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과연 얼마나 변화했나

독재의 기억-6

이지현 | 기사입력 2006/03/21 [02:34]

권위주의, 과연 얼마나 변화했나

독재의 기억-6

이지현 | 입력 : 2006/03/21 [02:34]
우리는 아픈 현대사에서 ‘반공’과 ‘경제성장’의 기치아래 군부독재정치가 자행됐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독재’가 남긴 유산이 과거의 것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이는 드물다.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공세에 밀려, ‘독재’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판단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뿌리깊게 자리하지 못했다.
 
<일다>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독재’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독재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독재란 과연 무엇이며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개인의 일상을 통해 조명해나갈 계획이다. -편집자 주
 
내가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였다) 다니던 시절엔 한 학급에 반장과 부반장, 회장과 부회장이 있었다. 반장과 부반장이 하는 일은 수업시간 앞뒤로 구령을 붙이고 선생님께 인사하는 것과, 떠드는 아이 이름 적어 제출하는 것, 조회 시간에 줄 세우는 것, 시험지 채점하는 것 등으로 기억한다. 회장과 부회장도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 회장은 학급회의를 진행하고 부회장은 애국가를 부를 때 지휘를 했다.

그런 임원을 해보겠노라고 애를 쓰면서 유세까지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주로 칠판에 이름 적히는 아이에 해당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라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어느 날 나는 칠판에 이름 적히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맨날 적히는 아이들만 계속 적히는데, 적히지 않는 아이들은 목소리가 커도 절대로 적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반장이나 부반장이 만만하게 생각하는 아이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아이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따라 칠판에 적힌 내 이름을 보는 게 기분이 나빠서 나는 내 이름을 적은 반장에게 따졌다. 내가 거기에 이름 적히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서 떠들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 반장은 처음엔 웃으면서 여느 때처럼 나를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내가 진짜로 화를 내며 내 이름을 지우라고 하자 겁을 먹었는지 얼굴이 파래졌다. 만만하게 봤던 애가 무섭게 나오니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때의 경험이 나한테는 큰 사건이었다. 임원이 대수라고 같은 반 친구 사이인데 말도 함부로 하고 만만하게 보고 우쭐대는 아이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학교 다닐 때는 반장, 부반장을 비롯해서 힘 좀 쓰는 애들, 그리고 선배라고 나대는 학생들과 폭력적인 교사들이 그랬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상사들과 관리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남자라는 이유로, 나이 깨나 먹었다는 이유로, 잘 산다는 이유로, 잘 차려 입었다는 이유로 우월감에 빠진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고, 경찰이나 기자 같은 직분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눈 앞에 있으면 나는 어릴 적처럼 분하고 억울했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왜 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위협적으로 대하고 우쭐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고, 기분 나쁜 일이다. 나중에서야 한국사회가 특히 권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것이 사회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독재 청산은 권위주의 청산이기도 하다. 권위주의는 정치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권위주의는 학교나 회사나 가정이나 우리 일상에 굳어져 있다. 사람들 개개인의 권위주의적인 관계가 변화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권위주의와 결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과 지금, 사람들 간에 권위주의적 관계는 얼마나 변화했을까? 나의 경우는 별로 체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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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델 2006/03/21 [17:33] 수정 | 삭제
  • 반장과 부반장, 회장과 부회장의 역할은 딱 고거 맞네.
    재밌게 읽었습니다.
    권위주의, 신분과 직위가 사람을 대신하는 거.
    그런 거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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