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왕 후회해.”
그녀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계속 나온다. 유쾌한 사람, 그녀에 대한 첫 느낌이다.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엄청 후회한다고 하는데, 그녀가 인생에서 ‘왕’ 후회하는 일은 무얼까? 그녀는 통역 일을 한다. 영어뿐 아니라 태국어까지 능수능란하게 하고, 이 능력으로 난민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자원활동도 한다. 요즘은 검찰청에서 통역봉사요원도 하며, 무역업까지 겸하고 있다. 그녀의 일정이 빡빡한 터라 ‘왕’ 후회할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 자체부터 후회하고, 거기다 아이까지.” 앉자마자 그녀는 결혼부터 후회했다. 원래 남자를 안 좋아하고, 자기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그녀는 중국인과 했다. 그것도 두 사람은 아프리카 레소토라는 나라에서 “길 가다” 만났다. “내 성격 자체가 따지는 성격이 아녀요. 좋아하니까. 단순해.” 구속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가 ‘길 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연히 했는데, 거기에다 아이까지 생긴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한국 여자들보다 피임이 더 철저해요. 근데, 생리 날짜를 잘못 계산해서….” 남들이 보면 그녀는 부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산다. 워낙 언어를 배우기 좋아하는 그녀는 중국어까지 재미있어 하며 배웠다. 매일같이 남편 얼굴 보며 시중 들 필요도 없다. 한 달에 3,4번씩 오는 남편은 집에 오면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스스로 다 한다. 요리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남편과 있을 때는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닥 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에게 가더라도 사위인 남편이 “장모님도 손가락 까닥하지 않게 할 정도로 가사노동”을 훌륭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 방자하다고 봐. 어휴, 버릇이 없어요. 부모들이 그렇게 키우고… 이기적이잖아. 얼마나 괘씸해? 난 남자 자체가 싫어.” 이런데도 결혼한 게 후회되는데 매일같이 버릇없는 남편들을 봐야 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녀로선 상상이 안 된다. 그녀는 한국처럼 결혼이라는 제도가 당연시되는 사회도 언젠가는 그 제도가 없어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고 했다. 그녀가 주변사람들에게 “되도록이면 결혼하지 마라”고 조언하는 이유는 결혼은 한 개인을 제도 속에 가두어 그 역할에 맡게 사람을 개조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결혼하면, 너는 가족을 만들었으니까, 너는 엄마니까…. 왕 의무, 왕 부담감. 결혼제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서로가 좋아서 순수하게 지지하고 사랑하고 이게 안 돼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결혼하고 난 후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리 좋은 사람하고 해 봤자,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언지”를 알고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녀가 “길 가다 만나서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 것처럼,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다. 남편을 만나기 전의 애인은 미국인이었는데, 그녀는 그와 헤어지기 위한 종지부를 찍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낙 확실한 성격이라 전화로 대충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대충 헤어지고 나서 “내가 미국에 있었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미련 따위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 애인과 만나서 3일 동안에 관계를 정리했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엉엉 울면서 결심했다고 했다. 수면제를 먹고 죽어버리리라. 한국에 돌아와 수면제를 사서 먹으려고 하다가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죽자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렇게 단숨에 날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레소토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났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곳에서 무역업을 하던 데이빗이라는 남자가 찾아오고 거기서 첫눈에 반했다고. “잡지 같은 데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게 낭만적이고 꿈과 같은 사랑을 하는 것처럼 말들 하던데…. 그 사람들이 진짜 그렇게 믿고 사는 건지. 하여튼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봐요. 근데 난 아냐.” 얼마 전까지 중국에 있던 네 살 난 아들은 지난주에 한국으로 와서 그녀와 함께 있다. 아이와는 한 시간도 같이 노는 게 힘들다는 그녀지만 이혼하더라도 아이는 자기가 데리고 살겠다고 했다. “아이는 자연 분만해서 내가 낳았거든.” 아이를 낳던 날도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모종의 계획이 있었는데, 무통분만을 하겠다는 것. 그러나 아이는 그녀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8개월 만에 예정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생일날. 그래서 무통분만 처치를 할 틈도 없이 그녀를 “사정없이 어디론가 몰고”갔다. 분만 시 경험했던 고통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아이는 생일이 그녀와 같다. 그녀는 지금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이가 있다고 이혼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동으로 협력하면 되잖아요. 내가 이혼을 생각하는 건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어젯밤도 남편과 국제전화를 하며 다퉈서 눈이 퉁퉁 부었다고 말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남편이 카지노, 마작, 카드 등 도박하는 걸 못 참겠다고 했다. 중국은 한국에서와 달리 이런 문화를 죄악시 하지 않는 편이다. 그녀도 결혼 전에는 데이빗이 도박하는 것까지 멋있게 보였는데 결혼하니까 사정이 달라졌다. 돈을 많이 잃든 아니든 도박장에 가는 것 자체가 싫단다. 이래서 요즘 부부간에 다툼이 잦다. 그녀 또한 중국 사람들이 마작 등을 적당히 즐기는 문화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니 그녀도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각자 좋은 대로 하고, 그러면서 자기 삶을 책임지고, 이혼 후 아이 양육에 대해선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 “제게 이혼은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찾는 거죠.” 앞으로 그녀가 결혼 생활을 어떻게 유지할지, 이혼을 결정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6월경에 차를 가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캠핑 투어’를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1주일에 이틀은 시간을 내서 분쟁으로 몸살을 앓는 콩고에 대해 공부하고, 한국에 와있는 난민들을 위한 일들에 동참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한번에 한 시간 이상씩은 못 놀아주지만, 그녀가 키울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 아버지와 어떻게든 나름대로 협력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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