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서 평택에 온 서신

헤노코 투쟁 10년, 희망을 담아

혁은 | 기사입력 2006/11/15 [02:04]

오키나와서 평택에 온 서신

헤노코 투쟁 10년, 희망을 담아

혁은 | 입력 : 2006/11/15 [02:04]
“한국 모든 분들의 싸움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본 오키나와 헤노코 투쟁에 참여했던 토미타(22)씨가 전하는 말이다. 토미타씨는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돕는 사람이자, 헤노코 투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도쿄 태생이지만, 15살 때 오키나와에 와서 7년째 헤노코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통해 승리의 경험을 얻어낸 오키나와 헤노코 사람들. 헤노코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토미타씨는 그 투쟁의 역사에서 자신이 함께 한 7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한국에서 4년여 동안 기지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에게 지지와 연대의 서문을 보내왔다.

현재 평택은 주민대표인 김지태 위원장에게 법원이 2년 실형을 선고했고, 국방부는 엄청난 경찰력과 군 병력을 동원해 대추리와 도두리에 추가 철조망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정부는 평택미군기지 확장문제를 철저히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만의 문제로 만들기 위해 외부로부터 접근을 차단하는 한편, 주민들이 보상문제 때문에 싸우는 양 왜곡해왔다. 현재는 한층 더 강한 검문검색을 통해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해, 폭력적으로 주민들을 외부와 고립시키고 있다.

평택과는 달리, 헤노코 투쟁은 헤노코 지역뿐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지속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정부의 태도는 일본정부의 태도와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평택 문제는 오키나와 헤노코 투쟁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보면, 평택과 오키나와는 닮았다. 또한 양 진영은 서로 강한 지지와 연대 의사를 보내고 있다.

토미타씨는 평택주민들을 향해 “우리도, 여러분도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연대는 꼭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계속 살아갑시다. 투쟁의 장소에서 만나고, 투쟁이 사라진 장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진심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서신의 말미에 썼다.

헤노코 투쟁을 통해 평택을 본다

헤노코 투쟁을 통해 평택의 문제를 바로보기 위해, 혹은 우리의 평택을 통해 헤노코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토미타씨와 몇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다. 토미타씨는 헤노코 투쟁에 대해 설명하며, 8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행된 ‘스와리코미’(연좌농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미군에 의한 ‘소녀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오키나와 현민 약 10만 명이 결집했다. 일본정부는 눈 가리고 아웅 격인 ‘후텐마 기지 전면 반환안’을 발표했다. 기존의 낡은 시설인 오키나와 현 기노완시 후텐마 한복판에 있는 비행장을 헤노코 앞바다, 길이 약 2500미터, 폭 약 730미터를 매립하고 그 위에 1800m에 이르는 최신식 비행장과 기지를 건설하는 안이었다.

헤노코 앞바다는 멸종위기에 처한 듀공이 서식하는 북한계선이기도 하며, 주민들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헤노코 기지반대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끈 ‘생명을 지키는 모임’은 주변 지역인 헤노코, 토미하라, 쿠시의 주민들이 1997년 1월 결성한 모임이다. 결성된 첫날부터 8년 간, 당번제로 20명 정도가 ‘스와리코미’를 진행했다.

1997년 12월 21일 나고시민투표에서 나고시민의 52%가 기지건설에 반대했다. ‘생명을 지키는 모임’과 ‘헬리포트 건설의 시비를 묻는 나고시민 투표 추진협의회’가 나고시 시민투표운동을 추진한 결과였다.

“시민투표 당시 여론은 기지건설 반대가 70%를 넘고 있었다.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승리하기 위해서 자민당 국회의원과 방위시설국 직원 300명을 동원해 찬성촉구연설을 하며 운동을 벌였고, 오키나와현 출신의 자위관 전원에게 친척에게 전화를 걸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사용한 기밀 비용은 수십억 엔에 달했다고 한다.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나고시민 여러분, 배고프고 험난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찬성에 투표하십시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배고프고 험난한 시절’이란 류큐왕조시대와 미정부 점령시기를 말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기지건설 ‘반대’를 결정했다. 당시 나고 시장은 독단으로 기지건설 승인이라는 “역사적인 배신”을 감행한다. 이후 약 7년이 흘렀다. 2003년 4월 8일, 일본정부가 기습적으로 ‘기지 건설을 위한 보우링 사전조사’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2003년 7월부터 ‘토요 해안 집회’를 통해 기지 건설을 ‘직접행동’으로 저지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스와리코미가 단지 연좌농성이었다면, 이때부터 ‘직접행동’을 포함한 저항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개인, 단체, 주민 누구든지 모여서 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그 때 ‘해상 행동대’를 결성했고 ‘카누대’를 만들었다.”

토미타씨의 설명에 의하면 ‘토요 해안 집회’는 한국에서 말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것이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요시위’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2004년 4월 19일, 일본정부는 본격적으로 ‘보우링 조사’(말뚝을 땅 속에 박아 지질을 조사하는 기지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헤노코 주민들은 3일 전 정보를 입수하고, 오키나와현 주민들에게 호소해서 당일에는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헤노코 어항을 봉쇄하고 정부의 보우링 조사를 막았다. 헤노코 투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삶 자체가 된 ‘비폭력 직접행동’

“2004년 4월 19일부터 ‘텐트 마을’을 만들었다. ‘텐트 마을’은 기동대 및 방위시설국이 ‘작업 야드’를 설치하기 위해 진입해올 것이라고 생각되는 장소에 설치해, 기지반대운동의 지원자나 오키나와현 사람들이면 누구라도 방문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곳에선 기동대가 연좌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연행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훈련도 했다. 이때, 우리는 기동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놓았다.”

시위를 진압하러 나오는 기동대에 대비해 예행연습과 훈련을 거치면서 헤노코 사람들은 비폭력투쟁을 견지해나갔다. 헤노코 사람들이 말하는 비폭력투쟁은 “이에지마(伊江島)에서 미군의 총검과 불도저에 빼앗긴 토지를 되찾기 위해 리더인 고 아하곤 쇼우코우씨가 실천했던 방법”이라고 한다.

“비폭력이지만 직접행동을 하는 방법, 이것을 비폭력 불복종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헤노코의 운동은 ‘사상적 비폭력주의’와 ‘전략적 비폭력주의’가 있었다. 사상적 비폭력주의는 ‘전쟁은 모든 폭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 하에 모든 폭력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략적 비폭력주의란 정부와 대화를 항상 준비하지만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고려해 각 현장마다 방법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논의하면서 더 깊이 이해해, 즐거운 분위기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어떤 의견이라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폭력주의는 호소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헤노코 투쟁은 단숨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현재 도쿄와 오사카, 쿄토, 홋카이도, 큐슈 등에서도 함께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토미타씨는 한국에서 죽창을 든 시위대의 모습 등에 대해 언급하며 “나는 결코 이라크나 평택에서 피를 흘려 싸우는 사람들 모두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아무리 비폭력을 내걸어도 정부가 그것을 ‘폭력’이라고 간주하고 계속 배제해버리니까, 상황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선택해 취해왔다. 그것은 역사상 어느 투쟁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동료들이 눈 앞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을 때 나는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그런 의미로, 투쟁 방식이 어떻게 바뀌든지 우리들은 동료라고 말할 수 있다. 항상 투쟁은 ‘현장’이 선택하는 것이다.”

‘생명을 지키는 모임’은 이러한 비폭력주의라는 원칙 아래, 수동적인 저항이 아닌 2년 이상 비폭력 직접행동을 전개했다.

“우리는 해상에서 행해지는 볼링조사를 저지하기 위해 바다 위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링조사는 해상에 쇠파이프 초소를 세워 거기서 말뚝을 박는다. 우리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배와 카누를 타고 가서 직접 바다에 뛰어들었다. 리더는 평화시민연락회 다이라 나쓰메 목사였다. 정부의 작업은 압도적인 물리력 차이 속에서 행해졌으며, 우리 저지선(船)이 한 척이라면 저쪽은 20척 이상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저지 행동으로 잠수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건설작업을 계속 강행했다. 2004년 10월 중순부터는 기지건설용 쇠파이프 초소 건설이 시작됐다. 이 즈음부터 건설업자들의 폭력은 격화됐고, 헤노코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은 초소 4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건설 작업원들은 우리를 ‘자신들의 일을 빼앗는 괘씸한 자들’이라고 생각해서 일상적으로 목을 조르고, 억누르고, 때리고, 발로 차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비폭력으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폭력을 참으면서 저지행동과 설득을 계속했다. 한편으로 정부측에게 작업선을 제공하고 있는 헤노코 어민들을 대상으로도 설득작업을 했다.”

비폭력투쟁은 다음과 같이 전개됐다. 건설업자들과 방위시설국이 오전 7시에 초소에 나오면 주민들은 오전 6시까지 초소에 들어가 점거해 저지행동을 전개했다. 그러면 정부 측은 오전 5시에 초소를 점거하기도 했고, 주민들은 대응전략을 논의했다. 4개 초소 점거자들은 각자 자치권을 가지고 행동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 초소에 도착하면 오늘의 행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령 토미타씨의 초소에선 ‘비폭력’, ‘체포시의 대응방법’, ‘구체적인 저지행동의 실시 방법’, ‘점심식사 관계’, ‘긴급지원이 필요한 경우 대처방법’, ‘무선 취급’ 등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오전 7시에 작업원이 캠프 슈와브로부터 출항하면 그때부터 직접행동을 시작했다. 초소에 뛰어 올라오는 작업원들을 막기 위해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헤엄쳐서 카누대와 함께 작업선들을 저지했다. 저지에 성공하면 정부측 배의 교섭인과 교섭을 시작하고, 교섭이 깨지면 다시 행동에 들어갔다. 오후 6시경에 작업원들이 완전히 육지로 돌아갔는지 확인하면 우리도 육지로 돌아왔다. 육상의 텐트마을에서는 각 초소끼리의 의견을 나누고 교환했다.”

정부 측에 비해 주민들은 물리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바깥바다에서는 “정부측의 1000톤의 배와 작업선 20척에 대항하는 주민들의 저지선 2척, 내해에서는 정부측 작업선 40척 대 주민들의 카누20척과 저지선 2척이었다.” 주민들 중엔 부상자가 속출했다. 1000톤 작업선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 주민들은 “이 배가 돌진하면 우리는 죽는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배를 타고 나갔다 한다. 할머니들은 바다의 신에게 기도를 하고 달려와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살아 돌아와! 살아 돌아와! 살아 돌아와서 이 싸움의 의미를 전해라!”

작업원들의 고문과도 같은 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행동가들 중 2명이 초소에서 밀려 떨어져 머리를 다치게 돼 생사의 위험에 처해지자, 위기감과 초조함이 감돌았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근처 동쪽 해안의 어부들이 30척 넘는 배를 이끌고 지원하러 나온 것이다. 원조에 나선 어민들의 모습을 본 시위대들은 “놀라움으로 넋을 잃을 것 같았다”고 한다.

어부들은 “우리도 우리 자신들의 몸의 일부인 바다를 더럽힐 수 없다. 너희들이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들도 왔다”라고 화답하며 투쟁에 합세했다. 어민들까지 함께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정부는 바다에서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됐다. 작업을 강행하려고 해도 무수한 배들이 초소를 둘러싸 작업선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려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시대

마침내 2005년 9월 정부는 쇠파이프 초소를 모두 자진 철거했다. 10여 년간 바다에서, 육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지역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진행해온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비록 정부가 그 한달 뒤인 2005년 10월, 헤노코 바다를 비켜간 육지에서 공사를 하는 ‘캠프슈와브 연안안’을 발표했고, 오키나와 지사가 연안안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이 돌아서기는 했지만 ‘생명을 지키는 모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여전하다.

“‘생명을 지키는 모임’은 주민들에게 있어 ‘삶의 방식’ 그 자체다. 힘겨운 투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지팡이가 되어 지지해준 덕분이다. 이 투쟁은 오키나와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세대를 잇는 우리들이 지금 시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전쟁인가 변혁인가, 순응인가 저항인가. 어느 쪽이 진실한가에 대해 우리 투쟁이 분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현재 오키나와 사람들은 “헤노코의 투쟁은 최근, 오키나와와 일본에서 ‘전쟁을 하려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을 알리는 희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헤노코는 평택과 비교했을 때 여러 조건들에서 차이가 있다. 헤노코는 바다였고, 헤노코 지역 외 나고시 전역에서 광범위한 지지와 연대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정부가 한국정부만큼이나 강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헤노코의 반기지 운동은 10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저항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끝까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끈질기게 비폭력적인 ‘직접행동’을 계속해 승리할 수 있었다.

기지건설 반대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바다를 지켜내고 있는 헤노코 지역 주민들은, 오키나와의 작은 지역인 헤노코의 문제가 비단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임을 시사하며, 한국 사회에도 적극적인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서신 번역: 사이토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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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 2006/11/16 [12:38] 수정 | 삭제
  • 정말 잘 읽었어요.
    끈질기게 이어지는 운동이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감동을 줄 수 있나봐요.
  • 냐옹 2006/11/15 [11:37] 수정 | 삭제
  • 왜 단체들보다 지역주민들의 투쟁이 더 비폭력적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지역주민들에겐 삶과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kyung 2006/11/15 [05:14] 수정 | 삭제
  • 삶의 방식, 그 자체가 되는 운동
    그런 운동이 필요하죠. 절실히..
    미군에 의한 소녀 성폭력 사건으로 인한 인간띠 잇기며, 오키나와에 대해선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상세하고 많은 정보 잘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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