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생각하는 여자

통역사 김선영

윤정은 | 기사입력 2005/03/21 [19:40]

이혼을 생각하는 여자

통역사 김선영

윤정은 | 입력 : 2005/03/21 [19:40]
“지금은 왕 후회해.”

그녀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계속 나온다. 유쾌한 사람, 그녀에 대한 첫 느낌이다.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엄청 후회한다고 하는데, 그녀가 인생에서 ‘왕’ 후회하는 일은 무얼까?

그녀는 통역 일을 한다. 영어뿐 아니라 태국어까지 능수능란하게 하고, 이 능력으로 난민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자원활동도 한다. 요즘은 검찰청에서 통역봉사요원도 하며, 무역업까지 겸하고 있다. 그녀의 일정이 빡빡한 터라 ‘왕’ 후회할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 자체부터 후회하고, 거기다 아이까지.”

앉자마자 그녀는 결혼부터 후회했다. 원래 남자를 안 좋아하고, 자기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그녀는 중국인과 했다. 그것도 두 사람은 아프리카 레소토라는 나라에서 “길 가다” 만났다.

“내 성격 자체가 따지는 성격이 아녀요. 좋아하니까. 단순해.”

구속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가 ‘길 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연히 했는데, 거기에다 아이까지 생긴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한국 여자들보다 피임이 더 철저해요. 근데, 생리 날짜를 잘못 계산해서….”

남들이 보면 그녀는 부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산다. 워낙 언어를 배우기 좋아하는 그녀는 중국어까지 재미있어 하며 배웠다. 매일같이 남편 얼굴 보며 시중 들 필요도 없다. 한 달에 3,4번씩 오는 남편은 집에 오면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스스로 다 한다. 요리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남편과 있을 때는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닥 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에게 가더라도 사위인 남편이 “장모님도 손가락 까닥하지 않게 할 정도로 가사노동”을 훌륭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 방자하다고 봐. 어휴, 버릇이 없어요. 부모들이 그렇게 키우고… 이기적이잖아. 얼마나 괘씸해? 난 남자 자체가 싫어.”

이런데도 결혼한 게 후회되는데 매일같이 버릇없는 남편들을 봐야 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녀로선 상상이 안 된다. 그녀는 한국처럼 결혼이라는 제도가 당연시되는 사회도 언젠가는 그 제도가 없어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고 했다.

그녀가 주변사람들에게 “되도록이면 결혼하지 마라”고 조언하는 이유는 결혼은 한 개인을 제도 속에 가두어 그 역할에 맡게 사람을 개조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결혼하면, 너는 가족을 만들었으니까, 너는 엄마니까…. 왕 의무, 왕 부담감. 결혼제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서로가 좋아서 순수하게 지지하고 사랑하고 이게 안 돼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결혼하고 난 후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리 좋은 사람하고 해 봤자,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언지”를 알고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녀가 “길 가다 만나서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 것처럼,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다. 남편을 만나기 전의 애인은 미국인이었는데, 그녀는 그와 헤어지기 위한 종지부를 찍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낙 확실한 성격이라 전화로 대충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대충 헤어지고 나서 “내가 미국에 있었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미련 따위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 애인과 만나서 3일 동안에 관계를 정리했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엉엉 울면서 결심했다고 했다. 수면제를 먹고 죽어버리리라. 한국에 돌아와 수면제를 사서 먹으려고 하다가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죽자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렇게 단숨에 날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레소토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났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곳에서 무역업을 하던 데이빗이라는 남자가 찾아오고 거기서 첫눈에 반했다고.

“잡지 같은 데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게 낭만적이고 꿈과 같은 사랑을 하는 것처럼 말들 하던데…. 그 사람들이 진짜 그렇게 믿고 사는 건지. 하여튼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봐요. 근데 난 아냐.”

얼마 전까지 중국에 있던 네 살 난 아들은 지난주에 한국으로 와서 그녀와 함께 있다. 아이와는 한 시간도 같이 노는 게 힘들다는 그녀지만 이혼하더라도 아이는 자기가 데리고 살겠다고 했다.

“아이는 자연 분만해서 내가 낳았거든.”

아이를 낳던 날도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모종의 계획이 있었는데, 무통분만을 하겠다는 것. 그러나 아이는 그녀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8개월 만에 예정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생일날. 그래서 무통분만 처치를 할 틈도 없이 그녀를 “사정없이 어디론가 몰고”갔다. 분만 시 경험했던 고통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아이는 생일이 그녀와 같다.

그녀는 지금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이가 있다고 이혼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동으로 협력하면 되잖아요. 내가 이혼을 생각하는 건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어젯밤도 남편과 국제전화를 하며 다퉈서 눈이 퉁퉁 부었다고 말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남편이 카지노, 마작, 카드 등 도박하는 걸 못 참겠다고 했다. 중국은 한국에서와 달리 이런 문화를 죄악시 하지 않는 편이다. 그녀도 결혼 전에는 데이빗이 도박하는 것까지 멋있게 보였는데 결혼하니까 사정이 달라졌다. 돈을 많이 잃든 아니든 도박장에 가는 것 자체가 싫단다. 이래서 요즘 부부간에 다툼이 잦다.

그녀 또한 중국 사람들이 마작 등을 적당히 즐기는 문화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니 그녀도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각자 좋은 대로 하고, 그러면서 자기 삶을 책임지고, 이혼 후 아이 양육에 대해선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

“제게 이혼은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찾는 거죠.”

앞으로 그녀가 결혼 생활을 어떻게 유지할지, 이혼을 결정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6월경에 차를 가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캠핑 투어’를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1주일에 이틀은 시간을 내서 분쟁으로 몸살을 앓는 콩고에 대해 공부하고, 한국에 와있는 난민들을 위한 일들에 동참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한번에 한 시간 이상씩은 못 놀아주지만, 그녀가 키울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 아버지와 어떻게든 나름대로 협력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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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 2005/04/03 [21:11] 수정 | 삭제
  • 결혼을 하게 되면 가족이라는 제도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지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입니다.
    이것을 강요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 사회의 관념이기도 하지만
    또 내 자신이기도 합니다.
    연인의 모습으로 만족했던 상대방에게
    아내가, 남편이, 내 아이의 아빠 혹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게 되니까요.
  • 33333333 2005/04/02 [20:50] 수정 | 삭제
  • "마초근성이 다 죽지 않아서... 설겆이 빨래도 잘하고 자발적으로 하는 편이지만 여친이 집에 와서 제가 차려주는 밥먹고 아무것도 하지않고 누워만 있고. .설겆이는 제가 하고... 그러면 다른 남성들이 여친에게 받는 대우를
    자연히 떠올립니다." ===============> 부산 남자님은 바보인가봐요.....하하하하하.. 왜 남자은 여성에게 집안일시키면 마초라서 죽일놈이고, 여성은 남성집안일 시키면 당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님은 마초가 아닙니다.... 이 기사의 여성은 자기 남편한테 집안일 다시키면서도 당당하죠.......그런데 부산남자님은 집안일은 님이 다 하면서도, 스스로 마초라고 미안해하죠?? 아주 바보시군요.
  • 아라엘 2005/04/01 [05:31] 수정 | 삭제
  • 중국이 원래 그렇잖아요..집안일 남자들이 하는거...
    그리고 가사분담같은것도 우리보다 상당히 잘 된 편이죠..
    집에 먼저 온 사람이 장보고...흠....
    그런면에선 상당히 부럽네요..
  • 부산남자 2005/03/25 [19:02] 수정 | 삭제
  • 거의 불가능할듯하네요. 전 심정상 페미니스트라고 보지만 마초근성이 다 죽지 않아서... 설겆이 빨래도 잘하고 자발적으로 하는 편이지만 여친이 집에 와서 제가 차려주는 밥먹고 아무것도 하지않고 누워만 있고. .설겆이는 제가 하고... 그러면 다른 남성들이 여친에게 받는 대우를
    자연히 떠올립니다.

    내가 걔네들보다 못한것도 아닌데 집안일은 일대로 다해주고 별로 대우도 못받고....
    전 어쩔수없는 마초일까요?
  • 사이렌 2005/03/25 [16:07] 수정 | 삭제
  • 많이 공감해요..
    제도가 사람의 순수함을 거세하죠.
    가장 사랑하는 관계까지도 말이에요...
  • 마이 2005/03/25 [00:30] 수정 | 삭제
  •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음이 부럽습니다.
  • 하하하. 2005/03/25 [00:25] 수정 | 삭제
  • 여자한테 집안일 다시키고, 나는 손까딱 안해야지.

    철딱서니없다고, 여자는 기본적으로 다 무시해주어야지..

    부인이 좀 맘에 안들면 확 이혼해야겠따..



    아래 댓글을 보니, 그렇게 행동하는데 오히려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고 말해주는걸 보니, 나도 앞으로 마초로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하하
  • 마초여성 2005/03/25 [00:18] 수정 | 삭제
  • [[
    한 달에 3,4번씩 오는 남편은 집에 오면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스스로 다 한다. 요리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남편과 있을 때는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닥 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에게 가더라도 사위인 남편이 “장모님도 손가락 까닥하지 않게 할 정도로 가사노동”을 훌륭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 방자하다고 봐. 어휴, 버릇이 없어요. 부모들이 그렇게 키우고… 이기적이잖아. 얼마나 괘씸해? 난 남자 자체가 싫어.”
    ]]

    남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찬 여성이군여.


    바로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마초남성과 똑같은 성향의 여성이네..
    게다가 마초남자들은 그래도 여자들을 어느정도 존중이라도 해주지.

    마초남성이이 다 쓰레기라면
    이 여성도 최악의 쓰레기겠네요
  • 바다 2005/03/24 [19:42] 수정 | 삭제
  • 김선영님 재밌는 분 같아요.
    시원한 얘기 속에 많은 생각과 경험들이 녹아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드네요.
  • heart 2005/03/22 [23:06] 수정 | 삭제
  • 그런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네요. 사람이 암만 좋아도, 관계가 아무리 튼실해도 이상하게도 제도안에서 힘을 못 쓰고 여타의 악기능을 반복하게 되는 거, 가족관계 안에서 많이 보이죠. 부부간의 관계가 제일 그런 것 같고요.

    스스로도 많이 느끼는데 직접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 공감이 간다고 할까요.. 솔직한 인터뷰 정말 잘 봤어요.
  • 아줌마 2005/03/22 [02:17] 수정 | 삭제
  • 열정적이고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에 반했습니다.
    이혼을 결정하든 다른 선택을 하든 항상 그 모습 변치않길 바랍니다.
  • 동감 2005/03/22 [01:13] 수정 | 삭제
  • 어떤 사람에겐 별것이 아닌 일이 어떤 사람에겐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도 결혼은 무덤이라고 확신했으면서도 스스로 그 곳으로 걸어 들어갔는데,
    들어갈 땐 내맘인데, 나올 땐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아이들을 낳은건 백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아이들은 희노애락애오욕을 가르쳐 줘요.
    결혼으로 달라진건 없는데, 아이를 낳고 안낳고는 너무나 세상이 달라지네요.
    저도 혼자 싸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는데, 자유로운 영혼이 갖혀 사는게 서글프지만 남편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혼을 하든 별거를 하든 부부가 아니라 친구처럼 살면 더 좋을 것같아요. 아이들 스무살 되면 그러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참을 수 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 .... 2005/03/21 [23:16] 수정 | 삭제
  • 최악까지 가지 않는 게 좋죠..
    부부 양쪽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도.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늘 최악을 보고서야 끝장이 나니..
    상처도 깊고 만신창이가 되고.. 앞길 막막해지고..
    힘차고 시원스러운 성격이 엿보이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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