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먹고 싶어진다. 생강 향이 나는 하얀 가락엿! 그럴 때는 그리움이 따라온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창평 할머니’가 보고 싶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립다는 게 나조차 신기하지만, 이것은 꽤 또렷한 감정이다. 그리움에 맛과 향이 묻어 있다.
창평 할머니는 엄마의 둘째 이모, 나에게는 겨울마다 쌀엿과 생강 가락엿을 만들어서 우리집으로 한 바구니 가득 보내주신 할머니다. 덕분에 나는 겨울마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엿가락을 톡 분질러서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그 엿은 이빨에 붙지 않으면서도 쫀득쫀득 참 맛이 있었다. 그때 기억이 내게 어떤 각인을 남긴 걸까. 겨울 찬 바람에 코끝이 시려질 때면 지금도 어김없이 생강엿이 먹고 싶어진다. 창평 할머니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보고 싶어진다.
그 맛은 할머니를 데리러 온 죽음의 그림자, 사신마저도 황홀하게 만든다. 사신은 할머니의 음식에서 “생의 맛”을 맛보고, 며칠 만 더, 하루만 더 죽음으로 가는 길을 미루는 할머니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그럴수록 사신은 따스하고 보드라운 행복감을 느끼는 동시에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아서 슬퍼지려 하는데…….
오래전, 생강엿이 도착하지 않은 어느 겨울밤에 창평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녘 늘 깨어나던 시간에 일어나지 않은 할머니를 “자네, 새벽 기도 안 가는가?” 할아버지가 흔들었고, 그제야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전날 잠든 모습 그대로 돌아가셨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한다. 주무시듯 돌아가신 할머니를 두고 어른들은 복받은 일이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정말 괜찮았을까? 무섭지는 않으셨을까?
어릴 적에는 창평 할머니와의 연결이 가락엿밖에 없었지만, 자라는 동안 우리집에 몇 달 살았던 5촌 이모들과 나랑 잘 놀아주던 삼촌의 엄마가 창평 이모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이모들과 삼촌의 인생 여정을 보고 들으며, 나는 종종 창평 할머니와 연결되곤 했다. 그때에도 사이사이 생강엿이 도착했고, 나는 생강엿을 먹으며 할머니를 상상하듯 그려봤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도 그림에는 없다. 홍조를 띤 뺨에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형태가 전부이다. 여인의 목소리를 내는 사신이 할머니를 데리러 온 장면도, 사신의 감정 변화도 비유적 표현이다. 그림작가 비올레타 로피스는 형태를 압축하고 붉은 빛, 검은 빛의 색채 대비는 강조해서 시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적극적인 상상과 해석의 세계에 동참하도록 만든다. 독자들은 이 책에 담긴 인물과 서사, 이미지에 저만의 구체성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덕분에 나는 이 책에서 창평 할머니와 내가 만난 여러 할머니들의 음식, 손과 냄새, 삶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책의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은 이 그림책의 배경과 의미를 깊이 해석하는 자원이 될 수 있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이탈리아의 베파타(befana) 전설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빗자루 탄 마녀가 1월 6일 주현절 전날 밤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이야기이다. 산타클로스 이야기와 닮은 듯 다른 이 전설은 이탈리아 민속신앙과 서구 기독교 세계관이 결합해 만든 이야기라고도 하고, 고대 그리스 헤라 여신의 성소에서 동짓날 안팎에 음식을 나눈 풍습이 베파나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한 해를 지나가게 하고 새로운 해를 데려오는 이야기와 결합한 새해 의례라는 설도 있다. 이 전설에 관한 유래와 기원이 하나가 아니겠지. 세상 모든 아이들이 아기 예수처럼 귀하다는 마음과, 베파나가 매년 일정한 때에 돌아와서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마음을 끈다.
“우리 이모는 진짜 천사 같았어. 돌아가실 때도 웃고 계셨대.” 이제 어리지 않은 나는 “천사 같은” 수식어를 들었던 창평 이모할머니의 삶이 꽤 고단했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내 이웃에 사는 다른 할머니들의 삶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창평 이모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와 분위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어떤 그리움은 기억을 부축해주니까. 막연히 남은 이야기와 생생한 기억 사이에서, 할머니는 여러 번 내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건 어쩐지 꽤 생기가 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나의 엄마가 인지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날 엄마는 입으로 웃고 눈으로 우는 모습으로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내 삶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걸 예감했지만, 두렵지만은 않았다. 그날 엄마는 당신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나에게 자꾸만 소고기를 먹이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소금만 넣고 담근 큰 무김치가 먹고 싶다고 투정부리듯 말했다. 겨울바람이 불어서인지, 우리는 그날 창평 이모할머니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가 만든 생강엿이 먹고 싶었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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