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다양한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커서 음악가가 될 거라던 아이
초등학교 입학 때 만나 단짝으로 6년내내 붙어 다닌 친구는 어렸을 적부터 줄곧 나에게 크면 뭐가 될 건지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음악가’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 친구는 ‘음악가가 어떻게 되냐’면서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한국에서 또 세계적으로도 부산은 큰 도시이고 개발된 도시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부산에서는 예술가의 꿈을 꾸기 어렵다는 막연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자라왔다. 게다가 대학을 서울로 가지 못하면 안 된다는 알 수 없는 목표가 주어진 채로 자란 나는 항상 고향인 부산을 떠나 ‘무언가’가 되는 것만이 인생 최고의 성공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고민이 없이 성인이 되었다.
운 좋게도 내가 다닌 학교들은 한번도 ‘이반검열’(동성애자 학생을 색출하여 정학이나 퇴학을 시키거나, 여학생이 머리가 짧거나 서로 손만 잡아도 제재를 가하고, 스킨십에 따라 벌점을 매기는 등 행동을 규제한 검열 행위)이라는 것을 시행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는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직장인 아버지가 아닌, 한번 출항하면 12개월 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는 선원 아버지가 계셨던 탓에 어머니가 집안의 체계를 잡아가는 특별한 가정에서 자랐다.
특히, 5살이 많은 언니는 문화적으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언니는 여자라고 해서 의견 없이 자라면 안 된다는 (이제 보니 여성주의적이었던) 언행으로, 다니던 대학에서 ‘네네’ 할 줄 모르는 여학우로 찍혀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5살 어린 나의 눈에는 ‘부산 탈출=서울행’이 아닌 ‘부산 탈출=미국행’을 성공시킨 언니가 마치 대단한 영웅처럼 보였고, 나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일본서 작곡가 데뷔! 성공신화를 쓰는가 싶었다
드디어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며 나는 꿈꿔온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이뤄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동기들은 같이 음악을 만들거나 연주하는 것보다는 어울려 술을 먹거나 연애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 학교 공부 역시 ‘슬픈 발라드를 잘 부르면’ 최고점을 획득할 수 있는 (잘난 체하는 것 같지만) 너무 쉽고 자극이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서울 생활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국 드라마 <The L Word>를 좋아하는 팬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즉흥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음악을 좋아하는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바에서 만나 잘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음악 얘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스스로의 꿈에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만난 인터넷 친구들, 학교 친구들 모두 나에게 ‘뭐가 되도 될 사람’이라고 치켜 세워주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올린 자작곡을 듣고 찾아온 신인가수의 데뷔곡을 작업하는 영광을 경험하기도 했다. 스무 살의 나이로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니 부산 탈출만이 역시 길이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작곡료 백만원 중 일부가 입금된 날은 스스로가 정말 대견해서 가장 친한 친구를 불러내 순대국밥집에서 가장 비싼 메뉴인 모듬순대에 술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신인가수는 데뷔를 하기 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졸업을 즈음하여 한 애니메이션의 OST에 내가 만든 곡이 실리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일본에서 작곡가로서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며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될 거라 믿었지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의 삶에도 변화가 왔고,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대형 기획사에서 작곡하며 겪은 차별과 갈등
한국으로 귀국하며 본격적인 K-POP시장에 뛰어들었다. 운 좋게 국내 3대 기획사로 꼽히는 회사의 아이돌 곡을 작업하며, 레슨이라든지 번역과 같은 부업을 접고 ‘전업 작곡가’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함께 곡을 작업하는 연상의 동료 남성 작곡가와 동석한 자리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당신 눈에는 지금 내가 이 사람의 보조로 보입니까?’라고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을 만큼의 미묘한 차별의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그와 동석하여 미팅에 참석하는 일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들어봤을 법한 아이돌들의 히트곡을 작곡한 유럽의 프로듀서들과 만나 같이 작곡을 할 수 있는 ‘송캠프’의 기회도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비를 들여 북유럽으로 출장을 가는 일 역시 신인 작곡가인 나에겐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실적의 차이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 같은 해 일을 시작했던 남성 작곡가는 대형 아이돌의 타이틀곡을 작업하며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판매하는 일을 겸하는 사업가형 프로듀서로 발전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무명 작곡가에 불과한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내가 겪은 미묘한 차별은 퀴어로서의 나에게도 계속 이어졌다. 이성애자 동료들이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지루한 자리에서 그 누구도 나의 파트너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던가, ‘너 보라고 무지개빛 티셔츠를 입고 나왔어!’라고 말하면서도 게이를 비하하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던가, 성별 이분법적 젠더 수행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보면 끊임없이 트랜스포비아적 지적을 해대는 것 등.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농담에 불과’하거나 ‘진심 어린 조언'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반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나날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내가 이런 것들을 지적하면 ‘우리는 열린 사람들’이라며 오히려 화를 내는 응답이 돌아오니, 혐오 행위들은 나아지지 않았다. 호모포비아라는 낙인은 ‘쿨’하지 않고 닫힌 마음을 가진 옹졸한 예술인 같이 느껴져서 싫지만, 이성애중심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희화화하는 것은 마치 표현의 자유처럼 허용된 행위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혐오가 근원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농담일 텐데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나 같은 유별난 존재가 대중음악을 만드는, 특히 아이돌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떤 작은 변화일지라도 어쨌든 변화를 가져올 것이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 안에서 버텨서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업계에서 다른 여성들과 퀴어들의 손을 잡고 이끄는 존재가 꼭 되어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성공적인 커리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위해 성별이분법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이성애중심의 문화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개2퀴2. 파트너와 함께 강아지 두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는 코로나19가 안겨준 험난한 창작 생활 속에 버텨나가고 있는 대중음악 작곡가. 대학원에 다니는 파트너를 위한 각국의 요리를 수준급으로 해내며 ‘대박곡’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용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 하는 사람. 언젠가 나타날 퀴어아이돌 프로듀싱의 날만을 손꼽아 기대하고 있는 실력파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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