 거기에 빠르게 진입한 거죠. 하지만 이런 정보가 없으면, 아예 시작점이 다른 거에요. 사실 큰 차이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렇게 관련 제도들을 깊이 들여다 보게 됐잖아요. 좋은 것도 있을 것 같고, 아쉬운 점이나 미비하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선 무료 상담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분명 좋았어요. 공공에서 지원하는 기본적인 무료 상담이요. 저도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전화해서 정신병원에 응급입원은 어떻게 하냐 이런 거 물어봤거든요. 초반에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 정보를 얻기 좋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안 좋았던 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는 거에요. ‘뭐는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 이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상황이 있어야 한다...’ 등의 말을 늘 들어야 했어요. 응급입원을 시키려고 했던 때도 ‘그 사람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아빠가 날 해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지... 너무 답답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아빠는 경기도에 있었는데 그 지역은 1인가구 병원 동행 서비스가 없더라고요. 서울시는 지금 자치구마다 다 있는 상황인데, 그런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진 않다는 것도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정치인 대다수가 ‘1인가구’ 아니고 돌봄이 자기 문제가 아니라서…</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1a62c6; font-family: 바탕;">혼인과 혈연에 기대지 않는 동반자, 보호자‘들’이 필요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1인가구 증가는 꽤 전부터 이야기된 부분이잖아요. 1인가구 정책이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여전히 이를 고려한 제도가 부족한 이유는 뭘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인들의 관심이 크지 않기 때문이죠. 1인가구 이야기하면 ‘결혼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결혼을 안 하려고 해요? 요새 청년들은 참 이기적이야’ 이런 말을 하거나, ‘1인가구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말은 하는데 실상을 모르거나요. 왜냐면 그들은 1인가구가 아니거든요. 그것이 자신의 삶이 아닌 거죠. 한국 사회의 정책 결정권자의 대다수가 여전히 ‘정상가족’으로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이들의 삶을 몰라요.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앞으로 1인가구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잖아요. 결혼한다고 해도 꼭 출산하는 것도 아니고, 한 명만 낳는 경우도 많고요. 가족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어서, 돌봄을 ‘가족’ 내에서 해결하라고 한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맞아요. 그래서 지금 관련 제도를 논의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 세대부터요. 제가 1986년생인데 주변 친구들 보면 외동 아니면 형제자매가 1명 더 있어요. 외동이어도 부모돌봄이 힘들지만, 둘이어도 힘들더라고요. 서로 어떻게 돌봄을 분배해야 할지 다툼이나 갈등도 늘어나고요.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지겠죠. 그러니까 가족에게만 기대는 부분을 바꿔야 한다는 거죠. 주변에 내가 정말 신뢰하는 친구에게 돌봄을 부탁할 수 있어야 해요. 또, 돌봄을 주고 받는 건 단순히 ‘선의’로 할 수 있다기보다 어떤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회가 그런 걸 갖출 수 있도록 해야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도나 법이 어떤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지도 논의하고 싶어요. 정신병원 보호입원도 안전망으로 ‘2명의 동의’라는 장치를 넣은 건데, 저같은 경우는 또 한 명의 보호자를 찾는 게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예외, 다양한 사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논의가 필요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금 내가 가족과 돌봄에 관련된 제도를 설계한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활동반자법과 비슷한 건데요. 다만 저는 일대 일의 관계라기보다 다수의 사람을 나의 보호자로 지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나 사실혼의 경우에도 여튼 파트너인 1명에게 돌봄의 역할이 가는데, 그렇게만 되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임의후견제도’(본인이 직접 신뢰할 수 있는 후견인과 재산관리·신상보호 대리권을 계약(공증)으로 정해두는 제도)처럼 누군가를 지정해 두는 거죠. 그치만 그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어야 한다고 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혈연에 기대지 않은 ‘사촌’들을 만들고 싶어요. 공동체에서 마음이 맞고, 서로 돌봄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 누군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고 유품 정리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요. 그걸 위해선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부탁할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도 많이 나눠봐야겠죠. 우리에겐 그런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우린 ‘돌봄이 필요한 몸’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 몸을 상상해 보지도 않고요. 이런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여전히 ‘청년’으로서 내가 늘 건강하고, 경제력이 있고, 내 삶의 모든 걸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고, 돌봄을 상상했을 때도 여전히 그걸 ‘기본값’으로 상상하는 것 같거든요. 사실 그동안 1인가구 정책을 논의할 때도 그랬던 것 같아서, 나 또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논의했던 정도로는 안 된다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이번 경험이 삶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빠가 끝까지 나한테 미션을 주고 간 건 같아요. 날 평생 힘들게 하더니, 마지막에도 이렇게 과제를 주고 갔구나 하고요.(웃음) 어렸을 때 이혼가정에서 살면서 다른 부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생겼고, ‘가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죠. 이번엔 실제 돌봄 현장이 어떤지, 제도적 허점과 틈새를 경험하게 됐잖아요? 이걸 바꾸라는 건가 보다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렇게 힘겨웠던 경험들을 승화하신 거군요.(웃음)</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소수자로 살다 보면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의 삶이 되는 것 같아요. 남들 보다 어떤 일들을 먼저 겪는 거죠. 그 역할을 해 보려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이 책을 어떤 독자들을 생각하며 썼나요? 누가 읽으면 좋을 것 같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처럼 외동인 사람, 가족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책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공공에 어떤 서비스가 있는지, 무엇을 이용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고 미리 체크해 보고요. 인터넷서점 판매를 보면 40대 여성이 제일 많이 읽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역시 동년배들이 읽는구나 싶은데,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7 11:3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가족/관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가족/관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274216754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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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결핍, 불가능, 불운은 장애 때문이 아니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1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해 11월,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진 Moon이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했다. 장애인 스쿠버 다이빙을 지원하는 감태 씨를 만나고 나서다. 활동지원사인 나, 이 과정을 다큐멘터로 기록하는 방준식 영화감독도 합세했다. 우리 팀의 이름은 “스쿠버 다이빙 어벤저스”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53153667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혜화역 지하철 선전전을 하고 돌아가는 길. Moon이 마로니에 공원의 휠체어 그네를 타고 있다. 집에만 있다가 25살에 사회에 나온 Moon은 아직 그네 타는 걸 좋아한다. “물리적 나이는 50대지만, 사회적 나이는 20대예요. 사회적 시간은 집을 나와야 흐르더라고요. 그래서 내 안에는 20대의 나와 50대의 내가 같이 있어요.” 20대의 Moon에게 스쿠버 다이빙은 시작에 불과하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제주 잠수풀에 입수하기까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 첫 연수는 올해 2월 초, 제주 잠수풀이었다. Moon, 방 감독과 나까지 셋은 새벽부터 서두른 덕에 한 시간 반 일찍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탑승권을 발급받았지만 한 시간이 넘게 대기해야 했다. 전동휠체어 사양을 이미 확인해주었는데도, 단종된 제품이라 기종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출발이 임박해지면서, ‘못 갈 수도 있겠다’ 싶을 즈음, 그제야 항공사에서 확인이 되었다고 출발하란다. 급히 휠체어를 수하물로 보내고 보안 검색대를 향해 뛰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도착한 제주는 전날 온 눈이 쌓여있고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있었다. 40분을 기다려 장애인 콜택시(이하 장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장콜 창 밖으로 펼쳐진 바다는 풍랑주의보가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우람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엘리베이터가 있고 현관에 턱이 없는 숙소를 예약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현관에서 거실로 오르는 데 턱이 있었다. 신발들을 경사로 삼아 깔고서야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옷을 갈아입고, 잠수풀까지 가려는데 장콜이 잡히지 않았다. 안내센터에서는 외진 지역이라 언제까지 기다릴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숙소에서 잠수풀까지는 걸어서 25분. 걸어가기로 했다. 담요로 Moon의 몸을 감쌌지만 제주 바다 바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휠체어를 쌌던 커다란 비닐 속에 다리를 넣고 싸맸다.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이틀 내내 몸이 날릴 듯한 매서운 추위 속을 다닐 수 있었던 건 비닐 덕분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53218650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제주에 풍랑주의보가 내려 매서운 바람에 눈까지 흩뿌린 날. 장애인 콜택시가 잡히지 않아 숙소에서 잠수풀장까지 25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다리를 담요로 덮고 비닐로 감쌌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잠수풀장에 들어가는 경사로에서 우리는 또 멈췄다. 경사가 40도는 되는 것 같았다.(권장기준은 5도 이내이다.) 전동휠체어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마침 다른 다이버들이 있어 도움을 요청했다. 네 명이 휠체어를 밀고 Moon이 휠체어 기어를 올리자, 굉음을 내며 휠체어가 경사로를 올라서서 앞으로 튀어 나가다, 맞은 편 기둥 바로 앞에서 극적으로 멈춰섰다. Moon이 순간적으로 휠체어 전원을 끄지 않았다면 부딪혔을 상황이었다. 아찔했다. 옆에서 지켜본 나는 오랫동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잠수풀은 5미터 깊이였다. 줌으로 두 번에 걸쳐 이론 수업을 받았고, 유튜브로 기본 장비 이름도 외웠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감태 씨에게 장비 설명과 이용법을 다시 듣고, 이퀄라이징(물 속으로 내려가며 수압이 높아지므로 귀의 압력을 맞추는 것. 코를 막고 숨을 불어넣으면 귀 안쪽 압력이 팽창하면서 압력 균형이 맞춰진다.) 연습을 했다. 그리고 탱크와 BCD(Buoyancy Control Device, 조끼처럼 입는 부력조절기)를 맸다. 레귤레이터(호흡기)를 통해 입으로 숨을 쉬는 연습. 그리고 드디어 다이빙 마스크를 쓰고 입수!</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식당, 카페, 편의점, 지하철에서 늘 뒤로 밀리는 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틀 맹연습을 마치고 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갔다. 다행히 이틀을 오가며 Moon이 숙소 근처에 턱없는 식당을 이미 봐두었다. 실은 그 곳 뿐이었다. 제주는 눈이 많이 오고 풍랑주의보가 뜨는 날에는 문 닫는 가게가 많다. 식사를 마치고 회의를 하기 위해 카페를 찾아봤지만, 문 연 곳도 적고, 턱 없는 카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식당 사장님께 봉지 커피를 몇 개 얻어 숙소에서 회의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회의를 마치고 감태 씨를 보냈다. 저녁 7시를 넘은 시간, Moon이 꼬냑 한 잔을 하자고 한다. 장콜이 집힐 리 없고, 잡히더라도 카페 문 연 곳이 없을 테고, 있더라도 그 카페에 턱이 없으란 보장이 없다. 턱이 있는 카페를 찾더라도 숙소로 돌아올 차량이 있겠는가. 내가 망설이는 동안 들려오는 방 감독의 통화 목소리.</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카페 입구에 턱이 있나요? 휠체어 이용자와 갈 거라서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참 동안 통화하더니, 방 감독이 턱도 없고 9시까지 하는 카페를 기어이 찾아냈다. 이미 Moon이 장콜을 예약한 모양, 잡혔다는 연락이 온다. 카페는 숙소에서 30분 거리, 가면 카페 문 닫을 시간이다. 방 감독이 다시 전화를 걸어 30분만 더 영업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직원이 사장한테 물어보겠다며 전화가 끊기고, 다시 전화가 온다. 카페 사장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원에게 연장근무 부탁해놨어요. 오세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급히 장콜을 타고 카페를 향한다. 카페는 근사했다. 조명도 멋스럽고, 세련되고 정갈한 꾸밈새, 무엇보다 턱없이 매끄러운 입구! Moon이 말하길, 가장 맛있는 커피는 턱없는 카페 커피라던데, 이 밤에 턱도 없고,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문을 연 카페의 꼬냑 맛이 어땠겠는가. 향기롭고 부드럽고 동시에 묵직한 목 넘김이라니! 우리는 장콜이니, 시간, 추위 따위는 잊고 꼬냑 맛과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5미터 아래 세계, 물 속에서 전혀 다른 중력 속을 누비던 이야기, 깃털처럼 가볍던 몸의 감각들, 처음에는 어색했던 눈맞춤이 점점 익숙해지던 것...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30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카페 직원은 정리를 시작했다. 물론 접수한 장콜은 오지 않고 있었다. 카페 직원은 밝게 웃으며 더 있어도 좋다고 말해주었지만, 30분이 지나자 차마 더 있을 수 없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53243452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스쿠버 다이빙 연수를 마친 날 저녁, 꼬냑 한 잔을 하기 위해 찾은 카페, MOTIFF COFFEE. 휠체어 이용자가 이용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장애인 콜택시가 잡히지 않아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는데도 환대해주었고, 돌아갈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도록 해주었다. 꼬냑 맛도 좋았다. 다시 가고 싶은 곳. (사진-호미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밖으로 나오자 2월 초, 제주의 어둠이 매서운 바람과 함께 덮쳐왔다, 추위로 5분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누군가 외쳤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4시 편의점으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처 편의점을 검색했다. 신나서 달려갔는데, 다행히 편의점 입구에는 턱이 없었다. 그러나, 편의점은 경사로 없는 보도블럭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럴 수가! 편의점 직원분이 나오셔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기에는 너무 추웠다. 우리는 전동휠체어를 들기로 했다. 직원도 합세했다. (전동휠체어를 드는 일은 선의라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휠체어가 들리는 순간, 이용자는 통제력을 잃고 순식간에 사물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는다. 휠체어는 이용자에게 몸이기 때문이다. 사지가 번쩍 들려본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러므로 휠체어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용자의 허락 없이 휠체어를 드는 것은 폭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겨우 들어간 편의점. Moon이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하지만 매대 간격이 좁아 휠체어는 아이스크림 매대까지 갈 수가 없었다. 매대 속 아이스크림들을 사진 찍어 보여주어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과 함께 길을 나서면 늘 뒤로 밀린다. 기차 오르내릴 때도 승객이 다 내리고야 리프트를 대준다. 엘리베이터 줄을 서도 양옆에서 오르는 사람들 뒤로 밀린다.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날 경우는 가고자 하는 역의 반대 방향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뒤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장애몸은 그렇게 계속 뒤로 밀린다. 턱이 있는 곳은 줄에 설 수조차 없다. 이동이 힘드니 학교에 가기 힘들고, 교육을 받기 힘드니 직업을 가질 수 없다. 누구도 대놓고 뒤로 가라고 하거나, 차별을 선택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뒤로 밀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구조라는 에스컬레이터는 장애몸을 끝없이 뒤로 보낸다. 단종된 전동휠체어를 타서, 보도블럭에 경사면이 없어서, 가게에 턱이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수리 중이라서, 경사로가 30도라서, 장콜이 없어서, 점포의 매대가 좁아서.... 이렇듯 사소해 보이는 ‘부주의’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서로 결합하고 부추기며 장애몸을 밀쳐낸다. 보이지 않는 곳, 존재가 지워지는 곳. 시민이 아닌 자리로. 그 곳에서 장애는 장애 이상의 것이 된다. 장애몸에 또 다른 장애를 덧입히며, 결핍과 무능으로, 불가능과 불운으로 만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장애몸이 더는 밀리지 않게 붙드는 힘들,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span><span style="font-weight: bold;">돌봄의 시민성</span><span style="font-weight: bold;">’</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부력을 조절하는 것이다. 갑자기 위로 솟구치면 감압병으로 폐 손상이 올 수 있고, 가라앉는 것 역시 사고 위험이 있다.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과 함께 부력조절기(BCD)를 사용한다. 숨을 마시거나 BCD에 공기를 넣으면 몸이 떠오르고, 반면 숨을 내쉬거나 BCD에 공기를 빼면 가라앉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5330796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퀄라이징(귀의 압력 균형 잡기)과 호흡을 해가며 기어코 5미터까지 내려간 Moon과 Moon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지원해주는 감태 씨, 본인도 초보인데도 늠름히 촬영하는 방준식 감독... 세 사람의 모습이 놀랍고 아름다웠던 이유는 ‘돌봄 시민성’의 압축적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호미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끝없이 뒤로 밀리는 Moon의 삶이 일상이라는 부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잡아당기는 또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싶다는 장애인 친구와 놀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하고, 외부의 어떤 지원도 없이 6년째 장애인 스쿠버 다이빙을 지속해온 감태 씨, 이 다큐를 찍기 위해 달려온 방준식 감독, 늦은 시간에도 카페 문을 열고 환대한 카페 사장과 직원, 편의점이 경사로 없는 보도블럭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던 편의점 직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 함께 휠체어를 들어주었던 손길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손길들은 선의나 시혜가 아니라 보편적 윤리이며, 시민성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기존의 ‘시민성’-생산과 노동, 대의정치 참여로 좁게 정의되어온 시민성-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 상호관계성이 누락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 특히, 돌봄 윤리 연구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물질에 의존하고 관계 맺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시민성의 핵심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관계성’과 ‘돌봄의 윤리’가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이를 ‘돌봄의 시민성’이라고 한다. Moon들의 삶이 더이상 뒤로 밀리지 않도록 붙들수 있었던 것은 ‘돌봄의 시민성’의 힘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잠수풀, 5미터 아래의 물 속에서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분투하는 Moon, Moon에게 괜찮은지 끊임없이 신호하며 한 호흡, 한 호흡을 기다려주던 감태 씨, 처음이라 흔들리면서도 Moon의 다이빙 전 과정을 찍어낸 방 감독.... 세 사람의 모습이 놀랍고 아름다웠던 이유는 ‘돌봄 시민성’의 압축적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2박 3일의 연수 이후에도 우리는 서울로, 용인으로 연수를 이어가고 있다. 용인 잠수풀에서는 15미터 아래까지 내려갔다. 4월이면 제주 바다로 나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의 이야기는 영화 〈제주 빌덜은 바당 소곱에도 뜨메〉(제주 별들은 바다 속에도 뜨네)로 만들어질 것이다. 영화 제작을 위한 펀딩이 진행되고 있다. Moon의 다이빙 장면이 담긴 예고편도 볼 수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오를 긴 이름들의 행진, 누구도 뒤로 밀쳐지지 않게 서로를 붙들어 매며,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이빙을 하고 싶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는 동료 시민의 소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돌봄 시민’들의 다정한 행진을 기다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카카오같이가치 펀딩 <a href="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134693/donators" target="_blank">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134693/donators</a></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 예고편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HPmETU3aGlo" target="_blank">https://www.youtube.com/watch?v=HPmETU3aGlo</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f34cb;">[필자 소개] 호미</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5 14:28: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253517788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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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이반 일리치의 죽음, 세기를 넘어온 죽음의 은유]]></title>
       <link>https://ildaro.com/1041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톨스토이는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죽음을 거짓과 무의미뿐인 속세의 삶에서 영적으로 해방되는 기회로 보는 형이상학적 죽음관이 기본 토대였겠지만, 유년기에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고 이어 후견인이었던 고모를 죽음으로 잃은 경험도 무/의식의 차원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30대에 『세 죽음』을, 60대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70대에 『주인과 일꾼』을 썼다. 죽음에 관한 사유를 평생 멈추지 않았던 거다. 셋 모두 은유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이지만, 특히 1886년에 집필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 전체를 하나의 투명한 은유로 이야기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실상’을 남김없이 치밀하게 포착해 내려는 시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점점 더 독한 외로움 속에 홀로 내쳐진 채, 삶이 사라지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파멸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내적 성찰과 고백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영적 ‘구원’으로 비상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4014682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윤우섭 역, 현대지성, 2023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풀리지 않는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아직도 살아있는 은유로서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1인칭 죽음의 (서사) 불가능성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가능한 1인칭 화자의 시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3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내면을 기술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 법원 동료들을 묘사할 때는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며 물들이는 건 이반 일리치의 질문, 느낌, 생각, 회한, 희망, 절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거짓과 진실의 대당이 아니라, 소위 불쾌와 유쾌의 대당으로 삶을 조망하고 조율해 왔다. 나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저 질병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품위로 치장한 교양 계급의 위선과 진짜 유쾌했던, 기억하고 싶은 삶의 경험이라는 대당을 두고 저울의 가늠을 옮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주변인 모두의 거짓(된 삶)이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영적 해방과 구원을 막아선 건 자신의 삶이 모조리 기만일 수는 없다는 믿음이었다. 진짜 유쾌했던,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삶의 경험이 단 한 조각도 없을 수는 없다는 ‘전면적 자기 부정(否定)의 부인(否認)’이었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는 최종적인 고백’은 그의 안에서 터져 나오지 못한 채/않은 채 그를 짓눌렀다.</span></p><p> </p><p style="margin-left: 60px;"><span style="color: #1053ee; font-family: 바탕;">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span></p><p style="margin-left: 60px;"><span style="color: #1053ee; font-family: 바탕;">그런데 이게 뭐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그럴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었을까? <span class="bold">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span> 뭔가 잘못된 거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여기가 그 법정이다! 그러나 나는 잘못이 없어!' 그는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무엇 때문에?' [...] 왜 무엇 때문에 이 모든 두려움이 생긴 거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윤우섭 옮김, 현대지성 ebook, 57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이 고통과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삶의 의미가 없이는 죽음이 가능할 수 없다고 몸부림치며 항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연의 세계에서라면 생존 자체가 삶이고 의미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없는 이곳에서 살아있음은 이미 의미를 품고 있으며, 죽음 또한 그 안에 공생한다. 그러나 살아있음과 의미가 더이상 하나가 아닌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가능성은 삶의 의미에 달려있다는 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세기도 훨씬 더 전에 집필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은 은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은유로 읽힐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이 질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존의 주요 ‘해석’이 그러하듯 예수의 십자가 부활이라든가, 속물적 삶을 내파하는 영적 깨달음이라는 통과의례에서 찾는다면 이 텍스트는 죽은 은유로 쇠락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40221259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Signet Classics CD13, 1960. Cover by Milton Glaser. Source: <a href="https://www.flickr.com/photos/44238709@N07/17136786976" target="_blank">www.flickr.com</a> Make It Old. License: CC BY-NC-S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전환 : 명령하는 주인에서 돌봄받는 취약한 몸으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음’에 대한 인정과 부인이 계속 반복되고, 그래서 죽음이 공허하게 지연될 때 이 히스테리적 회전에 멈춤을 가져온 건 하인 ‘게라심’의 돌보는 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상세히 묘사된 몸 상태의 악화, 통증, 고통을 통해 점증적으로 더 확실해진다. 한기가 엄습하고, 호흡이 멈추고, 입에서는 악취가 나고, 옆구리의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은 결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아편이나 모르핀 주사조차 더이상 그의 통증을 가라앉히지 못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주변인들은 그의 아픈 몸, 통증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엾이 여기며 돌보는 손길 없이 그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단둘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돌봄이 몹시 필요한데, 그 돌봄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환자였다.</span></p><p> </p><p style="margin-left: 30px;"><span style="color: #1053ee; font-family: 바탕;">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누구라도 자기를 병든 아이처럼 가련하게 여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에게 입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같은 책, 47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이 일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하인 게라심이었다. 통증으로 밤새 뒤척이는 이반 일리치의 무거운 다리를 자기 어깨 위에 올린 채로 밤을 같이 보내고, 간간이 이야기도 나누는 사람. 이 일을 “쉽게, 기꺼이, 간단하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감동할 만큼 친절하게 수행”한 사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신의 ‘창피한 몸’을 맡기는 게 부끄럽고 겸연쩍어 머뭇거리는 이반 일리치에게 그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런 수고를 하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니지요.” 자기는 다름 아닌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자기에게도 그런 때가 오면 누구든 자기를 위해 같은 일을 해 줄 것이기에, 이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을 명료하게 전한 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려움도 없고 거짓에 빠지지도 않는 그의 태도는 이렇듯 죽음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착하기에 가능하다. 게라심은 하인이라서 돌봄 노동을 하는 거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보편적인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구원의 빛’은 초월적인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무엇보다 타자 윤리의 확보에서 출발한다. 45살에 죽을병에 걸려 결국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견딜 수 없는 통증과 처절한 외로움 속에 내던져진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하인’의 돌봄을 받음으로써, 농부 하인이 선물하는 돌봄과 (그 돌봄에 자양분을 대주는) 보편적 윤리를 경험함으로써, 자신도 타자의 윤리를 획득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을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타자를 ‘만나지도’, 타자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주체였고, 지위였고, 판단자였고, 규범의 집행자였고, 모든 것 속에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유쾌한 교양 계급의 일원이었다. 완전히 의존적인 취약한 존재로서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바로 그 취약한 몸의 자리에서, 강요가 아닌 선물로 오는 ‘인류애’를 경험하고, 의무가 아닌 단순하고 당연한 행위로 오는 관계적 윤리를 경험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반 일리치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구원의 지평은, 신체적 붕괴와 사회적 가면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과 파멸의 ‘불쌍한’ 처지에서 타자의 돌봄을 받고, 그로써 타자를 향한 윤리적 눈뜸이라는 존재론적 ‘전환’(transformation)을 이루고, 다시 그 힘으로 그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던 다른 타자를(특히 아내를) 용서하면서, 서로의 해방과 구원의 빛을 체험하는 돌봄 파장의 연쇄로 이해할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순서는 단순한 심리 변화가 아니라 일종의 세속화된 ‘은총’의 구조에 가깝다. 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중심성의 갱도에서 빠져나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타자의 얼굴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여기에서 일부러 ‘구원’과 ‘은총’이라는 용어를 쓴다. 완전히 세속화된 의미로, 그러나 가능한 그 의미의 폭과 깊이를 온전히 복원하고자 노력하면서. 먼지로 뒤덮인 그리고 어쩌면 쓰레기로 폐기 처분된 이 용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틀 너머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걸 다시 느끼고 생각하고 추구하며 지켜낼 수 있게 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서로돌봄과 그것이 어루만지며 지켜내는 보드라운 삶 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두운 방에서 소파의 등을 향해 누운 채 오로지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통증과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단지 이반 일리치 뿐일까.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버려두는/버리는’ 죽음의 삶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원인을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전환하는 건 구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건 돌보는 몸이 건네는 은총이다. 이 문장들, 글 역시 은유다. 그렇다, 우리는 은유나 해석 없이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를 잘 구분하는 밝은 관점, 시좌(視座)를 제대로 찾고 지키면 된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은유를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아프고, 늙고, 죽어갈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간단한가!’</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반 일리치가 돌봄 윤리를 만나고 은총의 빛 속에서 내지른 경탄이다. 우리도 이처럼 배움의 열망으로 경탄하는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737bc;">[필자 소개] 김영옥</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4 10:58: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책/문학]]></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책/문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25'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240718941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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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I Don’t Think Rights for Helpers (Doumi) Exist”]]></title>
       <link>https://ildaro.com/1041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In collaboration with a women workers’ writing group, Ilda is publishing a series examining the previously ignored work and lives of female laborers. This series is being produced with support from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t helper, a promising job?</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the press mentions the difficulties of getting a job among college graduates and the competition in the part-time job market, narrator models and sales promotion helpers [both of which are types of event helpers] are listed as the representative jobs that pay high hourly wages and have over 90% of their applicants in their 20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wenty-nine-year-old Choi Mi-yeon (alias), who has been working as an event helper for 7 years, shook her head at the word “promis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wages are the same as they were over 10 years ago, and nowadays they’re even getting lower since everyone wants to do this. The wages are different for each event, and they regard working experience or physical appearances as important too. Since it’s a job that’s meant to be seen. Usually the wages are 10,000 to 20,000 won [10-20 USD] per hour, and the work can be as short as a day and as long as 4 or 5 days in the cases of exhibitions. It’s a nerve-racking field since you can’t predict when you’ll have a job. It all depends on how much work you are able to get, but you can’t do all the events just because you want to, and there are many variables such as sudden cancellations or not getting paid. There’s a limit to how much you can plan your life. At this time of the year, there used to be a lot of events, but after the Sewol Ferry incident, a lot of the events have been downsized. It’s also rare that you get a contract [instead of relying on a verbal agreement]. I once had a contract for a long-term job, but that kind of thing happens less than 10 percent of the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requently, the hiring company suddenly changes the schedule or changes their mind and cancels the event, but helpers cannot receive any compensation in these cases. Helpers “live managing their schedules according to the immediate circumstances,” and if an event is cancelled a day before or on the day of, it is very difficult on them because the financial losses are large. They have tried demanding that in these cases, they be given at least half of the promised wages, or even one-third - but the companies have never done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they receive orders from the advertiser, the agency recruits helpers. The advertiser comes first, the agency comes next, and the helpers are beneath that. We are cautious around the agency, and in many cases we can’t voice any complaints or opinions for fear of not being able to receive the next job. I think it’s absurd. There aren’t even any legal procedures. But on the contrary, if a helper is sick or something unavoidable occurs, the company goes berserk. In the same situation, all that is required of them is the words “I’m sorry,” but for the helpers, they are condemned. “You, you won’t be able to work anymore, don’t ever think of coming here again!” they say insultingl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only I could get a contract, even if it is to work for a d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oi Mi-yeon describes herself as a person who “meticulously inquires.” Even when starting to work, she always asks in advance at what kind of place she is to work, and what kind of work she is to do. If a helper doesn’t do that and just answers “yes,” in many cases the terms change suddenly once she arrives at work, and the work itself can increase beyond the allowed limi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oi also inquired when her wages were overdue. She waited for three paydays, then called the company until they paid. “I’m receiving the payment for my labor,” she said. When she was demanding that the company pay, she was prepared never to work with that company again. Even though the amount wasn’t large, it was commonplace for the company not to pay immediately. And even though they did the same job, the company paid people like Choi Mi-yeon, who demanded the payment, first, while paying her fellow workers three months lat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y don’t abide by the payment deadline. There are some companies that pay promptly, but some companies don’t, and I’ve seen companies that go to trial for overdue wages. We need that money to live, but they keep delaying payment or they don’t answer the phone or change the dates and terms and keep us waiting... If you work, you should get paid for it, don’t you think? But helpers that aren’t good at talking people into things or speaking their mind get their payment three months later or sometimes never, even though it’s only a small amount. Should we just trust whatever place it is that gives us a job? It’s hard for us to judge which company is good. The helpers are on the weaker sid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the interview, an agency sends her a text message. A photograph with a woman dressed in a red skirt and a white sleeveless top is attach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y’re telling me to wear a sleeveless top. Sometimes they give us the clothes, but there are cases where we have to prepare our own clothes according to the photographs. Sometimes cue sheets come. The ones that inform us like this are on the kinder side. Some of them don’t. It becomes harder then. Tomorrow’s job is to host an event and hand out presents to people who enter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oi Mi-yeon closely reads the event script that had also been sent. The things she wants when working are thes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ink it would be nice to have a contract even if it is to work for a day. Since it’s a promise between two parties, I would like to sign a contract, and I would like it if there weren’t any situations where the work gets cancelled a day before or on the day of, and I wish they would state that in the case of cancellations, there will be compensation, and I think it would be better to work if they considered the safety of the helpers. And if they also took into consideration the health of the people who work... The thing that bothers me the most is the wages. Everyone says, ‘oh, what if I can’t get paid?’ That’s the first thing that makes us anxious. ‘The job was cancelled suddenly, so I don’t have any money.’ That’s another source of anxiety. Since we’re the weaker ones. But everyone does it anyway, to earn mone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nt to escape “those ways” of viewing helpe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does various tasks. She works as a helper to promote a company’s image, wears a suit and guides guests for ceremonies, greets guests at counters, carries out lottery events, or leads tours for company publicity. The companies include big enterprises, smaller business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ublic institutions, schools, franchise dealers, and smaller shops. The working hours vary depending on the event, spanning from five to eight hour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34726622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Event helper at work (Image | AI-generated)</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Choi Mi-yeon has also worked as a narrator that holds a microphone and explains the event during the opening of a franchise chain. She had to work while standing outside under the hot sun in the middle of summer. There wasn’t even a single parasol. In the winter, she worked in the biting cold. It is so hot, so cold; her throat hurts, her legs ache. But all Choi Mi-yeon says is that “it’s very hard.” Her expression hardens gloomily for a moment when she says that. When it comes to talking for 45 minutes and resting for 15, or talking for 50 minutes and resting for 10, she says that that difference between a 5-minute break and a 10-minute break felt very bi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throat never was on the strong side, and since I have to talk nonstop, I get tonsillitis often. So do many other people... And you know how our job is to prioritize the customers and always be nice and friendly to them? I don’t think there are any rights for helpers. Sexual harassment also occurs... One of the very insulting and offensive things I’ve heard was when I said, “Congratulations, we’ll give you a present,” and a man slyly said to me, “Don’t they give you as well? Don’t they give anything else?” Older men have tried to hug me from behind, and sometimes they watch us with creepy ey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says other helpers also experience similar situation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m not that tall or pretty like a celebrity, and it’s worse for other women who are taller. In those situations, I say, “What are you doing?” or ask security guards beside me to control them, but nothing much is done to resolve this kind of problem. The companies don’t want to create a fuss, so they tend to overlook it. I’m not doing these jobs to hear comments like those... it makes you feel very b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ish they would start by not addressing us in casual language (banmal)</span><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anmal: Informal language usually used between those of the same age or from an older to a younger pers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carrying out events, she is frequently addressed rudely or in casual language. Also, even when she has already generously handed out presents from a limited stock, there are customers that ask for more or steal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m working, they look negatively at me, or stare at me explicitly, or address me in casual language. ‘Miss, do this, what is this, give this to me!’ they say. If we go out to work, people in their 20s and 30s mostly respect us, but people in their 40s and 50s use casual language. I don’t know whether it’s because they think we’re their daughters, but it is very insulting. It feels bad because they use contemptuous tones... I think there should be a shift in the way helpers are perceived. We’re working. I wish they would respect us from their hearts. Even people in the company don’t address us in formal terms and use casual terms, so I think those things should change fir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also says that many college students do this job because it’s regarded as “okay to do for a short while.” There are many young women who work as event helpers during their preparations for their future, or while they prepare for exams, or study at schoo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someone asks us helpers, ‘What do you do?’ we say ‘freelancing.’ If we say that we’re helpers, they sometimes look at us in a negative light... Since there are also helpers in karaoke rooms, people tend to think of them when they hear the word ‘helper.’ There are negative stereotypes about narrator models and helpers that wear short, revealing costumes. We call each other freelancers because we want to escape those kinds of perspecti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s ‘frees’...” She calls her colleagues by this term. Sometimes the work is fun because she talks with people and does a variety of jobs, and sometimes it makes her happy to see guests delighted to hear her words or receive the presents she hands out. This optimistic happiness, the pride in doing labor from which she makes a living, and the hope that she will be able to leave for a job where she can do what she wants to do and be respected, is contained in the word “free.” The women want to escape from “those views,” and do not want to hear “those word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rboring dreams of becoming an actres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started working as a sales promotion helper to sell cereal for a retail store at age 22. She worked nine hours and received 50,000 won. Even when doing the same job later, if it seemed as if she had no work experience, companies would pay different wages. “I was good at my job.” She smil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had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arts at a professional school. When she had moved to Seoul to study, she had had dreams of acting. She graduated from school, starred in plays, went to auditions, and applied at many places. When she wasn’t able to pay her rent because she had no income, she decided to “act while working” and started to work again as a sales promotion helper. It was common to see fellow actors around her working as event helpers as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acting, you never know when you’ll be called, and it’s like being on the 5 minute waiting squad, so I wasn’t able to get a regular job. I endured it and worked as a helper, because it was acting that I wanted to do, not being an event helper. Since acting wasn’t enough to make a l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at age 24, she started working aga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a sales promotion helper for baby skin care products. I was a contract worker for a year. It was to work over 20 days per month, and because I was ambitious for work, I worked over 25 days a month. I worked 9 hours a day and received 90,000 won per day. Back them, 90,000 won was the highest amount to be paid in the retail store. Although I had a fixed income for a year, the work was very hard. I had to stay standing the whole time, and there was pressure regarding sales. The pressure is given to achieve higher standards than competing companies. Because I was chosen not as a common sales worker but as part of a special team that was good at selling, the pressure was even worse. I didn’t just work at one place but had to go to several retail stores. Sometimes I had to go to places far from home, where it took 3 to 4 hours just to go back and forth. It was a very hard job.”</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at time, the agency told her to “choose between receiving the 4 major insurance benefits (with a regular contract) or paying 3.3% income tax (with a freelance contract).” She chose to receive the 4 insurance benefits and pay the premium. She chose to be an employed worker. “After the job was over, I was able to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for several months. I was happy I had done it, but there haven’t been any more chances to receive insurance benefits since then.” She, who worked 9 hours a day, 25 days a month, for a year as a contract worker, now feels as if she is no longer a worker.</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lower of the event? If it withers, no one will like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secured jobs as a day worker through agencies or promotions. Sometimes she would find internet forums such as small groups for event helpers and apply by e-mail after creating a profile. Agencies had connections with advertisers, and when they received “orders,” the agencies would post them on such small groups’ forums. With the agencies, most of the work is secured by oral agreement. The agencies take their share from the amount determined by the advertiser and give the rest to the helpers. There are cases where the agencies take a lot of the mone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sually the ratio is 70 to 30, but they often take more. We don’t know the amount, but sometimes when we hear how much the advertiser paid, we find out that, “Oh, the agency took a lot for themselves.” It’s usually unclear [how much they take]. We’re grateful that the agencies give us work, since if they don’t, we can’t work. A lot of the helpers keep their heads down from fear of falling out of favor with the agency, of being disliked by the agency. Many have complaints about insulting and illogical affairs but can’t speak them out loud. The ones that are taller and prettier work as posing models for motor shows or racing events, and they receive higher wages. Since they are a type of product. They devote a lot of care toward their looks, such as by getting plastic surgery, or in the case of posing models, getting breast enhancements or going on diets. They do it in order to keep work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oi Mi-yeon continues to consider herself an actress. She has had minor roles in films and dramas. The work she wants to do is acting, but as a person playing passerby roles in drama sets, she was nameless. She was addressed in casual language as “hey, you,” treated badly as if she were a piece of baggage. I discovered that she had appeared in films I had seen as well. I promised that I would recognize her face in the next film. Choi Mi-yeon sai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Korean age, I’m a 29 year-old women, and I have no experience of working in a regular workplace. I wouldn’t be able to work in a regular job, would I? It would be hard to work in the so-called ‘big’ or smaller enterprises. Since I don’t have special knowledge or a career history. That’s why the people who worked as event helpers move on to be heads at the agencies, since they already know a lot about this work. Or they become secretaries or bookkeepers. Everyone thinks that working as an event helper is temporary. Even the helpers themselves. I mean that they all think of something else and prepare for it while working. They perceive it to be a passing job to do while preparing for one’s career, while going to school. Even the helpers themselves don’t think they can work as one for a long time. Usually, if you take good care of yourself, they say you can work until your early- to mid- 30s, but that’s difficult since this is a job to be seen. They look for pretty, slim women. They say they’re the flower of the event, but these helpers...if they whither, people will not like them.”</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devoted my life, and did this job sincere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pauses for a mo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I have a sense of achievement. Doing this work, I paid back my student debt. I graduated from a 2-year arts college, and because I wasn’t in circumstances where I could receive help from my parents, I went to college depending entirely on student loans. When I graduated from school, my debt was 20 million won. Working as an event helper, I paid back that debt whenever I got money. Whether it was a few hundred thousand won, 500,000 won, I made payments on my debt. After graduating from school, I paid back all that money in 4 years after I started at 24 years old. I was so proud. I worked really hard during that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smiled as she said she didn’t want to live like this when she gets married in the future. “I did all the part-time jobs young people can choose from.” She was also happy to find a small place to rent with the key money of several million won she earned after paying back all her student deb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ryone said that event helping was temporary work you passed through. Even the customers who passed by, even she herself as a helper regarded this as the background for life. So no one paid attention to what the helpers did, why they took such roles, who determined that work, what the conditions of labor were, and what parts could be changed. But this is all that has been given for now. One realizes that this is where we are stay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You have to manage with what you have. If you have a perceptive eye and are precise, it will be ok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wishes that the labor she does would not be looked down on, that she would not be treated badly, and that she will be able to receive payment. Because she “really works hard” on the jobs she iss given. The small room she was able to get for the first time at 29 years old, the education she persevered through unsupported, the things she had to sacrifice for her dream, the independence she managed to keep. Because she did this work sincerely in order to take responsibility for her life. Even though she had to work, dressed in certain clothes that were predetermined, and work while smiling consistently, saying certain words, she devoted her life to it, and she has been sincere. She wants that sincerity to be respected. She wants that promise to be upheld, and she trusts that it will b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will go out to work again tomorrow. <span style="color: #af30ce;">[Translated by Ros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6723" target="_blank">http://ildaro.com/6723</a> Published: June 23, 2014</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3 11:45: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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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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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ilda@ildaro.com (An Mi-s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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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청년 남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title>
       <link>https://ildaro.com/1041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3월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이승현 객원교수는 이번 학기 강의를 하나 더 맡게 되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사논문으로 〈성별의 법적 결정에 대한 헌법적 고찰: 성전환자의 경우를 중심으로〉를, 박사논문으로 〈혐오표현에 대한 헌법적 고찰〉을 쓴 법학 연구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심하며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특히 이젠 ‘자식뻘’이라는 학생들 이야기를 할 땐 더 의욕이 넘쳤다. ‘확실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구나’라는 게 확 느껴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20358765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이승현 객원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승현 씨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성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됐고,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도 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대학에서 강의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0년째인 것 같아요.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정확한 표현이 중요한데요.(웃음) 지금 사실 ‘대학강사’는 아니고 ‘객원교수’에요. 강사로 3년 일했는데, 강사법이 개정되면서 계약 보장이 돼서 6년을 일하긴 했어요. 근데 이 강사법 때문에 학교에선 강사를 적게 뽑기 시작했고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면서 지금은 객원교수(비전임교원, 학기 혹은 년 단위로 계약함)로 일하고 있어요. 근데 이렇게 소개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글쓰고 강의합니다.’라고 말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01학번인데요. 사법시험이 있을 때니까, 법대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걸 생각하던 때였죠. 근데 전 전공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법학 전공을 꼭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요. 솔직히 고등학교 때가 정체성 혼란이 심할 때이기도 했고, 성별 불쾌감(디스포리아)과 위화감이 있을 때니까, 내 안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사람은 왜 자살하면 안 되냐?’는 거였거든요. 우울증의 정점에 있던 때였죠. 그래서 쇼펜하우어 책을 열심히 읽었고 ‘철학과는 어떨까’ 생각했어요. 당시에 학교 윤리 선생님을 붙잡고 ‘왜 죽으면 안 되냐?’ 물어보기도 했었는데, 그 선생님한테 철학과에 가고 싶다니까 ‘굶어서 죽게?’ 하더라고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단 수능 성적에 맞춰 대학에 들어갔고, 거긴 광역학부제(공학계열, 인문계열 등 광역 단위로 입학해 1학기 혹은 2학기 후에 전공을 선택)여서 사회과학계열로 들어갔어요. 입학하고 OT할 때 보니까 다른 학생들은 미리 정보를 다 수집해 왔더라고요. OT 끝나고 나왔을 때 각 학과 학생회 깃발이 쫙 깔려있었는데 다들 원하는 곳을 찾아갔어요. 나 혼자 ‘뭐야? 이게 뭐지?’ 이러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좀 튀는 깃발이 하나 보였어요. 거기만 색깔이 좀 다르더라고요. ‘저 깃발 좋은데?’ 이러고 따라갔어요.(웃음) 그게 법학과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1년 동안 몇 가지 과목을 수강했는데, 제일 재미있게 들었고 그래서 성적도 잘 나온 쪽이 법학이랑 사회학이었어요. 어느 쪽을 갈까 고민하다가, 이미 1년 동안 법대 건물 썼으니까 ‘그냥 법학으로 해야겠다’ 하고 선택한 거에요. 근데 막상 거기랑 안 맞았어요.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기선 제 성별에 의문을 갖지 않고 바로 ‘여성’으로 규정되더라고요. 반면, 대학 들어가자마자 들어간 만화 동아리에선 한달 동안 제 성별 가지고 논쟁이 있었다고 해요. 그땐 그렇게 나를 헷갈려 하는 곳이 오히려 편했어요. 그러니까 법대 공동체랑은 가까워지지 않았죠. 거기다 3학년 땐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가기도 했고요. 법대 안에서도 계속 ‘전형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치마정장 입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주민번호가 왜 이래요?’…트랜지션 이후 취업은 더 어려워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법대에 별로 애정이 없었는데, 대학원까지 진학하셨잖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제 정체성과 관련된 거긴 해요. 학부 졸업할 때가 되니까 도저히 취직을 못하겠더라고요. 취직해서 치마정장 입는 그런 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법시험 칠 생각도 없었으니까. 선택지가 대학원 정도더라고요. 대학 때 공부는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인권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대학원 다니며 인권 관련된 공부를 좀 더 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고 〈성별의 법적 결정에 대한 헌법적 고찰: 성전환자의 경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썼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2000244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승현 씨는 2007년 논문 〈성별의 법적 결정에 대한 헌법적 고찰: 성전환자의 경우를 중심으로〉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07년 여름에 석사 졸업을 했는데, 박사 과정을 바로 시작했던 건 아니에요. 석사 논문 쓰면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성별 정정을 요구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가 무엇일까?’ 그 지점을 정말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결국 논문에서 나름 중요한 내용을 도출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 논문을 쓰고 나서 번아웃이 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연애를 시작했는데요. 제가 연애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은 아닌데, 한번 누군가한테 빠지면 정신 못차리고 빠지는 스타일이더라고요. 그러면서 본가에서 독립했고요. 상대 역시 트랜스젠더였는데, 호르몬 주사를 통한 트랜지션(transition,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춰 사회적, 신체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전체적인 과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나도 해야겠다’ 결정하게 되었죠. 그렇게 트랜지션을 시작하니까 취직은 더 안 되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면접을 보러 가면 ‘주민등록번호가 왜 이래요?’ 아니면 ‘군대를 안 갔는데 면제 사유가…’ 이런 반응이었어요. 정말 운 좋게 합격한 곳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면접관들이 아무도 제 주민등록번호를 못 봤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회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주민등록번호가 알려지는 일이 있기도 했고, 나 스스로 정말 회사 일이랑 안 맞는 걸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되면서 석 달 만에 그만뒀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에도 ‘(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게 안 맞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안 맞는진 몰랐거든요. 그때 깨달았어요. 석사 때 고생했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쉬웠다’라는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어떤 지점에선 본인의 선택대로 온 게 아니기도 한데요. 지금 일엔 만족하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은 기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건데요. 둘 다 잘 맞아요.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INTJ인데(웃음) 내가 생각하는 걸 구현하려고 하면 혼자 작업하는 게 딱 좋고, 수업하는 것도 ‘내가 세운 목표에 부합하게 어떤 수업 내용을 만들까? 어떤 방법을 써 볼까?’하면서 진행하는 게 재미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이제 40대인데, 30대 후반 정도부터 20살인 대학생들이 너무 귀여워 보이더라고요. 사실상 거의 ‘자식뻘’이잖아요. 트랜지션 과정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아서 임신·출산이 불가능한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박탈감이 생겼어요. 해외에는 임신한 트랜스젠더 이런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런 상상도 못해 봤으니까요... 여튼 그래서인지 학생들을 보는 게 좋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20027927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대학에서 강의 중인 이승현 객원교수의 모습. (사진 제공: 이승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요즘 ‘20대 남성의 극우화’ 등에 대해 말들도 많은데 말이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점점 더 고민하긴 해요. 재작년부터 수업 시작할 때 ‘내가 여러분과 20살 이상 차이가 난다. 그래서 알고 있는 기본 상식, 통념이 다를 수 있다. 여러분들의 것들도 알려 달라’고 말해요. 예전부터 청년들 삶이 빡빡하긴 했지만 확실히 요즘은 ‘진짜 빡빡하다’는 게 느껴져요. 학생들이 너무 경쟁에 찌들어 있는 게 보이고요. 그래서 보수화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이 대체로 정말 ‘내 파이가 사라질까봐’ 걱정해요. 그래서 요즘은 인권 수업할 때 ‘이런 이런 게 나의 권리이고, 나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말을 오히려 줄여요. 그건 이미 기본값이 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 존중’을 더 많이 언급하죠. 대형 강의를 하면 1년에 400~500명 정도의 학생을 보는데, 리포트에 ‘남성이 겪는 역차별’ 이런 이야기를 써서 내는 이들이 있어요. 진심으로 그걸 믿고 있는 거죠. 사실 요즘은 꽤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이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정말 이들의 삶이 너무 빡빡해서 그런 거구나 느낀 순간이 있어요. 몇년 전에 한 남학생이 예비군 훈련 때문에 수업을 못 듣게 된 거에요. 그래서 ‘그건 수업 인정 되니까 괜찮다’고 했어요. 이 학생 걱정은 그게 아니라, 시험이 수업 안에서 나오는데 필기를 공유 받을 친구도 없고 수업도 못 들으니까 자신이 불리해진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학생한테 그럼 다음 시간에 좀 일찍 오면, 빠진 날 어떤 수업을 했는지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 때 그 학생의 표정의 잊혀지지 않아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분은 처음이에요.’라고 하더라고요. 새삼 ‘이 애들이 되게 힘들구나’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즘 젊은 남성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없지 않나 싶어요. 트랜스남성이 그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웃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우리 사회는 ‘강한 남성성’에 포섭돼, 다양한 남성성 모델 부재…</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특히 소수자 정체성을 포함한 남성성은 드러나지 않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청년 남성들에게 어떤 역할모델이 되고 싶으세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 우리가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재정비하고 긍정하는 게 더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한 과정을 보면, 처음부터 ‘남성’으로 정체화했다기 보단 ‘일단 여성은 아니다’라고 정체화를 했어요. 그러다가 트랜스남성이라 정체화했고, 지금은 트랜스남성이라는 정체성과 동시에 남성의 정체성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설명하기 까다롭긴 한데... 예전에 1990년대 페미니즘에서 나온 말 중에 하나가 ‘젠더 차별이 없었으면 트랜스젠더도 없었을 거다.’라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듣고 무척 화가 났어요. 난 무인도에 혼자 있었어도 ‘바디 디스포리아’(body dysphoria, 몸에 대한 위화감)가 있었을 거고,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존재한다는 거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거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엔 오히려 젊은 여성들에겐 다양한 롤모델이 있는데 젊은 남성들에겐 다양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이들이 부재한 것 같아요. 그냥 어떤 ‘강한 남성성’에 다 포섭되어 버렸달까? 특히 어떤 소수자의 정체성을 포함한 남성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트랜스남성이 하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나이든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또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부재한 부분이죠.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자서전을 써볼까 싶기도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금 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어떤 목표를 갖고 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본적인 정체성은 연구자라고 생각해요. 석사할 땐 활동가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었는데, 그 때 지도교수님이 ‘연구하면서도 활동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연구를 열심히 하라고요. 인권운동, LGBT운동 특히 트랜스젠더 운동을 백업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도출해 내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인생 목표랄까? 법을 기반으로 트랜스젠더, 인터섹스(intersex, 호르몬, 염색체, 생식기 등이 전형적인 성별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성징을 지닌 사람)와 관련된 교과서를 만들고 싶거든요. 언젠가 법학 내에서 LGBT법 같은 과목이 개설되면 그때 쓸 수 있도록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또 관심있는 연구 분야가 있는데, 근대 헌법에 대한 거에요. 한국의 법이 서구의 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에 대한 논의는 많은데, 아시아의 법이나 한국의 예전 법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거든요. 법학 교과서 열면 프랑스 혁명부터 얘기하는데 좀 이상하잖아요? 사실 우리 사회는 일제 식민지가 되기 전에 헌법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사학 쪽에서 하지 법학 쪽에서는 별로 안 해요. 그 시기 한국이나 오키나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헌법이나 인권 민주주의를 도모했던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요.</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2 16:56: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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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집 짓기를 통해 이야기하는 중년 레즈비언의 삶]]></title>
       <link>https://ildaro.com/1041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집에서 살며 살아갈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인생의 과제이지만, 성소수자에게는 역할 모델을 찾기 어려운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 2025년 6월에 『중년 레즈비언의 주거와 커밍아웃, 지금까지와 지금부터』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50대 레즈비언이며 1급 건축사이기도 한 가와치 시노(河智志乃) 씨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고뇌, 커밍아웃 방법과 전략, 노후를 감안한 파트너와의 삶 모색 등을 두 채의 집 짓기 과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14252739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가와치 시노(河智志乃) 1971년 일본 치바 출생. 1급 건축사이자, 비영리법인 레인보우 커뮤니티 꼴라보(coLLabo 홈페이지 <a href="https://co-llabo.jp" target="_blank">co-llabo.jp</a>) 이사를 맡고 있으며, ‘모두에게 결혼의 자유를’ 소송 원고이기도 하다. 복지주거환경 코디네이터 2급, 방문요양보호사 2급 양성 연수 과정 자격 보유. (촬영: 우이 마키코 宇井眞紀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3년 전에 삿포로시 여성문화센터 직원분에게 ‘성인 레즈비언 책은 더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틈틈이 적어왔던 글을 책으로 출간하기로 마음먹었죠. 여성문화센터에 페미니즘 책은 많지만, 확실히 레즈비언 책은 적죠. 아직 사회가 여성 커플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가와치 씨는 말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혼자의 집’ 짓기에서 ‘둘의 집’ 짓기까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소년기부터 성별 위화감을 느꼈던 가와치 시노 씨. “남자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었어요. 여자의 몸도, 그 몸에 부여된 젠더 규범도, 성역할도 혐오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대상은 여자... 당시에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 동성애 혐오로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괴롭히던 나날들이었다. 직업으로는 ‘여성’답지 않은 건축 현장을 선택했지만,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30대에 접어들 무렵,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성으로 사는 인생을 포기하고, 여성인 자신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도 현장감독에서 건축설계로 전환하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와 함께 가와치 씨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앞으로도 혼자 살게 될테니 노후에도 쫓겨나지 않기 위한 ‘혼자의 집’ 짓기. 본가는 ‘부모와 세 자녀’가 사는 전형적인 단독주택이었다. 책 『중년 레즈비언의 주거와 커밍아웃, 지금까지와 지금부터』에는 부지 선정과 인프라 정비로 시작해 노후에도 살 수 있는 집 짓기 비법도 잔뜩 소개되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자의 집’이 완성되면 만세를 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가와치 씨는 고독에 휩싸였다. 여성 연인은 있었지만, 자신이 ‘여성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느 날,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들을 위한 공간에 갔다가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는 동료들, 그리고 일생의 파트너가 될 하토가이 히로미(鳩貝啓美) 씨를 만난다.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둥지를 틀고 있던 ‘여성’ ‘동성애자’ 혐오의 원인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하고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여성으로서, 여성 파트너와 사는 여성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만, 레즈비언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어요. 하지만, 하토가이와 친구들을 만나 레즈비언에게 따라붙는 역풍과 차별에 저항할 각오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214345490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50대 레즈비언, 1급 건축사이기도 한 가와치 시노(河智志乃) 씨가 2025년 6월에 출간한 책 『중년 레즈비언의 주거와 커밍아웃, 지금까지와 지금부터』(ミドルエイジ・レズビアンの住まいとカミングアウト、これまでとこれから, 겐다이쇼칸) 표지(좌)와 책 내부에 소개한 집의 평면도(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09년에는 하토가이 씨, 동료들과 함께 레즈비언과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여성을 위한 ‘레인보우 커뮤니티 꼴라보(coLLabo)’를 설립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이번에는 나이가 들어도 하토가이 씨와 둘이서 살며 친구나 동료들도 모일 수 있는 ‘둘의 집’ 짓기를 시작했다. 연령에 따른 가변성이 있는 집으로, 나이가 많이 든 후에는 1층에서만 살 수 있도록 수도와 침실을 설계, 3층은 동료와의 작업 공간으로 삼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는 친구들이 가까이 사는 환경을 만들어 서로 반찬을 나누거나 안부를 묻거나 하며 지내고 싶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커밍아웃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서에는 신뢰와 관계를 심화하는 기술과 힌트도 가득하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혼할 수 없는 상황도 있으니, 저를 포함해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지 못해온 사람은 파트너에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느낌이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 커밍아웃하는 방법도 꼭 읽어야 할 대목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커밍아웃은 타자와의 관계를 구축하거나, 지금까지 속여왔던 관계를 재구축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죠.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데로도 이어집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커밍아웃의 우선도와 확장을 표로 만들고, 캐치볼을 예로 들어 오가는 대화를 정리했다. 캐치볼에서 어떤 볼을 던질지를 ‘PDCA’(계획-실행-평가-개선)으로 실천하는 방법이다. 그 외에도 공증서와 유언, 재해와 소수자 등 다루는 화제가 풍성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책이 전국의 여성센터 서가에 놓이면 기쁠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와치 씨는 2021년 하토가이 씨와 함께 ‘모두에게 결혼의 자유를’(Marriage for All) 소송의 원고가 되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헌법을 위반하는 기본권 침해이자 차별이 아닌지 묻는 전국 단위의 소송으로 2019년부터 시작되었고, 두 사람은 도쿄2차 소송 원고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별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사람과 안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 결혼도 가능한 사회의 풍경을 빨리 보고 싶고, 뒷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21 09:41: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가시와라 토키코)]]></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214816339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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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한국어도 모르면서 한국 학교에 왔어?’]]></title>
       <link>https://ildaro.com/10413</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두근두근, 중도입국 청소년들의 새 학기 풍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 3월은 봄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새 학기를 맞는 수많은 학생들은 새로움과 설렘, 긴장, 그리고 약간의 걱정 속에서 등교를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배경 청소년’(본인이나 부모가 외국 출신이거나 한국으로 이주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면서, 나에게 3월의 첫 일과가 시작되는 날은 조금 특별하다. 출근길에 오늘이 등교일일 아이들을 떠올리며 응원과 격려의 문자를 보내고, 아이들이 하교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일주일 동안은 아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한국 학교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우리 센터가 시끌시끌하다. 내가 일하는 ‘서울시 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는 2022년 서울시가 설립하고, 사단법인 ‘이주민센터 친구’가 2025년 4월부터 위탁 운영하는 ‘중도입국 청소년’(외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청소년기에 한국으로 이주한 9세부터 24세의 청소년) 지원 기관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94214208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내가 일하는 서울시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는 ‘중도입국 청소년’ 지원기관이다. 중도입국 청소년이란, 외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청소년기에 한국으로 이주한 9세부터 24세의 청소년을 칭한다. 센터에서 청소년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춤을 연습하는 장면. (사진-서울시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학교라는 공간, 같은 반 친구들, 담임 선생님, 낯선 한국 학교 문화, 교과서까지 이야기할 것도 많고 챙겨야 할 것들도 많다. 번역기의 도움 덕분에 예전보다 가정통신문을 들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줄어들었지만, 정작 확인해야 할 가정통신문의 양은 오히려 점점 늘어나는 느낌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할 수 있을까요?’ 눈물로 시작된 옥이의 대학생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대학에 입학한 옥이(가명, 베트남 출신, 여)가 개학 이틀째부터 센터에 오겠다고 연락했다. 아침 수업이 끝나고 공강이 한두 시간밖에 없는데도 센터에 들르겠다고 했다. 옥이는 센터에 오자마자 울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말은 다 알아듣겠는데…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 시험, 발표… 내가 할 수 있을까요? 저걸 어떻게 해야 하지? 할 수 없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서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센터의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위로하고, 각자의 방법을 이야기했지만, 말을 할수록 옥이는 더 울기만 했다. 지금 어떤 위로가 옥이의 귀에 들어갈까 싶었다. 그렇게 울다가 결국 오후 수업은 들어가지 못했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어도 모르면서 왜 학교에 온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등학교에 입학한 지민이(가명, 중국 출신, 여)는 개학 3일째에 센터에 와서 눈물을 쏟았다. 둘째 날까지만 해도 “어렵지만 괜찮아요.”라고 말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센터를 왔다 갔다 하더니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다가, 조금 진정된 뒤에야 며칠 동안 학교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야기를 듣고 나는 지민이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혼냈다. 4년 전 지민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고, 또다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민이는 4년 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보고 싶다며 연락해 왔다. 대안학교에서 같은 나라 출신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선생님이 제대로 대응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후 센터에서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준비해 2년만에 합격했고, 상담을 거쳐 결국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등학교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민이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지민이는 또래보다 두 살 많은 나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만큼, 이번에 다시 포기하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학교에 외국 학생이 없더라도, 한국어가 어렵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민이가 겪은 일은 이랬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날 영어 수업 시간, 한국어 설명이 어려웠던 지민이는 손을 들고 말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선생님, 제가 한국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순간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웃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음 날 컴퓨터 시간에도 같은 말을 했는데, 그때 웃었던 학생들이 이렇게 말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어도 모르면서 왜 (한국) 학교에 온 거야? 중국에서나 학교 다니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민이는 이 일을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했지만, 교실로 올라가라는 말만 들었다. 지민이는 4년 전처럼, 이 선생님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했다. 지민이는 결국 조퇴를 하려고 담임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고, 다음 날에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하루 쉬고 싶다고 또 문자를 보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담임 선생님은 “도와줄 테니 잘 이겨내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센터 선생님들과 언니들도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해 주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9423555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주배경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습. (사진-서울시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우리 지역에, 학교에, 일터에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옥이와 지민이의 사례를 통해서 눈물로 시작되는 중도입국 청소년들의 새 학기 풍경을 소개하게 되었지만, 사실 중도입국 청소년들에게 이런 상황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상당수의 중도입국 청소년들은 단기간 한국어를 배우고 일반 학교에 들어가기 때문에, 3월의 상황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3월의 우리 센터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일하는 ‘서울시 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는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학교 편입학을 준비하고, 진로를 고민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작년 한 해 동안 5백여 명의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센터를 다녀갔다. 일부는 학교에 진학했고, 일부는 일터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여전히 센터에 남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센터가 위치한 서울 서남권은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이어서, 이주배경 학생이 밀집된 학교가 많다. 그래서 지역사회와 교육현장의 선생님들을 만나면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 시간이 갈수록 학교와 센터가 따로 일을 하기보다 함께 연대해야 할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지난해 남부교육지원청과 함께 ‘찾아가는 이중언어 집단상담’을 진행했다. 학교를 방문하며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과 교사들의 고민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청소년’이 아니라 ‘외국인’이 되는 순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늘 안타깝게 느끼는 지점이 있다. 중도입국 청소년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이지만, 어떤 중요한 순간에는 ‘청소년’이 아니라 단지 ‘외국인’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원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제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생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 선생님들은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교 밖에 있는 것보다는 학교 안에 있어야 그나마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정상황, 행정절차, 서류 준비 등의 문제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청소년들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센터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중도입국 청소년들과 이들의 부모님들이 찾아온다. 주변 이야기를 듣고 일단 자녀를 한국으로 데려왔지만, 이후의 과정은 학교나 센터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역할이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94300220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주배경 청소년 대상 특강 진행 장면. 작년 한 해 동안 우리 센터에 5백여 명의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다녀갔다. 이주배경 청소년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성인으로 자립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진-서울시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청소년기에 이주를 하면, 언어도 마음대로 소통되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게 여러 어려움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성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배경 청소년이 한국 사회에서 성인으로 자립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중도입국 청소년 가운데 적지 않은 동포 학생들은 동포 비자를 가지고 있어 체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체류자격과 별개로 언어, 인적 네트워크, 정보 등 삶의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본국에서 품고 왔던 꿈과 점점 멀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미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많은 지자체가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에 대응하기 위해 유학생 유치 정책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여러 연구에서도 인구 감소의 대안 가운데 하나로 ‘이주배경 청년’ 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실제 정책과 지원을 살펴보면, 유학생 지원에 비해 이주배경 청년에 대한 지원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어린 시절 한국에 와서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한 이주배경 청소년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보다 대학 진학이나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학생 유치 정책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고 있는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 역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이들이 ‘이주배경’ 이전에 ‘청소년’으로서 마땅히 보호받고 지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들이 건강한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438c7;">[필자 소개] 신혜영</span>. 2006년 미등록 이주아동 한국어 자원교사로 활동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이주배경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한국사회 적응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이주민센터 친구 산하의 서울시글로벌청소년교육센터에서 이주배경청소년을 만나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9 09:39: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신혜영)]]></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94521794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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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마을을 흥하게 만든 암탉의 울음이 바다까지 이르러]]></title>
       <link>https://ildaro.com/1041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넷플릭스 방영 〈폭싹 속았수다〉는 지난 세월 동안 제주도 마을 안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드라마로 재현했다면, 올해 1월에 방영된 제주MBC 다큐멘터리 2부작 〈암탉이 울면 마을이 흥한다〉는 현재 제주도 172개 마을 중 단 3명뿐인 여성 이장들을 통해 지금 제주도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낱낱이 보여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호에서는 현재 제주도 마을에서 부는 바람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고자 2명의 인터뷰를 싣는다. 처음은 다큐 〈암탉이 울면 마을이 흥한다〉를 만든 김지은 PD이고, 다음은 ‘모태 해녀’인 고명효 씨로 이호마을 성평등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해녀이다. -편집자 주-</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암탉이 울면...〉 김지은 PD, “전국의 애순이들에게” 바치는 헌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1월 19일, 26일에 2부작으로 다큐멘터리 〈암탉이 울면 마을이 흥한다〉가 방영되었다. 제주 성평등 마을만들기 사업과 현재 제주에 3명뿐인 여성 이장들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으로, 제주MBC에서 제작되어 지난해 11월에 제주에서 전파를 탔다. 반향이 커 올해 전국 방송으로 방영되었고, 이후에도 서울MBC ‘탐나는 TV’ 등 각종 미디어에서 다뤄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김지은 PD는 〈해녀밥상〉, 〈제주여성선각인물 민족여성의 혼불 김시숙〉, 16개사 공동 제작 〈농업이 미래다〉 16부작, 〈그리운 이름 고향, 살암시난〉 등 제주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이 인터뷰는 지난해 11월, 올해 2월에 걸쳐 전화로 진행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72745530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암탉이 울면 마을이 흥한다〉를 제작한 김지은 PD가 MBC 옴부즈맨 토크쇼 ‘리얼 비평! 탐나는 TV’에 출연해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년 2월 7일 방송 캡쳐)</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br />호미</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 다큐 잘 봤습니다. “암탉이 울면”을 검색하니 자동완성기능으로 “마을이 흥한다”가 뜨더라고요. 조용한 혁명을 느낍니다. 다큐가 방영되고 반응은 어떤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 PD</span>: 제일 많은 들은 이야기가, “진짜 여자 이장이 3명밖에 안 된다고요?”예요. 우리 도민들도요. 정말 몰랐던 거죠. 그나마 두 분 이장님은 2025년에 이장이 된 거예요. 이장은 으레 “누가 하나 보다”하고, 성별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는, 지방선거가 있으니까 타이밍이 괜찮았다는 얘기들도 좀 들었어요. 제주도에 여성 선출직들이 너무 없어요. 저희 프로그램에서 보여드렸듯이 2023년 기준, 여성 도의원은 20%,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는 18.9%, 여성 공무원은 27.2%, 5급 이상은 33.8%예요. 제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65.3%(2024년 기준)을 볼 때 너무 차이가 나죠. 여자들이 정치한다는 거에 대한 편견이 있고, 제주도 특유의 ‘형님 문화’가 있어요. 이게 남성들이 가지는 고등학교 선후배 간에 끈끈함 같은 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밀어주죠. 이 문화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여성 선출직이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인 것 같아요. 여성 정치인하고 여성 공무원들이 나오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야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질 수가 있는 거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모두가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만, 문제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이 다큐를 만들게 된 동기가 있다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2025년 1월, “제주도에 여성 이장 달랑 한 명, 이게 말이 되나요?”라는 기사를 보고서예요. 저도 놀랐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그 기사는 성평등마을사업단 김연순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위원</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성평등 마을사업에 대해 쓴 글이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맞아요. 이후에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을 먹었죠. 애순이가 국민학교에서 반장을 억울하게 못하고, 어촌계장을 하는 것도 너무 힘들잖아요. 어촌계원 대부분이 해녀들인데, 어촌계장은 다 남자들이죠. 제가 해녀 다큐멘터리를 좀 오래 작업해오면서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애순이가 어촌계장으로서 활약하는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드라마 같은’ 이야기죠. 2024년 기준 전국 어촌계장 2,079명 중 여성은 단 67명으로 전체의 3.2%에 불과하더라고요. 성평등 마을사업을 알리는 기사와 ‘애순이’가 이 다큐의 시작이로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예, 이런 다큐멘터리 하나 만들려면 펀딩을 받아야 가능하거든요. 지역 방송이 되게 열악하거든요. 그래서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지역 방송을 지원하는 콘텐츠 제작 지원 공모에 응모해서 선정이 됐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45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728077380.jpg" alt="" width="745"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제주MBC에서 제작한 2부작 다큐멘터리 〈암탉이 울면 마을이 흥한다〉 중에서, 김인영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영상을 만든 김지은 PD는 성평등이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방송 캡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촬영 중 마을의 저항 받아…“그런 식 인터뷰면 안하겠다”</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장 선거에 또 출마하겠냐?’ 세 여성 이장의 답변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성평등의 시대정신이 이 다큐를 가능하게 했네요. 다큐를 찍는 과정에서 저항도 있었을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취재하면서 느끼는 것들은 있었죠.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가, “여자 이장이 적고 많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였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부에서 우리 (여성)이장님이 어떠냐? 라고 마을 분들한테 물어봤을 때 대부분 다 고령자 분들만 인터뷰를 해주셨잖아요. 이걸 보고 주변에서 “젊은 남성들로부터는 왜 ‘우리 이장님 최고다’라는 하는 얘기가 없냐”고 하시는데, (인터뷰를) 안 해주셨어요. 한 마을의 청년회장은 여성 이장에 대한 소감을 묻는데, “그런 식의 인터뷰면 난 하지 않겠다” 거부하셨죠. 좀 안타깝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제작 과정이 성차별을 목격하는 현장이기도 했네요. 그럼에도 마을을 누비며 촬영을 하셨는데요. 촬영하시면서 애초 기획과는 다른 점들이 있었을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저조차도 이장님들의 역할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제주MBC 입사 23년 차인데, 그동안 제주도 마을을 취재하러 다니면서 본 이장님들과는 많이 달랐어요. 이 여성 이장님들을 밀착 촬영하면서 보니까,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세요. 정말 일이 많아요. 어디서 민원 들어오면 연장 하나씩 들고 가서 다 고쳐주시고, 특히 독거노인 분들 잘 계신가, 일부러 돌아보시고, 정말 열심히 일하셨어요. 세 분 모두 진심으로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저도 이장이 행정과 마을을 잇는 가교 역할 정도로 생각했고, 주민들 도장 가지고 서류 작업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좀 놀랐어요. 그래서 “이장은 아무나 하나” 소제목이 울림이 있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그게 2025년에 이장이 되신 두 분이 이장으로 선출된 초기에 하신 말씀이예요. 주변에서 해봐라 해서 하긴 했는데 이것저것 다 챙기시려 하니까 일도 많고 너무 버거우니까, 괜히 한다고 했다고 한숨 쉬시면서 “이장 아무나 하나” 하셨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촬영 시작하고 한 6개월 정도 지나서 이 세 분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는 분들이고, 이제 좀 안면도 트면서 서로 힘든 것들 얘기하고 그야말로 연대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요. 그때 제가 “이장 선거에 다시 또 출마하겠냐?” 물어봤을 때, 세 분이 모두 “출마하겠다” 그러시는 거에요. 그 대답이 되게 놀라웠어요. 그 몇 개월 주민들 속에서 일하시면서, ‘내가 마을에서 이런 일을 좀 더 해보고 싶다’로 바뀌신 거죠. 그러면서 또 “이장은 아무나 하나” 하시는 거죠. 그래서 그걸 제목으로 뽑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6,7개월 사이에 이분들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다잡으시고 마을에서 내가 해야될 일들을 보기 시작하신 거잖아요. 다시 출마할 결심도 하시고. 이분들이 몇 개월 사이에 강해졌구나,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잘 걸어가시겠구나, 라는 생각에서 개인적으로 좀 기뻤어요. 주변에서 강연 요청도 와서 강연도 하시고요. 촬영 종료 시기에 한 마을 총회에 성평등 마을규약이 안건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받은 씨앗을 정말 크게 키우셨고, 그게 이렇게 널리 퍼지고 있네요.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지은</span>: 저는 이 프로그램이 그냥 제주도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 전체, 구석구석의 이야기라고 봐요. 저희 이 방송 프로그램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으면 합니다. 전국의 모든 애순이들의 이야기지 않습니까? 전국 곳곳, 다양한 채널에서 방송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해녀 고명효, “해녀야말로 태초의 에코페미니스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도에서 새롭게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작한 곳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제주여민회를 통해 추천받았는데, 그렇게 만나게 된 이가 이호어촌계 ‘모태 해녀’ 고명효(이하 명효) 씨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728286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호일동 고명효 해녀가 마을 해녀 탈의실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명효 씨는 제주 바다를 기록하기 위해 태왁에 카메라를 꼭 넣고 다니는 ‘모태 해녀’다. (사진: 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명효 씨를 만나러 간 날이 마침 ‘검은덕’ 마을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명효 씨는 마음이 바쁠 텐데도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검은덕’은 현무암 해변의 바위로, 물이 빠지면 바위가 드러나 분지가 생겨 바깥에서는 알아챌 수 없어 제주 4.3사건 때 마을 여성들과 아기들이 숨었던 곳이다. 마을 해변이 매립될 때, 주민들이 반대하여 지켜내어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청소하며 돌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이호마을 공동체가 활발한가 보네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명효</span>: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25년 동안 마을회관에 불이 꺼져있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아예 모이지 않았어요. 모일 공간도 별로 없고, 해안을 매립하면서 해녀 창고도 뺏기고, 재산도 없는 마을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마을만들기 사업을 하자고 해서 마을회관을 해녀 삼촌(제주에서 성별, 촌수와 관계없이 나이가 많은 이웃 어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들, 마을 분들이랑 5, 6시간 청소해서 겨우 시작했죠. “호이 호이 해녀가 숨비는 말등대 백개 마을”이 우리 마을 테마예요. 제가 낸 아이디어가 당첨됐죠.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면서 회관에 환하게 불이 켜졌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어머님이 해녀로 활동하고 하시니까 어촌계나 마을 분들이 많이 도와주시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명효</span>: 전혀 아니에요. 원래는 어촌계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하려고 했어요. 엄마는 자기 딸 때문에 어촌계나 마을에 뭔가 분란이 일어나는 건 싫다고, 안 된다고만 하세요. 해녀 삼촌들도 육지 사람들 데려오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고 하셔요. 어리다고, 출가외인이라고 하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해녀회도, 어촌계도 반대를 하니까, 마을회의로 가져가야겠다 해서 마을회장이 누군가 봤더니, 제가 가까이서 보면서 살았던 삼촌, 20살 위에 삼촌인 거예요. 그래서 찾아갔죠.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고 싶은데 어떠냐 했더니 그 삼촌은 되게 기특해 하셨어요. “나도 이런 거 하고 싶었는데 몰라서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2023년, 우리 마을 보물 찾기 사업(제주시에서 진행하는 마을에서 가꿔 나가야 할 유·무형의 지역 자원을 주민 스스로 발굴하고 보존하는 사업)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을 분들하고 진행하면서 마을에 활력이 돌고 하니까 신임을 얻었죠.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어요. 저는 직접 말 안 해요. 마을회장님이 얘기하시도록 하죠. 그러니까 엄마나 해녀분들도 싫어도 해야 해요. 마을회 안에 어촌계 안에 해녀회가 있거든요. 나름 마을의 불평등적인 구조를 역이용해서 다시 돌려놓는 작전이에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성평등 마을 사업은 어떻게 아셨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명효</span>: 제가 활동하는 곳이 ‘파란’이라고 해양시민과학센터인데, 여기 김연순 대표님이 성평등 마을 사업단에 계셔서 알게 되었어요. 해녀가 돼서 물질하면서 전복하고 소라가 갈수록 없어지는 걸 봐요. 진짜 황량해요. 제주 바다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파란에서 해양시민과학센터 산호탐사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명효 씨는 물질하는 일이 바다를 지키는 일이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명효</span>: 저뿐 아니에요. 해녀 삼촌들은 바다 속에서 생계를 꾸리면서도 바다를 지켜오셨어요. 바다와 공존했기 때문에 해녀가 지속 가능하다고 하거든요. 해녀야말로 진짜 태초의 에코 페미니스트예요. 그래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게 ‘제주 해녀문화’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해녀공동체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요. 우리는 바다를 ‘바다밭’이라고 해요. 그냥 다 잡지 않아요. 어린 건 잡지 않죠. 해녀공동체는 약자, 공동체에 대한 감수성도 발달해있어요. ‘할망바당’이라고, 나이드신 해녀분들을 위해서 ‘먼바다’ 소라 작은 걸 뿌려놔요. 연세 있으신 분들은 멀리 못 나가시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바다에 들어갈 때 꼭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요. 바닷속 해양 생태계 모니터링을 해야 하잖아요. 이게 바다의 몇 프로라도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고 하는 거예요. 한 군데라도 어촌계에서 이걸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103개 어촌계에서 다 하면 해양보호구역이 얼마나 늘어나겠어요? 그 시작을 우리 마을부터 할 거예요. 우리 마을이 해안보호구역 안에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우리 마을에서 ‘해녀가 되지 않는 해녀학교’를 하고 있거든요. 제주해녀문화연구원이랑 같이요. 제가 해녀학교 다니면서 보니까, 막연한 호기심이나 해녀자격증 땄다는 거 SNS에 자랑하고 싶어서 하시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해녀가 그냥 해녀가 되는 게 아니라, 해녀공동체 속의 해녀거든요.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나 인권감수성, 공동체성도 많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해녀가 되지 않는 해녀학교’를 2025년부터 하고 있는데 지역사학자, 해녀연구자 분들 다 모셨죠. 강사도 교육생도 너무 좋아하세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7284953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해녀 탈의실 마당에는 해녀 삼촌들의 잠수복이 마르고 있다. 명효 씨는 제주 바다와 공존해온 해녀를 ‘태초의 에코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92년 역사 마을제에 남자만 입장…3년만에 촬영 허락 받아</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 마을 사업이 바다까지 이르러, 어촌계도 성평등하게 바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하시는 일이 정말 많네요. 마을활동까지 하시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명효</span>: 우리 마을이 92년 동안 마을제를 해오고 있는데, 제가 촬영하고 싶다고 했는데 처음에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마을제에 남자들만 들어가야 하고, 일하는 여자들도 생리도 끝난 사람, 과부 이런 사람들만 마을제에 참석할 수 있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촬영 허락이 3년만에 받아들여졌어요. 마을 회장님이 봉행 위원장님 허락받아서요. 92년 금기를 깬 거죠. 재단에 카메라 설치하고 제사 지내는 거 다 촬영했죠. 그러면서 봉행 위원장님이 1933년도 마을제 기록이 담긴 동지 모아놓은 거를 꺼내서 보여주셨어요. 지역사회학 연구하시는 분들께 보여드렸더니 엄청 희귀한 기록이라고, 이렇게 모아두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삼촌들이 고령이시니 살아계실 때 이걸 정리해서 우리 마을 역사를 기록하자고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을 건강교실도 열고 하면서 마을 분들이 마음을 많이 여셨어요. 자주 모이게 되고, 오기는 힘들어도 오면 좋다 하시고. 일단 모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성평등 마을 사업도 제안 드렸더니 그냥 오케이 해서 하고 있어요. 성평등 연극도 하고, 강의도 하고, 프로그램들도 되게 좋아하세요. 삼촌들은 우리가 평등하지 못했다는 것도 모르셨다고 하세요. 처음에 제게 했던 말들, ‘출가외인이다’, ‘여자는 마을제 못간다’ 이런 거요.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 부녀회장님도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10년만에 회장이 되신 거거든요. 정말 마을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열심히 하시는 분이고 인정받고 계시는데도요. 성평등 워크숍 하면서 누가, “여자도 이장 해야지.” 했더니, 다른 분이 “에이, 그건 아니지” 하시더라고요. 남자든 여자든, 이주민이든 선주민이든, 열심히 할 사람이 이장을 해야할 텐데, 아직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차별 때문에 일할 사람을 못하게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요? 나 같으면 떠날 것 같아요. 우리 마을에 정말 필요한 시기에 성평등 사업 제안을 받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마을이 많이 도움을 받을 것 같아요. 조금씩 마을이 변화할 거라고 기대해요. 어촌계도 성평등하게 바뀌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92ed0;">호미</span>: 성평등 마을 사업이 바다까지 이르겠네요. 또, 육지와 바다, 인류와 비인류를 넘어 바다 속 물살이에게까지 잇는 활동 의미 있게 잘 들었습니다. <span style="color: #c92ed0;">[끝]</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2ed0;">[필자 소개] 호미.</span> 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여성농어업위원회 위원, 장애활동지원사, 동화집필 노동자이다. 서울에서 귀농했다가 도시로 역이주했지만 다시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들이 귀농하기 만만치 않지만, 그 여자들도 만만치 않다는 걸(지민주 노래 ⌜세상에 지지 말아요」를 따라썼다) 드러내려고 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7 22:21: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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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차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성차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73135518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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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다카이치 총리의 ‘일하고×5’ 발언 유감]]></title>
       <link>https://ildaro.com/1041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 수상의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 발언에 놀라고 분노한 사람이 많다. 과로사 대책은커녕 많은 여성의 비정규 노동과 직장 내 성희롱, 임신한 직원에 대한 괴롭힘, 가사와 육아의 과중 부담 문제는 그대로다. ‘불안정 노동자’이자 책 『‘일하지 못함’을 철저히 생각해봤다』의 저자 구리타 류코(栗田隆子) 씨에게 ‘일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기고를 받았다. [편집자 주]</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60809206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 10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다카이치 사나에 씨의 연설 중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일하고×5’)가 2025년 ‘신조어·유행어 대상’에 뽑혔다. (콜라주 제작-페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다카이치 사나에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10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다카이치 사나에 씨의 연설 중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이하 ‘일하고×5’)가 2025년 ‘신조어·유행어 대상’에 뽑히는 등 이상하고 한심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이미 일본은 최근 20년 가까이 ‘한심한’ 일들이 당당하게 사회 정중앙을 활보해왔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리란 사실을 꿰뚫어 보듯이, 한심한 상황들이 그대로 돌진해 나가버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카이치 총리의 이 발언이 그렇듯, 하청업자에게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서 ‘흑자였다’고 떠벌리는 오사카만국박람회가 그렇듯, 또 “저를 여러분의 어머니로 삼아주세요!!!”라는 말을 선거 가두연설에서 외치는 참정당 여성의원(관련 기사: 참의원 선거 약진한 극우정당, 여성 당원이 왜 많을까? <a href="https://ildaro.com/10319"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19</a>)이 그렇듯, 통일교 등 특정 종교에 유착한 자민당 정권이 그렇듯, 외국인 혐오 발언이 그렇듯, 故 아베 신조 전 수상의 ‘파트타임 월급 25만엔’(실제 파트타임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약 8만4천엔 정도였다) 발언이 그렇듯, “가난은 자기책임”이라는 말이 그렇듯, 뉴라이트의 역사개찬이 그렇듯….</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 시민들은 아무리 한심하고 비속한 일에 대해서도, 이상한 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유행어인가, 정치적 선동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궁금한 것은 ‘일하고×5’가 정말 유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카이치 발언이 2025년 유행어 대상을 받은 것은 언론이 공범인 ‘선동’이라는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나 역시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 1989년에는 ‘성희롱’이라는 말이 유행어 대상을 탔다. 직장 내 성희롱을 가볍게 생각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이번엔 더욱 직접적으로 정치의 힘을 느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유행어 대상 선정을 선동이라고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025년에 나의 저서 『‘일하지 못함’을 철저히 생각해봤다』를 비롯하여, ‘일하고×5’를 연호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책들이 줄지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명인의 저서를 사례로 몇 편 꼽아보겠다. 데시가와라 마이(勅使川原真衣)가 쓴 『‘일하다’를 다시 묻다-누구도 남겨두지 않는 조직개발』. 난치병을 앓고 있는 변호사 아오키 시호와 항상 몸의 부조화를 느끼면서도 확정적인 병명을 진단받지 못하고 있는 신문기자 다니다 토모미의 공저 『내일 아침, 두통이 없기를』. ‘절대 막차를 놓치지 않는 여자’의 저서로 허약한 몸의 고민을 적어 내려간 에세이집 『허약하게 살다』. 또한, 진학률 탑클래스 고등학교에서 ‘낙오자’로 지낸 경험을 서두에서 꺼내는 센류(풍자시) 작가 구레다 마나의 저 『죽었는데 수다를 떨고 있어!』 등등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글의 문체 차이는 있지만,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보통의’ 일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 연달아 출판되며 저마다 주목을 받았다. 일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살짝이나마 제기하는 미야케 카호의 『왜 일을 하면 책을 못 읽게 될까』도 꼽을 수 있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60835305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구리타 류코(栗田隆子) 저술가. 비상근직과 파견직 일을 하며 여성의 빈곤 문제와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저술한다. 저서로 『‘일하지 못함’을 철저히 생각해봤다』(이미지 우측 표지, 헤이본샤), 『꼭 맞지 않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속삭이는 페미니즘』 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보통을 질문하는’ 목소리가 모이고 있는 시기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 책을 펼치면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와 ‘(애초에) 일할 수 없다’, ‘병이라고 진단은 받지 않았지만 항상 부조화를 느낀다’, ‘일한다 해도 풀타임은 무리’ 등등 ‘보통을 질문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빙하기(1993~2004년, 일본 버블경제 붕괴 후 극심한 구인난으로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발생한 시기)라는 특정의 세대, 혹은 우울증 등의 특정 질환, 혹은 비정규 고용이라는 특정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방식과 일하는 방식을 쫓아갈 수 없다는 목소리가 모이고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의 빈곤 문제와 노동 문제는 항상 ‘문제’이지만, 지금까지 여성이 일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책이 출판되어 주목을 받았던 해는, 내가 태어나 철이 든 이후 거의 없었던 것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일하고×5’가 유행어 대상으로 뽑히는 사실에서 ‘백래시’(사회의 진보적 변화 흐름을 역행하는 반동)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제동을 걸지 않으면 저임금 장시간 ‘일하고×5’하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히려 여성의 노동에 대해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급노동(unpaid work)을 포함한 ‘여성 파업’, 그리고 ‘휴가 사용’이 어떻게 가능한지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슬란드 여성들의 가사노동 등을 포함한 모든 노동의 파업(관련 기사: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배경과 성과 <a href="https://ildaro.com/9989" target="_blank">https://ildaro.com/9989</a>)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슬란드가 멈추던 날〉(Women Who Stopped Iceland, 파멜라 호건 감독, 2024)이 일본에서도 개봉되었다. (맞다, 2025년은 이 영화가 상영되기도 한 해이다.) 우리 모두는 “휴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혹은 “그 정도까지 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일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노동자에 대한 보호를 깎아내려는 다카이치 사나에 씨 외 정치인들에게 강력하게 ‘NO’를 들이밀지 않으면 저임금, 저대우로 ‘일하고×5’를 실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출생 현상을 한탄하면서도 가사, 육아, 돌봄 노동에서의 젠더 불평등을 시정하거나, 대우를 개선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정치인들. 노동력이 줄어든다고 우려하면서도 가혹한 노동환경은 돌아보지 않으며, ‘정규직 비장애인 남성’이라는 ‘노동자모델’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는 기업들. 그러면서 고령자가 늘어나니 “고령자도 은퇴하지 말고 일을 시켜라”라고 말하는데, ‘지금까지 기대되던 노동자 기준의 절반 정도밖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노동시장에 자리매김시킬까 하는 이야기에는 무관심한 정재계 인사들이 산더미처럼 있는 것이 지금의 일본사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구나 건강하고 체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을 일하게 할 거라면 더더욱 노동기준법을 지켜야 한다. 유급휴가가 있으면 소진될 때까지 쓰게 해야 한다. 시급으로 일하기 때문에 쉴 수 없는 사람들과 프리랜서는 그만큼의 임금 인상과 적절한 대우를 요구하자. 19세기로 돌아간 듯 방약무인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오래됐지만 새로운 노동운동을 꿈꿀 때이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6 09:04: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구리타 류코)]]></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61001215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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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Feminism Requires Study!]]></title>
       <link>https://ildaro.com/1041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To begin a new feminist discourse in 2016, Ilda is running a series on “Living as a Young Woman in South Korea.” The series receives support from the Korea Foundation for Women’s “Funding for Gender-Equal Societ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o sit by that seonba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April 2007, in my first year of university. I had just stumbled through my first exams and was unreasonably excited for the (excuse for drinking and selling alcohol known as the) yearly campus festival. The swollen heads of my donggi [students in the same grade and department], who wanted to become a legendary class whose unprecedented sales at the festival would pay for a luxurious departmental outing, came up with an idea that can still be seen at the department’s festival tent today (at least through the 2015 festival): bunny girl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ryone put on bunny ears and pert bunny tails, and male students put on black ties over white dress shirts while female students wore aprons with white spots on a hot-pink background. Some talented donggi got help from some seonbae [older students in or graduates from the same department] and drew perfect rabbit heads (the Playboy logo) on sparkling paper, hanging them up to make an entrance to our t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selling alcohol and snacks is the main task at a tent, division of labor was necessary. Broadly, the divisions were cooking, serving, and attracting customers. The taste and price of the snacks are important, but in the end, the factor that decides a tent’s sales is enthusiastically courting customers. You have to grab someone on the street and pull them in. No one came out and said it, but we all knew that if you want to earn money, pretty girls have go outside and attract customers, and plain girls have to fry pajeon [Welsh-onion pancakes] in the kitch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mehow or another, the roles were divided. A few girls that no one could deny were pretty were put in charge of attracting customers. I, as someone in a gray area (which could be known by how no one pushed me to try attracting customers) thought it seemed like I should just carry and clear away food, so I was one of the servers. That kind of thing didn’t upset or surprise me, as I also thought those girls were pretty. And I wanted us to make a lot of mone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something that happened on the last day of the festival became my main motivation for founding the study group “Finding Feminism After High School” much later. On that day, graduated seonbae at the festival would come and there would be an after-party just for our department, so the student head of the department requested that we stay late and participate. We opened for business and when it became late, as had been announced, about four or five male seonbae, who gave off a strong vibe of being office workers, were escorted in. A few of my donggi, wearing serious expressions, quickly made a large space for them in the middle of the tent. And then someone nudged me and said, “Go sit by that seonba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is way, I and a few other girls were dispatched to sit dispersed between the men, which we did, blankly. The male seonbae who had been in charge of escorting them here came into this obviously awkward situation and livened things up. After the younger seonbae flatteringly introduced the older seonbae to us, the latter started to talk to us. While at first they had only waved shyly, after a few rounds they began to tell stories from their school days. I listened and nodded, but found myself mut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side I was sweating, wondering, “When this story ends what should I say? Is it enough if I just sit here listening and pour drinks?” and even, “That other girl is good at chatting and creating a pleasant atmosphere—should I be doing tha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idiculous university culture—in the name of feminism, we won’t put up with you!</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f there were a picture of that scene? New students wearing bunny ears and tails, and graduates wearing suits. I didn’t really talk about it for a long time, but it kept coming back to me. I didn’t know how to describe this situation, other than as strange and ridiculous. At that time, when a topic was brought up, [as an art student] I had no language other than the technical ability to make a picture about it within four hours, and no ability to resi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then, after graduation, when I by chance (an description which also makes me sad) became active in a women’s environmental group in the area in which I grew up in, I found feminism. It was not the light at the end of a long and dark tunnel, but like a stone being thrown at me by someone telling me not to go farther into the tunnel in the first place. Powerfully attracted to one of the stone-throwers, I started to carry around feminist books like they were Bibles, and thought again about that scene. I started to summon up and pass judgment on not just that scene in my first year, but also the myriad of other things that had happened to me in univers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soon as I entered school, there was the sexy dance we practiced for the talent show that was part of the welcoming events for new students, the dressing up male donggi as women and choosing one of them as “Miss X” (“X” here stands for our department’s name), the event celebrating [male] military reservists and the female seonbae who were in charge of the food for it, male seonbae making comments like “You’re so thin that there’s nothing to hold onto” like jokes... these situations flashed past, leaving me unsure even now at whom I should be ang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ore depressing thing was that the department that I graduated from was thought to be relatively okay, when it was actually terrible. It’s always like that, but no one explains why these kinds of events exist within university departments or why they continue. It gets covered up in the name of tradition, and it gets passed down to and carried on by hubae [students in the same department or school that entered later than oneself] without a chance to realize how weird it is. In a situation where even a relationship with one’s seonbae has become a type of job qualification, those who have just tossed their school uniforms and entered university or the working world are faced with two choices: keep quiet or be exclud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beloved (and mostly female) dongsaeng [younger siblings or, in this case, younger friends], whom I met when I was doing local activism and we took humanities classes together, and who are now graduating from high school, are soon going to enter this culture... this thought is very upsetting. I thought about the high school students trapped in the Sewol ferry who were uncomfortable when told to stay put, but could do nothing but that. I wasn’t going to stay pu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roselytizing feminism to young women barely out of high school</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567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53016247.jpg" alt="" width="567"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One of the reading summaries for one session of “Finding Feminism After High School.” We three presenters had to study hard but also learned a lot. ⓒChoi Jeong-hui (Paeng-paeng)</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Of course, discovering feminism is painful. Your everyday life becomes uncomfortable and dissatisfying. But you also experience a freedom and pleasure - whose source is at first unclear, sudden desires to talk about things, and a safe, supportive group that listens wholeheartedly to your thoughts and feelings. I wanted to give this experience to my dongsaeng. So I rounded up two strong-willed friends and suggested that we start a feminist study group. We would target dongsaeng who had just thrown away their school uniforms and were about to go to university or get job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of my two friends had majored in Women Studies, and the other one was active in a women’s group, so even though we weren’t teachers or experts, it seemed like we could pull it off. Before this study group, we had successfully worked together to run a three-class course called “Think Kindly of Same-Sex Love,” which dispelled misunderstandings and stereotypes about same-sex love. In order to enrich our learning and listen to everyone’s voices in turn, we had an activity called “writing and recitation,” and bought pretty notebooks to give each dongsaeng.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few of the dongsaeng that I knew had shown a lot of interest in feminism, saying they wanted to learn about it. We planned to hold the five sessions of “Finding Feminism After High School” group, including an orientation and a feminist movie-watching session, and to take the most hot-button incidents of the times and connect them with feminism. So the topics were Japanese “comfort women,” Megalian, and taljoseon [a derogatory term for the phenomenon of South Korean youth immigrating out of the country]. Each session focused on a topic like th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irst we three leaders would create a short reading summary—as a PowerPoint presentation or a handout—about the issue, and then each of us would toss out a question at the end. The participants considered the questions and jotted down their thoughts in their notebooks. And after exchanging notebooks with the person next to them, they would take turns reading the other person’s writings aloud. Then we would pass the notebooks around and write “real-time replies.” You could express your agreement, your different feelings or way of thinking, anything. Summary → questions → writing → reading aloud → replying. Three hours wasn’t enough! As an example, let me introduce an excerpt from materials for the second class, which was entitled “Is Megalian the Female Ilb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first saw Megalian last year around June and July, my honest response was to burst into laughter. Sure, it made some people uncomfortable, but for some reason I thought it was really funny. Endlessly and irrepressibly. The feeling that came over me after I finished laughing was a clear sense of pleasure. Why? Actually, when I think about it, it was because I had been scared, worried, and tired, even though I had pretended not to be. Because the woman who said one wrong thing, “loser man,” disappeared without a trace and is still being cursed, and (old, rich, powerful man) Park Jin Young was on fucking TV asking who your mother is, singing about how he likes girls with big butts and if your butt is small you’ll be ignored. (...) You say it, so why can’t I? I mean, there are times when I too want to express my desires in rough and coarse ways.”—Park Bo-hyeon (Doda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the presentation of the reading summary ended, we three leaders asked the following questions, making everyone think about their experiences and leading to an enriching discussion. “What is a way to fight enjoyably?”, “Have you ever seen a case where violence quelled violence? How was it?”, “Among Megalian, Womad [another Internet community], inclusive feminism, etc., where do I le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inding Feminism After High School was held in the living room of the house where I live, and our circle was sometimes larger, sometimes smaller, but usually around 10 people. Having to do a reading summary every week put enormous pressure on us, but I also looked forward to that time. Gathering in the living room to listen to presentations, writing while listening to the scratching noises coming from all around, reading someone’s writing aloud, someone reading my writing aloud, passing the notebooks around and writing replies... the personal histories, feelings, and resolutions contained in the cramped writing made us look at the dongsaeng in a new 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didn’t tell them about this, but after the dongsaeng left I would sit in a quiet corner and read and reread the comments on my writing. The words filled with surprise, agreement, or consolation about my writing made me feel warm and comforted. After a few classes, I could tell who the writer was by their handwriting, and as their expressions, voice, and even their personality showed through, each student became a special and precious part of my hear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553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530501951.jpg" alt="" width="553"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nswers of dongsaeng to questions from the leaders, and others’ replies ⓒChoi Jeong-hui (Paeng-paeng)</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is time it’s finding feminism during high schoo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study group ended. Some of the dongsaeng entered university. I was curious about how they were all doing, when I happened to do some work with one of them for a short time. It was around March of this year. Telling me that she wanted to complain, she spilled out all of the embarrassing things that had happened to her at the new students’ orient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really ridiculous thing is that on the first day, each group had to pick a leader and a mascot. But because the group leader had to drink a lot and the mascot had to flirt a lot, they had to be a man and a woman, respectively. And at night when we were sitting in our groups, drinking, we ran out of snacks. So we sent the mascot to headquarters to get some. But she didn’t come back for a long time. It turned out that the male sunbae at the headquarters had made her put on a talent show and given her snacks according to how well she performed. And if a male student went to get snacks, they would yell at hi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second time, I couldn’t stand to send the mascot alone so I went with her. When we got to the headquarters, they were like, “One snack is 3,000 won, but you can get one free for each talent demonstration.” Sitting there drinking, like, “Go on, do it.” It was really uncomfortable, and when I got the snack I wanted to throw it in their faces. Who do they think are? This was the first way I was treated in university. This kind of thing really needs to be gotten rid of. So next year I’m going to go along and protect the new female students, no matter w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niversity culture is the same, but listening to my dongsaeng talk made me unreasonable proud. She went on, with for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ally, everyone should study feminism. Because when I didn’t know about feminism, I didn’t know about discrimination, either. Because I was used to it. But after waking up to it, I see it everywhere. And a big change in myself that I’m feeling these days is a rebellion against others’ standards. When I was a student, I was caught up in grades and teachers’ orders. But now I try to live a little more for myself and the things that I think are right. And I feel more sure about the things I like and dislike. I feel more confident talking about those things. The more that happens, the more I remember that I have to keep my ears and my mind op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started with the wish to give to my dongsaeng, but instead January was packed with lessons for me. Perhaps because my heart missed the stimulation of these lessons and touching moments, I became the organizer for the fourth year of a local youth humanities lecture series. This time, I plan to sit down with people who are still in high school. It’s “Finding Feminism During High School.” We have a budget, so I’ve recruited two teachers, I’m going to bring a ton of snacks, and we’re going to have fun, while even learning some self-defens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the people who took the earlier class are participating in the planning and carrying out of this one. So much strength! We have to preach feminist thought to our sisters with twice as much power. When I imagine my dongsaeng’s dongsaeng, and then their dongsaeng, sitting in a circle with our knees touching, my heart feels full. Finally, I’d like to end this essay with a prayer for my sisters and to the goddess of feminis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oddess of feminism, who art in our cells.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Korea as it is in Northern Europe. Give us this day the language to resist, and forgive us our anger, as we understand those who discriminate against us within the system. And do not let us fall into the trap of trying to become alpha girls, but deliver us from patriarchy. For thine and our siste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span style="color: #bb30ce;">[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472" target="_blank">http://ildaro.com/7472</a> Published: May 19, 2016</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5 14:26: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Choi Jeong-hui)]]></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630'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53339691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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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성희롱에 잘 대처하지 못해 자책하는 당신에게]]></title>
       <link>https://ildaro.com/1040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중략)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리베카 솔닛의 저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김명남 옮김, 창비, 2017)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크게 위안받았다. 세상에, 저명한 여권운동가 리베카 솔닛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사는구나. 내가 살아오며 그렇게 많은 성폭력을 겪고도 매번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처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불쾌함, 분노 등의 감정을 나도 모르게 억압하는 습관. 그 순간에는 내 진짜 기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고 나중에서야 문득 깨닫는다. 억압된 감정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깬 새벽에도 수면 위로 올라와 가슴을 치게 만들었고,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 나를 괴롭히곤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심리상담을 받을 때 오랜 시간 이 문제를 다뤘다. 혼자 화를 내고 욕하는 연습도 해보았다. 평소 성폭력 대처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으며, 성폭력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머리로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래픽 북 『악어 프로젝트』와 별책부록에 실린 내용인데, ‘일반적인 상식을 동원해 말하기, 상대의 말을 기록하기, 뜬금없는 말 던지기, 단호하게 거절하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자리 뜨기’ 등 여러 방법을 조언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44051836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 그리고 대처법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낸 그래픽 북 『악어 프로젝트』와 별책부록(토마스 마티외 저, 맹슬기 역, 푸른지식, 2016)</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성희롱을 제지시킨 경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내가 전에 비해 크게 성장했다고 느낀 일이 있었다. 오랜 친분이 있는 직장 상사와 식사를 할 때였는데, 그가 자꾸만 이런 질문들을 늘어놓았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는 대체 왜 남자를 안 사귀는 거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랑 사는 동거인, 사실은 남자 아니야?”</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가정방문 한번 해야되는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점점 불쾌감이 쌓여갔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아니거든요.”, “여자들 사는 집에 팀장님이 왜 오세요.” 정도로 받아넘기며 참고 있었다. 앞으로도 봐야 하는 사이에서 분위기나 관계가 어색해질 것이 두려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이어진 어느 순간,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느낌이 훅 들어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꾸 다가오면 ‘뽀뽀’ 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식당은 무척 시끄러웠고,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그가 웃으며 뱉은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말 하지 마세요. 불편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당황한 듯 얼버무렸고 대화는 흘러갔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기 전 다시 말을 꺼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까 그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해요. 앞으로 그런 말을 하시면 저는 같이 일을 못할 것 같아요. 남자친구나 결혼 얘기도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으면 좋겠어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잠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할 말을 찾더니 “알았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날 나는 여러 차례 성희롱을 당한 것이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전처럼 뒤늦은 분노로 속을 끓이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불편하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말이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짚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받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사과를 받았다면 더 좋았겠으나, 내게 무척 중요한 일터였기에 일과 관계에 문제가 없도록 마무리하는 편을 택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대응은 퇴보한 걸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대응 능력은 직선형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직장 상사와의 일이 있고 몇 달 뒤의 일이다. 편의점에서 근무 중인 내게 70대 남자 단골손님이 이런 말을 던졌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이 어떻게 돼? 미스 김? 미스 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급습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선 넘는 언행으로 나를 불쾌하게 했던 손님이라, 이 손님이 오면 나는 재고를 두는 창고로 피해 있다가 굳은 표정과 말투로 결제만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경계심을 놓친 상태였다. 평소보다 부드러운 태도를 느꼈는지 그 틈을 타 그가 다시 사적인 질문을 해왔고, 나는 “왜요…? 모르셔도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그는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따라웃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가 나간 뒤에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법한 질문이었고, ‘미스 김, 미스 리‘라는 말은 나를 직원이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가 진작에 확실히 경고했다면 같은 사람에게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44113922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내가 근무하는 편의점 점포에 붙어있는 성희롱 관련 안내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처음에 그는 대뜸 내게 결혼했는지 물으며 밥을 사 주겠다고 했고, 두 번째는 가게에서 파는 상품을 선물하려 했다. 나는 적당한 말로 선을 그었지만, 다음에도 그는 어떤 맥락 없이 ‘요트를 태워주겠다’는 말을 던졌다. 다행히 그때 나는 모든 성의가 사라진 눈빛과 “전혀 관심이 없네요.”라는 일관된 반응으로 쉽게 그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이렇게 공격을 받고 보니 그때 너무 무르게 대응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내게 성을 물은 말이 성희롱이 맞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성폭력 전문 상담사에게 전화로 문의하니 상담사는 “전에 있었던 상황들까지 들으면 성희롱이 맞다”고 말했다. 내 고통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상담사의 위로를 듣자 서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도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무능력한 자신으로 자꾸 되돌아가는 기분에 울먹이며 물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왜 이렇게도 안 바뀌는 걸까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해도 괜찮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성폭력상담소는 ‘자신의 감정과 만나기 위해서 몸 안에 있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안내한다. 먼저 몸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독해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불편감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목이 죄어들고, 떨리고, 위가 꼬이고, 호흡이 가빠지고, 눈가가 젖어들고, 다리 사이에 땀이 차고,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충만해지고, 손을 안절부절못하는” 그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 경우를 돌아보면, 성희롱 가해자 손님의 성희롱 발언을 들을 때 가슴이 짓눌리고 목구멍이 답답해지며 뒷목과 어깨 근육이 긴장하는 느낌, 얼굴과 머리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있었다. 분명한 신체적 신호가 있었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내가 신체감각 신호를 따르지 못했던 것이 그 신호에 무뎌서만은 아니었다. 성폭력의 모습은 무척 다양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애매한 공격도 많다. 또한 자신에게 중요한 관계 속에서 겪는 성폭력의 경우,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바로 인지하고 대응 방법을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온라인에 연재하는 류이현 작가는 성폭력이 매번 새로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는 점을 지적하며, “성폭력을 하나의 단일한 범죄로 묶어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단순한 생각”이라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이렇게 썼다.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청소년 때 깡패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한테 삥을 뜯긴 적이 있다고 해서 오래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지 말라는 법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에게 삥을 뜯기고 오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봤다고 해서 길거리의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말라는 법 있나?”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첫 번째 피해가 피해자의 탓이 아니듯, 또 다른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절대 피해자의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내게 가장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은 이후 그 손님이 오지 않은 한 달이었다. 나는 지난 무례들을 야무지게 따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벼르고 있자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간의 일을 전부 따져 물을까, 짧고 정중하게 경고만 해야 할까? 사과를 요구할까? 일을 키워 사장님께 폐가 되진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민 끝에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짧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할 말을 적어 외우고 연습했다. 또 한 번 만족스럽지 않은 대응을 할 경우 오래 자책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몰라서 일할 때는 늘 긴장 상태였고, 잠자리에서도 편히 자기 어려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침내 그 손님이 다시 왔을 때, 비장한 각오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장님이 연락처 달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사적인 질문들을 해서 힘들다고 말씀드렸거든요.</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고 외쳤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아가씨가 친절하니까 고마워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때 나는 계산대에서 나와 그 손님 앞에 섰다. 직원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건 손님 생각이고, 상대방 생각을 하셔야죠. 그동안 계속 참았는데, 제가 손님하고 밥을 왜 먹으며, 요트를 왜 탑니까?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몇 차례 더 변명을 했지만, 뒤에 손님이 들어오자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하고 서둘러 점포를 빠져나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4420232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내게 여러 번 성희롱 발언을 했던 남성 손님에게 할 말을 준비해서 드디어 단호하게 말하고 사과를 받은 날. 이날의 성공을 기억하라며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가 그려준 그림.</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날 이후 그는 다시 오지 않았고, 나는 마침내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해피엔딩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일 내가 생각만큼 할 말을 잘하지 못했다면, 그 손님이 더 비협조적으로 반응했다면, 또는 아랑곳없이 다시 찾아와 성희롱을 반복했다면… 나는 그래도 나 자신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동안 지나친 마음고생을 했던 자신에게 이제는 수시로 말해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해도 괜찮아. 너는 수많은 성폭력 속을 뚫고 이번 생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위대한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울어진 사회구조 속에서 성폭력은 계속된다. 피해자 혼자의 힘으로 성폭력을 다 막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왜 상처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피해자들만 자신을 지키는 능력을 키우려 애를 쓰며 자책까지 해야 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738c7;">[필자 소개] 민바람</span>.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4 13:3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민바람)]]></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40245321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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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기지촌 성착취’, 주한미군의 책임도 묻는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0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나이 거의 팔십 가까이 들어서 처음으로 소송을 하니까 정말 용기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제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나왔습니다.” (‘주한 미군 성착취 규명’ 소송 원고인 발언 중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4년 6월 25일, 122명의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관련 기사: 미군 ‘위안부’ 국가 손배소송의 네 가지 쟁점 <a href="https://ildaro.com/7740" target="_blank">https://ildaro.com/7740</a>) 이 소송은 2017년 서울중앙지방법원(1심)과 2018년 서울고등법원(2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2022년 9월 대법원 확정 판결로 한국 정부의 위법 행위 책임이 최종 확인됐다. 이 역사적 판결을 통해 기지촌에서 국가 주도로 성매매가 조장되었고 강제 성병관리가 실시됐다는 점이 인정되었으며, 원고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인정받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이 소송의 피고는 한국 정부로 한정되어 있어서 미군 당국의 범죄 행위는 판단 범위에서 제외됐다. 이에 피해자들은 미군 ‘위안부’ 제도의 진상을 밝히고 미군 당국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2025년 9월 5일 117명의 원고가 참여한 두 번째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공정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주한미군민사특별법에는 미군이 직무수행 중 우리 국민에게 입힌 손해에 대해 한국이 국가배상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2차 소송의 피고는 여전히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원고 대리인단은 이 소송의 목적은 ‘미군 당국의 불법행위를 규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30707448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6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침묵을 깨고 책임을 묻다: 주한미군 성착취 규명 소송의 의의와 쟁점〉(주최: 주한미군성착취규명 공대위, 국회의원 손솔, 장철민, 임미애, 전진숙, 이주희 의원실) 토론회가 열렸다. 소송 원고이자 피해당사자의 발언도 송출되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미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침묵을 깨고 책임을 묻다: 주한미군 성착취 규명 소송의 의의와 쟁점〉 토론회에서, 고미라 새움터 대표는 이번 소송의 주요 목적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째는 미군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다. 미군 당국은 기지촌에서 벌어진 인신매매와 성착취 범죄를 알면서도, 이를 사실상 허용하고 조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는 미군 ‘위안부’의 피해를 알리는 것이다. 대부분 10대였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았다가 허위 알선과 기망으로 기지촌에 유입되었다. 납치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미군의 성적 학대, 폭행, 감금 등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었으나, 미군 당국은 가해자를 은닉하거나 사건을 무마하며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셋째는 미국 정부와 미군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고, 재발 방지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 상대 소송을 통해 미군 ‘위안부’ 제도의 위법성이 확인됐지만, 실질적으로 운영한 미국은 여전히 침묵 중이다. 범죄 인정과 기록 공개, 재발 방지 제도가 필요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넷째는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지원하는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성착취와 폭력, 페니실린 강제 투여 부작용 등으로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에게 즉각적이고 통합적인 지원이 요구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30801540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2년 9월 29일,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대법원 판결 선고 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대법원은 한국 정부의 위법 행위 책임을 확인하였고,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여 일반적인 5년의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역사적인 판결을 했다. (출처: 두레방)</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피해자 117명, 주한미군의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 제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내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소송 대리인단 단장을 맡은 하주희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주한미군의 책임을 묻기 위한 최초의 소송”이라는 점을 짚었다. 그리고 소송의 핵심 목적은 “미군 당국이 한국 정부와 손잡고 기지촌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조장한 시스템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정부의 책임은 이미 대법원 판결로 확정되었다. “미군의 사기 진작과 (한국의)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기지촌 특별구역을 설치하여 성매매를 조장하였고, 공무원들을 동원해 미군을 대하는 자세까지 교육하는 등 이른바 ‘애국교육’을 실시한 위법성이 인정”되었다. “또한, 법적근거 없이 여성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가두는 등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강제격리수용 조치를 시행한 점도 명백한 불법행위로 판단”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이를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여, “일반적인 5년의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역사적인 판결”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주희 변호사는 이번 2차 소송에서 규명하려는 주한미군의 주요 불법행위는 첫째 “성매매 적극 조장”과 “미군 ‘위안부’를 자국 군대 내 인종차별 문제 해결 수단으로 악용”한 점이라고 말했다. “미군은 부대 내외에서 성매매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 내 인종갈등이 심각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성매매의 동등한 기회 보장’을 강요하며 ‘흑인을 거부하는 건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무의식적으로 북한을 돕는 행위’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 변호사는 “당시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에겐 내부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괄적인 차별철폐교육’을 시행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조치였다”라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는 “미군 당국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인 강제 성병관리를 직접 주도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1953년 자국 내에서 인권침해 논란으로 여성 격리치료시설을 전면 폐쇄했음에도, 1970년대 한국에서는 자국 병사들 보호를 위해 한국 정부에 위안부 격리조치와 성병관리소 신설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주희 변호사는 그 성병관리소에서 “당시 권장량의 4~5배 달하는 페니실린을 여성들에게 과다 투여”해 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또 “성병 접촉자를 색출하기 위한 ‘토벌’과 ‘컨택’ 과정에는 미 헌병과 미군차량이 동원”되었고, “미군은 위안부들을 등록하게 한 뒤 사진과 번호표를 활용해 이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3073423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6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주한미군 성착취 규명 소송 의의와 쟁점’ 국회 토론회 현장 모습. (출처: 한국여성민우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미국을 직접 피고로 세우자는 주장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토론회에서는 미국을 직접 피고로 세우는 방안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제법상 다른 주권 국가를 국내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국가면제’ 원칙이 통용되지만, 반인도적 불법 행위로 피해를 당한 사람의 마지막 구제수단인 경우에는 예외를 두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민국 법원은 이미 일본군 ‘위안부’ 강요에 대한 소송에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일본국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확정 판결을 세 건이나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위안부’ 소송…국가면제 법리와 ‘여성’인권의 충돌 <a href="https://ildaro.com/8956" target="_blank">https://ildaro.com/8956</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SOFA(주한미군지위협정)과 주한미군민사법 규정 때문에 미국을 피고로 세울 수 없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SOFA 조항에 따르면 ‘미군이 직무수행 중 우리 국민에게 입힌 손해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 그러나 김창록 교수는 “미군 ‘위안부’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한 범죄 행위는 결코 정상적인 공무나 직무수행으로 볼 수 없으므로, 해당 협정과 법률이 이 사건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교수는 주한미군 성착취 범죄의 “실질적이고 1차적인 책임 주체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미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들이 헌법과 국제인권법에 따라 효과적인 사법적 구제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박탈한다는 점”을 지적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들은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고 있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한미군 성착취 규명 소송의 의의와 쟁점〉 토론회 말미에 하주희 변호사는 “현재까지 피고 측(한국 정부는 성병관리 관련부처인 질병관리청이 소송수행자 지정서를 제출한 상황)으로부터 아무 답변도 오지 않은 상태”라며, “미군과 한국 정부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한 피해당사자는 “과거에 아무리 억울하고 참혹한 일을 당했어도 감히 국가나 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각계 각층의 전문가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도와준 덕분에 1차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라며 “2차 소송에서도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3 10:0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평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평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30850635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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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유아퇴행’이라는 말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title>
       <link>https://ildaro.com/1040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아퇴행이라는 말은 원래 어린이가 스트레스나 불안, 환경 변화에 직면했을 때 발달 단계상 이전의 행동을 보이는 방어기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보호자의 관심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유아퇴행’이라는 표현이 여성 아이돌을 향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최근 이 말은 전혀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다. 어린이가 아니라, 여성 아이돌을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아이돌의 행동이 과하다고 느껴질 때, 혹은 시청자의 기준에서 ‘적당함’을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 ‘유아퇴행’이라는 표현은 쉽게 호출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 한 매체는 그룹 에스파의 멤버 윈터가 방송에서 담력체험 도중 귀신을 보고 오열한 장면을 두고 ‘유아퇴행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 내용에는 “귀엽다”는 반응과 함께 “유아퇴행 같아 보기 불편하다”는 누리꾼들의 평가가 병치되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이 장면이 왜 ‘놀랐다’거나 ‘무서워했다’가 아니라, 굳이 ‘퇴행’으로 명명되는가에 있다. 담력체험이라는 상황 자체가 공포를 전제로 설계된 예능 장치임에도, 그 공포에 대한 반응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성숙함의 기준으로 재단된다. 울음은 허용될 수 있지만, 그 울음이 ‘적당한 선’을 넘는 순간 곧바로 미성숙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 미성숙함은 ‘퇴행’이라는 이름으로 진단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1595587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여성 아이돌의 감정 표현이나 행동에 ‘유아퇴행’이라는 병리적 표현을 붙이는 것, 더 깊이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자료 이미지 | ChatGPT 생성)</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여성 아이돌은 늘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귀여워야 하지만 너무 유아적이어서는 안 되고, 감정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불편함을 줄 수 있으니 절제해야 한다. 보호받는 존재로 소비되기를 요구받으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성숙함을 증명해야 한다. 이 모순된 요구를 어기는 순간, 곧바로 ‘과하다’, ‘불편하다’, ‘이상하다’는 평가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다른 매체의 기사에서는 그룹 르세라핌의 홍은채를 두고 “‘은채아기’, 평생 아기일 줄 알았는데… 입술 깨물고 ‘으른미’ 발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문장은 한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아기’라는 호명을 얼마나 오래 유지해왔는지를 드러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홍은채는 자주 ‘유아퇴행’이라는 평가를 받는 여성 아이돌 중 한 명이다. 그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기’로 불리며 소비된다. 귀여움이 오래 유지되기를 요구받고,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순간에는 변화 자체가 하나의 사건처럼 다뤄진다. 성장조차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이전 이미지와의 대비’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때 성숙은 당연한 흐름이 아니라, 대중의 허락받아야 하는 선택처럼 취급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최근에는 ‘아기라이팅’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아기라이팅은 ‘아기’와 ‘가스라이팅’이 결합된 표현으로, 성인인 아이돌이나 연예인을 반복적으로 ‘아기’라고 호명하며 실제보다 더 미성숙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이 표현은 팬덤 문화의 애정 어린 은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대상에게 특정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그 이미지를 벗어나는 선택을 할 때 오히려 낯설거나 문제적인 변화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보호’의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1004357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아이돌 공연장 사진. 여성 아이돌의 감정 표현은 그저 하나의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과잉’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미성숙함’으로 환원된다. (필자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미성숙한’, ‘감정 과잉의’, ‘보호해야 할’, ‘문제적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표현들이 문제적인 이유는, ‘유아퇴행’이라는 말이 단순히 특정 행동을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퇴행은 설명의 언어라기보다 판단의 언어에 가깝다. 이 말은 언제나 정상적인 성장 경로를 전제하고, 그 경로에서 벗어난 상태를 곧바로 설명과 교정의 대상으로 만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감정과 행동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고, 반드시 원인과 진단을 요구받는다. 특히 그 대상이 여성일 때, 감정의 표현은 더 쉽게 ‘과잉’으로 해석되고, 그 과잉은 곧 미성숙의 증거로 환원된다. 여성의 감정은 그냥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관리 실패의 신호가 되곤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과정에서 ‘유아’라는 범주는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띤다. 유아적이라는 말은 곧 비이성적이고, 미완성된 상태를 뜻하며,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이해나 공감의 존재가 아니라,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위치 지워진다. ‘유아퇴행’이라는 표현은 여성에게는 ‘성인여성답지 못함’을, 어린이에게는 ‘존중받기 이전의 상태’라는 의미를 동시에 부여한다. 이 말이 여성혐오이면서 동시에 어린이혐오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할 질문을 지운다. ‘왜 그 장면이 불편했는지’, ‘왜 여성의 감정 표현이 유독 과하게 느껴졌는지’, ‘왜 귀여움은 늘 조건부로만 허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너무 빠르게 병리의 언어를 호출한다. 이해와 맥락을 살피려는 질문은 사라지고, 대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이 남는다. 그 선 바깥에 위치한 여성의 감정은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되고, 교정되어야 할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성과 어린이 모두에게 너무 쉽게 “아직”, “과도한”, “문제적인” 존재라는 이름을 붙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48a5;">[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1 14:53: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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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실패로부터, 실패를 향해]]></title>
       <link>https://ildaro.com/1040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숲이 기르던 생물들이 잠시나마 숲을 지켰다. 그리고 이 숲에서 사람들은 숲을 구하며 자신을 구하고 있었다.”(윤여일, 『광장이 되는 시간』, 포도밭, 2019, 228쪽)</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것은 실패한 이야기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몇 년 전 제주 구좌읍에 있는 비자림 자연휴양림에 방문했다. 안내판에는 ‘500년~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밀집하여 자생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자생이라는 것은 저절로 자라난다는 뜻이지만, ‘자생되고’ 있다는 건 그것이 가능하도록 인간의 손길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곳은 보호의 경계 안에 속한 나무들에만 일시적 안전을 보장하는 장소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0344432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비자림 자연휴양림에서 자생되고 있는 나무들 (사진-전솔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보호의 구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삼나무들이 벌목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비자림로는 2018년부터 확장공사가 시작되며 숲이 파괴된 장소이다.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결국 재개하였고, 그간 발파 및 공사로 인해 생긴 소음과 진동이 파괴한 주변 생태계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무언가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서울로 돌아와 거리와 광장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 난민 인정 요구 시위, 재개발에 반대하는 여러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다시 비자림에서 쓰러진 나무들을 떠올렸다. ‘누구나 자신이 머무를 곳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떠날 곳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외침은 곳곳에 있었다. 이동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 같지만 ‘정상성’, 민족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교차 속에서 누군가에겐 문을 열고 누군가에겐 벽을 세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간혹 뜻밖의 사건이 그 벽에 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2019년 비자림로 공사를 잠시 중단시켰던 건, 인근에서 발견된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인 팔색조의 존재였다. 팔색조는 인간의 관점에서 특별한 ‘종’이었다. 보존할 만한 가치를 평가받아야만 그제야 파괴가 멈추는 생태운동의 딜레마를 향해, 누군가는 ‘왜 인간 권리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비인간의 권리가 결정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자림로 공사 중단을 알리는 기사 아래에 댓글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외침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인간이 나무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인간으로서 비참하다.” 이 말은 개발 예정지에 쏟은 투자로 인해 손해를 본 투자자들의 입에서도 나왔지만, 인간 존재로서 아무런 보호받을 만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서 살던 곳에서 쫓겨나야 하는 강제 이주자들의 목소리로도 등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처럼 박탈의 현장들은 빼앗기는 존재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는 식으로 흘러가곤 한다. 벌목된 그루터기의 상처만이 아니라, 반목했던 인간의 마음속에도 상처를 남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에게 남은 건, 상처뿐인 실패한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함께 상처를 목격했던 현장의 기억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기록 또한 쓰러진 삼나무 곁에 남아있다. 그것은 실패한 이야기로부터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며, 우리에게 ‘실패’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03307856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난개발로 파괴되는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모여있는 컴필레이션 앨범 《섬의 노래》(서이다-예람-오재환-이형주 노래, 비스킷 사운드, 2019)</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섬의 노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9년에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섬의 노래》에는 난개발로 파괴되는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모여있다. 앨범에는 다음과 같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이형주), 〈새야 울어라〉(예람), 〈말하는 것들〉(오재환), 〈지나가는 숲〉(서이다), 〈사천삼백칠십구일과 하루 더〉(이형주), 〈나무〉(오재환 &amp; 예람), 〈숲으로〉(예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난개발에 반대하는 투쟁 현장들이 노래의 배경이기에 제목에 언급된 새, 나무, 땅, 뿌리, 숲은 추상적 은유가 아닌 특정한 시공간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 앨범은 2019년 문화예술행동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제주’에서 제2공항 건설 지역, 비자림로 확장 공사 지역, 기타 난개발 현장들을 방문하며 만들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앨범에 담긴 곡들은 사라져간 현장의 냄새와 소리,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며 특정 장면들을 노래 속에 남긴다. 훼손되는 숲에서 바라본 풍경에 관한 기억(지나가는 숲), 파괴되는 하나의 현장으로부터 또 다른 파괴의 현장으로 연결되는 마음(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 투쟁하고 갈등하며 깨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말하는 것들), 제주뿐만 아니라 모든 소외된 현장과 투쟁 현장에서 오래도록 버티는 사람들의 시간(나무) 등. 현장에 가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장면들이 노래를 통해 상상되고 시각화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섬의 노래》에 수록된 노래들을 듣다 보면,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 앞에서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말 없는 자연의 대변자, 목격자, 증인, 보호자가 되기 위해 그 숲에 갔지만, 사라지는 쪽에 함께 서는 일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박탈됨으로 연결된 세계의 진실을 목격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찾아가는 목소리들. 실패의 현장에서 목격한 풍경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되찾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고</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키만큼의 뿌리가 여기에 남아있다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야기를 들은 순간 난 시내로 달려나가</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누구의 이익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던</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의 뿌리를 찾으러</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누구의 욕심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던</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든 것의 뿌릴 찾으러</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이형주) 노랫말 중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섬의 노래》에서 이형주의 노래는 ‘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라고 반복해서 되뇐다. 그것은 땅 위에서 버티고 서있는 나무를 자르면 그 땅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땅 밑에 존재하는, 깊고 긴 뿌리의 시간을 상상해 보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땅 속에 남아있는 나무의 뿌리를 감각하는 일은 곧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수많은 박탈된 존재들을 이해하는 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시간성과 그곳을 점유하는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그 땅을 차지하더라도, 그 아래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뿌리를 잊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힘으로 살기보다는 사라지는 쪽에서 그것의 파괴된 흔적에 남아있는 기억과 함께 머무르겠다는 결심으로 나아간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103347647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무의 키만큼의 뿌리가 땅 속에 있다〉(이형주) 뮤직비디오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wKPnUwkaYI0" target="_blank">https://www.youtube.com/watch?v=wKPnUwkaYI0</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숲에서 노래를 부르며 만돌린을 연주하는 사람과 그 옆에서 기타를 치는 사람의 모습이 전부인 단순한 연출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란 하늘이 보이고 초록빛 풀밭이 보이고 무성한 나무와 흔들리는 나뭇잎, 그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들이 밟고 있는 땅 아래에 존재하는 뿌리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이 뮤직비디오에서 노래가 거의 끝나가는 후렴구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서 돌려보곤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누구의 이익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의 뿌리를 찾으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이 지점에서 갑자기 한꺼번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끼어들고 강한 바람 소리가 마이크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과 옷자락 그리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한순간 뒤흔들어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라진다. 너무나 인간 중심적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예술을 매개로 만나는 어떤 이상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이 노래 안에서 목격했다고 느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법사 프리렌이 말했던가.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정확하게 상상하는 힘에 달려있다고(만화 〈장송의 프리렌〉). 이 마법 같은 장면 안에 감춰진 넓고 깊은 관계망을 상상하는 힘이 아마도 우리를 실패로부터 실패를 향해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지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32bc2;">[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10 10:31: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음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음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103652756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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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페미니스트 각성은 자산경제를 넘어설 수 있을까?]]></title>
       <link>https://ildaro.com/1040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동산 임장 현장을 처음 찾아간 것은 인류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2021년 집값 폭등기 이후 ‘임장’이라는 말이 뉴스와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넘쳐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주식과 달리 물리적 실체가 있다. 관심 있는 부동산의 입지에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 그것이 임장이다. 발로 뛰는 투자 공부라 해도 좋다. 이 용어가 대중 담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부동산 투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이 말을 안다.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임장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계급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아파트와 ‘유능한 엄마’…</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다를 줄 알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한국의 도시주거 문제를 연구해왔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토건주의적 도시개발이 맞물리면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섰다. 어떤 동네,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는 곧 가족의 계급적 위치를 가시화하는 문제였고, 그 선택의 책임은 암묵적으로 여성에게 귀속되었다. ‘좋은’ 아파트는 유능한 엄마라는 증거였고, 여성의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입증하는 지표였으며, 남성 가장의 평범한 소득을 자산으로 불려주는 도구이기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산으로서의 아파트, 삶의 무대로서의 아파트, 계급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아파트가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구조 속에서, 여성들의 부동산 실천은 투기적 욕망의 발현인 동시에 빠듯한 조건 속에서 가족의 미래를 직조하는 살림의 논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번듯하고 안정적인 내 집을 갖고도 다 큰 자식에게 물려줄 얼마를 위해 끊임없이 갈아타기를 시도하며 더 많은 이익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이 실천의 도덕적 정당성과 구조적 모순을 동시에 드러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81841678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한국의 도시주거 문제를 연구해왔다. 책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표지 (최시현 지음, 창비, 2021)</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는 밀레니얼 세대는 다를 거라 보았다. 베이비부머 세대 여성들을 부동산으로 이끈 조건들, 예컨대 불안정한 경력 추구(때로는 진입 자체의 불가), 가족주의적 헌신, 자녀를 통한 계급 재생산의 압력 등이 이들의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에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페미니즘이 강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의 엄마나 부인으로 살기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삶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여성들, 가부장적 이성애 결혼을 유예하거나 거부하는 여성들, 심지어 4B(비혼, 비연애, 비출산, 비섹스)를 선언하는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물려줄 자식도, 어떻게든 지켜야 할 ‘정상가족’의 울타리도 크게 의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비싼 아파트에 삶을 걸어야 할 이유 또한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오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부동산 ‘임장’ 현장에서 만난 청년 여성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하며 성인이 된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실제로 어떤 선택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지난해 커뮤니티 기반 임장을 10여 차례 참여관찰하면서 그 답의 실마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매번 참여자의 절반 이상은 젊은 여성이었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 대부분 직장인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쪼개거나 주말의 반나절을 반납하며 임장에 나왔다. 임장 활동은 몇 시간 안에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므로 체력과 부동산에 대한 높은 호기심, 그리고 관찰력이 요구된다. 임장이 시작되면 핸드폰에 보고 들은 내용을 빠르게 메모하고, 사진을 찍어가며 관심 지역을 조사한다. 참여자들이 궁극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연 이 지역이, 이 동네가, 이 아파트가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갖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정보와 계산이 필요하다. 어떤 직장을 가진 이들이 이 동네에 거주하는가, 상권과 학원가는 안정적으로 형성되어 있는가,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오가는 이들의 연령대는 어떠한가, 이 지역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향후 5년, 10년 뒤에 무엇이 예측 가능한가, 심지어 주차장의 공간 여유, 분리수거장의 관리 상태, 생활체육 시설이나 소음 수준까지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숫자로 환산되는 가격 정보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 현장에서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기에,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 그리고 일종의 감각적 해석 능력이 요구된다. 참여자들은 서로의 관찰 내용을 교환하며 소위 ‘좋은 동네’의 징후를 학습하고, 때로는 기존의 기대를 수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임장은 단순한 매물 탐색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둘러싼 집단적 해석의 장이자 서로의 판단을 조율하는 일종의 현장 세미나처럼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몇 차례의 참여관찰을 거치며 나는 이 활동이 투자 기회를 찾는 실용적 행위를 넘어서, 불확실한 자산경제 속에서 청년 세대가 간신히 낙관의 감각과 언어를 구성하는 과정임을 이해하게 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81909295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임장을 하면서 본 아파트 모습 (사진 제공: 최시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자기만의 방’과 여성의 경제적 자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동산은 다른 투자와 달리 꽤 높은 수준의 종잣돈이 필요하다. 특히 수도권 주택가격은 이미 평범한 이들의 임금 수준과는 무관한 시세를 형성한 지 오래다. 내 이름으로 된 소규모 아파트 한 채를 갖기 위해 상당한 종잣돈은 물론, 주택담보대출이 가능한 안정적 소득과 직위, 장기적으로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는 보장된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 접근성은 동등하게 주어질 수 없다. 임장 현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을 리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미 많은 통계가 증명하듯 한국의 노동시장이 매우 깊이 성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성별 임금 현황을 공시한 2,980개 기업 분석 결과, 남성 1인당 평균 임금은 9,780만 원, 여성 1인당 평균 임금은 6,773만 원으로 성별 임금격차는 전년 대비 4.4% 증가한 30.7%에 달했다. 제조업, 정보통신업, 금융 및 보험업 등 종사자가 많은 산업에서 격차는 더 확대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은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높으며, 동일한 직종과 직급에서도 임금 격차는 완강하게 유지된다. 이 이중구조의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은 종종 핵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배치된다. 안정적인 정규직에서의 꾸준한 소득 상승, 삶의 질 유지, 주택담보대출 심사가 요구하는 신뢰 가능한 소득 이력 등 모든 것이 많은 여성에게 처음부터 기울어진 조건으로 주어진다. 어렵게 진입한 전문직 내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22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남성 의사의 연평균 보수는 2억4,825만 원인데 비해 여성 의사는 1억7,287만 원으로, 남성 대비 약 69.6%에 그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지점에서 오랫동안 우리를 붙들어온 질문이 소환된다. 100여 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에게 글을 쓸 자유가 있으려면 일 년에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울프는 자신이 원하는 지적 자유가 물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받아들이면서, 여성이 자유롭게 자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울프의 말은 지금도 진실이다. 오늘의 도시공간에서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갖는다는 것은 울프가 의미한 그 ‘방’의 현대적 번역쯤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고 내 집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안전이다. 내 집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원하지 않는 많은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때로는 해방시키는 일차적 물적 기반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제적 종속은 삶의 종속으로 이어지기에, 내가 원하는 삶을 내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여성에게 경제적 자립은 곧 생존의 언어다. 여기서 경제적 자립이란 언제고 빼서 쓸 수 있는 통장 잔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선택의 구조와 동일시된다. 재테크 담론이 자주 호출하는 ‘경제적 자유’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성차별적인 직장과 갑질하는 상사를 감내하지 않아도, 으스대는 집주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원치 않는 관계를 무력하게 유지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경제적 지원 아래 자신의 욕망을 접어두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것이 ‘경제적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인식은 페미니스트 자아에 매우 깊이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따라서 주거 불안을 해결하고 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는 부동산 투자에의 몰입은, 젠더불평등한 구조의 고통을 마주하고 어렵게 이뤄낸 페미니스트 각성의 결과일 수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능력주의적 평등이 지워버리는 ‘구조적 불평등’</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복잡한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갖고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숙모가 남긴 상속금에서 비롯되었다. 경제적 자립을 통한 해방을 역설한 여성이 정작 노동만으로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었기에, 상속받은 돈을 발판 삼아 그 글을 썼다는 아이러니는 개인사의 모순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울프 스스로 인정했듯 물질적 기반은 자기 사유를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이미 주어진 출발선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당겨지지 않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합리한 이중노동시장에서 운 좋게 안착한 이들, 즉 안정적 정규직이나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이들 혹은 부모의 증여나 가족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이 가능한 이들은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경제적 자유’를 선언하기가 조금 더 수월할 수 있다. 꾸준히 쌓인 소득 이력과 대출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신용 조건이 부동산 시장 진입의 전제라면, 이중노동시장의 주변부에 배치되어 온 여성들에게 그 전제는 처음부터 동등한 무게로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경제적 자유’란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조금씩 좁혀갈 수 있는 목표이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출발선 자체가 다른 곳에 그어진 불평등한 게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낸시 프레이저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한 바 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싸워 온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비판이 어느 순간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방향과 위험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제사회학회 저널 Global Dialogue와의 인터뷰, ‘<a href="https://globaldialogue.isa-sociology.org/articles/feminism-in-neoliberal-times-an-interview-with-nancy-fraser" target="_blank">신자유주의 시대의 페미니즘</a>’, 2018)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시장에서 경쟁하고 능력만큼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추구해 온 중요한 목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능력주의적 평등으로 환원되는 순간, 구조적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각성의 지연으로 손쉽게 치환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파트를 매수하고 월세까지 받는 다주택자로 거듭나면서 투기적 자본주의 안에서 간신히 자기 통로를 확보한 여성은 가부장 세계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통로는 누군가의 주거비 위에 놓여있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월세를 전전하며 삶의 불안정을 떠안는다.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천장을 깨고 구조를 빠져나가는 소수의 여성이 있는 동안, 대다수 여성은 지하실에서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것이 부동산 장에서 더욱 첨예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대도시의 ‘좋은 주소’가 입혀진 주택은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지극히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화폐처럼 필요에 따라 찍어낼 수 없는 집은, 인간의 거처인 동시에 자산경제의 핵심 상품이라는 이중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자산시장에서의 성공이 페미니스트 각성의 결실처럼 읽힐 때, 우리는 그 가능성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차등 배분되어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81958523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임장을 참여했을 때 찍은 인증 사진 (제공: 최시현)</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내가 얻은 ‘좋은 주소’가 누군가의 주거비 상승을 기반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6살 대기업 직원인 지나(가명)의 이야기는 이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 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소개한 지나는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스쿠버다이빙 같은 취미도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2021년 집값 폭등기,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겼던 동료들이 주택 소유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생애 전망을 갖게 되는 것을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에서 일한 만큼 월급을 받듯,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 공부에 쏟으면 수익을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3년 사이에 갭투자로 두 채의 아파트를 마련한 것이다. 결혼도 출산도 양육도 원하지 않는 지나에게 이 자산은 미래를 낙관하게 하는 토대이자, 안정적인 직장에서의 커리어보다 더 큰 무게를 갖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주말이면 임장을 다니며 다음 투자를 기획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싱글로서 미래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불안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그녀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나가 부동산 투자를 통해 쟁취한 것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도권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노동시장과 불충분한 사회복지 체제 속에서 돈이 스스로 일하게 하는 전략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는다. 투자자로 자신을 단련하며 남들이 탐내는 부동산을 손에 넣는 일은, 어쩌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인정받을 만한 성취일지 모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 게임에서 누군가가 쟁취한 주도권이 그만큼의 실질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주거비가 상승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상승의 압력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닿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떠올리면, 그녀의 해방이 구조적으로 더 취약한 다른 누군가의 부정의한 조건 위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렵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이기에 더 절박하게 주거 안정을 확보하고 안전한 자산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정당하다. 가부장적 구조와 여성에게 불리한 노동시장이 누적해 온 구조적 불이익을 감안할 때, 여성이 자산시장에서 주도적 행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오랜 배제에 대한 전략적 응답인 동시에,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욕망을 단순히 투기적 탐욕으로 환원하거나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구조가 개인에게 부과한 조건을 지워버리는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욕망의 정당성이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과 만들어내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나의 주거안정과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면서도, 투기적 자산 축적의 구조와 맺는 공모적 관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최소화하는 길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것은 개인 선택의 문제이기 이전에, ‘페미니즘이 자산경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공동의 질문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은 자산경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은 단일한 해방의 서사를 약속하지 않는다. 누구의 해방이 어떤 조건 위에서만 가능한지, 그 자유가 또 다른 배제나 불평등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묻고 되물으며 갱신하는 정치적 실천에 가깝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한국의 자산경제 앞에 선 젊은 여성들의 현실 역시 이 긴장의 지형 위에 놓여있다. 자산을 통해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영리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부동산 시장의 우상향에 대한 기대와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의 주거불안을 전제로 한 이익구조에 편입될 때, 우리는 자유와 안전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계급적 경계를 다시 긋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시에 우리는 ‘경제적 자유’라는 언어가 주는 해방감과 그 협소함을 함께 질문해야 한다. 지금 통용되는 ‘경제적 자유’란 대체로 자산소득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원치 않는 관계나 조건에서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몹시 강렬하고 매혹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그 매혹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충분히 묻지 않는다면, 자유는 또 다른 규범이 되고 만다. 자산을 통해 불안을 관리하고 미래를 안정화하는 능력은 분명 중요한 힘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유일한 안전장치로 상상될 때,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서로의 의존 관계를 지워버린 채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제적 자유’를 어떻게 사회적 관계 속에 다시 위치시킬 수 있을까. 소유와 축적의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다른 형태의 안전망을 상상하는 것, 개인의 탈출 가능성보다 함께 머물 수 있는 조건을 공정하게 확장하는 것,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이 할 수 있는 일은 욕망의 방향을 성찰적으로 한 번 흔들어보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자유가 누군가는 그 가능성 바깥에 놓인 채로 성립하는 것인지, 그 불편한 질문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자기만의 방이 누군가의 불안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 이것이 ‘페미니스트 각성은 자산경제를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놓지 않으려는 가능성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62fcf;">[필자 소개] 최시현</span>.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며 연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한다. 젠더와 계급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족과 도시공간을 연구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8 16:1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최시현)]]></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082230739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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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The Real Crisis: The Unknown Plight of “Young Women Wishing to Evaporate”]]></title>
       <link>https://ildaro.com/1040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rising suicide rates among women in their 20s is no longer a new revelation.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s White Paper on Suicide Prevention reports a year-over-year surge of 25.5% in 2019, followed by a 16.5% increase in 2020. This trend stands in stark contrast to other age groups, which have either seen decreases or only slight increases in their suicide rat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response to this trend, Slap, a gender-focused YouTube channel run by The Hankyoreh, released a video in 2020 titled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qyXWtE7Osrg" target="_blank">A Quiet Massacre Has Begun Again</a>”, spotlighting the escalating suicide rates among young women. Upon viewing the video at that time, researcher Lee Sojin thought, “It’s about time this issue comes to light. Finally, it’s getting the attention it deserves.” Three years later, in December 2023, Ms. Lee published a book entitled Women Wishing to Evaporate, with May Books as the publisher. The book’s subtitle is A Study on Young Women’s Suicidal Thought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7481851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Researcher Lee Sojin, the author of Women Wishing to Evaporate: A Study on Young Women’s Suicidal Thoughts, published by May Books. (Provided by Lee Soji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n the prologue, Lee Sojin observes, “In Korean society at this time, there are very few women my age who have not considered suicide.” She includes herself among those who have. Drawing from her personal experience, she connected with other young women, listening intently to 21 individuals battling suicidal thoughts. After gathering their stories, she carefully organized and analyzed the data, ultimately using 19 of these cases in her stud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y do young women, often described as being in the prime of their lives, “wish to evaporate”? What drives them to such a crisis? What possible solutions exist? This book adopts a multifaceted approach to illuminate the issues that overwhelm young women, placing their narratives at the forefront. As one delves into its pages, it becomes increasingly apparent that Korea’s low birth rate is merely one facet of a broader societal problem. There’s a pressing need for greater attention to the real stories of young women experiencing suicidal thoughts. I interviewed the person who is bringing these stories to light: Lee Soj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How did you begin this study?</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searching for a topic for my thesis in graduate school when I stumbled upon a video by Slap titled “A Quiet Massacre Has Begun Again.” Watching it, I didn’t find it strange; instead, I felt like it was about time this issue came to light. What puzzled me was why it hadn’t received more attention sooner. But I hadn’t planned to research this topic because, to me, the reasons behind it seemed obvious. However, that clarity seemed to be unique to me. I remember discussing it with some older female scholars, expecting them to understand why an increase in suicide among young women was predictable, but they didn’t see it that way. This made me realize that perhaps my perspective was more unique than I thought. Encouragement from those around me to explore this issue further led me to start my researc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The book is divided into three parts, with the first titled “How Does Family Tie Down Young Women?” Starting with family issues seems significant. After all, young women in their 20s are adults and should be seen as independent entities. Why do family issues play such a central role in your b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believe that, compared to other countries, familism in Korea is more intense. It goes beyond simply putting family first. It’s about the belief that invading someone’s privacy is tolerable if it's for the family’s sake, and that one must do anything for the family. This prompted me to delve into the family backgrounds of my subjects. I was curious about the impact their families had on them. The reason I had the book start with family issues is that the participants talked so much about their families when discussing their experiences. When asked about the first time they considered suicide, most said it was during their youth. Given this, it’s clear that family issues are too significant to igno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quite simple, really. If you assume young women consider suicide solely because they struggle to secure stable employment, this reason could apply to most young women—but most women don’t contemplate suicide, right? This indicates there must be additional underlying reasons. For young women, while they do receive support from their families, these same families can also be a significant source of stress. This was true in my case as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As someone born in the 1980s, I was quite surprised to learn that individuals born in the 1990s are still facing sexism within their families. I mean, some parents of the 1990s belong to Generation X… right? Yet, it seems these parents are pretty similar to their own parents. This revelation was particularly shocking to m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xism, which was once overt, has become more subtle today. Previous generations of parents openly preferred their sons, allocating resources to them and expecting daughters to support their brothers. Nowadays, there’s a growing awareness that such biases shouldn’t be taken for granted. However, these practices persist, which, in a way, makes the situation worse. In the past, when daughters questioned why their brothers were treated better, parents would justify their actions by openly stating their preference for sons. Now, parents deny any favoritism, insisting they love their daughters equally. Yet, they still expect daughters to make the same sacrifices as in the pa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dditionally, unlike previous generations who lacked the vocabulary to articulate their experiences with sexism, we now have the language to do so. What used to be dismissed as merely uncomfortable, without understanding why, can now be clearly identified and expressed. As a result, the same acts of inequality and injustice become even more distressing for young wome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74854516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page from the second chapter, titled “Caregiving Crisis: How Families Exploit Daughters’ Time,” of the book Women Wishing to Evaporat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The book addresses the caregiving crisis in addition to family issues. Although stories of teenagers and young adults taking on caregiving roles are starting to surface, the topic isn’t frequently explored within young adult discussions. Many young adults think that if they decide not to get married, caregiving won’t be a concern for them. Given this context, choosing to highlight caregiving issues represents a significant decision. Was this a deliberate focus from the beginn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ctually, I wasn’t initially aware of the caregiving aspect. It came to my attention, though, when two of my interviewees shared their experiences of caring for their grandparents. Other participants also spoke about the stress of being expected to take on the responsibility of caring for their aging parents. This theme of caregiving emerged as a significant issue through listening to their sto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mong those interviewed, especially from lower economic backgrounds, there was a significant worry about the duty of caring for their parents, and for some, the daunting prospect of doing it alone. This worry was much greater if their parents didn’t own their home. In Korea, it’s common for parents not to share their financial details with their children, often offering vague assurances like, “Live your life; we’ll get by.” Yet, without the security of home ownership or a reliable income, young women’s fears about the responsibility of looking after their parents grow considerab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The second part of the book focuses on labor and employment, which I see as the most critical issues for young women. What’s your perspective on the current situation regarding labor and employment for young women?</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 used to say all jobs were equally important even while there were certain discrimination and stigma against some jobs. But nowadays, mass media and social media show us only some kinds of work. For example, they emphasize that you’ve got to have a job that’s all professional, something that lets you climb the ladder and helps you grow personally—so that’s what people dream of. But not all types of work are like that, right?  What I’ve been reminded of yet again during the interviews is that there’s a serious lack of promising, “career” jobs for wom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roles where women make up the majority of workers, career progression often hits a roadblock due to age—not because of marriage, pregnancy, or childbirth, but simply age. Take flight attendants, for example. While foreign airlines may hire women regardless of looks or body type, in Korea, you’ll find that there’s a specific age range that’s preferred. I once asked a flight attendant if they typically transition to office roles at a certain age. She said most of them quit. This is because office positions are scarce, giving them no choice but to leave the field al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recently spoke with a female web designer who has a decade of experience. She mentioned preferring to downplay her years in the industry because companies often view long-term workers as being out of touch with current design trends. I think roles like these exploit the youthfulness of women. Women find it challenging to advance their careers, and even when they do make significant strides, their achievements are not fully recogniz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Did any of your interviewees express a lack of fear or even optimism about their work and employment prospects?</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Yes, there was one. She held a promising and secure position as a web developer and was genuinely proud of her job because her achievements were well recognized. However, securing such a position often comes down to chance. Even with a similar educational background and job preparation, the way you enter the job market can dictate whether you find yourself in stable employment or moving from one insecure job to ano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cently, I interviewed someone who went to a private academy hoping to learn web development. But the academy nudged her towards a course in web publishing instead. It’s known that, generally, publishers don’t have as good working conditions as developers. So why the switch? They said that web publishing was a better fit for women. When talking about workplace sexism, we often say, “The glass ceiling is the problem. It’s the pinnacle of gender discrimination,” but my interviews and research have shown me that a more pervasive form of discrimination is the funneling of women into specific sectors. The concept of the glass ceiling mainly pertains to large companies and doesn’t quite capture the challenges women face in small and medium-sized businesse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7492443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cover of Women Wising to Evaporate by Lee Sojin, published by May Books ©Ild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Reading the book brought back memories of how, in my generation, we would send out résumés dozens of times before finally landing a job. It got me thinking, “Has finding a job become even more challenging tod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ngs have definitely changed. Back when we thirtysomethings were in our 20s, we were often warned about the long and tough road to employment. Yet, many of us in my generation took it easy during our freshman and sophomore years in university. It wasn’t until our junior or senior years that we began to seriously work on building our qualifications. What surprised me during the interviews, though, was hearing that some students’ parents were so involved that they even made their first-year class schedules. Those who began preparing [for the workforce] right from their freshman year often had parents from the middle class or above. These parents were financially secure and didn’t need to worry about making ends meet. Moreover, these parents usually held management positions in desirable companies and understood exactly what those companies looked for in candidates. Even if they didn't, they had the connections to ensure their children could make well-informed preparations, essentially leveraging their social capital for networking. This head start makes their preparation for employment much smoother. In contrast, those without such advantages often have to work to pay their tuition fees and only start their career preparations in their junior year, creating a gap that now seems insurmounta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When you talk about “labor insecurity” in the book, you use the term “labor without a future,” which sounds quite alarming. Can you explain why you see this issue as so serious?</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young women wonder, “What kind of job should I pursue?” they find themselves limited to a small range of options. Moreover, in these positions, the prospect of working until retirement age seems unlikely. I spoke with 21 interviewees, all of whom are employed in similar fields. Considering the vast number of career opportunities available, the fact that these 21 individuals hold jobs in such closely related areas was particularly striking to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they all had in common was the observation that individuals who don’t work as hard, who take their pay and pursue their hobbies and think, ‘I’ll just play a little office politics to secure my position,’ tend to last longer in companies compared to those who work diligently. Interestingly, it seems that the hard workers are assigned more challenging tasks, while the less diligent employees get the easier tasks. In essence, it’s a system that burns out the hard workers, ultimately pushing them to leav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In the third chapter, you delve into the anxieties faced by young women, with a section analyzing the decision not to get married and its impact on their labor. You note that, unlike previous generations, women today don’t see marriage as a necessary part of their life’s progression. In the past, marriage could serve as a strategy for women to sidestep labor risks, but now, with many rejecting this path, these labor risks extend throughout their lives. Could you elaborate on this observation?</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concept of “labor risks” here isn’t about objective threats. Imagine two people in identical circumstances: one might find these employment-related risks daunting due to anxiety about work, while the other, possibly supported by family wealth, might not perceive these risks as threatening at all. Similarly, it’s not that marriage completely eliminates work-related anxieties; rather, it shifts a woman’s focus in life to other matters. Through marriage, pregnancy, childbirth, and child-rearing, her attention is drawn away from career anxieties towards family responsibilities, potentially easing her concerns about work. However, since many young women today are opting out of marriage, I think they will inevitably continue to feel anxious about making ends meet and finding suitable employ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is not to say it’s problematic for women to choose not to marry. My point is that their decision is often driven by anxiety. The declining birthrates and the rise in suicidal thoughts among young women are, in fact, two manifestations of the same underlying issue: the quality of the world we inhabit. If someone perceives the world as a place where they don’t wish to live, why would they choose to marry or have children? Our focus should be on understanding why young women are opting out of marriage and childbirth, and the circumstances they find themselves i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7500830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Charts showing suicide rates among different age groups in 2018-2020, from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s White Paper on Suicide Prevention for the years 2021 and 2022. The yellow-highlighted sections pertain to women in their twenties; the first two columns in the section state the number of suicides in each given year per 100,000 people, the third column states the change in that number between the two years, and the fourth expresses that change as a percentage. ©Ild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It’s disheartening to see young women so focused on their own abilities and efforts, blaming themselves for every fail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my research, I deeply felt this. In Korea, societal success is highly valued, and such success is primarily measured through one's career. For example, if I were to tell my parents I'm considering leaving my PhD program to start a lunch box shop, they'd be furious (laughs). The truth is, if we view work simply as a means to make a living, there’s a wide range of things we could pursue. However, certain jobs are looked down upon because choosing them means our families, peers, and society might not view us as successfu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You’re critical of neoliberal feminism, which promotes the idea of “Be successful.” It makes me wonder why messages like this have been so well-received among young women, while so-called “ggwon feminism [a derogatory term for a type feminism that is seen as overly concerned with other social justice movements],” which calls for solidarity with other marginalized groups, isn’t viewed in the same way?</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believe that young women who support neoliberal feminism come from the middle class. Moreover, there’s currently a societal expectation to hide any financial hardships and, instead, display signs of affluence. This trend could very well have an impact on their viewpoints as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ve also sensed a kind of fatigue among young women towards feminism. They understand and agree with its ideals, yet they question its real impact on their lives. They’re also tired of things like ‘mirroring’ [creating gender-swapped parodies of misogynistic tex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urthermore, I believe that civic organizations have not successfully acquired the language of the internet, and I feel partly responsible for that. On the internet, only fast and sensational content survives, but the language civic groups use is quite different from that. Our movement strategies should probably be rethought as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m convinced that feminism and capitalism are incompatible. The reason is, capitalism aligns closely with patriarchy, creating a system that profits from this partnership. As long as capitalism prevails, feminism cannot fully realize its objectives. Under capitalism, it’s ultimately the wealthy women who experience freedom, while those who aren’t wealthy continue to be exploited within this system. That’s why I see it as crucial for feminist movements to persist in their critique of this dynamic.</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In your author bio, it states that you are focused on “researching gendered labor and the accumulation of financial assets among the current young generation.” I’m intrigued to hear more about what your upcoming research entails.</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m interested in comparing jobs dominated by men with those by women. To do this, I’m interviewing three distinct groups: male web developers, female web developers, and female web designers. Traditionally, web development was mostly male-dominated. However, the labor shortage during the pandemic led the industry to recruit more women developers. As a result, web developers in their 40s are mostly men, but among those in their 20s, the gender distribution is now roughly fifty-fifty. Given this context, my research will focus on understand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se groups’ roles, investigating any existing pay disparities, analyzing the financial products they prefer for asset accumulation, and identifying any gender-specific trends in these area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I’m really looking forward to seeing the results. I also hope the insights from “Young Women Wishing to Evaporate” gain widespread attention. Who do you hope will read it the most?</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Young women! It’s important to me that they know the tough times they’re going through aren’t their fault. Blaming yourself just makes life feel even harder. I hope this book shows them they’re not alone—lots of people are dealing with the same things. And I get it, it’s hard, but sometimes, if it’s your family making things tough, you might have to take a step back for your own good. <span style="color: #be2dd2;">[Translated by Julie Leigh]</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source: <a href="https://ildaro.com/9819" target="_blank">https://ildaro.com/9819</a> Published: January 22, 2024</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7 16:44: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Park Ju-y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59'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07481851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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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발달장애인 K의 노동]]></title>
       <link>https://ildaro.com/1040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루는 Moon이 저녁 식사를 건너뛰며 K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K 선생님의 어머님이 센터에 도너츠를 사다주셨어요. 센터 활동가들한테 고맙다고요.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자꾸 간식을 보내주세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말하는 센터는 세종시에 있는 보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다. Moon은 이 센터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역사회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들이 만든 비영리 민간 기관이다. 장애인들의 활동지원, 동료 상담, 탈시설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부터 보람센터는 장애인 일자리 사업을 위탁받은 수행기관이 되었다. K님도 ‘장애인 복지 일자리’로 센터에서 일한다.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K님은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출퇴근한다. K님이 출근해서 하는 일은 업무일지에 이름을 적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활동가들이 간단한 업무를 제안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의 어머님으로부터 “K가 이런 저런 말을 듣는 걸 힘들어한다. 집에 오면 역정을 많이 낸다.”는 연락을 받았다. 센터는 K님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K님은 동료들과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회식 자리에 한 번 참여한 정도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K의 출근-이동이 지역사회에 가지는 공적 의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Moon의 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 K 선생님은 출근해서 뭘 하셔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업무일지 쓰시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퇴근하시지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부끄럽게도 나의 질문은 더 나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도 일자리잖아요. K 선생님은 센터에 어떤 기여를 하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내게 묻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자리니까 센터가 그 선생님께 기여해야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제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벽력같은 깨우침이 나를 강타했다. ‘기여’의 방향이 바뀌자. 마치 마법처럼 보이지 않던 세계가 몸을 드러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61326252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역사회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들이 만든 비영리 민간 기관이다. 세종보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세종시청에서 100미터가 되지 않는 건물에 있는데, 임대료는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 사진은 사무실 밖 모습이다. (사진 출처- 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K님의 출근은 직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소음이나 거리에서 만날 시선 폭력은 논외로 하더라도, 예측불허의 상황에 즉각적 대응이 어려운 K님에게 높은 각오로 감행해야 하는, 매일 손에 땀을 쥐는 일일 것이다. 사회가 당연하다고 간주해 온 ‘장애 없는 공적 연결망’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고, 그 단절의 장벽을 매일 통과하는 일, 비장애 중심의 관계망에 자신을 주소를 만들고, 배제의 설계 위에 장애를 기입하는 노동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공적 공간의 폭력성을 가르며, 다양한 몸들이 벌이는 출퇴근 노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므로 K님의 출퇴근은 단순히 집에서 센터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발달장애’를 이유로 ‘집’이라는 ‘사적’ 공간만 배정되었던 K님이 ‘공적’ 공간-지역사회에 출현한 일종의 ‘사건’이다. K님은 출퇴근을 함으로써 공적 세계와 관계맺기 시작한다. 직장 동료가 생기고, K님 역시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적’인 장소이기만 했던 K님의 집 역시 사회적 관계망 속으로 이동한다. K님의 어머니가 센터에 보내는 간식은 센터에 대한 감사라기보다 K님의 집, 어머님의 돌봄이 공적 관계망에 진입했다는 신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시에 K님의 출퇴근은 지역사회라는 공적 연결망에 K님의 존재가 누락되었다는 것, 애초에 공적 사회가 아프고 장애가 있는 다양한 몸을 배제하고 설계된, 결손된 연결망이었다는 것, 그 결손된 ‘공적’ 연결망이 취약한 몸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어왔다는 것을 폭로하는 강도 높은 일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61354678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보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2025년 4월에 순천만 국가정원에 회원들과 놀러 갔다. 순천만 여행을 가기 위해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리프트 장착 버스를 빌렸다. 전국에 몇 대가 없어 여행 경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진 출처-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장애인 일자리, 결손된 사회관계망을 수선하고 연결하는 노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므로 K님의 출퇴근은 손상된 사회적 관계망을 수선하고, 새로운 관계망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손상된 네트워크에서 삐져나온 다양한 몸들을 추스르고 일으키는 돌봄의 노동, 장애와 비장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노동과 돌봄을 잇는 연결노동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 연결노동, 관계망을 생산하는 노동은 통계에 잡히지도, 생산성이나 실적이 되지도 않는다. 실적은커녕 업무일지에 써넣을 항목조차 없다. 다양한 몸들의 연결노동은 끊임없이 ‘비가시화’되고 ‘복지’, ‘시혜’로 폄훼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자리니까, 센터가 K님에게 기여해야지요?” Moon의 대답은 수사나 역설이 아니다. 센터는 매일 K님이 출근하면 환대하고, 퇴근할 때 환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K님의 어머님과 소통하며, K님의 기분 상태를 체크해서 업무를 의논한다. 요가, 만들기 교실 등 센터의 크고 작은 행사에 K님이 자연스레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일자리 노동자들이 서로의 동료가 되도록 돕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일하는 센터만이 아니다. 한국의 많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하는 일이다. 장애인의 연결노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그 스스로도 연결노동을 한다. 중증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기관이 받지 않는 노동자들을 들일 뿐만 아니라, 더 중증인 노동자일수록 환영한다. 어떤 장애를 갖든, 자신의 몸에 맞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센터와 노동자가 함께 노력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장애 차별에 맞서 다양한 몸들이 포함되는 거리를 만들고, 버스를 만들고, 지역사회와 법과 제도를 바꾼다. 이때 장애는 다른 몸들과 동등하게 존엄한 정체성을 가지며, 이를 현실화해내는 역동적인 힘이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61416176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 12월 13일에는 보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5주년 기념으로 처음 후원의 날 행사를 열었다. 장애인 비장애인 회원들이 참여해서 한해를 함께 마무리하고 부족한 센터 운영비를 만회한 뜻깊은 시간이었다. 벽에 걸린 큰 펼침막에 적힌 “Disability Pride”(장애 자긍심)는 보람센터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기치다. 장애 그 자체로 긍정의 힘, 장애를 이유로 한 모든 차별에 맞서는 역동의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1970~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시작된 장애인권운동의 빛나는 유산이다. (사진 출처-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취약한 몸들을 배제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사회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글을 쓰는 지금, 전남 영암 대불국가산업단지 이주노동자의 사망 소식이 연달아 들려온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대불산단의 산업재해로 모두 12분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연간 10만 명이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 그 위험도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등 취약한 노동자에게 쏠려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그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을 먹고 입고 누린다. 명복을 빌기도 죄스러운 사회다. 이 죄스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다양한 몸을 불운하고 능력 없는 몸, 취약한 몸으로 낙인찍고 차별하고 배제하며, 오히려 위험을 생산하는 구조로부터 어떻게 노동자를,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켜낼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사회의 복판을 가로지르며 오늘도 노동자 K님이 출근 노동을 한다. 어떻게 노동자에게 ‘기여’할지 논의하는 직장으로 말이다. 취약성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이며, 문명은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을 함께 돌보아온 결과라는 것을, K님의 출퇴근 노동이,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가 죄스러운 사회의 방향을 바꿀 출발점이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937c7;">[필자 소개] 호미</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6 17:11: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0617283814.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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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무고죄 역고소는 가깝고 강간죄 개정은 멀 때]]></title>
       <link>https://ildaro.com/1040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희끄무레했다. 오늘 무고죄 피의자 조사를 받고 왔다고 한다. ‘아 그러셨군요….’ 내 목구멍도 울컥했다. 무고죄 피의자 조사가 어떤 건지 알고 있기에, 축 처진 어깨를 움직여 상담소에 전화를 건 마음을 헤아린다. 같이 슬퍼하고 기막혀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고죄를 앞세운 보복성 역고소는 그 앞에 성폭력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상태를 전제로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에서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이 성희롱, 성추행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한다면, 그 고위직이 성폭력 사건을 부인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미 회사에선 피해자로서는 상상도 못 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인이 무고죄 보복성 역고소를 한다면, 그냥 고소장 하나를 제출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이 자기 책임을 부인하면서 주변 인적망과 자원을 총동원해 성폭력 문제 제기를 뒤집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등학교에서 성폭력 신고 이후 보복성 역고소가 이어질 때도 마찬가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54055684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7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모의법정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에 대한 피해자의 반격〉 장면. 준강간 성폭력과 무고 주장에 대해 열린 법정을 가상으로 재연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상대방이 동의했다’고 주장하는 가해자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알다시피 대부분의 성폭력 부인은 사실관계에 대한 게 아니다.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라는 주장은 거의 없다. 상대방도 맞고, 그 성적 행위도 맞는데 “상대방도 원했다”는 주장이 대다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실제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아서 소리도 못 낸 집 안 성폭력, 새로운 곳에 온 지 하루, 한 달, 일 년밖에 안 된 사람이 결정권자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경우, 여기가 어딘지 상황 파악도 안 된 상황, 의사를 표시하면 더 험악하고 위험해질 것 같아서 포기한 상황, 십수 번 ‘안된다, 싫다, 가겠다’ 버틴 어느 날,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상황,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는 경우, 스포츠 코치나 교육시설의 장이 학생에게 가한 성폭력, 종교지도자가 신도에게 가한 성폭력 등.</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0%의 강간은 이런 이유로 명확한 폭행·협박이 없다. 피해자의 동의도 당연히 없다. 이 때 필요한 개입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회에 기대하는 것은 직장, 학업, 진로, 취미, 돌봄, 종교, 정치, 예술을 ‘빌미로’ 성적 착취 또는 침해가 일어났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한 목소리로 막아서는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도에 기대하는 것은 피해자가 사고 현장에 머물지 않도록 구조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에 기대하는 것은 가해자의 일방적 왜곡과 책임전가가 통용되지 못하게 명확한 기준점과 해석을 제시하고 쌓는 것이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형법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부재’로 바꾸는 것도 이 변화를 위해서다. 강간죄 성립 기준을 피해자의 저항 정도로 두는 건 불평등만 가속한다. 그 세월만 70년이 넘었다. 가해자의 ‘상대방 동의’라는 똑같은 주장을 규명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성폭력 기준을 동의 여부로 옮기는 게 마땅하다. 이는 출발점에 불과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의의사의 형성과 표현은 사회적 역량이기 때문이다.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 의사를 형성하거나, 표명할 수 없었던 피해자 상황을 살펴야 한다. 학대, 경제적 사회적 지위, 심신의 장애, 술이나 약물은  동의를 어떻게 가로막는지 등. 동의 여부로 ‘강간죄’의 기준을 변화시키면, 누군가가 동의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 대해 더 명확히 헤아리며 알게 된다. 성폭력은 부인하는 게 아니라 예방, 재발 방지에 면밀히 다가서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54134109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8년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이 주최한 포럼 〈의심에서 지지로 - 성폭력 역고소를 해체하다〉 모습. 부추겨지는 성폭력 역고소와 가해자의 전략을 다뤘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그 보좌진이 걱정하던 “억울한 피해자”는 누구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한국에서 강간죄 개정은 멀다. 작년 3월 8일 여성의날 주간에 22대 국회에서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과 진보당 정혜경 의원이 개정안을 내놨지만, 1년이 지난 지금 10명 이상의 공동발의자가 나서지 않았다. 국회도, 정부도 강간죄 개정을 ‘보류’시키고 있다. 왜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의원실을 방문했을 때 몇몇 남성 보좌진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면 어떡하죠?”이다.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현황도 아니고, 현실에 맞지 않는 보수적 성폭력 기준과 형법체계 문제도 아니고, 가장 우선 고려하는 것이 ‘억울한 피해자’라니. 아마도 한동훈 전 법무부장관과,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말한 ‘억울한 피해자’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누구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에 대한 현재 법적 기준은 “폭행 또는 협박”이며, 판례와 학설상 ‘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정도’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송치, 불기소가 되는 사건들이 허다하다. 또 무죄 선고의 빈번한 사유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성폭력은 여러 상황과 조건에서 일어난다. 그와 견줄 때, ‘명백한 폭행과 협박이 있었나, 저항이 현저히 곤란했나’라는 기준은 지극히 좁은 선 긋기다. 마치 성폭력이 일어난 실제 상황은 알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극단적인 성폭력만 아주 드물게 골라내서 인정하겠다는 듯이.</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무고죄 역고소와 인지수사에 나서는 자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 현실의 성폭력과 1953년부터의 강간죄 법적 기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다. 바로 ‘무고죄 역고소’다. 피해자의 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정도일 때만 강간을 인정하겠다는 법적 기준이 존치되는 사이에, 강간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불신은 여전히 권위 있는 법적 심증이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으로 고소되면, 많은 경우 피고소인은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한다. 무고죄만이 아니다. 피해자가 직원이었다면 횡령죄, 피해자가 사과를 독촉했던 친구나 전 연인이라면 스토킹, 피해자만 비혼이라면 가해자 배우자에 의한 상간녀 민사청구…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증폭시킬 수 있다면 뭐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고죄 역고소의 문제점들이 공론화 된 후, 2018년 대검찰청과 법무부는 성폭력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때까지 역고소 무고 사건은 수사를 중단하는 성폭력 수사매뉴얼을 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폭력에 대한 기소 여부가 최종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무고죄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부르는 사례도 많다. 검경수사권 조정 이후나, 검찰수사권을 없애는 체계가 논의되는 지금도, 검찰은 무고죄를 인지하여 조사하는 액션을 자주 취하고, 이때 성폭력이 대거 포함된다. 경찰이 성폭력 사건을 불송치한 후 무고죄로 입건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법원 판례에서, 처음 만난 10살 연상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피해자가 고소했을 때 검찰은 이를 기소하지 않고, 이후 피해자를 무고죄로 기소했다. 법원은 성적 행위 당시 녹음파일을 듣고, 피해자가 여러 번 거부하고 거절한 점을 들어 무고죄 ‘무죄’ 판결을 1심과 2심 모두 내렸다. 수차례 거절, 거부했지만 상대방은 이를 무시하고 유형력까지 사용해 성적 행위를 이어갔는데, 검찰은 이것을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신 피해자는 무고죄 혐의를 가해자와 검찰, 법원으로부터 벗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국회의원실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억울한 피해자’론에서 억울한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게 성폭력 피고소인을 말하는 거라면 그런 단순한 명명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고, 무고죄 보복성 역고소를 정당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 개정을 보류하면서 무고죄 역고소는 팽창되는 사이, 법과 제도, 사회가 비용을 쏟고 있는 것은 ‘피해자 의심’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 어떤 것이 성폭력 현실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제안은 사라져버린다.</span> </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5072260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강간죄개정연대 주최 국회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 : 일본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 한국이 참고한 일본 형법 강간죄 조항이 부동의성교죄로 개정된 사례가 발표됐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세계여성의날 광장에서 함께 외칠 것이다</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 구성요건,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고죄 피의자 조사를 받고 오신 분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사건이 성폭력인 이유와 자료도 충분하고, 피해자를 두렵게 하는 가해자의 권력과 지위도 뚜렷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긴 대화 끝에 “3월 8일 여성의날인데, 광장에서 만날까요?” 말을 건넸다. 엉뚱한 화제 전환이었을까? 그런데 분노하고 절망했던 순간만큼이나 즐거움이 슬며시 차올랐다. 피해자가 정말 광장에 오실지, 우리가 만나게 될지, 만나서 서로를 확인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준비한 피켓을 배부하면서 당신에게 닿고 있기를 바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 구성요건,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윤석열 탄핵 겨울 광장 이후에도, 새 정부 새 대통령이 들어선 후에도 의심되고, 보류되고 있는 이 과제를 외칠 것이다. 무고죄 역고소가 너무 많아졌다고 만날 때마다 근심을 나누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성적 시민으로서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은 피해자들과 함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23dc2;">[필자 소개] 김혜정</span>. 200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판에서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폭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사려깊고 해방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고, 상근활동가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5 13:38: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혜정)]]></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3/20260305425062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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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임금이 드러나야 평등이 시작된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0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은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이후 꾸준히 회원국 중에서 ‘성별 임금 격차’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5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임금은 한국 남성보다 29% 낮아, OECD 회원국 평균 성별 격차인 11.3%의 2배를 훨씬 넘는다. 성별 임금 격차는 채용, 직군/직무 배치, 고용안정성, 평가, 승진 등 고용 전 과정에 걸쳐 누적된 성차별적 관행과 ‘여성 집중 직종’의 저임금화 등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구조적 성차별’의 결과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외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고용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많은 이들은 ‘성평등 공시제’가 그 변화를 만들 기반이라 말한다. 이재명 정부 또한 ‘고용평등 임금공시제’를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2월 25일, 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실에서 ‘성평등 공시제’ 도입 필요성과 입법 방향을 논의하는 토론회가 여성노동연대회의 주관으로 열렸다. 성평등 공시제가 실효성을 갖기 위한 구체적인 법제화 방향을 두고 시민사회와 여성/노동계, 그리고 정부 부처 간의 열띤 논의가 펼쳐졌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임금이 기업 기밀?! 차별을 은폐하는 꼼수 제공</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임금이 개인의 비밀 혹은 기업의 기밀로 취급되는 문제부터 지적했다. 이런 비밀주의가 “차별을 은폐하고 기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업은 임금을 기밀로 취급하고 심지어 근로계약 시 임금 누설 금지 서약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업이 공정하고 체계적인 임금 시스템 없이도 조직을 운영할 수 있게 만드는 꼼수를 제공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배 대표는 “구직하는 일자리의 임금조차 모르고 회사에 지원하는 현 상황 자체가 노동자 권리의 상당한 침해라 생각한다.”고 짚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35839290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25일, 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실에서 열린 〈성평등공시제 도입의 필요성과 입법 방향〉 토론회에서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가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임금 투명성 확보 방안”에 대해 발표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임금 정보공개의 정당성 근거로 ‘정의’, ‘자율성’, ‘효율성’ 그리고 ‘성평등’을 들었다. 배진경 대표는 임금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확인하는 수단(정의)이며, 노동자가 자신의 미래를 기획할 수 있게 하고(자율성), 자원의 효율적 배치를 돕는다(효율성). 무엇보다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여성 노동자가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필수 장치(성평등)”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중소규모 업체, 파견과 특수고용도 포함하는 ‘성평등 공시법안’ 제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우리 사회에 임금 투명성 제도가 없는 건 아니다. 상장사의 임원 보수나 직원 평균 급여 등을 공개하는 전자공시시스템(DART)이나,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ALIO)가 있다. 하지만 배진경 대표는 “이들은 임금 투명성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한계도 명확하다. 비상장 중소기업들은 대상에서 제외되고, DART에서는 직급·고용형태별 임금을 파악할 수도 없다. 때문에 “임금 투명성을 위한 전면적이고도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배 대표는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김두나 변호사도 “현행 제도들은 정보 공개의 범위와 대상이 제한적이어서, 성별임금격차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는 데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용상 성별 불평등의 현황과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공개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별도 입법을 통해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두나 변호사는 ‘성평등 공시에 관한 법률’(가칭)을 입법할 것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여성노동연대회의와 민변 여성인권위원회가 함께 논의하여 만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법안의 특징은 종사자의 범위를 넓게 규정(포괄적 적용 범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노동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간접고용, 파견, 특수고용 등 다양해지는 고용 형태를 반영해 종사자의 범위를 파견근로자 및 노무 제공 계약을 체결한 자”까지 폭넓게 규정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 다수가 중소규모 기업에 집중된 현실을 반영하여, 공공기관뿐 아니라 ‘상시 50인 이상 민간 사업장’으로 공시 의무 대상을 대폭 확대”하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 공시 의무도 구체화했다. 공시 목적이 단순한 ‘통계 수집이 아니라, 원인 분석과 상황 개선’인 만큼 “단순한 임금 총액을 넘어, 격차를 유발하는 구조적 요인을 파악할 수 있도록” 상세한 현황을 공개하도록 했다. “고용형태, 직종, 직급, 직무, 근속연수별 성별 인원 및 보수”, “성별 승진 소요기간 및 승진 현황”, “육아휴직 등 모성보호제도 사용 현황” 등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고용형태, 직급, 직무, 근속연수별 성별 인원과 보수, 승진 등 공개해야</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차별 개선 안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 등 실효성 있는 제재 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김 변호사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뿐 아니라 “성별임금격차의 원인에 대한 체계적 진단을 통해, 국가기관등과 사업주가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마련하도록 ‘성별임금격차 개선계획’도 공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3591116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김두나 변호사가 “성평등 공시제 법제화의 방향과 과제: 「성평등 공시에 관한 법률안(가칭)」의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법안엔 ‘한국고용평등원(가칭) 설립’도 포함되어 있다. 김두나 변호사는 “성평등 공시제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성평등 공시제에 대한 사항을 포함하여 성평등 고용정책 전반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전담기관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구직자의 임금정보 청구권, 종사자의 임금정보 청구권도 포함되었다. 김 변호사는 “만약 사업주가 임금정보 제공을 거부할 경우, 법적으로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는 강력한 조항을 두어 성실한 이행을 강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중요한 부분은 ‘강력한 제재 조치’다. 법 위반에 대해 강제력이 없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김두나 변호사는 “성차별적 처우에 대해 고의나 반복성이 인정될 경우, 손해액의 최대 3배를 배상하게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고, 종사자가 차별 행위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사업주가 차별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하는 입증책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금 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허위보고 시 “과태료를 부과”하고, “개선명령 불이행 사업주 명단을 공표”하는 등의 제재 방안도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합리적이고 투명한 임금 체계가 가져올 변화</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별 임금격차 줄어들고, ‘더 좋은 노동환경’ 만들어질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 공시제 법제화를 논의하는 토론회에서 참여자들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고 공개하는 정도의 제도로는 현재 노동시장의 고질적인 문제, 구조적 성차별을 고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그런 점에서 ‘성평등 공시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이다. 기밀처럼 여겨지던 임금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성별 임금격차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인식을 형성할 수 있고, 변화를 논의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성별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3595264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25일,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실에서 〈임금이 드러나는 순간, 평등이 시작된다-성평등공시제 도입의 필요성과 입법 방향〉 토론회가 여성노동연대회의 주관으로 열렸다. (공동주최: 여성노동연대회의,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김남희, 김주영, 서영교, 이수진, 이용우, 이주희, 전진숙 의원실, 조국현식당 정춘생 의원실, 진보당 정혜경 의원실) [출처: 전국여성노동조합]</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배진경 대표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임금 체계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에 대한 확실한 동기부여를 제공하며, 사회 전체적으로 유능한 인적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해외 연구들을 살펴보면 “성별 임금 투명성이 확대되고 공정한 환경이 보장되면, 대상 기업 내 여성 노동자들의 스트레스 수준이 유의미하게 낮아지는 심리적 효과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동자가 일에 매진할 수 있는 더 좋은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부는 2027년 공공과 민간 부문 시행을 목표로 성평등 공시제를 추진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와 고용노동부가 제도 시행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노동/여성계·시민사회와 소통하며 촘촘한 입법 및 예산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토론회 참여자들은 촉구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3 13:53: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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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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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지역소멸 위기 ‘마을이 성평등하게 변해야 살아남는다’]]></title>
       <link>https://ildaro.com/10400</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마을규약 검토, 안에 있으면 잘 안 보이던 차별적인 조항들 드러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막상 본인이 사는 마을에서 성평등 마을규약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면서 어떠셨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김미랑(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회장, 이하 ‘미랑’)</span>: 2020년 이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마을 규약의 문제를 잘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후 3개 단체(제주여민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제주YWCA)가 만든 성평등마을 사업 추진단이 꾸려지고, 여기서 마을 부녀회 분들과 같이 규약을 검토했어요. 다른 마을 규약과 비교 분석하면서 보니까, 가부장적이고 여성에게 차별적인 조항들이 보였어요. 평생 살아오던 마을이라 그 안에 있으면 사실 안 보인 거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놀랐고, 공부하는 계기가 됐어요. 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꼬집어주었던 컨설팅이 크게 도움이 됐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김이승현(제주여민회 이사, 이하 ‘승현’)</span>: 성평등 마을 사업을 하다 보면 마을에서의 삶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깨닫게 되요. 여지껏 보이지 않았던, 너무 당연해서 알아챌 수 없었던 마을 속의 성역할, 젠더화된 노동, 이게 그냥 내 몸에 살아 숨쉬는구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성평등 워크숍에서 교육받으면서,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내 몸에 배어서 나조차도 몰랐던 이런 게, 몸이 자동으로 움직여지고 있었네, 마을이 우리를 만들고 있었네. 그런 걸 깨달을 수 있었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15119137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제주 OO리 한 식당에서 혼디팀(성평등 마을규약 만들기 추진단)이 회의를 하고 있다. 제주에서 시작한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은 강원도 횡성, 충남 천안, 전남 영광, 경북 의성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진-제주여민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성폭력 발생해도 ‘말 나지 않게’ ‘묻어주는’ 문화 바꾸기 위해</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주민 의무로 ‘마을 내 인권 문제, 누구나 피해자 보호조치 해야’ 규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그런 점에서 성평등 마을 규약을 만든다는 게 더욱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사업단이 제안하는 표준조항 다섯 가지 항목 중에, 주민 의무로 “마을 내 인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마을주민 누구나 적극적으로 피해자 보호조치 시행 의무가 있다”는 항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조항을 넣게 되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제주 지역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된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세요. 가장 일본 가까이에 있고, 왕래도 잦고, 공출되는 인력이 많았는데 피해자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피해가 있어도 ‘말 난다’고 생각하고 모른 척 ‘묻어주는’ 게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일종의 배려였던 거고, 더 드러낼 수가 없게 되죠. 그래서 (성범죄) 피해가 발생해도 눈감아주는 문화가 문제적이라는 판단으로 넣게 된 거였어요. 마을 규약을 처음 설계할 때 김영순, 이경선 고문님 같은 제주 토박이분들이 제주여민회 대표단에 계셨기 때문에 제주 지역에 대한 이해가 깊었어요. 그래서 이런 조항을 만들 수 있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제주의 역사성과 지역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올 수 있었던 조항이군요. 하지만 ‘농촌 소멸’, ‘지역 공동체 위기’를 말하는 시기에 정말 필요한 규약으로 보입니다. 왜 그간의 마을 규약에 이런 조항이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누가 여자 못하게 막냐?” 임원조직 성비 규정에 거부감 가장 커</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마을운영위 30~40% 이상 여성’, 오히려 마을 분란의 소지 없앨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막상 이 조항을 실제로 마을에서 논의하면, 부녀회에서 얘기할 때는 필요하다고 했다가 마을총회에 가서 부딪히는 경우들이 많아요. 그래서 못 들어가는 경우도 꽤 있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민감한 게, 마을 임원조직 내 성별 비율이예요. 작년 제2공항 건설사업 이슈로 싸우고 있는(제주의 자연환경 파괴, 지하수 오염, 조류 충돌, 농지 상실 등의 우려로 반대하고 있다) 마을 중의 하나인 OO리 이장님이, 농민회장도 하신 분이신데도, 몇 프로라고 굳이 여성 비율을 정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셨죠. 결국 총회까지 못갔어요. ‘이미 여성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서 이런 40% 조항을 넣을 필요가 없다’거나, ‘부녀 회원들 중에서 하고 싶어할 사람이 충분치 않다’ 같은 이유로 총회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부녀회에서는 통과가 되었는데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네. 부녀회가 마을규약 개정안을 제출한다 해도, 마을 개발위원회나 운영위원회 검토를 거쳐야 마을총회로 안건이 올라갈 수 있는데 여기서 막히는 거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마을 운영위원회와 총회가 2026년,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 수준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농민회 활동가, 회장이라고 해도 임원조직 내 여성 비율을 규약에 정하는 것에 심정적 거부감이 커요. 우리 마을도 “누가 여자 못하게 막냐? 여자들 나오면 다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막았냐?”는 얘기가 분명히 나올 거거든요. 불평등의 책임을 여자들한테 돌리는 말하기죠. 실제로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동장을 하는 데도 있고, 몇몇 동은 여자가 동장을 맡기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 사례를 빌미로 삼기 때문에 여성 비율을 마을 규약에 정하는 일이 쉽지 않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한두 명이 들어가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 마을도 부녀회 임원들이 복수로 들어가야 개발위원회에서 발언권도 갖고, 마을 돌아가는 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고. 최소한 (부녀회에서) 3명은 들어가야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여전히 제주 내 많은 마을들이 개발위원회에 현직 부녀회장 한 명만 참여하고, 임기는 보통 2년에서 3년이에요. 이렇게 되면 처음에 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다가 이제 2년 되어서 좀 알아들을 만하면 빠져야 되는 거죠. 그래서 마을의 중요한 이슈가 부녀회 쪽으로 정보가 잘 안 들어가요. 그러다 나중에 일이 터지는 거죠. 마을 갈등이 커진 경우들을 보면, 개발위원회 같은 데에서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해가지고 마을 뭔가를 팔아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러면 그제야 그 사실을 알고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는 상황들이 벌어지거든요. 이런 경우 마을 평주민인 여성들이 많이 들고 일어나기도 했구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그렇다면 마을 운영위원회에 여성임원 참여를 규정하는 조항이 추후 마을 분란의 가능성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겠군요. 성평등이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존속시키는 열쇠라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15144117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은 워크숍 과정부터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부녀회 회원들이 참여한 성평등 마을 만들기 OO리 워크숍 중 주민들이 레크리에이션을 하고 있다. [사진-제주여민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성평등 마을”이라는 자부심, 노인회도 바뀌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운영위원회가 이장이나 대의원 등 선출직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 당연직 참여비율 보장’에 반발하는 것도 있지만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내가 마을에서 어떤 일들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부족한 문제도 있어요. 또 이걸 이유로 성평등 마을 규약을 반대하는 흐름도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여성들이 준비가 부족하다는 게, 정치적으로 과소대표화가 되어온 결과잖아요. 여성이 준비가 안 된 건, 성평등 규약에 반대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업을 서둘러 진행해야 할 이유일 텐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부녀회가 마을 안에서 공식적으로 작동하면서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정치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어야죠. 부녀회가 마을규약 개정안을 마을회에다 내고 통과시키는 이 과정을 밟아보는 것 자체가 정치적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중도에 멈춘 마을들이 많이 아쉬워요. 이 과정 통해서 부녀회가 조직적으로 성장하는 게 엄청나거든요. 보통 마을구조 속에서는 부녀회가 조직적으로 발언한다는 걸 상상도 못 해요. 그냥 개인이 활동하는 것과 부녀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 마을 1호인 신도3리에 후속 프로그램을 할 때, 노인회에 갔거든요. 재미있는 게 이 노인분들이 ‘성평등 마을’이라는, 이 어려운 용어가 입에 붙어 있어요. 성평등 마을이라는 게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 마을이 성평등 마을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씀하시는데, 되게 큰 변화죠.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서 했지만, 노인회가 바뀌어 있다는 거. 여성 어르신까지 성평등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로 바뀌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이 마을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 기회이고 열쇠라는 걸 지자체도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22년 제주특별자치도 마을 규약 매뉴얼에 ‘성평등 관련 세칙’이 포함되었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맞아요. 그래서 다른 마을에도 널리 퍼지게 되겠죠.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와! 제주, 정말 멋집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1520634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2년 제주특별자치도 마을운영규약 매뉴얼. 제주지역 마을운영규약 개선 방향 안에 제주여민회에서 만든 표준 조항을 담은 ‘성평등 관련 세칙’이 사례로 포함되어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지역소멸 위기감, “우리 마을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이 사업이 제주를 넘어 강원도 횡성, 충남 천안, 전남 영광, 경북 의성 등에서도 성평등 마을 규약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 승현 님이 의성에서 특강을 하셨다고요. 제주와 육지는 양상이 다른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의성은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이 ‘마을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데,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면 관에서 지원해주는 형식이더라고요. 행정에서 탑다운 식으로 다가가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제주는 행정이나 마을 바깥에서 마을에 들어가기가 진짜 힘들거든요. 육지 농촌의 ‘리’는 행정구역상 가장 기초 단위의 느낌인 반면, 제주는 읍면 지역의 전통 자연마을로서 리 마을회 파워가 육지, 도시보다 훨씬 크다는 걸 다시 확인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육지의 경우는 행정이 먼저 의제를 제시하고 마을을 추동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도시, 농촌 모두 마을의 자치 정도나 행정 등 상황에 맞게 성평등 마을 사업을 진행하면 좋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제주와 육지가 여건은 많이 다르지만, 성평등 마을 사업에 대한 요구는 비슷하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제주도도 다른 지역들도 모두 ‘지역 소멸’에 대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실제 마을 분들 만나면 남성 이장님들도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을도 변해가야 한다.”고 말씀들을 하시거든요. ‘이제는 너도나도 마을에 건물 세우는 하드웨어의 시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마을의 소프트웨어를 구축해야 한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 마을 문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죠. 성평등 마을 사업이 마을 구성원들간의 민주적 관계 확보를 통해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 최고의 불쏘시개가 될 거라고 말씀드리면, 호응을 받아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가슴 뛰었던 순간, “부녀회 모의총회 날짜 잡혔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활동하면서 가슴이 뛰었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얼마 전 우리 마을 부녀회장님이 전화하셔서 부녀회 모의총회 날짜 받았을 때, 정말 가슴이 뛰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맞아요! 맞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계속 날짜를 못 잡았다가, 회장님이 “모의총회 날짜 잡혔습니다.” 직접 연락이 왔어요. 그만큼 기쁜 게 없어요. 그동안 조용하다가 날짜를 잡았다는 게 회장님의 의지 표명이기도 하고, 우리와 앞으로도 소통하시겠다는 것이기도 하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저는 “마을규약이 통과됐습니다!” 이때일 줄 알았는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하나하나 사업하는 과정 모두가 피 말라요. 진짜 진짜 진짜 힘들어요. 나중에 어떤 성과가 나올지 몰라도 지금은 피 말라요. 이번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까? 가다 주저앉지 않을까? 여지껏 해온 걸 없었던 걸로 해버리지 않을까? 얼마나 해야 이분들이 앞장설 수 있게 될까? 이게 머릿속에 계속… 작은 거 하나라도 성과 나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span></p><p> </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1523164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성평등 마을 만들기 워크숍은 부녀회 조직의 활성화 및 마을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꾀하고 있다. [사진-제주여민회 제공]</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br />승현</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 마을 섭외할 때 일일이 한 마을 한 마을 방문하면서 이장님이나 부녀회장님을 만나는데, 마을 방문의 기회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아요. 만나서 필요성에 동의하더라도 부녀회장님들이 심정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많은 경우 자리를 피하세요. 부녀회원들이 하자고 하더라도, 부녀회장이 나서서 마을회에다 마을 규약을 바꾸자고 안건을 제기하는 거 자체가 큰 부담이에요. 한 번도 안 해본 거잖아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마을의 미래를 바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실감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여농 활동가로 옳은 일, 해야 할 일이다 싶으면, 그걸 만들어내기 위해 관이나 정부와 싸우는 거는 힘들지 않아요. 조목조목 따지고 담당자와 이야기하고, 직접 행동하면 돼요. 근데 마을 일은 그렇게 해서 되지 않아요. 마을의 일상 문화, 시스템으로 들어가야 해요. 세 사람이면 세 사람 생각이 다 달라요. 그 생각도 아침이랑 밤이 다르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마을을 존중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조심하고 의논하고, 어느 분께, 누가 연락할지, 언제 할지, 마을마다, 상황에 따라 무엇부터 이야기할 것인가. 회의하고, 매 단계마다 의논하면서 진행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미랑</span>: 정답이나 주어진 게 있어서 마을마다 대입하는 게 아니니까. 마을에 맞게, 마을의 필요와 요구에서 출발하려고 애써요. 우리 마을에 맞는 대안을 마을 분들과 함께 찾아내는 일이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e2dd2;">호미</span>: ‘날짜가 잡혔다’는 의미가 그런 모든 내용을 담고 있군요. 여태껏 목소리 없이 활동해온 부녀회, 그게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온 개발위원회 입장에서는 성평등 마을을 만든다는 게 마을의 미래를 위해 정말 큰 용기를 낸 일이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승현</span>: 활동가 입장에서도, 마을의 입장에서도 진짜 치열한 현장입니다.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실감을 해요. 보람도 있으니까 움직여지고 있는 거겠지요. 어렵게 자리가 마련됐는데 마을 분들이 너무나 주체적으로 발언하고, 의견들도 많이 내고, 부녀회와 마을의 변화를 보면 “너무너무 어려웠지만 하고 나면 너무너무! 하길 잘했다!” 하죠. 매번 살얼음판 걷는 것 같지만, 정말 매력적인 사업이에요.</span></p><p> </p><p><span style="color: #be2dd2;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호미</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 말씀을 들으며 성평등 마을사업이 지역, 농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고도의 정치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앙에서 일제히 규약을 만들어 내리고 주민 전체를 통제했던 시대에서, 마을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마을의 조직, 주체들이 스스로를 변화시켜가며 마을을 평등하게 재구성하는 운동이니까요. [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e2dd2;">[필자 소개] 호미</span>. 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여성농어업위원회 위원, 장애활동지원사, 동화집필 노동자이다. 서울에서 귀농했다가 도시로 역이주했지만 다시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들이 귀농하기 만만치 않지만, 그 여자들도 만만치 않다는 걸(지민주 노래 ⌜세상에 지지 말아요」에서 영감을 얻었다) 드러내려고 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3-01 16:4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차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성차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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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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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하산해도 될 것 같은데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상담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성폭력상담소를 알게 된 뒤, 1~2주에 한 번씩 상담을 이어온 지 1년쯤 지났을 때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상담소를 찾았을 때, 나는 성추행 피해 트라우마로 일상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샤워를 하다 성추행을 겪은 부위를 씻을 때도, 미디어에서 남성이 여성의 몸을 만지는 장면을 볼 때도, 성추행을 당하는 순간이 떠오르는 플래시백(Flashback, 과거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자극을 접했을 때 당시의 감각이나 심리 상태 등이 그대로 재현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한 증상)이 일어났다. 그런 밤은 묻어둔 분노가 올라와 잠을 설치곤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길에서 가까운 거리에 남성이 있으면 내게 손을 뻗을 것만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민단체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많은 남성들과 어우러지는 활동에 불안감과 거부감이 들어 망설였다. 결국, 주최측에 내 상태를 미리 설명하고, 활동 중 무리한 느낌이 오면 뒷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등 제한적으로 참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외상의 기억이 편도체와 시상하부에 남아있는데, 이 부분은 뇌에서 생존 관련 본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위는 외상 경험을 통합할 능력이 없고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지금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처럼 계속 반응한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외상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을 경험할 때마다 편도체와 그 주변 구조들이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스트레스 화학성분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고 설명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일종의 PTSD를 겪고 있었고, 내 편도체는 과잉 활성화 상태였다. 그런 내가 상담사에게 ‘이제 정말 괜찮아졌으니 하산하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신기했다. 새삼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았다. 치유에는 일대일 상담에서 받은 꾸준한 이해와 정서적 지지도 큰 몫을 했고, 성폭력 피해자 집단상담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변화가 찾아온 것은 상담소에서 진행한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치료에서 주인공을 맡은 이후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는 의자가 아니지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이코드라마는 심리치료 기법의 하나로, 내담자가 자신의 경험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일종의 즉흥 연극이다. 사이코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지목한 관객은 조력자가 되어 보통 주인공 삶 속 인물들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인공과 갈등을 겪는 대상이나 주변 지지자, 또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된 치료 대상이 되는 내담자는 주인공이지만, 조력자나 관객 역할을 맡은 내담자들도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해 쌓인 감정을 해소하고 함께 치유에 다가갈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이미 몇 번 사이코드라마에 참여해 조력자와 관객 역할을 맡으며 그런 치유의 효과를 분명히 느꼈다. 하지만 주인공으로 나선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행히 성폭력 또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모인 자리라, 준비(Warming-up) 단계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놓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건 당시의 배경과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가해자가 끝내 사과를 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한 합의에 이른 과정과 그 후 내게 남은 감정들을 터놓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료자는 여러 색의 보자기 중 가해자의 이미지에 가까운 색을 선택하라고 했다. 내가 빨간색 보자기를 고르자, 치료자는 의자 위에 그 보자기를 씌웠다. 그리고 가해자가 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은 어색했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멈칫거리니, 치료자가 옆에서 대신 큰소리로 욕을 해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낮은 목소리의 “야.”로 시작된 말에 점차 감정이 실려 목소리가 떨렸다. 울분이 솟기 시작했다. 가해자에게 직접 쏟아내지 못했던 말을 이 자리에서 읊조려야 하는 상황에 억울함이 들었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배에 힘이 들어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나쁜 놈을 혼내 줍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료자가 종이에 테이프를 감아서 만든 방망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시범으로 의자를 세게 한 번 내리쳤다. 퍽. 의자의 방석 부분은 푹신했지만 표면이 매끈해 방망이로 때리니 찰진 소리가 났다. 치료자는 방망이를 내 두 손에 쥐어주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방망이를 휘두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해자가 내게 했던 성희롱과 무시의 발언들이 떠올랐고, 내면에 응어리진 말들이 울먹임과 갈라짐이 섞인 목소리로, 눈물과 함께 하염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렇게 한참 의자를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팔이 욱신거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후련할까? 이걸로 된 걸까? 알 수 없어서 더 힘을 쏟아붓고 싶었지만 팔이 아파 더 내리칠 수 없었다. 그러자 치료자는 의자에 씌웠던 보자기를 내게 주며 밟아도 좋다고 했다. 나는 엉엉 울며 그것을 열심히 발로 밟았다. 그에게 짓밟힌 내 존엄을 일으켜 세우는 마음으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곧 치료자는 가해자 역할을 했던 보자기를 주워서 내게 내밀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 이제 이걸 꽉꽉 뭉쳐서 저 멀리 던져버릴 겁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던지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손에 쥔 휴지 뭉치로 코를 닦으며 보자기를 더 꼭꼭 밟은 뒤, 그것을 집어들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를 지르며 문 쪽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8170467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는 이날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가해자를 벌했고, 무력했던 자신을 용서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폭력을 겪은 다른 이들의 존재를 느끼고 깊은 공감을 나눈 것이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진실한 이해와 지지가 전해져 왔다. (자료 이미지 | ChatGPT 생성)</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끝은 아니었다. 이제는 나 자신을 만날 차례였다.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하라는 치료자의 지시에, 나는 또 다른 빈 의자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 자책하지 말라고. 그 일이 일어난 건 네 탓이 아니라고. 고분고분한 소녀의 모습으로 자라온 것, 그래서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의 고함에 움츠러들고 성범죄에 이용된 것에도 네 잘못은 없다고. 넌 매 순간 잘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것뿐이라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서 내가 지목한 관객 한 명이 나와 마주 섰다. 그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방금 내가 했던 말을 내게 똑같이 들려주었다. 너그럽고 단단한 인상의 그 여성은 마치 잘 씹어서 먹여주듯 문장들을 말해주었고,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낯선 사람의 품이었지만 오래 부대껴온 사이처럼 포근했다. 그렇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한 나 자신을 안아주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극이 모두 끝나자, 몰입해 있어서 몰랐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대성통곡한 것도, 욕을 쏟아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는 관객들도 모두 눈이 젖어있었다. 많이 울어 눈이 부은 사람, 아직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둥글게 둘러앉아 소감을 나누는 시간에 여러 사람이 비슷한 마음을 들려주었다. 극을 지켜보며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고.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고.</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대하며,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의자는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의자일 뿐’이라 생각하면 허무하고,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닌 물건에 벌을 주며 애써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슬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눈 마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오로지 개인의 불운이 아님을 깨달았고,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연민과 지지를 느꼈다. 또, 자기 안에 있는 분노가 스스로를 지켜주는 안전한 것임을 확인했다. 그것을 분출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무력해 보였던 자신을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내면에 있음을 보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의 플래시백은 대부분 사라졌다. 남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도, 의식은 되었지만 전만큼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사이코드라마는 직면을 연습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이다. “사이코드라마는 꽤 현실과 가까우며, 실제 상황에서 직면이 불가능할 때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극적이면서도 강력한 도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몸에서 출발하는 치료법은 편도체와 시상하부에 갇힌 외상을 언어를 관장하는 논리 영역, 즉 대뇌피질 쪽으로 서서히 옮기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대뇌피질은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고 바꾸는 능력이 있어, 외상 기억을 이 부위로 통합시키면 생존자들은 피해가 ‘과거’에 일어난 일, 지금은 ‘끝난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동적 스트레스 반응과 PTSD가 감소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문가들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많은 생존자들의 치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대응 방법을 안내하는 책 『보통의 경험』(한국성폭력상담소 저, 이매진, 2011)에서는 “나를 잘 모르지만 내가 겪은 일에 관해 잘 아는 사람도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썼다. 트라우마 연구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은 “심리요법은 독단적인 교리가 아니라 협동에서 나오는 노력의 작품”이라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이코드라마와 집단상담에서 폭력 피해생존자들을 만나 나누었던 연대감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든든하고 따뜻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심리요법으로 극적인 변화를 바라며 서두르는 마음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치유로 다가가는 데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성폭력상담소는 “대부분의 변화는 더디게 오”며, “조그만 자기애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아이가 걸음을 배울 때 한 발을 떼고 넘어지더라도 그 첫 번째 시도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처럼, 자신이 비틀거리고 넘어져도 조급해하거나 화내지 말고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라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규칙적이고 건강한 일상생활을 지키는 것만으로 성폭력 피해생존자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매일 충분히 자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취미를 즐기는 것. 그렇게 쌓인 하루하루가, 어느 날 돌아봤을 때 과거가 아닌 현재의 더 건강한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내가 겪어본 것은 내게 일어난 성폭력들뿐이고, 치유의 길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처 속에서 분투하는 용기 있는 이들에게 한 가지 생각을 나누고 싶다. ‘말하는 것이 아픔만이 아니라 치유도 가져온다’는 믿음 자체는 버리지 말자는 것. 성폭력을 겪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 도처에 있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 많은 피해 생존자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만나 치유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a28d6;">[필자 소개] 민바람</span>.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8 12:1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민바람)]]></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281936703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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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Race, Class, and Discrimination as Seen from an American Slum]]></title>
       <link>https://ildaro.com/1039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eing in its slums the true face of a country I had envi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university, I received a scholarship that allowed me to participate in an exchange program in the United States. My school designated me a scholarship student so that I could get my student visa quickly. I got the visa after an easy interview at the embass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leven hours after leaving Korea, I touched down in Los Angeles. Nothing was familiar, but just because it was America, everything seemed awesome. My heart kept pounding in excitement at being in a city that I had previously only seen on TV.</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school’s dormitory was in a section of LA near the coast; it was a poor area in which many black people lived. The school provided us a 100-year-old building in a slum for our dormitory. It was a fifteen minute walk from the school. From the first day, teaching assistants at the university told us, “Don’t walk around in groups made up only of women, bring some male friends.” At first, I couldn’t understand why I should do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had language class from 9 in the morning until noon, and then medicine-related classes from 1 to 8 p.m. When I came back to the dorm, I would review and do homework until 4 or 5 in the morning. Living so busily, I was chronically short of sleep, but because I wanted to enjoy this country called “America,” I would travel nearby when I had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neighborhood around the dorm, I saw many disabled people, and many morbidly obese people. But then, that must have been because it was a poor area. If you wanted to get a cheap meal at the supermarket, there was 2-serving pasta for 99 cents, two large pieces of fried chicken for $1, and 5 hot dogs for $3. Short on money, I ate that kind of thing too, and quickly started to gain wei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when I went to Beverly Hills or the rich areas on the coast, most people there clothed their slim bodies in tight workout clothes and went surfing or jogging with their iPhones on their arms. When I saw that, I realized that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poor can create a difference in body type. People’s expressions, too, were differen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mbarrassing incidents are “my fault,” because of my poor Englis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you walked for five minutes toward the coast from the dorm, there were expensive seaside restaurants, bars, clubs, and outlets. On Saturday nights, you could see people in dresses and suits, who looked like celebr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weekend, my roommate and I went out to go shopping. Three black men who seemed around my age drove by in an old red car. Suddenly, they made a shooting gesture with their hands and catcalled us, before racing away. It happened so fast that we, shocked, didn’t have time to respond. We comforted each other by saying that they must have done that because they hadn’t been taught any better. They were definitely the black people who lived in the poor area around our dorm. People say that black people see Asians as beneath them, and at that time I started to think that this seemed to be tru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espite what had happened, we went to a fast-food restaurant to fill our empty stomachs. We ordered hamburgers, but the young, white cashier said she couldn’t understand us and acted annoyed. Even when we said the number of the meal we wanted, she couldn’t understand. At this point we might have assumed that she was just pretending not to understand, but we didn’t have the guts to get angry, and instead thought it was our fault because of our poor Englis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end, I ordered the only thing the cashier understood—a Whopper meal. After that, it became natural for me to order a Whopper meal. When I was not that hungry, I would order a Whopper Junior me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weekend, we left the dorm at 7 in the morning to go on a trip. We were in a hurry, so we started to run. Immediately, a police car put its sirens on and headed toward us. I stopped and put my hands up, without even thinking about it. (Because guns are legal in the United States, you have to put your hands up if the police stop you, to show them that you don’t have a gu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uscular white police officer briskly asked to see our IDs. All we had done wrong, if anything, was cross the street 10 feet outside of the crosswalk. Luckily, it was just a simple check, and the officer soon left. After thinking about it, I realized that there were often cop cars in the area. If you walked around in morning, you could see a lot of scrunched-up women’s underwe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ough we were slightly scared by what had just happened, we got on the metro to continue our trip. A black man who seemed homeless was on it panhandling, and he shouted threateningly, “Look at my eye! I’m unfortunate! So give me 50 cents eac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e then plucked out his glass eye, and started to shove it in people’s faces. Scared by my first sight of a glass eye and his shout that was almost a scream, I wanted to get off the train quickly. When Korean students travel in groups on the metro, there is always a police officer and drug-sniffing dog nearby, but they were nowhere to be seen when this man was screaming and threatening u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 learned from my experience crossing borde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the four or so months I spent in America, most of the Americans I met were not friendly. But strangely, when I went to the wealthy areas, the people there were friendly. “Of course, how like a capitalist country,” I thou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upermarket workers were among the unfriendly people that I met, and so was Kathy, our language class teacher. Language class was divided by skill level. I was in the lowest-level class, but I was the best student in it, and sometimes Kathy would leave the instruction to me. When students couldn’t understand what she said, she would go silent and glare at them, and sometimes even end the class early. She, who was then 27 years old, said that teaching us was too hard and quit after a mont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students from Korea, including me, were mostly young. I doubt that any of us had experienced such open rudeness in Korea. Also, most of the Korean exchange students were from wealthy families. Some had their own cars. But when they came to live in America, it was nearly guaranteed that they would be looked down upon from the get-go. They didn’t even express their anger at Americans. Clearly, they were unconsciously intimidated by this advanced country. I felt like I would be happy in America (because the scenery is beautiful) if only there were no Americans ther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72817568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t Huntington Gardens. Even when people were rude, the beautiful scenery made me feel happy. ©Jo Hyobi</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soon finished my exchange program and returned to Korea. At my own university, there were many Chinese exchange students. Before I tried being an exchange student myself, I had wondered, “If they’re wealthy enough to study abroad, why did they come here?”—even as I had thought, “But China is not as cool as we are,” and “Chinese exchange students only hang out with each other and are guarded around others.” But these kinds of thoughts were similar to the discrimination that I had been subject to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Chinese exchange students were in a position similar to the one I had faced. So I guessed that that they were guarded because their experience of living abroad had included discrimination and feelings of intimidation that they couldn’t talk abou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rossing a border and seeing a variety of races and experiencing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poor made me a stronger person and widened my perspective. In particular, the ability to easily understand what the foreigners living in this country feel or how they are trying to settle down in this country is a gift. Doctors say that judging what is right or wrong is a natural function of the frontal lobe, but I think that we can learn how to see without prejudice through the experience of crossing a bord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experiences began out of ignorant courage and ambition, but the fact that I developed a healthier way of thinking and more tolerance in that relatively short time is like a miracle to me. <span style="color: #c23cb5;">[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197" target="_blank">http://ildaro.com/7197</a> Published: August 8, 2014</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7 16:25: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Jo Hyobi)]]></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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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암 투병해보니 “힘내”란 말 대신 “버텨” ]]></title>
       <link>https://ildaro.com/1039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배가 아픈 날들이 지속되던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민서 씨는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큰 병원에 가 보라고 권유했을 때만해도, 시험 기간이 끝나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납을 하는 동안 진료실에서 굳이 나와서 “오늘 꼭 큰 병원에 가보라”고 재차 권유하던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참 뒤에나 대학병원을 찾았을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암 환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스트레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암 진단을 받고 수술한 이후, 3주 간격으로 8번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부작용은 정말 다양했다. 집 안에서 걸어 다닐 때도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차가운 것을 만지면 손이 아리도록 아파서 겨울철에는 쇠로 된 문고리를 만질 수 없었고, 냉장고에서 반찬 그릇을 꺼내는 것도 힘들었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담당 교수님은 이런 부작용들에 대해 ‘낫는다’ 생각하지 말고, ‘무뎌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경이 파괴되어 생기는 증상이라서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항암 중인 사람들이 흔히 겪는다는 부작용 외에도, 민서 씨는 눈이 빠질 것처럼 통증이 심했는데 그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2332696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집 근처의 강변 사진. 항암 치료 중 운동을 할 때 걸었던 곳이자, 치료가 끝난 요즘도 종종 산책하고 있는 곳이다 (민서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계획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살았던 민서 씨는 투병 와중에도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코로나 덕분’에 비대면 수업에 참여하고 과제도 제때 제출했다.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주위에 암 환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지금도 암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선입견으로 작용할까 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을 때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통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는 ‘잘 지냈어? 어떻게 지냈어?’ 하고 묻잖아요. 하지만 제가 아픈 걸 아는 사람들은 ‘건강 어때?’라고 물어봐요. 뭘 안 먹는다고 해도 ‘쟤는 저걸 안 좋아하는구나’가 아니라 ‘아파서 못 먹는구나’ 생각하게 되고요. 그 사람들에겐 관심의 표현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암 환자라는 사실이 다시금 자각되는 것 같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처음에는 주변에서 ‘우리가 해줄게, 도와줄게’ 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어떤 사람들은 ‘유별나게 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건강 관리를 위해 탄산음료를 안 먹거나 음식을 가려 먹으려고 노력하면 처음엔 이해 받다가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너만 건강 신경 쓰냐’는 식의 말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매번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스트레스이고, 누군가에겐 자신의 행동이 유난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투병 생활 중에 제일 듣기 싫었던 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미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내며 투병 생활을 하던 민서 씨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힘내’라는 말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의 의도는 알아요. 사실 할 말이 없잖아요. 암 환자라는데 거기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하지만 당시 제 입장에서는 힘이 안 나는데 어떻게 힘을 내며, 요새는 의학이 발달해서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말을 들을 때는 ‘본인이 같은 병에 걸렸어도 과연 현대의학을 믿으며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마음이 꼬이는 거죠. 아프니까 사람들의 말이 곧이곧대로 잘 안 들렸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민서 씨는 위로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힘내라”, “잘 될 거다”라는 말 대신 “잘 버텨내라”고 이야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희망적인 건 좋지만, 그건 근거가 없잖아요. 저는 버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여덟 번이라는 횟수가 정해진, 끝이 있는 항암 치료를 했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여덟 번만 버티자, 버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텼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6191433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항암 치료 기간 중 오르곤 했던 집 근처 산 정상. 3주 간격으로 항암을 받았던 민서는 1~2주차에는 강변 등 평지를 걷고, 3주차에는 한 번씩 이 산을 올랐다. (민서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민서 씨는 아픈 동안 “꼬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것은 꼬임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러움에 가까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새는 ‘암 걸린다’는 말도 (저는) 안 써요. 무슨 말 하면 암 걸릴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친구들끼리 장난 식으로 ‘너 죽을래?’ 같은 말도 쓰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말 안 해요. 진짜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잘 안 하게 돼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퇴원 전 식단 안내를 해주듯, 정신 건강도 상담해주었으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서 씨가 조심스러워진 건 일상의 대화 속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암을 겪은 이후, 이전과 다른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민서 씨는 자신이 겪었던 불안장애에 대해 털어놓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게 어떤 느낌이냐면요, 그냥 집에 누워 있으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아요. 길가에 서 있으면 도로 위의 차가 저를 향해 달려올 것 같고, 가로등 옆에 서 있으면 가로등이 저한테 쓰러질 것 같고요. 언제나 무언가 제 건강을 위협할 것 같은, 또다시 아플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불안함이 있는 거예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서 씨의 말대로, 암 환자들은 육체의 건강만 상실한 것이 아니라, 질병 경험으로 인해서 일상과 삶의 방향 등 주변의 상황들이 바뀌는 상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생존 이후의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 국내 여러 연구에서도 암 생존자가 일반인보다 정신 건강 문제에 더 취약하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년’ 암 생존자의 정신 건강을 별도로 분석한 통계가 아직 제한적이다. 해외 연구에서는 청년/청소년 암 생존자의 상당수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울 증상을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동안 만나온 여러 청년 암 생존자들이 말해온 것처럼, 민서 씨 역시 “몸도 아픈데 정신도 아프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정신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퇴원하기 전에 영양사분이 오셔서 식단 설명을 해 주세요. 이런 건 좋고, 이런 건 조심해야 하고요. 그런 것처럼 병원에서 운영하는 상담실이 있으면 좋겠어요. 퇴원을 앞두거나, 항암 몇 개월 차쯤 되었을 때 연계되어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3/202603024051636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항암 치료 기간 중 유난히 우울했던 어느 날, 가족들이 기분 전환하자며 데려간 남해의 한 바닷가. (민서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암 환자 돌봄 서비스가 있다면, 당사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큰 도움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픈 동안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보호자가 짊어져야 하는 고충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곁에서 케어해 줄 사람이 없는 분들은 정말 힘들 것 같아요. 보호자들도 참 힘들거든요. 저희 엄마는 직장이 없어서 저를 돌볼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직장을 다니는 보호자들은 퇴근하고 와서 환자 식단까지 챙겨야 하잖아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단순히 병간호를 넘어 식사 준비 같은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무료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양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면 암 환자와 보호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존 이후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을 졸업한 민서 씨는 한동안 직업을 갖기보다 가족의 일을 도왔다. 항암 치료가 끝난 지 고작 1년 남짓이어서 체력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친구들이나 대학원 동기들은 계속 앞서 나가는데, 저만 멈춰 있는 것 같았어요. 몸이 힘들면 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무리할 수도 없고요. 병이 낫는 게 첫 번째 목표인 건 맞지만, 낫는다고 끝은 아니잖아요. 다시 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아픈 사람들이 꿈꾸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서 씨는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많다.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앞서, ‘과연 할 수 있을까’가 더 큰 질문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게 패널티 하나가 붙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숨기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설령 상대가 괜찮다고 해도, 그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됐고요. 저는 역지사지를 많이 하는 편이라, 만약 제 자녀가 누군가를 (결혼하고 싶다고) 데려왔는데 아픈 사람이라면 나는 과연 축복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고 해도, 또 아프면 어떡하지, 체력적으로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고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하루를 살기 위해 애썼던 기억으로 오늘을 살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암 경험자라는 것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물었을 때, 민서 씨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늘 아쉬움만 남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암에 안 걸렸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면서도 암에 걸리고 나서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말하는 건 슬플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5년의 시간을 버려진 인생으로 남겨두기보다는,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 어떻게 조금이라도 의미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따지면 암이 행복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불행이고, 사건이고, 사고니까 무언가를 잃은 건 분명해요. 그렇다면 무언가를 얻어야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덜할 테니, 내가 이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챙겨주다니’라고 생각하며 가족의 사랑을 다시 돌아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인식의 변화를 얻을 수도 있겠죠.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서 씨의 경우, 가장 큰 변화는 하루를 바라보는 관점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예전에는 죽음이 늘 멀리 있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언제든 가까이 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일상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고 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6202432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투병 기간 동안 꼭 해 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간호해 준 어머니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대만 등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은 대만 지룽 정빈 어항에서 찍은 풍경. (민서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정말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려고 하고, 후회할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 일상에 익숙해진 요즘은 자주 잊어버리기도 해요. 그래도 한때 하루를 살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있어서, 의식적으로라도 다시 되새기려고 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다시 암에 걸릴래?’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죠. 과거로 돌아가 또 암에 걸리겠냐고 하면, 그건 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이미 겪은 일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 안에서라도 얻어갈 것들을 찾으려는 거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지는 스스로 선택해 나가는 삶. 청년 암 생존자 민서 씨는 그렇게 평범한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살겠다는 태도로, 오늘도 ‘암 이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53aba;">[필자 소개] 지아</span>. 개인의 몸과 건강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건의료 불평등을 해소하고 건강형평성을 높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 날카롭지만 다정한 글을 쓰고 싶다는 실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 길동무 문학학교 르포교실을 수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 많은 청년 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이가 되어주실 이삼십 대 청년 암 생존자 분들은 메일로 연락주세요. youngadultcancersurvivors@gmail.com</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6 12:16:00</pubDate>
	   <section>sc8</section>
	   <section_k><![CDATA[일다의 방]]></section_k>
	   <section2><![CDATA[몸 이야기]]></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지아)]]></author>
	   <category><![CDATA[몸 이야기]]></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3023204260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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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국회의원 한 명은 할 수 없는 게 없다?!]]></title>
       <link>https://ildaro.com/1039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Q</span>. 국회의원이 되면 그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나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의지를 내면 일반인보다 해낼 수 있는 활동과 변화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국회의원이 일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c738c1;">장혜영</span>: ‘국회의원 한 사람이, 혹은 정치인 한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정치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보았을 궁금증입니다. 국회 밖의 시민들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파란 돔의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회에 간 정치인들은 툭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 헌법기관인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막강한 권력자일까요, 아니면 의외로 무력한 정무직 공무원일까요, 혹은 둘 다일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5324383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1년 장혜영 의원이 김부겸 국무총리에게 질의하고 있는 모습 (출처: 장혜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주어진 권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선 분명한 것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정치는 숫자’라고들 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입니다. 대한민국 공직선거법 21조는 ‘국회의 의원정수는 지역구 국회의원 254명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46명을 합하여 300명으로 한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주어진 권위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가진 한 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법은 의결정족수를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합니다. 본회의도, 상임위원회, 소위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통과시킬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때로는 국회에서의 한 표가 아주 중요한 정치적 국면을 좌우하는 ‘캐스팅 보트’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원 개인의 능력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만들어내는 맥락에 가깝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부여된 권한만으로는 법안 통과는 고사하고 애초에 법안 발의조차 할 수 없습니다. 국회법상 의안발의는 1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제아무리 역량이 뛰어난 국회의원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폐지하는 입법활동은 기본적으로 협업이자 다수결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부 예산을 통과시키는 입법부의 권한 역시 한 사람의 의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아주 제한적입니다. 국회의원들은 다음해의 정부 예산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오로지 감액에 대한 의견으로 한정됩니다. 예산 수립은 기본적으로 행정부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여러 예산들에 무한정 감액 의견을 낼 수 있지만, 그 의견이 반영되는 프로세스는 다른 일반적인 법률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국회의원 혼자서 특정한 정부 사업의 예산을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실세 의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정부 예산에 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애초부터 모든 의원들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5331916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3년 장혜영 의원이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출처: 장혜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시민의 대표자’, 시민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사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평범한 국회의원 한 사람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다수결은 결코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닙니다. ‘결정’은 민주주의의 오메가일 수는 있어도 알파일 수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본회의장에 들어가 각 법안에 표결 버튼을 누르는 것은 그에 앞서 펼쳐진 온갖 의정활동을 마무리 짓는 행위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표결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저마다의 실력을 다채롭게 발휘할 수 있는 영역, 바로 ‘의제 설정’과 ‘여론 형성’ 과정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의제를 설정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시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 가운데 무엇이 국회에서 논의될 만한 공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하고 정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무수한 뉴스들 가운데 각각의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식을 골라 이에 대해 발언을 합니다. 그 발언은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짧은 포스팅일 수도 있고, 문제의 현장에서 열리는 기자회견 발언일 수도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의원회관의 크고 작은 회의실을 빌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모아 토론회를 열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의 언론인들이 상주하는 국회 내 기자회견장 소통관에서 다른 사람과 겹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기자회견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을 모아 공동의 액션을 보여줄 수도 있고, 10명 이상을 모아 관련 법안을 발의할 수도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언론인들은 설령 단 한 사람이더라도 국회의원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의미를 두며 취재를 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헌법에 의해 규정된 적법한 ‘시민의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략을 잘 세우기만 한다면 한 사람의 국회의원은 이런 자원들을 활용해 그간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의제에 대해 큰 관심을 모으고, 그것을 공적 의제로 설정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의제 설정의 연장선상입니다. 어떤 일이 한번 공적 의제로 설정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 이에 대한 갑론을박을 통해 의제에 대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 의제를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우호적인 여론을, 반대의 경우라면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은 자신의 창의력과 체력, 보좌진들의 역량이 허락하는 한, 신문이나 라디오, TV 등 미디어와의 접촉, 소셜미디어를 통한 콘텐츠 확산, 오프라인에서의 집회나 기자회견, 남들은 생각지 못한 참신한 이벤트 등 다양한 여론 형성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것은 그 자체로 강제력을 갖는 활동은 아니지만, 특정 의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이후 입법이나 예산 반영 등 다수결을 통해 강제력을 갖는 활동들의 든든한 기반이 됩니다. 달리 말해, 한 사람의 국회의원은 특정 의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능동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정치적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들이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 어떤 사안을 논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시민들을 대신해 그 사회의 여러 의제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 바로 개별 국회의원들의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의제를 설정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입니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권한 중의 하나가 바로 ‘정보 접근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행정부와 사법부에게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 여러 자료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달란다고 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국회의원과 그 보좌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공적 정보에 접근하거나 이를 요구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제출 요구는 국정감사 기간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일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의원 한 사람에게는 총 9명의 보좌진을 채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대개의 경우 두 명의 4급 보좌관은 각각 정무와 정책을 총괄하고, 두 명의 5급 선임 비서관은 정무 혹은 정책적 주력 사안들을 책임지며, 6~9급 비서관들 가운데 홍보와 회계, 수행, 정책 보조 등의 역할을 분담하고 인턴 비서관을 한 사람 두는 ‘기본 세팅’에 준하는 형태로 구성됩니다. 지역구 관리에 집중하는 의원들은 절반 이상의 보좌진을 지역구 활동에 배정하기도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명의 국회의원이 특정한 사안에 열의를 가지고 보좌진들과 함께 합심해서 ‘들이 파다 보면’ 국정 운영의 중요한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고, 이러한 정보는 향후의 의제 설정과 여론 형성을 추진해나가는 뼈대이자 골조가 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5334016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3년 ‘패션그룹 의류 재고 금지법’ 시민 서명을 받고 있는 모습 (출처: 장혜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국회의원이 진짜 일을 할 수 있으려면…</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다당제 정치개혁’을 이야기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생각하기에 개별 국회의원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은 바로 동료 의원들을 만날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특권입니다. 어떤 의제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법안을 추진하기 위해 5천만 시민들을 일일이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한 299명의 의원들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 만나기가 어렵다면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고 ‘친전’이라고 부르는 편지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첫 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처음에는 혼자서 시작하더라도 꾸준히 동료 의원들을 만나고 설득한다면 다수결을 위한 두 사람, 세 사람, 열 사람, 백 사람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허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국회는 모든 국회의원들이 동등한 1인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300개의 뱃지는 모두 똑같은 뱃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중 일부는 ‘미생’의 뱃지입니다. 비교섭단체의 뱃지는 결코 교섭단체의 뱃지와 같은 힘을 갖지 않습니다. 국회법상 교섭단체란 국회의원 20명 이상을 보유한 정당을 말합니다. 국회법의 별명은 바로 ‘교섭단체법’입니다. 국회법상 규정되어 있는 대다수의 정치행위들은 오로지 교섭단체들에게만 허용됩니다. 국회 사무총장의 임명, 유급 정책연구위원의 배정, 인사청문회부터 상임위원회까지 각종 회의의 개최와 안건 결정까지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교섭단체는 많은 경우 두 개 뿐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섭단체 의원들은 자신이 속한 각 상임위원회의 모든 정치일정을 협의할 수 있는 자당 소속의 간사를 통해 자신들의 의제와 입장을 반영할 수 있지만, 비교섭단체 의원들에게 그런 통로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회의장 앞에서 농성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퍼포먼스를 고민하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의원 간 권력의 차이는 단순히 그 정치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합니다. 표의 등가성이 구조적으로 훼손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교섭단체라는 허들은 결과적으로 교섭단체가 아닌 정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의사가 교섭단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의사에 비해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국회의원 한 사람이 혼자서 법을 만들 수는 없지만, 법을 만들고 예산을 반영해내는 과정에서는 자신과 보좌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의원이 해낼 수 있는 일의 폭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이라는 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원이 자신이 가진 가능성과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의 국회를 만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다당제 정치개혁을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정치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 즉 여러분입니다. 이제 제가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여러분이 만들어내실 수 있는 변화의 폭을 어디까지 상상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답이 궁금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35c6;">[필자 소개] 장혜영</span>.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a hre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 target="_blank">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5 09:29: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장혜영)]]></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2535348212.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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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익명의 삼인칭 죽음이 건드리다]]></title>
       <link>https://ildaro.com/1039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 노트북에는 쓰다 만 글을 모아두는 분류 폴더가 있다. 주로 죽음과 연관된 것이다.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에세이이고 소설이고 단상이지만, 그저 문장과 단어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덩어리들은 인큐베이터처럼 폴더에 머물고, 나는 이들을 삭제하지 않은 채 어떤 이어짐을 기다린다. 앞으로도 삭제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건드려진 더듬이의 어떤 떨림들이 남긴 흔적으로서, 내겐 포기할 수 없는 기억이고 증언인 까닭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때때로 나는 그 문장들을 새로 프린트해서 읽어본다. 글을 완성하겠다는 욕망보다는, 무뎌지는 통각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타자의 죽음이 눈을 크게 뜨고, 혹은 눈을 감은 채 나를 부르는 장면들이 거기 있다. 실제로 목격했고, 누군가의 매개로 보고 듣고 읽었던 존재 중단의 장면들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관련해 한 장면을 불러내 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청소를 하고 나서 거의 일주일 동안 몹시 괴로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어요. 그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신 부패 냄새와 … 피가 엉켜있던 옷가지와 이불들 … 마침 제가 생리 중이어서 제 몸에서 나는 냄새와 그 방에서 맡은 죽음의 냄새가 구분이 안 되면서 삶과 죽음의 그 섞여 듦에 대해 견디기 힘든 …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롭고 묘한 느낌이었어요. 이런 게 도시 생활인가, 이런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는 게 도시인가 … 충격을 받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독거노인과 그의 시신을 돌보고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을 들려준 이는 그중 한 사람, 누구나 함께 살다가 함께 늙고, 죽을 때도 그 사람들 사이에서 죽는 곳에서 나고 자란 청년 여성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이주해,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 방치된 삶과 죽음은 그의 하루하루를 생존의 분투로 만들었다. 그의 놀란 심장은 어두운 침묵의 심연에서 여전히 쿵쿵 낮게 울리고, 그의 충격에 감염된 내 심장 역시 불안하게 동요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곳곳에 죽음이 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자연의 일,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건 ‘이런’ 죽음이다. 죽음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람들 밖으로 밀려나, 삶의 의미도 죽음의 비(非)-의미도 확정받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 말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35627181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존재했음을 확정하는 메시지인 죽음. 그러나 ‘나의’ 죽음을 정작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소중한 타자를 잃을 때, 그 죽음은 내게 비교 불가능한 비극으로서, 나는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죽음을 대면할 수 있다. (Image by <a href="https://pixabay.com/users/heungsoon-4523762/?utm_source=link-attribution&amp;utm_medium=referral&amp;utm_campaign=image&amp;utm_content=2850969" target="_blank">HeungSoon</a> from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죽음, 살았음을 확정하는 메시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음은 삶의 필연이지만, 삶의 대부분 시간을 죽음과 무관하게 사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아니, 자연스럽다. 그러나 죽음이 동행하고 있다고 느끼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다. 둘 다 자연에 내재하는 속성이다. 영혼을 잠식하는 죽음 불안증, 죽음 집착만 아니라면 괜찮다. 자살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또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해도, 죽음은 상상에서조차도 먼 무엇이다. 죽음을 상상한다고 할 때 그 상상 역시 삶의 변형태일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죽음을, 삶을, 또는 죽음과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각각 따로 떼어내 이해할 수 있나. 아니면 둘은 서로를 존재케 하는 상호 마주 봄이나 얽힘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피노자(네덜란드 철학자 1632∼1677)는 명석 판명한 이성에 따라 사는 자유인일수록 죽음을 덜 생각한다고 말하고, 하이데거(독일 철학자 1889~1976)는 죽음(이라는 끝)을 향한 존재로서 살아내는 삶의 치열함을 말한다. 반면에 생명을 낳고 기르며 돌보는 일을 세상사의 토대요, 핵심이라고 보는 에코페미니스트는 탄생(이라는 첫 순간)에서 출발하고 펼쳐지는 삶을 강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장켈레비치(프랑스 철학자 1903∼1985)에 따르면, 죽음이라는 사건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즉 비-의미(non-sense)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일어난 죽음 사건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았음’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영속적이고 공고한 사실로 영원히 확정함으로써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독일 철학자 1892~1940)은, 죽음은 이야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인준이라고 말했다. 죽음이야말로 존재의 유일한 ‘문제’인 거다.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말고, 죽음을 ‘문제화’하라고 장켈레비치는 권한다. 『죽음』이라는 방대한 저서는 그가 시도한 ‘죽음의 문제화’의 결과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인칭 죽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존재했음을 확정하는 메시지인 죽음.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메시지는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수신된다. 나에게 귀속하는 ‘나의’ 죽음을 정작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 일인칭 죽음의 사유 불가능성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랑하는 소중한 타자를 잃을 때, 그 죽음은 내게 비교 불가능한 비극으로서, 나는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죽음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다. 이인칭 죽음이야말로 유일하게 주어진 (나 아닌) 나의 죽음 경험인 셈이다. 나의 죽음은 아니지만, 나의 죽음과 가장 유사한,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이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가 존재했음을 인준하는 죽음이 그 인준의 구체적 내용을 내게 양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과정은 나를 윤리적 회심(Umkehr)으로 이끌기도 한다. 장례지도사들은 말한다. 장례식은 오로지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며,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또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는 많은 말을 남기고 있다고. 두 발언은 서로 배치하지 않는다. 전자는 일인칭 죽음의 사유‧경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이인칭 죽음의 목격을 가리킨다. 죽은 이가 남기는 말은 그의 살아온 삶의 내력이고, 이를 통해 살아있는 이들은 일정한 윤리적 목격자와 해석자, 해석이 가리키는 특정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게 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익명의 삼인칭 죽음 속에서, 누군가의 ‘살았음’에 책임지는 삶의 역량</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숫자와 통계에 불과한 삼인칭 죽음에 둘러싸여 산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인구 통계학적이고 의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죽음. 위에서 소개한 고독사 장면에서처럼, 삼인칭 죽음의 극한 형태인 ‘이런 죽음’이 곳곳에 널려있는 삶의 환경 속에서 우리가 끝내 얻지 못하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이 없이는 내 삶의 고유한 의미도 사라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존재했음을 인준하는 메시지로서 죽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의 삶도 너의 삶도 소중한 것, 경이롭고 신비로운 것으로 변용된다. 죽음을 문제화한다는 건 삼인칭 죽음 속에서 이인칭 죽음의 계기와 감각을 발견하고, 이로써 누군가의 ‘살았음’에 책임지는, 즉 응답하는 삶의 역량을 늘리는 것, 회복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살았음이 ‘자연스럽게’ 전수될 때, 우리는 삼인칭 죽음의 폭력적 익명성을 벗고 이인칭 죽음의 유일하고 진실한 의미를 만나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35719923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시〉(이창동 감독, 2010)에서 ‘시’를 쓰고자 사물들 ‘보기’를 학습하던 양미자(윤정희 분)는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집단 성폭력으로 죽은 소녀의 죽음에서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보게’ 된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영화 〈시〉(이창동 감독, 2010)에서 ‘시’를 쓰고자 사물들 ‘보기’를 학습하던 양미자(윤정희 분)는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집단 성폭력으로 죽은 소녀의 죽음에서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보게’ 된다. 자기 손자가 가담한 이 소녀의 죽음을 더 이상 삼인칭 죽음이 아니라 이인칭 죽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 황제, 철학자 121~180)는 “그러니 이 아주 짧은 시간을 자연에 따라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 여정을 마치는 것이 좋다. 마치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자신을 낳은 땅을 찬양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준 나무에 감사를 드리며 떨어지는 것처럼”이라고 쓰고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김재홍 옮김, 그린비, 4권 48)</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35749456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그러니 이 아주 짧은 시간을 자연에 따라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 여정을 마치는 것이 좋다. 마치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자신을 낳은 땅을 찬양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준 나무에 감사를 드리며 떨어지는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Image by <a href="https://pixabay.com/users/julie-kolibrie-1044881/?utm_source=link-attribution&amp;utm_medium=referral&amp;utm_campaign=image&amp;utm_content=789140" target="_blank">Julie-Kolibrie</a> from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영화 〈시〉의 양미자가 만난 살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하는 올리브 열매는 단지 비유로 등장하는 사물이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책의 다른 장에서 “우주는 변화고, 인생은 믿음이다”(4권 4)라고도 말한다. 믿음이 인간의 생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살구와 올리브 열매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두 소멸과 상실 속에서 그러나 더 큰 우주적 생명 순환의 흐름에 가담한다. 썩으며 신비로워지는 삶의 빛을 나누는 감수자(甘受者)들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인칭 죽음의 목격자, 곁이 되어줌으로 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의 세계는 과연 누군가를 올리브처럼 떠나게 할 만큼 충분히 정의로운가? 질문하며 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47ac;">[필자 소개] 김영옥</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2023)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2021)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2024) 『돌봄의 상상력』(2024) 『돌봄과 인권』(2022)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2020)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3 13:54: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2303013882.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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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들로 채워진 의회, 바꾸려고요]]></title>
       <link>https://ildaro.com/1039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는 일본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역시 아직도 중고령 남성 중심이다. 이러한 가운데 2022년에 ‘2030 여성들이 바꾸자’며 지방의회에서 젠더 정책을 만들고자 하는 청년 여성들의 입후보를 지원하는 ‘피프티스 프로젝트’(FIFTYS PROJECT)가 시작되었다.(관련 기사 <a href="https://ildaro.com/9592" target="_blank">https://ildaro.com/9592</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이제 ‘FIFTYS PROJECT’는 2027년 있을 통일지방선거 입후보자의 활동을 자금 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2025년 11월 ‘우리들의 바통기금’(わたしたちのバトン基金)을 설립했다. 기금 스태프인 스즈키 나리사(鈴木なりさ) 씨의 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주]</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span style="font-family: 바탕;"><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234208286.jpg" alt="" width="750" border="0" /></span></div><p class="body_img_captio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2025년 11월 6일에 열린 ‘우리들의 바통기금’(わたしたちのバトン基金) 설립 기자회견에서. 기금 대표인 노조 모모코 씨(왼쪽)과 스즈키 나리사 씨의 모습. (필자 제공)</span></sp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바탕;"><br />2030 여성 입후보자에게 허들은 ‘자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2년 여름, “정치 분야의 젠더 불평등, 우리 세대에서 없애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할 20~30대 여성(시스젠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X젠더를 지원하는 ‘FIFTYS PROJECT’(<a href="https://www.fiftysproject.com" target="_blank">fiftysproject.com</a>)를 시작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3년 통일지방선거 때는 29명의 입후보자를 지원했고, 그 중 24명이 당선되어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지역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채 간과되어온 지자체 직원들의 젠더 격차 해소, 월경 정책 추진,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 등을 각자의 지역에서 착실히 추진해 왔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FIFTYS PROJECT는 현재, 2027년 4월에 있을 통일지방선거의 입후보자 100명 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한 일본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젠더 정책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일하는 정치인을 늘려나가고자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20~30대 여성들이 입후보하는 데 가장 큰 허들 중 하나가 ‘자금’입니다. 공탁금, 선거비용, 선거 준비 단계부터 선거까지의 생활비, 낙선할 경우 취업할 때까지의 생활비 등 어느 정도 저축이 있는 분이라도 경제적인 불안은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시민들이 모아주시는 돈을 기금으로 예치하고 이를 입후보자에게 전달하여, 당선될 경우에는 기금을 다시 기부받아 미래의 후보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의 순환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우리들의 바통기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왜 기금을 설립했냐고요? 저 자신이 돈이 없는 상황에서 입후보와 낙선을 경험하면서, 입후보자에게 따라붙는 ‘돈의 벽’의 엄중함과 억울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금 구조로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span style="font-family: 바탕;"><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236048199.jpg" alt="" width="750" border="0" /></span></div><p class="body_img_caption"><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들의 바통기금’(わたしたちのバトン基金) 스태프인 필자 스즈키 나리사(鈴木なりさ) 씨. 26세에 무소속으로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했던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여성 입후보자들을 위해 기금 마련에 나섰다. (필자 제공)</span></sp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바탕;"><br />‘돈의 벽’ 실감했던 나의 입후보 경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스물여섯 살 때, 무소속으로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했습니다. “왜 무소속?”이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기존의 정당에서 공천을 받으면, 조직의 표도 얻을 수 있고 자금 지원도 기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소속을 고집했습니다. 정당에 구속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정당조직 내부가 여전히 가부장적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뜻은 창대했지만, 현실은 팍팍했습니다. 무엇보다 ‘돈’ 때문에 힘들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입후보를 하기 전까지 저는 혼자서 작은 카페를 경영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비어있는 시간에는 다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축한 돈은 거의 없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한 상황에서 결심한 입후보. ‘젠더평등을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공감하며 저를 지지해주신 분들은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어려움이 있고, 그 고통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학생, 육아 중인 분, 부모 돌봄을 하는 틈을 타 와주시는 분. 그럼에도 자기보다도 훨씬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정치를 바꾸고 싶어하는 분들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두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서도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공탁금, 전단 인쇄비, 변함없이 드는 생활비 등으로 갖고 있던 돈은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오랫동안 소중히 보관해두셨던, 제가 어릴 때부터 받아온 세뱃돈 저금을 깨서 선거에서 싸웠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정책을 펼칠지 말씀해보세요. 당신을 지지하고 있으니…”라며 저를 불러세운 분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령의 남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끝내 이야기는 정책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쁘니까 괜찮아”</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혼했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 낳고 하면 어때?”…</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명백한 언어폭력이었지만, 자금에 쪼들리던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화를 내지도,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한 귀로 흘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만약 그때 ‘우리들의 바통기금’이 있었다면… 언어폭력을 견디던 시간을 시민들의 목소리를 더 듣는 데 쓸 수 있었을 겁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23708771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입후보하는 사람을 홀로 두지 않겠다” ‘우리들의 바통기금’ 크라우드펀딩 홍보 포스터. 1천만엔 펀딩을 목표로, 2025년 11월 6일~2026년 1월 31일 진행됐다. <a href="https://www.batonkikin.com" target="_blank">https://www.batonkikin.com</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는 중고령 남성들로 채워진 의회…</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평등에 뜻 있는 입후보자에게 힘 실어줘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흔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경험을 뒷세대인 20~30대 여성들이 거쳐야 할 시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입후보라도 해보았지만, 그건 자영업자라서 시간에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이를 키우는 중이었다면, 돌봄을 하고 있었다면, 필수인력(essential worker)처럼 휴가를 쓸 수 없는 직업이었다면, 초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닐 시간조차 내지 못하고 입후보를 포기했을 겁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의 일본 정치는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만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 결과, 의회에는 비슷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 즉 중고령 남성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생활인들의 절실한 목소리가 가닿지 않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확신합니다.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한 미래의 입후보자가 전국 각지에 수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돈도 시간도 없지만, 젠더평등을 실현하고 싶다는 뜻을 가진 20~30대 여성, 논바이너리, X젠더들이 있다는 것을. 그분들이 당연하게 입후보할 수 있는 사회를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신도 이 바통을 이어갈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2 13:32: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스즈키 나리사)]]></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22391133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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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차별금지법은 ‘소수자’를 위한 법이다?]]></title>
       <link>https://ildaro.com/1039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1월 진보당 손솔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이 발의됐으며, 이어 2월엔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정부입법 형태로 처음 발의되었으나, 일부 종교계의 반발로 무산된 이후 여러 차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음에도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채 매번 자동 폐기되어 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이 부재한 기간 동안 노키즈/노시니어존 논란, 이주민 배제, 혐중 정서, 여성혐오,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대한 백래시, 성소수자 차별 등이 사회 곳곳에서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져 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기 때문에 혐오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로서 차별금지법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근거 없는 음해, 그리고 단순한 오해가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법 제정을 가로막는 커다란 방해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0040843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12일, 손솔 진보당 의원이 22대 국회에서의 첫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손솔 의원 페이스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월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차별금지법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알아보자〉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진보당 손솔 국회의원과 진보당 여성엄마당,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공동 주최하고, ‘22대 국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분야별 연속 토론회’의 일환으로 마련된 자리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의 저자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손솔 의원,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반차별팀 여경 팀장이 패널로 참여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사회 구성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홍성수 교수는 먼저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저성장, 고령화 등 복합적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한 후,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게 됐고, 이에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평소에 호감을 갖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확산되었다.”라고 분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욱 문제는 “이것이 지난 10년간 해결되지 않았고, 제대로 대응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인권 침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만, “차별 개념을 대략 7줄 정도로 적은 정도”에 불과하다. 홍 교수는 “차별이 어떻게 7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되물었다. 제대로 차별을 설명하고 이를 규정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을 통해 수십 개의 조문으로 차별 개념을 구체화해야 시민들이 무엇이 차별인지 알고 예방할 수 있으며, 피해자도 구제받을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을 ‘소수자를 위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바로잡았다. 홍성수 교수는 “누구든 상황에 따라 소수자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수자 집단도 어떤 경우에는 다수자의 지위가 되기도 하고, 또 다수자 지위에 있는 집단도 어떤 맥락에 따라선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 또 어제까지는 다수자의 지위였는데 내일부턴 소수자의 지위에 놓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홍 교수는 “이 법은 결국 이 공동체를 살아가는 모든 시민에게 꼭 필요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차별금지법은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미래의 예기치 못한 차별로부터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라는 설명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00435360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12일 저녁,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차별금지법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알아보자: 22대 국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분야별 연속 토론회〉가 열렸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현행법은 ‘복합 차별’ 겪는 사각지대 해소 못해…</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이 여성 노동자에게 보호막 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경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반차별팀 팀장은 “한 사람은 성별이라는 정체성 하나로만 규정되지 않는다”라며, “개인이 갖고 있는 정체성은 지역, 나이, 학력, 고용 형태 등 여러 정체성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녀고용평등법과 같은 기존의 개별적 차별금지법만으로는 채용 과정에서의 외모 차별 혹은 사상검증 등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불이익을 모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사유를 포괄하여 규제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경 팀장은 최근 몇 년 간 ‘페미니스트 사상검증’, ‘민우회 같은 여성단체를 SNS에서 팔로우하고 있어서’, ‘짧은 머리라서, 페미로 보이니까’ 등의 이유로 여성들이 폭력과 배제를 당한 일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런 사상검증을 ‘고용주가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이다’라고 차별금지법에 근거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건,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보호막을 하나 더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을 발의한 손솔 의원 또한 고용형태의 변화와 불안정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노동 영역에서의 차별금지 방안을 고민하며 법안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개념에 들어가지 않는 노동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직 등 다양한 형태의 ‘노무 제공자’를 포괄하여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새로운 차별 유형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손솔 의원은 최근 배달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을 배정하는 AI가 여성과 고령자에게 일을 덜 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그와 관련된 알고리즘이 공개되어야 하고, 정말 차별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빨갱이’, ‘페미’ 등 직장에서 사상검증을 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도 차별의 범주에 넣도록 했다.”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우려와 달리, 형사처벌 남발되지 않을 것</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의 효과는 처벌이라기보다 ‘피해 구제’와 ‘예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이 법이 제정되면 형벌이 남발하고 표현의 자유가 사라져 아무 말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홍성수 교수는 “차별을 했다는 것만으로 형사처벌을 받는 건 사실상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차별로 형사 고소가 되면 “사법부는 보수적으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무죄 판결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기에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차별시정 기구를 두고, 거기서 권고를 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걸 일차적인 해결 방법으로 두고 있다.” 홍 교수는 “권고 자체는 법적 강제성이 없지만,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차별 인정은 해당 기업이나 기관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며, 현재도 사기업을 포함해 약 70~90%의 높은 권고 수용률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가 권고를 무시하는 경우, 피해자는 민사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그 때도 차별금지법이 활용될 수 있다. “인권위가 조사하여 마련한 설득력 있는 논거와 증거들이 법정에서 피해자에게 매우 유리한 증거로 쓰이게 되어 승소 확률을 크게 높인다. 또한 차별금지법안엔 소송 지원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처럼 차별금지법은 일반적인 차별 행위 자체를 당장 형사 처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별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해고, 강제 전보, 승진 누락 등 ‘보복성 불이익 조치’를 가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하며, 형사 처벌도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내부 고발자와 피해자가 추후에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내어 신고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200458100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2대 국회 2번째 차별금지법안(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 대표발의)에 대한 입법예고가 시작되자, 시민들에게 찬성 의견을 남겨달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입법예고 기간은 2월 24일까지다. <a href="https://bit.ly/3OehBpK" target="_blank">https://bit.ly/3OehBpK</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차별금지법의 역할과 효과는 처벌이라기보다 ‘사전 예방’에 더 방점을 맞추고 있다. 홍성수 교수는 “차별 시정 기구를 두고, 그곳이 제대로 활동을 함으로써 변화가 생기면, 기업이나 대학 등에서도 인권센터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차별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라고 짚었다. 이러한 기구들은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에도 힘쓰게 된다. “이런 선순환이 되는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게 차별금지법의 기본”이라고, 홍 교수는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국가’가 차별을 시정하고 예방하는 계획 세워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 제정의 효과는 여러 방면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패널들은 입을 모았다. 여경 팀장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미디어 안에서 보여지는 차별 표현 및 메시지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미 방송통신 심의기준이 있긴 하지만, 심의위원이 누구냐에 따라서 심의 안건이 올라오더라도 안건 상정을 하지 않거나, 해석을 이상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기본법’이 생긴다는 건 분명 의미가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학교 교육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인신공격이나 편을 가르는 게 아니라, 차이와 차별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 안에 성평등 교육이나 차별과 관련된 인권감수성 교육이 포함되면 다양성과 포용성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손솔 의원은 국가 차원의 차별예방 계획이 수립된다는 점 또한 주요한 효과로 꼽았다. 법안엔 “국가에 차별 시정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고, 국무총리실 등 국가기관이 5년마다 차별 시정 및 예방을 위한 종합 계획을 의무적으로 세우게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손솔 의원은 계획을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계획에 맞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이 타당하며 현실 가능성이 있는지 등의 논의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20 18:0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200754943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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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What Is the Key to Breaking Down Fear and Division?]]></title>
       <link>https://ildaro.com/1039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ight before graduation, opening up my bucket list fi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high school, I had two phrases that kept me going through the worst of it: “volunteering abroad” and “never give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se two phrases shook up my young, high-school-girl heart. But everything about my present, as a student stuck in the bleakness and restrictions of the countryside, was stifling. I think it was because of that that my baseless self-confidence grew and I began to dream of a “scene change” in my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four years later, I was on the cusp of graduating university without having done anything you could call a challenge. “If I get a job now, my life will have no place for reckless bravery!” I thought. One day, for the first time in a long time, I opened up my bucket list file. The words “volunteer abroad” jumped out at me. I immediately found some websites run by that kind of organization and began to fill out an application for long-term volunteering abroad.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aster than I expected, I received the news that I had been accepted, and I went straight to a workshop held by organization A. But the workshop was different than I thought. For 3 days and 2 nights in the mountains in Gyeongsan, all we did was hold religious events, listen to endless speeches, and learn dance routines to Christian contemporary music. While I was doing the routines and wondering, “What is this?” though, I received word from organization B that I had been accepted for long-term volunteering at an overseas posting. I quickly had an interview with organization B and then participated in their orientatio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959579035.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I volunteered in India and Nepal for a year before graduating university. ©Jo Hyobi</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n June 2011, I went to Incheon Airport for my flight to southern India. I smiled as hard as I could in front of my parents, but really I was anxious. It wasn’t until then, as I was actually leaving, that I felt worried about the situations I was about to face and really thought about the attitude necessary for volunteering. Had my optimism stabbed me in the back? But, like the perfect example of an optimist, when I couldn’t figure out what to do about it, I fell into a deep sleep.</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two faces of the first Indian I met at the airpor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got off the plane in Bangalore and went through Immigration. A friendly-looking officer saw the U.S. student visa in my passport and spoke to me in English. But when I, flustered, couldn’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gave answers that didn’t fit his questions, his expression suddenly changed. Saying he needed to check whether my passport was forged, he immediately placed several calls. And he shouted, “If you don’t have anything that can verify your identity, go back immediately! If you don’t, our police will take you a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cared by this unanticipated situation, I couldn’t even look the officer in the eye. A co-volunteer with a lot of experience abroad, who had finished the immigration process before me, spoke up quickly. “She was only in the U.S. for 4 months, so don’t judge her based on the student visa. People feel uncomfortable and can’t speak well when they meet a foreigner. You know what I mean, ri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at, the officer’s manner became friendly again, as if nothing had happened, and he stamped my passport. I’ll never forget the impression made by the first Indian I met, who showed two faces within seconds. We were standing only a meter apart but it seemed like there was a glass wall between u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us intimidated, I went to the southern Indian countryside. It was a place where caste divisions and gender discrimination were still powerful. Groups of two to three of us would be sent to four areas in an Untouchable town about 30 minutes from the place we were staying, and we would teach art, music, and physical education. I wanted to change my impression of India to a positive one. Knowing I would be there for a year made this change cruci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leaving our lodgings, we had to check our outfits. We had to avoid tight T-shirts and drape long scarves so that they covered our bodies. Even then, all eyes were on us when we went to the market. Everyone stopped what they were doing to stare at us. When I asked about this later, I was told they looked at us “because the whiteness of your faces is surprising.”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where were the young women? I could see only men and middle-aged women. In the marketplace, there were many people chewing tobacco. Chewing tobacco makes your tongue red. People with blood-red lips and eyes that were yellow and bloodshot. The fear that I had started feeling at the airport continued, stopping me from breaking down boundarie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Volunteering is like the one million volts of joy that flow from Pikachu</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afternoon, I looked around the Untouchable village where I would be teaching. The people there gave off different vibes than those in the marketplace. In the houses, mothers and children were playing innocent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ough they were mothers, they seemed to be my age or younger.  I drank every drop of the chai tea that they kindly gave me. The feelings of anxiety and division that I had had since I arrived in India evaporated in the narrow-alleyed village. </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900208509.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e in India. Being helpful gave me unimaginable joy ©Jo Hyobi</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n class, the students were obedient, even though we couldn’t communicate with each other well. There was no trace of dishonesty in their faces. In addition, the children and their parents always showed concern for me, asking if I had any problems. I think it was because they knew that we were there just to help them, without putting religious pressure on them. I wanted to give everything to these villagers. I wanted to help with anything that I coul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those two months, I felt that volunteering was something inexpressible, much more than simply heartwarming. It had a power like Pikachu’s, sending out a million volts of joy and illuminating everything all the way into space. The villagers’ warm demeanor, the stars at night, the sound of the prayers said at the temple, the fragrances and atmosphere were more than I had been able to imagine. The cockroaches and mice that roamed around our lodgings were no more than momentary surprise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India-Nepal border, where cows and people slowly come and g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at only lasted for a short while before the Indian police started to bring us in to the police station. We were notified that our applications for residence had been denied, and so were ordered to return to Korea. My sense of regret at finding out that we had to return to Korea after two months, just when the volunteering was starting in earnest, was unspeakably deep. I went to the area where we had been teaching in order to say goodbye. When I saw the people, who greeted me warmly and asked me why I had been away for the past few days, I began to c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went to the big city and waited a month for our residence permits to be approved. But the situation didn’t get better, so in the end we were transferred to Nepal. I took my large rolling suitcase and my 45-liter backpack and got on the train [with the others]. It was a 48-hour trip, and I was worried because in addition to sitting in coach class with the locals, I had a lot of luggage. I chained my bags to a pole, put a padlock on anything that had a place for one, and, on my guard, slept fitful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the morning of the second day to begin in the train, a family across the aisle offered me something to eat. At the locals’ friendliness, my vigilance started to melt away again. The dark and dirty train no longer felt stifling. After getting off the train that had held us for 48 hours, we slept for a night in Gorakhpur, India. We didn’t know anything about the area, so an Indian college student that had been sitting next to us on the train helped us. The young man called people he knew in order to find a cheap, clean hotel, and even carried some of our luggage as he showed us the 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soon arrived at the town of Sonauli, which marks the border between India and Nepal. Picturing, at the word “border,” the border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the 38th Parallel), I had a strange anxiety that there would be landmines and wilderness, but it turned out to be a totally different landscape. A seemingly-free coming-and-going across the border, the slow movement of cows and people. We were just in time for the festival of Dashain, and so people appeared to be enjoying themsel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a roadside office that was hardly more than a pyeong [35 square feet], we were admitted into Nepal after attaching tourist visas to our passports and getting stamped. There was no search of our bags or inspection of our passports. There was only a friendly introduction to the rickshaw that could take us to the bus terminal so we could go to Pokhara, Nepal’s second-largest cit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flecting on the sense of superiority felt by the “help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ere no buses because of the festival, so we took a van from the border to Pokhara; later we found out that the price we paid was a rip-off. From Pokhara we took two buses, and arrived at a village in northwestern Nepal with an altitude of 8,500 feet. A completely vacant desolation approached. As our body temperatures slowly dropped, shingled roofs with holes here and there came into view. Finding ourselves here so soon after India’s high, humid temperatures, we thought first not of volunteering but of surv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did homestays there. The mother and grandmother I lived with kept cooking for me just in case I was hungry. They also made traditional Nepalese clothes for me. I wanted to adjust to this new place quickly, in order to show my gratitude for this kindheartednes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order to raise our body temperatures when we woke up in the morning, I did stretches with my homestay family in the yard. We could see travelling Westerners pass by. One of them, a German woman, came to me and said, in a friendly way, “I want to give you a present. It’s a nice ballpoint p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froze. Did she think that I was a person who didn’t have a ballpoint pen?! While I was just staring at her, my homestay father said, with exaggerated gestures and intonation, “Thank you. Could we have one more?” He soon sent them on their 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face flushed. Seeing that German woman was like looking at myself. I went back to my room and thought for quite a while. I wondered if I’d done anything to the locals that would make them feel so disrespected. Whether I hadn’t been acting out of a sense of superiority that I hadn’t been aware of... I suspected that I had. I was ashamed. I had been giving as much as I could to help the locals, whether they were child or adult, but I really had no idea how they saw m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anging the way I look at foreigner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9004412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In art class at a school for children of Nepal’s lower castes. In India and Nepal, caste is still strongly in operation culturally, so the right to education and the freedom to choose one’s work are limited. ©Jo Hyobi</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round the time that I was inspired to think deeply about the attitudes of those who came to poor countries to do volunteer work, the people in the village started to move south for the winter. Eventually, we also decided to move to a southern village. As a place where the weather was milder and there was plenty of food, development and aid were becoming well-established there. A local school principle and the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helped us get settled. I quickly started teaching arts classes at a school for students of lower castes and one for disabled studen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at was also for a short time, as conflict sprung up between us and the NGO that had sent us. Not only would they not take responsibility for the safety of those they had dispatched, but they announced that they would not be giving us the 3 million won they had promised for our living and working expenses. As the friction continued, I worried that I was losing the warm heart with which I had started my volunteer work. So for the remaining time, I did my work not as part of an NGO but independently. That motivated me to think about the true meaning of volunteer work. I also started to reconsider the activities of international aid organizations that play on people’s emotions in order to attract dono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finishing my year of volunteer work and returning to Korea, I visited my parents’ house in Yangju, Gyeonggi Province. The foreign laborers in the area caught my eye. Even just at the market in front of their house, there were many Nepalese people. Watching them discussing dried laver for kimbap, salted dried laver, dried green laver, and dried kelp, I was reminded of myself when I was shopping in Nepal and trying hard to fit 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ental borders that these people from a poorer country were feeling must be much higher than those that I had experienced. In my experience, the thing that can break down mental borders is no other than the expression of the other person. Everyone feels scared and isolated in an unfamiliar place. More so when they can’t speak the local language. At that time, someone’s attitude has the capacity to terrify and daunt us, or it can melt fear away in moments. So I have started greeting foreigners with a smiling face, hoping they can break down their mental borders about this place as quickly as possi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experience volunteering in India and Nepal didn’t just show me several paths that my life could take, it also changed considerably the way I look at foreigners and my attitude towards them. <span style="color: #c830ce;">[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189" target="_blank">http://ildaro.com/7189</a> Published: August 6, 2015</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19 12:57: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Jo Hyobi)]]></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62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190422610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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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부채와 금융에 저당 잡힌 집, 시간, 삶을 찾기 위해]]></title>
       <link>https://ildaro.com/1039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루하루 급변하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편리한 것 같으면서도 무섭고, 코스피 5000 돌파 뉴스도 금융자산이 없는 서민의 입장에서는 떨떠름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경영자는 인공지능 로봇의 발달로 이젠 “노동 소득의 개념이 사라지고, 투자의 시대 또는 보편적 고소득(Universal High Income)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저축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에 대해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노동 소득의 시대는 갔다, 투자의 시대가 열렸으니 저축하지 말고 투자하라고 하는 말은, 너무 속이 보이는 뻔한 말”이라고 꼬집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축하지 않고 투자하면 할수록, 일론 머스크에겐 더 많은 배당금이 쌓이기 때문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80224539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6일 서울가족플라자에서 열린 체제전환운동포럼의 세번째 기획 세션 〈부채와 민중의 권리: 저당잡힌 집, 시간, 삶을 되찾자〉 발제자들이 단상 위에 앉아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빚 권하는 사회, 빈곤과 불평등 확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월 5일부터 7일까지 서울가족플라자에서 열린 체제전환운동포럼의 기획 세션 중 〈부채와 민중의 권리: 저당잡힌 집, 시간, 삶을 되찾자〉에서 나온 발언이다. 김윤영 활동가는 신자유주의와 금융화가 어떻게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개인을 ‘빚’의 굴레로 몰아넣는지 구조적으로 분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지구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예전처럼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다. 이제는 자신이 갖고 있는 부를 활용해 더 많은 배당을 받고, 금융적 이익을 얻는 방식으로 더 부자가 된다. 그들의 재산은 엄청난 재능의 결과인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자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에게 부가 점점 더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기업들이 단기적 금융 이익을 위해 비용 절감과 해고를 단행하고, 불안해진 노동자들은 소득 보전을 위해 다시 금융 투자에 뛰어드는 악순환”을 설명했다. “특히, 주거, 의료, 교육 등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 부족할 때 개인은 빚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한국의 가계 대출은 총 1,925조원으로 GDP 2,549조원의 약 75%”에 달하며, 산업에 대한 대출 1,926조원과 비교해도 비등할 정도로 “가계 대출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계 대출 중 주택담보 대출이 58%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왜 이렇게까지 가계 대출이 많아졌을까? 김윤영 활동가는 신자유주의 정부가 실업 대책이나 공공성을 마련하는 복지 대신 ‘저금리 대출’을 복지로 포장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득이 높고 자산이 많은 사람은 안정적인 은행 대출을 활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금리가 높은) 나쁜 대출로 이어지고, 이는 또다시 빈곤과 불평등의 확대로 이어진다. 높은 이자는 당연히 부담이 되고, 만약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되면 정말 해결할 수 없는 부채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서 지원이 필요한 건, ‘조금 더 나은 (저금리) 대출’이 아니라 “대출 없이 살 수 있는 공공성 회복”과 “필수재에 대한 권리 보장”이라고 김윤영 활동가는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투기 상품이 된 집, 전세사기와 주거 위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동규 민달팽이 유니온 활동가는 전세사기 사태를 통해, 주택의 금융화와 투기적 구조를 비판했다. “전세사기는 단순한 개인 간 사기가 아니라, 주택을 투기상품으로 만들고 세입자의 보증금을 약탈적으로 동원한 구조적 결과”라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동규 활동가는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자원인데, 이것이 투기상품이 되었다는 것”의 문제를 지적했다. “정부의 전세자금 대출 확대는 겉으로는 세입자를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임대인의 ‘갭투자’(전세를 끼고 주택 매입) 자금을 지원하는 꼴”이 되었으며, “대출이 늘어날수록 전세가와 매매가가 동반 상승하는 악순환을 낳았다.”고 꼬집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막대한 전세대출을 통해 팽창한 주거비와 집값으로 누가 이득을 얻었을까?” 서 활동가는 “첫째는 (갭)투기를 위한 자금을 손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지주, 즉 다주택 소유자”이며, “둘째는 대출이자를 안정적으로 가져간 은행”이라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6년 1월 초 기준으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피해’로 인정된 건수만 해도 35,909건에 달한다. 서동규 활동가는 대규모 피해임에도 “정부가 전세사기를 ‘사회적 재난’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식으로 피해 구제에 재정을 쓰지 않으려 했던 점”에 대해서도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세사기 피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 활동가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조직화된 투쟁을 이끈 것, 그리고 그것이 ‘경매 유예’와 ‘특별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앞으로는 “소유권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주택의 탈상품화와 공공임대 확대, 세입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싸움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의 ‘역할’을 저당 잡는 금융자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07년 모 여성전용금융 광고 중엔 “남편한테 말하자니 그렇고, 은행 가자니 주부라서 대출이 안 나오고...”라는 말이 나왔다. 혜진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당시 대출 광고에서 강조했던 게 ‘여자들만의 비밀을 지켜준다’, ‘여자라면 누구나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과거 여성전용 대출 광고들이 여성의 가사노동, 양육, 그리고 드러낼 수 없는 사적 영역의 비용(임신중지 등)을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금융시장이 여성을 타깃으로 한 건, 그 이유 뿐만이 아니다. 혜진 활동가는 “금융 자본이 여성을 선호하는 이유는 연체율이 낮기 때문”이라며, “여성들은 관계적 압박(가족, 평판)에 취약하며, 이를 담보(명예)로 삼아 빚을 갚게 만드는 추심 구조가 작동한다.”고 분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때로 여성의 부채는 가계 위기 속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IMF 외환위기 등 경제위기 시,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와 돌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이 빚을 지는 경우”가 있었다. 혜진 활동가는 “이럴 때 여성들은 가정 내 돌봄 의무를 지는 동시에, 노동을 통해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에 놓인다.”고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적 위기가 가계로 전가되면서, 실상은 사회적 위기 상황임에도 ‘가계 위기’로 축소되어 드러나는데, 이때 가정 내 위험을 관리하고 완충하는 역할이 여성에게 배치됨에 따라, 사회적 위기에 대한 리스크는 여성의 삶으로 이전된다. 사회적 위기는 여성의 삶을 통과함으로써 위기를 완화하고 지연시키고자 하지만, 완화와 지연은 종종 실패한 채 여성의 삶에 축적된 부채 부담과 버거움만을 남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혜진 활동가는 부채가 젠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 여성의 취약성을 파고들어 약탈하는 구조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왜 갚지 못했나? 라고 개인을 비난하는 대신, ‘왜 그렇게 쉽게 큰돈을 빌려주는가?’라고 물으며, 부채 문제의 책임을 채무자에서 약탈적 채권자로 전환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채권자-채무자 대립이 아닌 ‘커먼즈 금융’, 빈고의 실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채와 민중의 권리: 저당잡힌 집, 시간, 삶을 되찾자〉 기획 섹션의 발표자들은 부채의 구조적 문제, 금융시장의 이면, 심화되는 불평등을 지적하며, 더 많은 공공임대 등 공공성 회복을 요구하자고 얘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김지음 빈고 활동가는 거대 금융자본에 맞서는 시민사회의 구체적인 대안으로 빈고(빈마을금고, <a href="https://bingobank.org" target="_blank">bingobank.org</a>)의 실험을 소개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8025094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김지음 빈고(빈마을금고) 활동가가 ‘커먼즈 금융’에 대해 설명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김지음 활동가는 “우리가 노동자와 소비자로서는 자본에 맞서 단결하지만, 금융 영역(예금, 대출)에 들어서면 철저히 자본가의 논리(더 높은 이자, 더 낮은 금리)를 따르며 채권자나 채무자로 분열된다.”고 지적했다. “자본 수익(이자)을 추구하는 채권자와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채무자의 대립 구도를 깨야 한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신 “서로 자본 수익을 ‘사양’하는 ‘공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그 예가 “예금자는 이자를 받지 않음으로써 돈이 자본으로 변하는 것을 막고, 이용자는 적정한 비용을 분담하며 상호부조”하는 ‘커먼즈 금융’이다. 이를 더 키우면, “그러니까 기존 은행에서 돈을 빼내어 빈고와 같은 공동체 은행(공유지)으로 옮기면, 그 자체가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이자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논의는 ‘보편적 고소득’이라는 달콤한 말보다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빚 권하는 사회’에 맞선 다양한 실험과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18 16:59: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180403969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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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농업 접근성은 기본적 인권입니다”]]></title>
       <link>https://ildaro.com/1039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부터 일본은 주식인 쌀 판매가의 폭등으로 시민들이 생활 불안정을 호소하고 있으며, 식량안보에 대한 불안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정부가 ‘농민의 소리 무시하고 농촌을 괴롭힌 결과’가 돌아오고 있는 거라며, 농업정책의 실패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관련 기사: 쌀값 폭등 ‘식량위기’ 임박한 일본 반면교사 삼아야 <a href="https://ildaro.com/10197"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97</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늦가을부터 햅쌀 판매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쌀 가격은 내려가지 않고 있는 상황. 과연 앞으로 공급량은 충분할까…. 그런 걱정을 안고 농업연구자인 사와노보리 사나에(澤登早苗)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와노보리 씨는 도쿄 다마시의 게이센여자학원대학에서 30년간 ‘생활원예’라는 실습과목을 유기농업으로 가르쳐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74356329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농업연구자 사와노보리 사나에(澤登早苗) 게이센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야마나시현 출생. 야마나시시 마키오카초에 있는 ‘후르츠 그로워 사와노보리’(Fruits Grower Sawanobori)에서 포도와 키위, 주스, 바이오와인을 판매한다. 책 『포도농장과 대학의 나날에서 발견한 ‘안심할 수 있는 장소’ 만들기』(ブドウ園と大学の日々からみえてきた安心の場づくり) 출간 예정. (촬영: 우이 마키코 ©宇井眞紀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쌀은 싼 게 당연한가요?” 반문하는 사와노보리 씨</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와노보리 씨에게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쌀값 폭등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입을 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반정책(쌀 생산량을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일본은 논의 일부를 휴경하거나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반강제적으로 유도해왔다. 한국도 쌀 재배면적 감축 정책을 시행 중이기 때문에 일본이 직면한 쌀 부족 사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등의 문제도 있지만, 먹는 사람들의 ‘농업에 대한 무관심’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는 “쌀이 가게에 없으면 야단법석, 값이 비싸면 또 야단법석. 하지만, 정말 쌀이 비싼가요? 밥공기 한 그릇 분의 밥과 빵을 비교해보세요. 쌀은 싼 게 당연한가요? 다들 돈을 좋아하는 것처럼, 농부도 돈을 벌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라고 일갈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농민들의 ‘트랙터 시위’(2025년 3월 30일에 도쿄의 아오야마에서 진행된 ‘레이와(일본의 연호) 백성봉기’. 전국에서 30대의 트랙터가 모여 농업의 위기와 농업 정책의 전환을 호소함) 때, “농가의 시급은 10엔(약 100원)”이라는 말에 모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선명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가는 농산물을 싸게 공급하기 위해서라며 지원금을 주고 농사 규모 확대, 기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농가의 수입은 늘지 않아요. 결국 농기구 사는 데 돈을 써야 하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 농가가 제대로 먹고 살 수 있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의 정책은 ‘농지 집약’을 내걸고 경작자가 부재한 농지를 모아 한 농가 당 재배면적을 넓히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유엔의 식량농업기관은 ‘소규모, 가족경영이어야 그 땅의 전통적 생산방법이 지속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화해서 적은 인원으로 재배면적과 생산 규모를 늘린 농업에서는 생산자 스스로도 직접 해왔던 지역 인프라 정비 등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또한 인구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야생 조수(鳥獸)들이 산에서 많이 내려와 경작지와 마을이 위협받게 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계의 농업 현황에 관해서도 잘 아는 사와노보리 사나에 씨는,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농업은 본디 풍요롭다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역사적으로 아시아에 인구가 집중하게 된 것은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이 자라기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죠. 반면에 건조지대인 유럽과 미국 등은 농작물 재배면적을 넓혀 대규모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지구온난화가 밭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때문이라는 둥, 게놈 편집이 ‘푸드테크’라는 둥, (우리는) 미국 정부에게 속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앞으로는 유기농업의 시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와노보리 씨는 야마나시현의 한 포도농장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에게서 농업이 살림을 풍요롭게 하고, 재배하는 방식에 따라 농사가 재미있어진다는 걸 배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농업계 대학에서의 배움은 기술과 생산성이 중심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시아의 농업을 조사해보니, 농약과 화학비료를 썼던 근대농업의 도입으로 마을이 피폐해지고 빚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크게 다른 현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침 그때는 일본의 ODA(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공적개발원조)가 정작 현지를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졌던 시기로, 농업에도 철학과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74444678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도쿄 다마 지역 커뮤니티 매체인 『もしもしWEB』에서 인물 시리즈 “TamaHito” 18번째 편으로, 유기농 교육농장 지도자 사와노보리 사나에(澤登早苗) 씨의 인터뷰와 활동 영상을 실었다. 게이센여자학원대학 학생들이 교육농장에서 유기재배 실습하는 모습. *출처: 모시모시웹 유튜브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hzMI-oJrULI" target="_blank">https://www.youtube.com/watch?v=hzMI-oJrULI</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 무렵, 게이센여자학원대학이 농장실습 교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는 유기농업의 시대여야 한다고 생각해, 시간을 들여 커리큘럼을 마련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름방학에는 밭의 잡초를 벨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자라게 둬 밭으로 돌려줍니다. 잡초에도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정말 많았어요. 자기가 키운 채소는 맛있다며 웃고, 수확물을 가지고 가면 평소에는 대화가 없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교류할 수 있다고, 음식도 남기지 않게 되었다고….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농사가 가진 ‘사람을 키우는 힘’을 다시 느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평화를 이념으로 내건 게이센대학의 유기농업 교육이기 때문에 알게 되는 사실도 있다. 학생들은 다양한 사람과 생물의 공생, 다른 의견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벌레를 싫어하는 학생에게 벌레를 좋아하라고 할 순 없지만, 죽이지 말고 거리를 두면 된다고 가르쳤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7452922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한국에서도 여성농민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농생태학 텃밭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무제초, 무농약, 비닐 대신 풀 멀칭, 작물 섞어짓기 등을 하며 땅과 생태계를 살리고, 지속가능한 농업의 미래를 일구어가고 있다. 사진은 ‘언니네텃밭’ 경북 상주 봉강공동체 김정열 농부의 농생태학 텃밭. [관련 기사] 기후재난…대안 농업 제시한 ‘농생태학’의 선구자들 <a href="https://ildaro.com/9963" target="_blank">https://ildaro.com/9963</a> (김정열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농사는 기후위기 시대의 희망, 작은 텃밭이라도 먹거리를 생산해보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와노보리 씨는 대학을 퇴직하고 지금까지 생각해온 농업과 먹거리를 집대성한 책을 곧 내놓는다. 제목은 『포도농장과 대학의 나날에서 발견한 ‘안심할 수 있는 장소’ 만들기』. 포도농장의 유기재배 여정, 대학과 지역사회에서의 활동, 농업과 먹거리를 둘러싼 국제상황 등 담고 있는 내용이 알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즘 포도는 ‘근육강화’ 포도예요. 항생물질로 씨를 없애고 호르몬제에 절여져 자라거든요. 우리 유기 무농약 포도는 수확 후에도 썩지 않고, 시들면 그대로 건포도가 됩니다. 이게 또 얼마나 맛있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와노보리 씨는 농사를 기후위기 시대의 희망이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5년, 10년 후면 먹거리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 농가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모두가 지금의 농업에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기후위기와 천재지변으로 인한 만일의 시기에라도, 땅이 조금만 있다면 먹거리를 지어 살아남을 수 있어요. 여기에 희망을 걸 수 있지 않을까요. 농업을 소중히 생각하고, 스스로 생산함으로써 사람은 변합니다. 농업에 접근하는 것은 기본적 인권입니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17 10:40: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시미즈 사츠키)]]></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174858916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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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국가가 애써 보지 않는 여성들, ‘국민의 양육자’]]></title>
       <link>https://ildaro.com/1038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변호사들이 법령이 아닌 ‘매뉴얼’을 펼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일하는 ‘이주민센터 친구’는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에게 법률 상담과 소송 구조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이다. 다른 곳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일하는 상근변호사들이 열심히 찾아보는 자료는 여느 변호사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한국의 법령 정보를 총망라한 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센터보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운영하는 하이코리아(Hi-Korea)를 더 자주 들여다본다. 특히 〈사증·민원 자격별 안내 매뉴얼〉과 〈체류민원 자격별 안내 매뉴얼〉은 거의 필수 참고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매뉴얼들은 출입국 업무와 관련해 체류자격별 신청대상과 처리, 절차, 필요서류 등을 안내하는 자료다. 복잡한 체류자격 취득 요건과 연장·변경 요건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분명 이러한 행정청 내부 지침은 대외적 효력을 가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출입국의 세계에서는 늘 ‘원칙’보다 ‘예외’가 더 중요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영어 강사 체류자격,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국적이 중요?</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국적과 인종을 선별하는 출입국 정책</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들 가운데서도 이른바 ‘외국인’, 즉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고 일정한 체류자격으로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은 이 ‘매뉴얼’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해야만 체류자격을 취득하고, 이를 연장해가며 살아갈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매뉴얼’에 담긴 요건들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엄정한 법질서의 유지를 지상 과제로 삼는 법무부 출입국 행정의 목적에 충실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가 이주민에게 가지는 편견과 혐오에서 비롯된 차별적 내용들도 발견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를 들면 영어 강사의 체류자격이다. 영어 강사는 E-2 체류자격으로 분류되는데, ‘매뉴얼’은 해당 체류자격을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국가’의 국적자에게만 부여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국가’는 영국,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열거한다. 그 외에 영어를 공용어로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은 제외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국적을 이유로 자격을 제한하는 이러한 규정의 근저에는 인종주의적 논리가 숨어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의 10%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 백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로 알려져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매뉴얼에는 없는 체류자격, ‘국민의 양육자’</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인과 혼외 관계에서 출생한 아동을 양육하는 이주민의 처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매뉴얼’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특정한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부여받을 수 있는 체류자격도 존재한다. 이른바 ‘국민의 양육자’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인과 결혼해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와 달리, 한국인과의 혼인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출생한 자녀를 양육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자녀 양육을 사유로 한 체류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정을 권고한 이후에야, 법무부는 권고를 일부 수용해 체류자격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지침은 여전히 ‘매뉴얼’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러한 체류자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많은 이주민들과 그 주변인들이 알지 못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52504854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11일 KBS뉴스 〈[더 보다] 그림자 가족…“나는 한국 사람 아닌가요?”〉 방송에서 한국인과 혼외 관계에서 출산한 한국 국적 자녀를 양육 중인 이주여성 이야기를 다뤘다. (출처: <a href="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55848" target="_blank">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55848</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국민의 양육자’들이 한국에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식적인 통계조사의 대상도 아니고, 체류자격을 실제로 신청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자녀가 ‘한국인’임을 확인받는 과정 자체가 산 넘어 산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인 외 관계에서 출생한 아동은 부(父)가 한국인이더라도, 먼저 모(母)의 국적국에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이후 생부가 자신의 자녀라는 인지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아동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고 한국의 등록 체계인 가족관계등록부 역시 만들지 못한다. 생부가 자발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면, 가정법원에 인지청구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게다가 법원의 인지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유전자검사 결과가 없으면 국적과에서 국적취득신고를 받아주지 않는다. 국적취득신고가 수리되더라도, 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민등록을 할 수 없고, 주민등록번호 역시 생성되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모든 절차를 거쳐 아동이 비로소 ‘한국인’이 되면, 그제야 양육자는 이를 근거로 체류자격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자신의 체류자격 근거를 상실한 이들은, 미등록 상태로 체류한 기간에 대해 최대 3천만 원에 달하는 범칙금을 납부해야 한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체류자격을 상실하고, 체류가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이들의 빈곤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국민의 배우자’와 대비되는 ‘국민의 양육자’의 지위</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가 미혼모를 대하는 태도 돌아봐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처럼 어렵게 체류자격을 취득하더라도, 삶에서 보장되는 것들은 자녀에게만 한정된다. 자녀는 한국 국적자로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생계 보장을 받을 수 있지만, 외국인인 모(母)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원도 제공되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심지어 취업을 하는 것도 크게 제한된다. ‘국민의 양육자’에게 허용되는 노동은 단순 노무직으로 한정되어 있다. 취업에 제한이 없는 ‘국민의 배우자’ 체류자격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단순 노무직에 취업하려 해도, 취업허가를 받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채용이 취소되는 일도 빈번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52542465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5월 30일, 이주여성과 혼인 외 출생 한국 국적 자녀의 삶을 위한 정책 제안 토론회가 “보이지 않는 가족, 인정받지 못한 권리”라는 제목으로 개최되었다. 이주와가치, 재단법인동천, 남서울이주여성상담소, 아시아의창, 이주민센터친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공동주최한 자리다, (출처-이주민센터친구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한 만삭의 여성이 ‘이주민센터 친구’를 찾아온 때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였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학위 과정에 등록하여 입국한 유학생이었다. 한국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 후, 남자친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는 자신이 아직 어리고, 결혼하고 싶지 않으며, 아이를 책임질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국 학위 과정을 마치지 못하였고, 팬데믹으로 항공편이 끊기면서 본국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센터의 도움으로 어렵게 체류자격을 ‘기타(G-1)’로 변경한 그녀는 혼자서 산부인과를 찾아 아이를 낳았다. 이후 미혼모자시설의 지원을 받아 산후조리를 마친 뒤, 남자친구를 상대로 자녀 인지 및 양육비 청구의 소를 제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녀는 국가로부터도, 생부로부터도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아이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아이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할 경우 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父)의 인지에 의한 국적취득 신고도 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나라에서는 미혼모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함께 아이를 키워요. 모두가 사랑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 아버지도, 그 부모도 아이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게 너무 이상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인인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한국 사회의 미혼모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부정적인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를 지워버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욕설보다 더 섬뜩한 것은 무관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국민의 양육자’들은 존재한다. 행정 매뉴얼에는 없는 존재들이지만, 우리의 주변에서 살아 숨 쉬는 몸을 가지고 있다. 매뉴얼이 사람을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제도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누구를 보지 않기로 결정하였는지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22dcb;">[필자 소개] 이진혜</span>. 이주민의 든든한 벗 ‘이주민센터 친구’ 법률인권센터장입니다. 공식 홈페이지 <a href="http://chingune.or.kr" target="_blank">chingune.or.kr</a> 인스타그램 <a href="https://www.instagram.com/friend79law" target="_blank">@friend79law</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15 12:22: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진혜)]]></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08'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2/2026021527532683.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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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나를 만든 그림자 속에서 ‘읽기’]]></title>
       <link>https://ildaro.com/1038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만약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녀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모든 것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데 능한데, 적어도 그러려고 애쓰고, 애쓰는 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그 바람에 그녀는 항상 아주 피곤하다.”(샹탈 아케르만, 『브뤼셀의 한 가족』 p.14)</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4280048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 소설 『브뤼셀의 한 가족』(이혜인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4)</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상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의 『브뤼셀의 한 가족』은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가끔 꺼내보는 책 중 하나다. 고독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신경 쓰는 딸의 고독한 시선에 이입하다 보면 점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다가 졸음이 쏟아지곤 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문단이 나눠지지 않는 긴 호흡과 만연체의 문장, 이렇다고 할 특별한 사건 없이 생각과 생각으로 이어지는 긴 독백의 소설은 졸음이 쏟아지기 딱 좋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책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거나 무료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 중에 혹은 낯선 여행지에도 나는 이 책을 소중히 챙겨가곤 했다. 소음이 거의 없는 적막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나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상념 또한 여행지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곤 했다. 여자와 여자, 어머니와 딸, 살아가는 자와 죽어가는 자, 기억과 기억,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부유하는 시선. 그것은 관음증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타자일 수밖에 없는 ‘보이는 자’를 향한 배려이자, 간격 속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묘한 안내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나는 늘 이 소설이 무언가를 여전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그것을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는 일이 더 피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은 『브뤼셀의 한 가족』에 관한 글이지만,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는 일의 난처함, 그로 인해 점점 더 커지는 피로함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지만 </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그리고 나는 다시 브뤼셀의 거의 텅 빈 넓은 아파트를 바라본다. 통상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 한 명만 있는 그곳을.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p.11)</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 페이지의 첫 문장임에도 ‘그리고’로 시작하는 이 목소리는 브뤼셀의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자를 관찰하는 일이 ‘나’에게 특별한 사건이 아님을 드러낸다. ‘나’는 ‘통상 가운을 입고’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를 늘 바라보곤 했으며, ‘다시’ 바라볼 뿐이다. ‘나’는 그녀의 ‘메닐몽탕에 사는 둘째 딸’로 추측되는데 ‘나’의 시선은 타지에서도 어머니를 향해 있지만,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 밖 어딘가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인 ‘그녀’는 종종 가족들과 통화를 하고 가끔 가족 모임에 가며 곧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남편이 죽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그리고 그 너머에 늘 존재해 왔던 어떤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다른 생각-가족의 근황과 남편과의 추억-을 멈추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생각들로 채워져 있고, 독자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밀어내는 힘에 떠밀려 다음 페이지로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처럼 한쪽에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어머니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녀의 딸이 멀리서 거리둔 채 ‘보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소설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방향과 각도에서 제한 없이 어머니의 일상을 관찰하고 있으며 주로 어머니의 내면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로 어머니 그 자신의 시선이기도 한다. 이때 어머니와 딸을 교차시키는 하나의 사건은 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이다. 남편이, 아버지가 얼마 전에 죽었기에 슬픔에 빠진, 하지만 살아가는 여성‘들’. 그녀들은 그와의 시간을 현재처럼 읊조리고 그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받아 적는다.</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다행히도 전화벨이 울렸는데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애들이 있는 딸이 아니고 애가 없는 딸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니 과연 그 애였고 그 애는 당연히 내게 어떤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답했는데 그 애는 엄마 목소리를 보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했고 나는 그러면 내가 뭐라 할까라고 되물었고 그 애는 모르지라고 답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를 했고 마지막에 그 애는 아버지를 바꿔 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이에게 무선전화를 가져다주면서 당신 딸이야라고 했다.”(p.41)</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전적 소설이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아케르만과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부유하면서도 결코 대상에 밀착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그녀의 영화 전반에 나타난다. 〈집에서 온 소식〉(News from Home, 1977)에서도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는 현재 아케르만이 사는 뉴욕의 도시 소음 속에서 줄곧 묻힌다. 그녀는 어머니가 보내는 목소리를 듣지만, 그 목소리를 향해 다가가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편지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시선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43009876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상탈 아케르만의 영화 〈노 홈 무비〉(No Home Movie, 2015)에서 아케르만의 카메라에 찍힌 어머니의 뒷모습 ©chantalakerman.foundation</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년의 병든 어머니를 찍었던 아케르만의 마지막 작품 〈노 홈 무비〉(No Home Movie, 2015)에서도 이러한 거리감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영화에서 아케르만은 브뤼셀의 아파트에서만 지내는 어머니를 찍는다. 하지만 촬영 대상인 어머니와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하며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에서 아케르만은 카메라 뒤에 서 있기도 하고, 카메라 뒤에서 프레임 안의 어머니와 대화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향해 카메라를 설치해 둔 채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하고, 고정된 프레임 속으로 자신이 들어오기도 한다. 때로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이나 창가에 비치기도 하고, 스카이프로 자신과 대화하는 어머니를 (카메라를 든 채) 바라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아케르만의 어머니는 거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으로, 부엌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뒷모습으로, 문틈 사이로 보이다가 사라지는 옆모습으로, 스카이프로 딸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스카이프로 통화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습이 전면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나는 장면이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때도 둘 사이에는 여전히 스크린이 존재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의 마지막쯤에서 어머니는 아케르만에게 “이제 너와 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도 아케르만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 영화를 개봉하기 직전 아케르만의 어머니는 죽었고, 이 영화는 또한 아케르만의 유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노 홈 무비〉에 대한 수많은 각주 중 하나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어머니, 딸, 그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뤼셀의 한 가족』은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의 첫 소설이며,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케르만이 벨기에 브뤼셀 출신이며, 그녀의 부모가 2차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녀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사실은 아케르만의 책과 소설 전반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케르만의 외조부모는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으며,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딸에게 침묵했지만 아케르만은 자기 삶과 작업 세계 전반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외할머니는 1905년생이고, 증조할머니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어요. 외할머니는 당신이 꿈꿨던 삶을 살지 못했고, 그건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에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죠. 약간 폭력적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지금 잘 모르겠어요. 내가 이 모든 것의 수탁자라는 걸까요? 분명 그렇겠죠, 이것과 또 다른 것들의 수탁자.”(책 속에 삽입된 ‘파자마 인터뷰’ 중 p.96)</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것과 또 다른 것들의 수탁자’로서 아케르만의 소설은 그런 점에서 단순히 자전적 가족 이야기, 모녀 관계,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머니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속에는 남편의 죽음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형성된 어떤 거대한 죽음의 기억이 자리한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 생각과 거리두기, 그렇게 생각을 생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는 한 인물을 기록하기. 이것이 아케르만이 어머니를 통해 남기고자 했던 역사의 상흔이자,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방법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이 소설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게 다일까. 생각하지 않으려 밀어내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기억, 유대인의 역사, 전쟁의 기억, 죽음의 트라우마라고 얘기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는 여전히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으며 어떤 무거운 피로함을 느끼는 것일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사실 언제나 ‘창작자’를 모르는 편이 낫죠. 누군가 내게 당신의 작품이 좋아서 당신을 알고 싶다고 하면, 난 항상 모르는 편이 낫다고 답해요. 당신이 실망할 거라고요.”(p.117)</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에 실험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벨기에의 영상 작업 〈폭풍우(샹탈 아케르만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Vents Violents (Two Letters to Chantal Akerman), 시라 포이겔 브루트만, 에이탄 에프랫, 2024)에서 두 감독은 아케르만의 영화 〈노 홈 무비〉 촬영지였던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식민지화된 팔레스타인의 알-나캅 사막을 방문한다. 〈노 홈 무비〉에 잠시 등장했던 황량한 사막의 풍경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폭풍우〉를 보고 나서야 그곳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추방된 땅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지역이지만 다르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그곳에 존재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2/20260214291445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샹탈 아케르만의 영화 〈노 홈 무비〉의 사막 장면 ©chantalakerman.foundatio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며 아케르만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노 홈 무비〉는 말하지 않는다. 〈노 홈 무비〉에 등장했던 사막의 장면은 고향도, 집도, 이스라엘도 의미하지 않는 그저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아케르만에게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고향이었을지, 트라우마와 접촉하는 경계 지대였을지, 그저 미지의 공간이었을지 알 수 없다. 아케르만의 작업에서 이스라엘에 관한 태도, 팔레스타인에 관한 태도를 찾아내기엔 그녀가 남긴 말들이 부족하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라는 그 감각, 부재하다는 감각이 우리에게 어딘가 불편함을 남긴다는 사실, 그것을 무시하는 일에서 이제 피로함을 느낀다는 사실, 다시 읽고 다시 보고 새롭게 말하려는 힘을 우리가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집중해 보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쩌면 아케르만이 말하지 않은 것은 아케르만이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피곤함’이라는 반복되는 단어 뒤에 존재했을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상상하며, 나는 아케르만의 〈집에서 온 소식〉을 보며 방랑하는 이민자의 감각에 대해 배웠고, 〈노 홈 무비〉와 〈호텔 몬터레이〉를 보며 공간을 잠식하는 고독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으며 가족 안에 가라앉은 트라우마의 기억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마음과 몸을 잠식하는지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라고 적었지만 결코 나는 아케르만이 느낀 것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절대 모를 것이라는 감각 또한 그녀의 작업 속에서 배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기에 나는 아케르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녀의 그림자에 가려진 또다른 그림자를 찾아내고 싶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p.19)라는 아케르만의 말대로, 말 속에 남겨진 말해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멈추지 않고 말했던 아케르만의 목소리를, 우리는 이렇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62ed0;">[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span></p>]]></description>
       <pubDate>2026-02-14 10:25: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책/문학]]></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책/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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