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아닌 대안, ‘약자남성’들의 출구찾기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④ ‘인셀’화 되지 않기 위하여

조경희 | 기사입력 2023/03/14 [11:16]

혐오가 아닌 대안, ‘약자남성’들의 출구찾기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④ ‘인셀’화 되지 않기 위하여

조경희 | 입력 : 2023/03/14 [11:16]

일본에서 최근 몇 년 동안에 ‘약자남성’이라는 단어를 쓰며 남성성을 분석하고 관련 저서를 잇달아 출간한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씨. “스스로가 어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서 남성학”을 한다는 그는 현재 잡지 『대항언론』 편집인으로 활동, 남성학과 관련해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간의 스기타 씨의 저작과 활동을 주목해온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가 인터뷰했고, 대화의 내용과 범위가 방대해 총 4회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약자남성’에 의한 아베 암살

 

조경희: 이번 『대항언론』에 야마가미 데쓰야(아베 신조 전 수상을 총격해 살해한 범인)에 관한 글을 쓰셨어요. 스기타 씨의 글을 과거에 야마가미가 참조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언제든 살인사건은 있어 왔지만 최근 일본에서 남자들의 페미사이드(여성살해)나 소수자를 겨냥한 혐오범죄가 눈에 띄죠. 야마가미의 경우 그런 케이스는 아니지만, 소위 ‘약자남성’에 의한 테러로 볼 수 있겠죠.

 

스기타: 작년 일본은 정말 일본 남자들의 ‘인셀’(involuntarily celibate의 약칭, 연애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에 원한을 품고 여성혐오로 가는 남자들을 일컫는 말)화 원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행복해 보이는 여성을 칼로 찌르거나, 영화 〈조커〉의 코스프레를 하고 전철 안에서 방화를 하거나….

 

야마가미는 40세인데, 내가 썼던 약자남성론 기사에 대해 트위터에서 짧게 반응하고 있었어요. 저의 기사 내용은 “약자성을 가진 남자들도 어둠에 빠지지 말고 비폭력적인 주체가 되자” 뭐, 그런 제안이었어요. 그가 이에 대해 “그러나 나는 거부한다”라고 썼어요. 이 “그러나(だが)”는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한번은 받아들이고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라는 뜻이에요.

 

▲ 작년 7월 아베 신조 전 수상을 총격해 살해한 야마가미 데쓰야가 2021년 4월 28일에 트위터에 올린 글. “그러나 나는 거부한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공격하지도 않고’라는 말이 옳은 것은 아무도 잘못이 없는 경우다. 명확한 의사(99% 악의로 볼 수 있다)로 나를 약자로 몰아내고 그 위에서 으스대는 놈들이 있다. 신 앞에 선다면 더더욱 그를 살려둘 수 없다”  ©일다

 

야마가미의 경우는 통일교 신자 2세의 문제가 핵심이니까, 단순한 약자남성론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꾸로 너무 특수한 사례로만 보면 그가 안고 있었던 사회적 문제가 보이지 않게 돼요. 그의 트위터를 보면 외국인혐오나 여성혐오 발언은 하고 있는데, 완전히 넷우익의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고 봐요. 그는 자민당이나 넷우익들의 비이성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었으니까요.

 

넷우익이 아닐 가능성도 그 안에는 있었지만, 내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던 것이죠. 이 상황을 내가 받아들이고 다시 “그러나”를 이어감으로써, 암살 외 다른 가능성은 없었는가 라는 물음을 조금 더 다른 차원으로 가져가서 고민하려 하고 있어요.

 

조경희: 아베 신조가 암살당했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위가 일종의 혁명적 상징성을 가진 측면이 있잖아요? 우파적 성향을 가진 사회적 약자가 결국 그 장본인이던 우익 정치인을 암살한다는

 

스기타: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아베 신조도 ‘미성숙한 아저씨’였어요.(인터뷰 3화에서 참조) 물론 권력을 가졌지만, 도련님 같이 부인의 돌봄을 요구하는 사람이었고. 멘탈이 약한 인간이 허세를 부린 측면이 있었죠. 그러니까 권력을 가진 ‘아저씨’를 인셀화한 로스제네(잃어버린 세대) 남성이 쳤다는 점이 현재 일본의 출구 없는 상황에 바람구멍을 낸 측면은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은 근대 이후 시민혁명을 못했던 국가니까 암살이나 쿠데타를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시민들이 거리나 광장을 채우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요. 암살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건 일본 시민사회의 한계인데, 아마도 남성성 문제와도 연관이 있겠죠. 어떤 돌발적인 사건으로 사회가 변하는 것에 기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베 정권과 통일교, 근대국가와 천황제

 

조경희: 그렇죠. 그런데 일본 사회의 역사성으로 볼 때 테러나 암살이 큰 의미를 가지거나 변화의 계기가 되어온 경위는 확실히 있잖아요. 야마가미는 통일교 신자 2세로서의 원한으로 아베를 죽였으니 정치 테러는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종교단체와 자민당의 유착이 드러난 것이니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가진 것이고요.

 

스기타: 네, 굉장히 컸어요. 정말 이 사건이 없었으면 사람들은 자민당과 통일교와의 그 깊은 관계를 깨닫지 못했죠. 물론 통일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공명당과 창가학회의 관계도 그런데, 적어도 정교분리가 원칙인 근대국가에서 그토록 깊이 유착하고 정치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다는 현실이 드러났어요. 신토와의 관계도, 일본은 신토와 천황제는 종교가 아니니까 정교분리 원칙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쳐왔어요. 이건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다 라는 논리에 필적하는데, 어쨌든 일본의 전후 정치는 종교와의 유착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왔고, 새삼스럽게 그 비정상성이 부각된 것이죠.

 

아베 정권 시기엔 좌파 세력까지도 ‘리버럴 천황제’와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헤이세이(1989~2019년) 천황은 평화적인 사람이니 활용하는 것이 좋다거나…. 이번 사건 직후도 좌우 할 것 없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표명했는데, 이렇게 말함으로써 거꾸로 현실을 안 보이게 만들고 있어요. 그동안 이 비정상성을 왜 깨닫지 못했는가가 야마가미의 암살로 급속히 노출되었다는 점이 중요해요.

 

▲ 스기타 슌스케 씨의 최근 비평집 『남자가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남성론』

 

“남자들에게는 약함을 인정 못하는 약함이 있다”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피해의식은 달라

 

조경희: 야마가미는 극도의 빈곤과 가족의 비극 속에서 자라왔죠. 통일교라는 특수성이 있다 하더라도 인적, 사회적 안전망이 약하고 개인화된 일본 사회에서 박탈감을 안고 지내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스기타: 남성들 사이에도 분단이 심화되고 있어요. 학력이 높고 비교적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페미니스트 남성들이 올바른 말로 ‘남자들은 반성해야 한다’며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이에 대해 울적한 감정을 안고 있는 불안정한 남성들은 그들에 대한 증오를 강화하게 되는… 그런 남성 내 격차나 분단도 지적되고 있어요.

 

저는 사회적 지위나 지식이 있는 진보(리버럴) 엘리트 남자들이 올바른 말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에 대해 약간 위화감이 있어요. 뭔가 좀 중요한 문제를 스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페미니즘 언어들이 남성들에게 그렇게 바로 쉽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이지 않아요. 여유는 없는데 어떻게든 어둠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그 갈등을 소중하게 다뤘으면 좋겠어요.

 

조경희: 네, 페미니즘을 배운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거나 신체화하기까지는 갈등과 도약이 꼭 필요할 것으로 보여요.

 

스기타: 물론 이건 제 입장이고 정답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해서 남자가 쉽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올바른 말로 처리하기 전에, 자신들의 문제와 제대로 대면해야 해요. 너무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압도적인 남성특권이 있는 건 사실인데, 너의 특권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 받으면 갈등하잖아요. 비판 받고 마음이 아프다거나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도 된다는 것이죠.

 

피해의식하고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비판 받은 다수자들이 ‘사실은 우리야말로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남자들에게도 상처나 취약성은 당연히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죠. 저는 종종 “남자에게는 약함을 인정 못하는 약함이 있다”고 표현하는데요. 무능력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스스로 부인, 억압하는 취약함이 있어요.

 

그래서 피해의식이 꼬여버린 ‘인셀’(여성혐오로 가는 남자들)이 아닌 형태로,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약자남성’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복합차별이나 교차성이라고 할 때 개개인마다 어떤 문제는 민감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차별에 가담하기도 해요. 그 갈등이 연립방정식처럼 되어 있으니 하나씩 생활이나 욕망의 수준에서 바꿔나가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과정에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상황이 바뀌면 또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은 페미니즘이 주류니까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바꾼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어요.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역사나 문화로 뿌리내리지 않을 것 같아요.

 

조경희: 정말 여러 감정이 드네요.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요즘처럼 논쟁에서 이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담론 형성이 아니라, 생활이나 신체성의 차원에서 변하는 과정이 있어야 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겠죠.

 

▲ 줌(zoom)을 통해 추가 인터뷰를 진행한 스기타 슌스케 씨(왼쪽)와 필자 조경희 씨(오른쪽)

 

약자남성들의 괴로움, 박탈감의 출구는 어디로 향해야?

혐오와 능력주의가 아닌 느슨한 공동성은 가능한가

 

“약자남성들은 소수자도 다수자도 아니다. 1%도 99%도 아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잔여, 찌꺼기일 뿐이다. 다수자 남성들의 내적 균열로 드러나는 약자성 -- 거기에는 경제적 빈곤과 문화적 빈곤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자체의 박탈이 있다.”

 

“약자남성들은 자신들의 괴로움이나 박탈감을 배타적인 증오나 반발 감정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가짜 대립이며 소모를 강요받을 뿐이다) 이 사회에 대한 분노로 변화시켜 응집해가야 한다. 그런 입장에 ‘인셀 레프트’라는 이름을 달아본다.” (『対抗言論(대항언론)』3)

 

조경희: 그런데 ‘약자남성’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설정한 순간 불편함도 생기는 것 같아요.

 

스기타: 강한 정체성이나 주체성을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누구든 아무런 발판이 없는 건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약자남성’이라는 말은 저에게는 잠정적 발판과 같은 겁니다. 책에서는 ‘인셀 레프트’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패미니즘 입장에서는 약자남성이라는 말에 비판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결혼도 하고 책도 내는 내가 ‘약자’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어떤 글에서 남자들은 구조적으로 약자도 아니고, 또 피해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비정규 남성’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요. 한 독자가 “우리한테서 약함이라는 말조차 뺏어버리는 건가”라는 감상을 썼더라고요. 이런 현실을 반영해서 ‘약자’라는 말의 다른 가능성, 자본주의의 저변에서 몸부림치는 남성들에게도 열어가는 의미에서 쓰기로 했어요.

 

요즘 SNS를 보면 여성혐오나 넷우익적인 사람들도, 그것을 비판하는 리버럴들도 이미 완성된 논리 속에 있어요. 완결되지 않는 사람들을 어둠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그것을 온라인에서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대면적인 공간에서 서로 고민을 나누는 상호 돌봄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여성들 사이에 있는 상호 카운슬링 같은 연대감의 경험을 남자들은 쌓지 못했어요. 생산주의나 능력주의에 수렴되지 않는 느슨한 공동성(the common)의 흐름을 과거에서 발굴하는 작업도 지금 시작되고 있어요.

 

▲ 스기타 슌스케 씨가 능력주의, 생산주의와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사례로 든 정신장애인 공동체 ‘베델의 집’. 80여 명이 마을을 구성해 사는 이곳에서, 유쾌하고도 획기적인 상상력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질병을 드러내고 연구하며 즐겁게 살아간다. (사진 출처: 페민)

 

‘베델의 집’이라는 지적장애인들의 커뮤니티가 있는데, 그들 역시 능력주의나 생산주의와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고 실천적으로 모색해온 사람들이에요.(관련 기사: “약점을 인연으로” 즐거운 베테루 마을 https://ildaro.com/4538) 또 알콜중독 자조모임과 같은 단체에서도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온 사람들의 당사자성을,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한 대안적인 커뮤니티 실천으로 전개하고 있고, 이런 맥을 청년 그룹도 이어가고 있어요. 여전히 수는 적지만, 아저씨들 중심의 남성학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요.

 

제가 말하는 무능력성도 이러한 장애인운동에서 배운 것인데, 능력주의를 비판한다고 누구나가 나름의 능력과 생산성이 있다는 담론에도 조심해야 해요. 왜 뇌성마비와 같은 존재가 있으면 안 되는가, 생산성이 없어도 되지 않는가, 라고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백래시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어요.

 

조경희: 신자유주의를 거쳐서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동시에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 특유의 현실들이 있어요. 스기타 씨의 개인사는 당사자성과 교차성의 실천과정으로서 정말 흥미롭고 고무적이었어요. 또 페미니즘과 남성성 문제의 현주소와 과제를 생생하게 말씀해주셔서 한국의 독자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스기타: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 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여러 깨달음이 있었어요. 평소 고민하거나 쓰면서 일본 내에서만 사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실감했습니다. 『대항언론』 4호는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동아시아의 사상과 차별’이라는 주제로 잡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었어요. 저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외국어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직접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대화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끝)

 

[필자 소개] 조경희. 일본 출생. 성공회대학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젠더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 공저에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 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포스트냉전과 팬데믹: 오키나와의 코로나 경험과 정동』(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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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니 2023/03/27 [01:17] 수정 | 삭제
  • 너무 재밌네요. 좋은 기사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체화의 과정에서 잠정적인 발판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남아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도나 2023/03/16 [12:09] 수정 | 삭제
  • 느무느무 재밌다
  • 오렌지 2023/03/14 [19:38] 수정 | 삭제
  • 4편 인터뷰를 보고서 약자남성이라는 말이 '프리터'에서부터 줄곧 연결되는 세대와 계층 간에 강자가 아닌 남성성에 대한 고민이라는 걸 좀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일본 사회를 별로 아는 건 없지만, 한국도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고 다른 면도 있는 것 같은데, 간만에 지적욕구를 자극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더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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