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라도, 계기를 찾아야죠!"

클레이 애니메이터 김현임

박희정 | 기사입력 2004/10/24 [21:44]

"늦게라도, 계기를 찾아야죠!"

클레이 애니메이터 김현임

박희정 | 입력 : 2004/10/24 [21:44]
무표정한 물체가 있다. 그 물체를 조금씩 움직이고 형태의 변화를 주어 하나하나 카메라 프레임에 담아낸다. 그렇게 찍혀진 개별 프레임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합쳐지면, 그저 ‘하나의 멈춰진 물체’에 불과했던 피사체는 마치 생명을 얻은 듯 다양한 표정과 움직임을 쏟아낸다. 그것이 바로 스톱모션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이다. 생소한 용어지만, 팀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하다.

찰흙 인형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다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게 좋아요. 하나하나씩 움직여서 작업을 할 때면 다른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고… 온전히 혼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결과물이 나왔을 때 '내 꺼다'라는 만족감이 커요."

일일이 손으로 매만져 피사체의 움직임에 변화를 주어가며 만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밤잠을 반납하고 하루 종일 작업에 매달려도 불과 수초를 찍을까 말까 한 고된 노동의 과정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씩씩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심지가 굳은 분 같다고 말하니, "그냥 고통을 즐기는 거죠."라며 수줍게 웃는다. "제가 별로 '인간친화적'인 사람이 못되어서 그런지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하는 것보다 애니메이션 작업이 체질에 맞더라구요."

고된 작업의 고통이 오히려 즐겁다고 말하는 현임씨는 모 빙과류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CF를 만든 클레이 애니메이터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사용하는 재료와 세부적 기법 차이에 따라서 클레이, 퍼핏(pupet, 인형), 오브제, 컷-아웃 애니메이션 등의 하위 갈래로 나뉜다. 무수히 많은 재료들 중에서 현임씨의 “필이 꽂힌” 소재가 바로 ‘클레이(clay)’다. 클레이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국내에도 개봉된 적이 있는 <월레스와 그로밋>(Wallace & Gromit)이 유명하다.

CF와 뮤직비디오 등에서 종종 보게 되지만, 일반인의 인식 속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현재 서른한 살의 현임씨가 애니메이션을 배우겠다고 맘먹었던 시절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척박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배울 수 있는 학교는 공주에 있는 공주만화전문대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현임씨의 길이 되지 못했다.

내 길이 아닌 길, 얻은 것은 ‘우울함’

"아버지께서 중학교 교사여서 그런지 정도 이외의 길을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소위 말하는 '학'자나 '사'자 들어가는 일을 해야 잘 사는 사람으로 아셨죠. 아예 얘기 자체를 못했어요."

 
예체능 계열은 학문으로 쳐주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반대에 밀려, 하고 싶었던 미술공부도 포기해야 했던 현임씨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자신이 ‘착한 딸’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일단은 대학을 가놓고 원하는 길을 찾자고 들어간 컴퓨터학과. 그나마 애니메이션과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현실과 너무 달랐고, 현임씨는 점점 원하는 길에서 멀어져 갔다. 졸업과 동시에 나우콤에 입사해 통신 커뮤니티 컨텐츠 개발을 업으로 삼았다. 6개월 동안의 회사생활 동안 현임씨의 생활은 집과 회사의 반복이었다. 생활은 폐쇄적이 되고 조울증마저 얻었다.

운명의 날, 신문을 펴다

어느 날 우연히 펼친 신문 한 편에 실린 광고는 현임씨에게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상명대학원 디지털 영상학과 애니메이션 전공」의 신입생 모집 공고. 대학원에 등록을 하고 6개월 후 현임씨는 완전히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과 심한 마찰이 있었음은 당연했다. “장난이 아니었죠. 부모자식 간에 못할 말도 오가고…. 아버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미술적 기반도 없는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에 관한 백지상태, 그리고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은 늦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늦게라도 계기를 찾을 수 있다면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차후 50년을 내 길로 갈 수 있잖아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 우문에 현답이다.

인터뷰 전, 현임씨의 개인 블로그를 찾았다. 프로필 란에 박힌 ‘독신주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거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죠.” 그 사연이 재미있다. 고등학교 때 의례적으로 보여준 성교육 비디오가 ‘출산’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당시에는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고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삼단논법의 결과였다. 그 얘기를 들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무서운 성교육 자료’를 보면서 출산에 대한 공포로 떨었던 건 아마도 한국 여고생 공통의 기억이지 않을는지.

현재 ‘독신주의’의 가장 큰 배경은 ‘관계의 힘겨움’이다. 스스로를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간섭 당하고 누군가를 간섭해야 하는 관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곧 독립을 하길 원한다고.

독립의 가장 큰 적은 역시 ‘돈’이다. 애니메이터 일이 프리랜서이다 보니 경제적으로 많이 불안하다. 전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재정적으로 약한 상태이고, 일이 규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수입 또한 불규칙적이다. 개인작업을 위한 작업비도 모아야 하는 상황. 아직까지 독립은 꿈일 뿐이지만, ‘고등학생 때의 현임’씨에게도 ‘애니메이터’가 된다는 것이 그저 머나먼 꿈이었지 않았겠는가.

일상의 기록, 로모의 매력에 빠지다

현임씨를 만난 곳은 신촌 한쪽에 자리 잡은 ‘그 사람’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카페였다. 바닥에 촘촘하게 깔린 작은 흑백의 타일과 벽면을 가득 채운 로모 사진이 인상적인 곳. 현임씨가 소속된 로모 동호회의 회원이 운영하는 곳이란다. 그 날 카페를 약속장소로 택한 것도 전시회에 낼 로모 사진들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현임씨가 로모를 알게 된 것은 2002년 경.

"자기기록을 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어요. 아는 사람을 통해 로모를 알게 됐죠. 로모만의 독특한 색감, 형태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생일 날, 스스로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죠." 사진을 찍으면서 현임씨에 일상에도 변화가 왔다. "사진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세심하게 보게 되더라구요. 아무것도 아닌 피사체도 찍고 난 후 찍기 전. 그 피사체가 주는 감성이 전해져요.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죠. 하루의 일상이 가치가 있어졌어요."

현임씨가 전문적인 애니메이터로 길을 잡아 나가면서 현재 부모님과의 관계는 많이 회복되었다. 어머니는 전폭적 지지는 아니지만, 현임씨의 길을 인정해주신다. 아버지는 예전 같은 반대는 안 하시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에 현임씨가 좀 더 ‘나은’ 길을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가끔 3D고급기술 책 같은 걸 가지고 와서 펴보세요. 그게 같은 컴퓨터 업종에서도 더 좋은 걸로 보이시나봐요. (현임씨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직접적으로는 말씀 안 하시고, 교사셔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면 자식이 따라 올 거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웃음)

그녀가 만들어나갈 새로움 움직임의 세상

현재 현임씨는 올 여름까지 아동애니메이션의 1차 작업을 끝내고 쉬고 있는 중이다. 그 틈을 이용하여 대안학교 하자센터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엔 사람을 대하는 게 힘들어서 아이들과 눈 마주치는 것조차도 어려웠지만, 아이들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이들은 담고 있는 바가 많아요. 배우는 게 많죠. 가르친 다기 보다는 같이 작업하면서 가진 것을 함께 승화시키고 싶어요.”

애니메이션 작업은 여러모로 고된 일이다. 일이 없을 땐 아예 없고, 있을 땐 스튜디오에 갇혀서 매일같이 밤샘이 이어진다. 몸과 마음이 지치기 쉬운 환경이다. 또한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캐릭터의 연기를 직접 만들어내는 애니메이터의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공은 대부분 ‘감독’과 ‘회사’의 이름 아래 묻히기 일쑤다.

여러 가지로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현임씨는 힘주어 말한다. “(힘들지만) 내가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눈동자에서 단단함이 읽힌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고통도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눈빛이다.

앞으로의 작업계획에 대해 물었다. 상업적인 애니메이션 보다는 의미에 우선을 둔 단편들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다. "보는 사람과 소통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건 싫어요. 작가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봐도 알 수 있는, 그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공감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요."

그 날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애니메이션 장비를 사서 모으고 있다는 현임씨. 그녀가 은근과 끈기로 만들어 갈 새로운 움직임의 세상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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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스토 2004/10/31 [10:40] 수정 | 삭제
  • 언제나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 시선이 느껴지는 현임씨의 단단한 작품을
    느끼고 소통하고 나누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 기대합니다.
  • 서진 2004/10/28 [18:17] 수정 | 삭제
  • 인터뷰 잘 봤어요.
    통신컨텐츠 개발보다 애니메이터가 장기적으로 보면 더 좋은 길일 수도 있어요. 물론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요.
    작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가 저도 좋아요. 찰흙인형이 움직이는 영상도 보고 싶네요.
  • sora 2004/10/27 [06:43] 수정 | 삭제
  • 저거 직접 만드신 건가요?
    일다 인터뷰 기사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학'자나 '사'자 들어가는 길보다 힘들어도, 자기 길 찾아가는 게 가장 멋지고 행복한 삶인 것 같아요.
  • 새벽바람 2004/10/27 [04:42] 수정 | 삭제
  • 인생이 꽉 차 있으면 결혼을 선택할 필요도 없겠죠.
  • 날개 2004/10/27 [00:34] 수정 | 삭제
  • 그 아버지 모습이 울 아버지랑 너무 비슷해서요..
    재밌기도 하고, 힘들었겠다 싶기도 하고...
    3D고급기술 책 얘기는 넘 재밌네요.. ^^
    다 딸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간섭은 우릴 힘들게 만들죠.
  • 베이브 2004/10/26 [17:31] 수정 | 삭제
  • 저는 미술은 소질이 별로 없지만 사진 찍은 거 참 좋아하거든요. 피사체의 감성이 전해진다는 얘기가 뭔지 저도 알 것 같아요. 사진을 현상하면서 느껴지는 포만감도.. ^^ 인터뷰 잘 봤구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 min 2004/10/25 [14:14] 수정 | 삭제
  • 내게도 운명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음 좋겠다.
    인생의 한 번 쯤은..
    이너뷰 멋쥐네요`
  • 대니보이 2004/10/25 [10:33] 수정 | 삭제
  • 나이 들수록 카메라나 공구 등을 다루는 사람들이 인생을 나보다 좀더 낫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현임씨는 애니메이션, 로모, 컴퓨터 쪽에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분 같군요.
    저도 취미로 하나 정도는 키워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업인 경우와는 물론 다르겠죠.
    그러나 인생이 좀더 착실해질 수 있는 방편이 될 듯 싶네요.
    김현임씨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별이 2004/10/25 [04:41] 수정 | 삭제
  • 그 쪽도 배고픈 직종 중 하나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야였는데 잘 알게 된 기분이에요.
    로모 사진도 넘 예쁘네요.
    잘 봤습니다.
  • Judi 2004/10/24 [23:50] 수정 | 삭제
  •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보면 작업하는 사람들이 저러다가 정신에 이상이 생기지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해보였어요. 직접 그런 일을 하시는 분 보니까 반갑구. 역시 범상치 않은 분 같네요. 재밌게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