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와 대중문화 사이에서

1974년생의 독재의 기억, 평화의 댐-1

홍정숙 | 기사입력 2006/01/24 [05:42]

군사독재와 대중문화 사이에서

1974년생의 독재의 기억, 평화의 댐-1

홍정숙 | 입력 : 2006/01/24 [05:42]
<우리는 아픈 현대사에서 ‘반공’과 ‘경제성장’의 기치아래 군부독재정치가 자행됐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독재’가 남긴 유산이 과거의 것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이는 드물다.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공세에 밀려, ‘독재’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판단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뿌리깊게 자리하지 못했다. <일다>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독재’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독재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독재란 과연 무엇이며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개인의 일상을 통해 조명해나갈 계획이다. -편집자 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가 이끄는 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시기에 5살, 그 후 내내 대통령으로 있었던 전두환씨가 백담사로 가는 걸 본 게 15살. 어린 시절 10년을 군부 내에서 사조직을 이끌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오른 수장 전두환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매일 뉴스에서 바라보며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참으로 암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야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시절이 수상하고 암울했다 해도 군사주의와 반공사상을 여과 없이 매일 텔레비전으로 보고 자랐으면서도 그 장면들 중에 또렷이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다.

매주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일찍 파해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가 크게 틀어놓고 점심을 먹곤 했다. 숱하게 <배달의 기수>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반공정신을 엄청 강요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니(만화의 효과에 비해) 국민 교육효과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그러나 초등학교 4,5학년 때였던가.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해 남한을 공격할 수 있다며 설계도까지 보여주면서 뉴스에서 겁을 줬다. ‘평화의 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초등학생들의 저금통까지 깨게 하며 전국민을 상대로 성금을 거뒀던 것, 지금 생각해보면 최악의 기억이다. 학용품도 사기에도 빠듯한 생활형편의 아이들까지도 무조건 성금대열에 동참해야 했다. 칠판 한쪽 귀퉁이에는 한둘 성금을 내지 못했던 아이들의 이름이 ‘낼 때까지’ 적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후, 1980년대 후반 즈음엔 매일같이 뉴스에서는 최루탄 가스 가득한 거리와 대학가의 풍경을 봐야만 했다. 자라서는 어쩌다 맡는 최루탄 가스가 진짜로 쓰라리다는 것도 알게 됐다. 태권도 승급 심사를 보러 실내체육관으로 가던 길에 최루탄이 코 앞에서 터져 콧물과 침을 덩어리째 흘리며 걸어가다가 ‘이러다가 품세 동작을 다 잊어버릴까’ 긴장했던 적도 있었다. 이후에 한번은 최루탄 가스 때문에 죽을뻔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는 그때 신문이나 방송사들이 보도했던 것처럼 “운동권 학생들은 이상한 사람들”쯤으로 생각했다. 임수경씨가 방북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모 여성아나운서가 “어떻게 저 어린 여대생의 입에서…”라고 했던 멘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나운서가 그렇게 말하자, 나 또한 ‘어떻게 저 언니는 무서운 북한에 갈 생각을 했을까?’라고 의아해했다.

우리를 열광시켰던 것들

흑백 텔레비전부터 출발해 칼라 TV로 변하는 과정을 쭉 시청한 우리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되었을 때 사회는 우리더러 ‘신세대’라고 칭했다. 언니오빠들처럼 ‘국민교육헌장’ 못 외운다고 손바닥을 맞아본 경험도 없었고, 애국가 가사 4절까지 외워서 시험보지도 않았다. 텔레비전을 통해 형성되는 대중문화(물론 검열과 건전가요 애창과 같은 제도적 제약이 있긴 했지만)의 수혜를 받으며 자랐다. 고등학교 때 ‘뉴키즈 온더 블록’이 내한했을 때는 학교 전체가 술렁거렸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를 열광시켰다.

그때도 노태우가 집권하던 시기였고, 군사독재문화는 우리 옆에 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흥분시킬 만한 것들에 열광했다. 초등학교 때 ‘국산품 애용’에 대한 교육도 받긴 했지만 홍콩영화 문화와 팝송음악,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까지도 엿보고 향유하기를 원했다. 또 고등학교 때는 <질투> 같은 새로운 소재와 형식의 드라마가 등장해 우리를 설레게 했고, 그것을 보기 위해 ‘자율학습’이라는 미명으로 야간에도 학생들을 강제로 교실에 잡아두는 것에 저항하며 ‘땡땡이를 쳤다.’

그래서 어린 날의 기억도, 청소년 시기의 ‘땡땡이’도 암울하기만 하거나 마냥 억울하지 만도 않다. 우리는 독재의 시퍼런 칼날에 대해 온몸으로 부딪힌 세대가 아니었다. 독재의 공포와 자유가 억압된 경험이 지독했다기 보다는 우리를 들뜨게 하고 열광시키게 했던 문화적 요소들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다. 또한 우리가 요구하면 물질적, 문화적 혜택을 제공 받을 수 있다고도 상상(망상이었나?)하곤 했다.

민주주의 경험이 있는가

그러나 정작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경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부재한다는 것이다. 20대 후반 어느 날. 우리는 마치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얼핏 자각했다. 물론 무수히 들은 말이 민주주의지만 민주주의를 정작 알기나 한 걸까? 나는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어린 시절 경험 중에서 언제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토론해보거나 자기 입장을 밝혀본 경험이 있었던가. 안타깝게도 없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소수자의 권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보고,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문제에 대해 토로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경험과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런 기억이 없다. 독재정권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반면에 말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시대에 대해 뭔지 모를 괘씸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몇 살 터울 위인 세대와는 또 다르지만, 역시 우리 세대 또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고,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발표해본 경험이 없는 경직된 태도가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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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플 2006/01/26 [19:43] 수정 | 삭제
  • 칠판에 아이들 이름이 많이 적혀 있었습니다.

    떠드는 아이들
    돈 못 낸 아이들
    암기를 못한 아이들

    절대로 적히지 않는 아이들이 있고,
    항상 이름 적히는 아이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romance 2006/01/25 [20:56] 수정 | 삭제
  • 저도 기억나는 게 몇 가지가 떠오르네요.
    어렸을 때라 시절이 어떤 지는 잘 몰랐고 나중에야 듣게 된 것이지만,
    학교에서는 이래저래 강제로 시키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평화의댐 건설한다고 돈 걷은 것도 그렇고,
    이유도 잘 모른 채 돈을 걷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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