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치 있는 입담으로 나를 자주 웃기는 친구 J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어두운 일이 생겨도 티 내지 말아. 그러면 자꾸 불행한 사람들이 달라붙잖아. 행복이 자꾸 달아나면 어떡해.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이상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J의 마음을 알기에 그냥 고마웠다. 내가 어둡고 불행한 시기마다 달려와 준 게 J였으니까.
“너도 이제 그냥 남자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아이가 주는 충만함이 너무 커서 이상한 힘이 생겨. 같이 유모차도 끌고 산책도 하자.”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도 진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J의 아이와 같이 수영장도 가고 봄 산책을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런 풍경이어야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내가 원하는 게 그런 안정된 삶일까? ‘괜찮아,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해야 한다는 강요에서도 벗어날 거야.’ J에게 미안해서 속으로 생각한 걸 말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잠든 아이가 눈을 뜨고, 뱀의 꼬리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눈앞에서 살랑이는 이 꼬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아이는 책상에서 옷걸이, 선반까지 온 집안을 휘감고 창문 밖까지 뻗어있는 뱀의 몸통을 본다. 뱀을 한번 꼬집는다. 얄미웠던 걸까? 저를 깨워놓고 정작 뱀은 잠든 듯 고요하니 말이다. 그때 비명이 들린다. 멀리서, 창문 밖에서, 도시 밖에서, 어쩌면 아예 다른 나라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멀고 먼 뱀의 소리!
아이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나서기로 마음먹는다. “구불텅구불텅한 뱀을 타고 정원 끝까지 나아갔어. 담장 너머에도 뱀의 몸통이 거리 곳곳을 휘감은 채 이어져 있었지.” 비바람을 지나고, 밤의 숲을 지나서 한참을 걷고 또 걸은 아이는 마침내 깊은 동굴 속에서 뱀의 얼굴을 마주한다. “내가 널 꼬집었어.” 내뱉는다.
‘기승전결’에 충실한 이야기 구성 방식대로라면 이제 아이와 뱀은 한판 붙거나, 어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야 할 것 같다. 의외로 뱀은 아이를 조용히 맞이할 뿐이다.
“널 보니 참 반가워. 아무도 여기까지 온 적 없거든. 친구도 없이 혼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묘한 긴장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책은 자꾸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왜 뱀과 아이인가? 그들은 왜 동굴에서 만났을까? 뱀과 아이의 만남은 그들의 선택일까, 꼬리의 우연일까?
수많은 텍스트에서 숭배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화려하거나 징그럽게 그려지곤 하는 뱀이 이 책에서는 꽤 담담하게 그려진 것도 특징이다. ‘리노컷’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판화 그림은 무척 신비롭고 아름다운데, 작가는 뱀의 무늬나 질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대신 화면 전체를 가로지를 만큼 커다란 몸을 구불텅구불텅한 선으로 찍어서 뱀의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그려냈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 자체가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뱀이 뱀으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뱀이 뱀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우산이고 그네이고 다리이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된다는 진실을 말이다. 뱀은 아이를 통해 그 진실을 듣게 된다.
“여기에 있어도 누가 나를 치거나 쓰다듬거나 간지럽히는 느낌은 나. 하지만 난 내가 사는 세상을 전혀 몰라. 네가 얘기 좀 해 줄래?”
뱀의 부탁을 들은 아이는 길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특별한 약속을 건네는데...
‘뱀’과 ‘동굴’의 재해석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이 그림책은 ‘뱀’을 무엇으로 읽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이야기로 확장되고 변주된다. 뱀은 그 이름에 갇혀 오랫동안 오해받고 따돌림당한 여성이나 퀴어, 이주민, 난민, 장애인들을 대변하는 것 아닐까. 세상은 뱀을 낯설다며 두려운 존재로 낙인찍고, 자꾸만 어둡고 외딴 세계로 몰아넣는다. 어쩌면 그래서 뱀도 잠시 깊은 외로움에 빠져 제 존재감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때 아이가 찾아왔다.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고 들은 독자들은 모두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길 수밖에 없게 된다. 천천히 이 그림책 전체를 관통하는 뱀의 이미지를 다시 보다 보면, 뱀이 그저 뱀으로 존재하기에 이미 세상을 더 다채롭고 아름답게 연결해주는 이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뱀은 왜 아이와 같이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동굴에 계속 머무는 걸까? 아이는 왜 뱀에게 같이 이 동굴을 나가자고, 이제는 외롭지 않게 밖에서 함께 살자고 하지 않고, 특별한 약속을 건네는 걸까? 이 질문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책을 ‘수치심에 감금됐던 자아의 버둥거림’으로도 해석해 본다.
J가 나를 걱정하는 건, 내가 겪은 몇 번의 좌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K-장녀의 책임감에 취해 오랫동안 돈과 감정을 소모하다 지쳐 나가떨어진 모습부터,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믿으며 몸담았던 곳에서 권력남용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떠났던 때,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줄 알았던 연애에서 배신을 겪고 충격에 빠졌던 상황까지.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 아직도 나는 종종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고통과 비탄에 빠진다. 그러나 나는 당분간 동굴에 웅크리고 싶다. 내 삶을 부정하고 싶지도, 억지로 안전하고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다. 언젠가 오늘을 회상할 때, 맘껏 버둥거렸던 날들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난감한 불행을 행복하게 맞기 위해서, 동굴 속에서 오래 버둥거렸다고.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어』를 읽으며, 아이가 뱀의 또 다른 자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뱀이 불러온 내면의 자아, 뱀이 도무지 세상을 알 수 없다고 느끼며 비탄에 빠졌을 때 꼬리를 흔들어 깨운 자아가 바로 그 아이 아닐까. 그 동굴에서 아이를 만난 뱀은 아이가 들려준 자신의 모습과 세상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의 얼굴과 화해하려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동굴 안에 있는 시간이 헛되거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름 재미도 있고, 나의 자아와 세상에 대해 이전엔 몰랐던 깨달음과 성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 2018)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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